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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전)

오함(吳唅): 개인의 비극에 그치지 않는다.

by 중은우시 2019. 5. 27.

글: 관우당주(觀雨堂主)


'문혁'을 회고하는 글에서 반드시 언급해야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바로 전 북경시 부시장이자 명사(明史)전문가인 오함이다. 1965년 11월 10일 요문원(姚文元)은 기수 강청(江靑)의 뜻을 받들어 "신편역사극 <해서파관(海瑞罷官>을 평한다"라는 글을 상해 <문회보(文匯報)>에 공개적으로 발표하며, '문혁'의 서막이 열린다. 얼마후 무수한 관리들과 지식인들에게 액운이 닥친다. 다만 처음 제단에 올려져 칼을 맞은 사람은 자연히 <해서파관>의 작자이자 관변학자인 오함이다. 오함은 <해서파관>의 작자일 뿐아니라, 흠정 "삼가촌(三家村)"의 흑방분자이기도 했다.


액운이 돌연 닥친 데 대하여 오함 자신도 돌연하고, 의외라고 생각하고, 오함의 친구들조차도 이해하지 못했다. 1949년이후 오함은 많지 않은 모택동의 서재를 출입할 수 있었던 명사전문가이기 때문이다.


1965년은 오함이 쓴 <주원장전>에 대하여, 모택동의 '역사유물주의"의 지시를 받아 수정한 후, 다시 출판한 해이기도 하다.


오함의 처지는 동정받을 만하다. 요문원이 명을 받아 '문혁'의 서막을 열기 전에, 모택동은 이미 확정한 투쟁목표중에서 오함은 포함될 자격이 없었다. 다만 왜 오함에게 첫 칼을 대었는가? 이는 아마도 모택동의 전략적 조치일 것이다. 먼저 오함에 칼을 댄 것은 기실 1959년 여산에서 파관된 팽덕회를 치기 위함이다. 팽덕회를 치는 것은 '고산진호(敲山震虎)' 즉 진짜 호랑이를 끌어내기 위함이다. 1959년 4월 상해에서 개최된 중공중앙정치국회의에서 모택동은 돌연 아이디어를 내어 말한다. 간부들이 명나라때 해서의 '강정불아(剛正不阿), 감언직간(敢言直諫)"하는 정신을 배워야 한다고. 얼마 후 모택동의 대비서 호교목(胡喬木)은 이 중요한 정보를 오함에게 알려준다. 이는 모주석의 뜻을 따르던 오함에게 또 한번의 중요한 기회였다. 어찌 가볍게 넘길 것인가. 그후 오함은 연이어 "해서의 이야기" "해서를 논한다" "해서가 황제를 욕하다", "청백리 해서"등의 글을 써서 중국정부의 선전도구인 <인민일보>에 발표한다.


1960년에는 그것만으로 부족하다고 여겼는지, 다시 신편역사극 <해서파관>을 슨다. 이때의 오함은 봄바람을 맞아 득의만면할 때였다. 자신의 머리에 조용히 올가미가 씌워지고 있는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심지어 저명한 경극배우인 마련량(馬連良)은 오함의 요청으로 해서파관의 극에서 해서의 역할을 맡았다가 1966년 비명횡사한다.


1959년 중국에 대기근이 발생한다. 오함이 모택동의 뜻을 따른 것은 이때부터가 아니다. 오함의 부인인 원진(袁震)은 과격한 공산주의자이다. 오함의 이후 운명도 그렇게 결정된다. 서남연합대학시절에 오함은 이미 따를 목표를 확정한다. 맹렬하게 국민당정부의 부패를 비판하고, 이를 자본으로 삼는다. 이두강(易杜强)의 <전쟁과 혁명중의 서남연합대학>(구주출판사 2012년판)이라는 책에는 오함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그가 강연대에서 한나라때의 외척정치간여를 분노하여 말할 때 바보가 아니면 이것이 송자문, 공상희와 장개석 본인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것이라는 것을 못알아들을 리 없었다." 그 책에서 작자는 또한 이렇게 지적한다: "오함은 명사 전공이다. 그가 보기에, 명나라말기, 제왕통치집단은 부패하고 무능했으며, 관리들은 부패했다..... 이 모든 것은 장개석 통치하의 중국과 아주 유사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오함은 1949년이전에 이미 홍색정권을 따르는 좌익인사였다. 이는 학술자유와 정신독립을 숭상하는 서남연합대학 지식인집단내에서는 드문 경우였다. 오함을 제외하면 문일다(聞一多) 한명 정도였다.


오함이 정치적으로 투자한 것에 대한 수익은 분명했다. 그 시대에 문화인으로 학문을 통해서 관직에 나간 경우는 두 명이 있었다. 한 명은 곽말약(郭沫若)이고 다른 한명이 오함이다. 1948년 오함은 민맹(民盟)의 신분으로 신정권을 대표하여 북대, 청화대학을 접수한다. 북경의 평화적 해방으로, 오함은 북경시 부시장의 영광스러운 자리에 오른다. 그는 무산계급혁명가 팽진(彭眞)의 조수였다. 이후 몇년동안, 악남(岳南)이 <남도북귀(南渡北歸)>라는 책에서 한 평가에 따르면, 오함은 진정으로 "춘풍득의마제질(春風得意馬蹄疾), 일일간진장안화(一日看盡長安花)"였다. 1950년전반기, 오함은 권력을 장악한 고위관료로서, 북경성의 건설계획에서, 청화대학 건축학자인 양사성(梁思成), 임휘인(林徽因) 부부와 충돌이 발생한다. 양사성, 임휘인의 목적은 북경노성구(老城區)의 전통적인 문화건축물(패루, 성문등)을 보존해야 하며, 새로운 신시가지를 건설하여, 노성구와 '일월동휘(日月同輝)"의 격국을 형성하자는 것이었다. 건축학자의 고심과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말이다. 팽진은 공산주의 혁명가로서 아마 이해하기 어려웠을 수 있다. 그러나 명사 전문가인 오함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면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반세기후의 오늘날, 양사성, 임휘인과 오함의 충돌은 이미 더 이상 분석과 평론이 필요없을 정도이다. 당시 임휘인이 병구를 이끌고 오함을 가리키며 통박했다. 그리고 "만일 네가 정말 허문다면 나는 여기에서 죽겠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아마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후인들이 임휘인을 그렇게 존경하고, 오함은 그렇게 멸시하게 될 줄은.


1957년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때, 오함의 모주석을 '뒤따르는' 행위방식은 깊이 생각해 볼만하다. 민맹중앙은 흠정대우파(欽定大右派) 장백균(章伯鈞), 나륭기(羅隆基)를 비판하는 대회에서, 같은 민맹 요원인 오함은 "나는 분노한다! 나는 고발한다!"는 발언을 한다. 오함의 비판발언은 날카롭고 엄하여 반드시 장백균, 나륭기를 죽음으로 몰아넣어야겠다는 냉막(冷漠)과 견정(堅定)이 드러나 보는 사람을 전율케 했다. 황상(黃裳) 선생은 일찌기 <독서>에 글을 써서 이 일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1957년 소위 '장라연맹(章羅聯盟)'을 비투(批鬪)하는 대회에서, 오함은 옛날 나륭기가 그에게 전해준 홍콩의 민맹주요책임자의 비밀서신을 꺼냈는데, 거기에는 민맹자주를 견지하고, 중국공산당영도를 받지 않아야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이 폭로로 나융기는 침중한 타격을 입는다. 사람들ㅇ느 오함의 수단이 독랄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나융기의 원본서신은 오함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제출하지 ㅇ낳고 수중에 남겨두었던 것이고, 바로 1948년 홍교요양원에서 얻은 것이다.


중요한 순간에 개인적인 서신을 공개하면서, 더욱 격렬하게 비판의 채찍을 날린 것을 보면 오함의 품성이 얼마나 비열한지 알 수 있다. 이렇게 낙정하석(落穽下石), 간진살절(赶盡殺絶)하겠다는 태도는 9년후 요문원의 "신극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한다"에서 그 자신에 대한 비판과 비교하더라도 더 하면 더 하지 못하지 않다. 타입으로 보자면 요문원은 그저 제2의 오함이다.


오함과 요문원의 구별은 다음과 같다: 하나는 오함이 타격하는 목표는 모조리 지식계였고, 요문원이 타격하는 목표는 주로 정부 고위층(무산계급 고위간부)였다. 당연히 이 목표의 확정은 그들 두 사람이 스스로 정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그저 눈치를 봐서 명을 받들어 집행한 것일 뿐이다. 둘째로 관방의 그들에 대한 사후의 평가가 크게 차이난다. 오함은 '문혁'이 끝난 후 제1차로 명예회복되였다. 요문원은 그 얼마전에 '사인방'이라는 치욕의 기둥에 오른다. 모택동 사후의 집권자들이 오함과 요문원을 서로 다르게 처리한 것은 완전히 모택동과 반대된다. 이 점은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다. 


요문원은 1965년의 글은 오함에 대하여 상종(喪鐘)이라고 할 수 있다. 얼마 후 오함은 홍위병에게 집안을 수색당하고, 홍위병에게 묶여서 허리띠로 얻어맞는다. 머리카락도 다 뽑히고 목에는 뜨거운 모래를 부어넣었다. 피가 바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후 정식으로 체포된 후 진성감옥(秦城監獄)에 갇힌다. 거기서 인간지옥의 고통을 겪는다. 처와 1남1녀도 전후로 박해를 받아 죽는다. 그러나 8년전 오함에게 비판을 받은 나륭기는 비록 '우파'로 몰렸지만, '죽을 때까지 투항하지 않았다' 비록 삼림공업부 부장의 관직을 잃었지만, 다행히 진성감옥에 갇히지 않고, 북대황노동개조소로 보내어진다. 그리고 홍위병으로부터 모욕. 비투나 독타(毒打)를 당하지도 않았고, 전국정협위원의 타이틀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북경 내자부(乃玆府)의 널찍한 공관에 거주하면서 친구들을 만나서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심지어 얘기를 나누면서 대담하게 '반우파투쟁'에 대한 불만을 토로할 수도 있었다.


1965년 12월 7일 심야, 나융기는 심장병이 발작하여 조용히 세상을 떠난다. 이때는 오함에게 상종이 울리기 한달도 남지 않은 시기였다. 오함과 나융기의 전혀 다른 최후는 오함 자신이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오함은 죽기 전에, 자신이 이전에 했던 여러가지 정치를 위한 학술과 자신이 '뒤따르면서' 낙정하석했던 여러가지 비열한 행위에 대하여 후회를 했는지 아닌지는 판단할 수가 없다. 다만 한가지 명백한 것은 만일 오함이 '뒤따르기' 위해서 나융기를 비판하지 않고, '뒤따르기' 위해서 해서에 관한 글을 그렇게 많이 쓰지 않았더라면, '문혁'이 시작되자마자 칼을 맞는 운명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중국에서 문인은 절대로 사회제도를 좌우할 수 없다. 개인의 행위방식은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다. 오함의 몸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중국지식인의 동류상잔(同類相殘)의 비열한 모습이다. 오함은 1957년 '장류연맹'에 대하여 잔인하고 살벌하게 처리했는데, 이는 어느 정도 자신에게도 상해를 입힌 것이다. 중국인들은 '인과응보'를 얘기하는데 오함에게서 그것이 발생한 것같다.


'문혁'이 끝난 후, 오함은 다시 한번 다시 보답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최초로 명예회복된 것 말고도, 관방에서는 청화대학 근춘원(近春園)의 연못 곁에 "함정(唅亭)"을 지어준다. 아마도 억울하게 죽은 원혼에 대한 안위이자 보상일 것이다. 당연히 이는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지식인은 낙후되고 싶지 않아하는 것같다. 내가 본 어떤 사람들의 글에서는 오함에 대하여, "품성이 영원히 역사에 남을 것이다"라든지, "인민이 영원히 그를 그리워할 것이다"라고 쓰거나, 심지어 어떤 중년의 역사학박사생은 글에서 '위대한 역사학자'라고 적었다. 확실히 이처럼 포풍착영(捕風捉影)하는 값싼 찬양은 기실 고의로 역사의 결과를 회피하는 것이다. 그중 진정한 원인은 바로 오함의 방망이와 요문원의 방망이가 확연히 구별된다는데 있다. 오함의 방망이는 지식인만 때렸다. 필자가 보기에, 청화원내의 그 '함정'은 최종적으로 낙정하석하는 류의 지식인을 풍자, 조소하는 것이다.


몇년전 필자는 중국계 미국인학자 장순여(張純如, Iris Chang)의 저작 <남경호겁: 잊혀진 대학살>을 읽었다. 그 책의 결론에 이런 글이 있었다:


"본서의 첫 의도는 그들 피해자들에게 원조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그들이 일본역사수정주의자들에게 한번 더 치욕을 당하는 것을 피하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남경의 수십만 피해자들의 무명묘소에 내가 쓴 묘지명을 바치기 위한 것이었다. 최종적으로 본서는 그저 나 개인의 인류본성에 대한 어두운 면을 탐색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여기에서 소위 '인류본성의 어두운 면'은 도대체 무엇을 지칭하는가? 왜 장순여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을까/ 장순여가 자살하기 전에 곁에 있던 친구에게 한 말이 그 해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남경대학살을 방문했을 떄, 나는 일본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중국인의 노예근성이 있다는 것을 보았다. 중국인이 가진 극히 악독한 심리는 세계의 민족중에서도 보기 드문 경우이다. 지금까지 이런 인간은 없었다. 주인이 다르다고 하여, 자신의 동류를 짓밟고 그것도 극히 잔인한 정도로...." 중국계인사인 장순여가 이 말을 했을 때, 자신의 마음 속에도 피가 흘렀을 것이다. 그러나 학자로서 그녀는 진실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그 글을 볼 때, 가장 먼저 연상한 것이 바로 1950년대의 오함이었다. 반우파운동때의 오함은 동류상잔을 서둘렀고 결국은 자신의 무덤을 팠다. 한때 자유주의종사 호적의 도움을 받았으나, 그는 노예근성이 가득찬 오함이었다.


오함의 비애는 개인의 비애에 그치지 않는다. 그리고 민족의 비애이다. 한 민족의 지식인집단의 비애이다. 오함을 찬양하는 것은 한 민족지식집단의 우매와 무지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