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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의 대외관계

어느 중국유학생의 우크라이나 탈출기

by 중은우시 2022. 3. 5.

글: 선생제조(先生製造)

 

전쟁이 발생한 첫째날 저녁, 그와 같은 학교를 다니는 친구는 오토바이를 타고 키이우(키에프)를 벗어났다. 그는 리비우로 가서 폴란드로 넘어가고자 했다. 5일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도착하지 못했다. 다만 종점은 바로 눈앞에 있다.

 

나는 지금 덴마크에서 유학하고 있다. 우리는 교실에서 이 전쟁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토론에 참가한 학생들은 전세계 각지에서 왔고, 몇몇 러시아 학생들도 있었다. 모두 각자의 견해를 말했다.

 

한 덴마크 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네 생각은?

 

1

 

샤오텐(小田, 텐씨인 나이가 많지 않은 사람을 가리킴), 그는 중국유학생이고 오토바이를 타고 우크라이나를 탈출하기로 마음먹었다.

 

2월 24일, 목요일 새벽 5시경, 샤오텐은 아직 잠들지 못했다. 그는 핸드폰을 만지다가 돌연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다고 선포했다는 뉴스를 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창밖으로는 비행기가 저공비행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절대 자동차의 엔진소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대담하게 창으로 다가가서 올려다 보았다. 그러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전체 키이우는 잠들어 있었다.

 

6시부터 차례로 학생들이 잠에서 깼다. 그리고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7시, 현지학생들은 계속하여 차를 불러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평소에 사이좋게 지내던 이란 학생과 상의했고, 키이우를 떠나 서쪽으로 리비우로 갈 생각이 없는지 물어보았다.

 

그곳은 우크라이나 서부의 주요도시이다. 개략 1주일전, 샤오텐은 뉴스보도에서 구미국가는 차례로 우크라이나에서 교민을 철수시키는데, 먼저 리비우로 데려갔다고 들었다. 그는 그 도시 이름을 처음 들었고, 또한 만일 탈출하려면 먼저 리비우로 가야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원래 두 가지를 생각했다: 하나는 기차를 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렌트카를 빌리는 것이다.

 

7시경, 푸틴이 선전포고한 2시간 후, 키이우의 기차표는 모조리 판매중단되고, 1장도 살 수가 없었다. 렌트카를 구하는 것도 어림없었다. 일찌감치 모두 렌트해갔다. 남은 것은 오직 한 가지 방법뿐이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것.

 

다행히 이란친구는 평소에 오토바이를 탔고, 오토바이를 1대 가지고 있었다. 출발전에, 그와 이란친구는 먼저 수퍼마켓으로 가서 물건을 산다. 8시경, 수퍼마켓의 계산대에는 이미 4,5미터 길이러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상품진열대 앞에서 사람으로 가득했고, 모두 앞다투어 물건을 챙겼다. 물이나 빵같은 기본물자를 샀다. 또 어떤 젊은이는 아무 것도 가져가지 않고 그저 보드카 2병을 들었다.

 

수퍼마켓에서 돌아온 후, 같은 기숙사의 중국친구들은 키이우를 떠나고 싶어하지 않았고, 기숙사관리인의 말을 듣고 지하실로 피난했으며, 대사관에서 도와주기를 기다리겠다고 했다.

 

지하실은 원래 기숙사의 잡동사니를 넣어두는 곳이다. 약 200평방미터가량으로 평상시에는 텅 비어 있는데, 이제 사람으로 가득 찼다.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간 학생들을 제오하고, 나머지 학생들은 모두 여기에 숨었다. 모두 앉아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샤오텐은 생각을 해본 다음, 비록 가족들은 그에게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고 했지만,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는 어둡고 비좁고 신호도 잡히지 않는 지하실에 계속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는 소식을 봤는데, 러시아가 키이우 교외까지 쳐들어왔다고 한다. 그는 또 소식을 들었는데, 기숙사부근의 지하철역이 폭파되었다고 한다. 그는 더욱 믿게 되었다: 만일 여기에 계속 남아 있으면, 러사이인들이 들어올 것이고, 나는 도망갈 수가 없게 될 것이다. 

 

"도망치자" 나는 이란친구에게 말했다. "지금 도망치자!"

 

2

 

2월 24일 전쟁이 발발한 그날 저녁, 나는 여러해 전에 가입했던 여름학기의 학생들과의 단체방에서 우크라이나수도 키이우에 있는 중국유학생 샤오텐을 알게 되었다. 단체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 현재의 상황은 어떤지 안전한지를 물어보았고, 샤오텐은 키이우 공항 부근의 친구에게서 총소리와 폭탄소리를 들었다고 하며, 그는 서쪽으로 탈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나는 샤오텐에게 친구신청을 보냈다. 나는 우크라이나의 현재 진실한 상황이 어떤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전에 나는 인터넷에서 대량의 뉴스와 SNS에서의 정보를 보았다. 다만 우크라이나전쟁에 대한 논의는 이미 내 주변에서 전개된지 오래되었다.

 

2021년 여름, 내가 덴마크에서 신문방송학 석사과정을 다닐 때, 우리 반에는 60여명의 학생들이 잇었는데, 유럽, 미주, 아시아 아프리카의 30여개 국가에서 왔다. 그중에는 4명의 러시아학생도 있었다.

 

푸틴이 공개적으로 선포하기 전에, 우리는 전체 반에서 발표회를 진행하고 있었다. 1주일에 한번씩, 각나라의 학생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발표할 사람이 한명 부족하게 되어 반장이 단체방에서 누가 자원할 것인지를 물어보았다. 

 

브라질학생이 말했다: "내 생각에 러시아에서 온 친구가 그들의 대통령이 EU지도자들이 악몽을 겪게 만들고 있는 점에 대해서 얘기하면 좋겠다"

 

반장도 말했다: "혹은 이번 충돌과 그 배경에 대하여 누가 얘기할 생각이 있는가?" 그녀는 단체방 내에서 러시아학생에게 하나하나 물어보았다.

반시간 후, 러시아학생 A가 참여희망을 나타냈다. 러시아학생 B는 브라질학생의 발언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경정했다: 이것은 러시아인에게도 악몽을 가져다 주었다.

 

러시아학생 C는 이어서 SNS에 일련의 사진을 올렸다. 첫째 사진에는 이렇게 썼다: "어제, 나는 나의 러시아친구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러시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하는 내가 받은 답안이다." 뒤에는 한장씩 모두 러시아어와 영어로 대답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도시, 길거리, 자연, 사람의 사진도 배경으로 있었다.

 

"러시아는 내가 국민신분을 가지고 있는 국가이고, 내 가족의 역사이다."

"사치와 빈곤: 어깨를 나란히"

"사랑스러운 국가. 비록 나는 치욕으로 느끼고 있지만, 그것을 바로잡고 싶다.

"언어와 문화, 현대부분을 포함하여, 나의 신분을 동일시하는 근원"

"문화, 예술, 자연, 정신역량을 가진 사람들"

"집"

"내가 사랑하지 않는 조국"

"수세기역사를 지닌 비극적인 제국"

"광활하여 관리하기 어려운 국토, 놀라운 문화, 자연과 사람을 가지고 있다."

"아름다운 추악함"

"15유로짜리의 유행에 맞는 네일아트, 값싼 택시, 15분내에 공짜로 배송해주는 요쿠르트"

"수도의 24/7 고품질의 서비스와 맛있는 음식

 

마지막 한 장은 C의 대답이었다: "나에게 있어서, 러시아는 모순의 상징이다. 나는 아주 사랑하고 그리워한다. 다만 동시에 나는 내가 거기에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모든 외국친구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러시아는 서방매체에서 말하는 것보다 복잡하고 다원적이다. 더 많은 것은 전체 국가, 특히 이렇게 거대한 국가를 권력자의 의지로 격하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 다음 날인 2월 24일 새벽 5시 55분, 푸틴은 공개적으로 우크라이나에 선전포고한다. 5시간후, 덴마크시간 8시에 나는 교실로 가서 수업을 들었다. 수업시간에 모든 사람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 대해서 얘기했다.

 

그날 저녁, A는 반의 모임에서 발표를 했다 - 러시아는 어떻게 오늘날의 러시아가 되었는가?

 

중국유학생으로서 나는 그때 내가 그저 방관자라고 여겼다. 다만 한 덴마크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중국의 태도는 어떠냐?"

 

3. 

 

위챗을 교환한 후, 샤오텐은 나에게 말했다. 그는 폴란드로 갈 생각이라고.

 

이는 많은 우크라이나난민의 목적지이다. 전쟁발발후, 폴란드는 우크라이나난민을 가장 많이 수용한 국가가 되었다. AFP등 매체가 27일 보도한 바에 따르면, 그날 정오까지, 20만이 넘는 우크라이나난민이 폴란드로 들어왔다. 유엔난민기구 대변인인 Chris Melzer에 따르면 폴란드-우크라이나국경은 이미 14킬로미터에 이르는 장사진을 이루고 있고, 40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난민기구는 국면이 더욱 악화되면 400만의 우크라이나인이 폴란드로 탈출할 것이라고 말했다.

 

2월 24일, 샤오텐은 키이우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계속 서쪽으로 간다. 하루를 써서 다음 날 Sukhodoly에 도착한다. 이곳은 리비우에서 93킬로미터 떨어진 마을이었고, 그의 우크라이나 학교친구의 고향이기도 했다. 그는 이곳에서 잠시 쉬다가, 우크라이나-폴란드국경을 통해 폴란드로 들어가려고 계획했다.

 

탈출하는 길에, 우리는 중간중간에 얘기를 나누었다. 그는 가는동안 매우 춥다고 말했다. 그날 온도는 영하3도 에서 6도가량이었다. 그와 친구는 가지고 있던 옷을 모두 걸쳤다. 7개의 상의 3개의 바지.

 

오후 5시가 되어 그들은 정식으로 출발한다. 개략 1시간 운전해서, 키이우 교외의 부자동네에 도착한다. 돌연 5대의 키이우방향으로 향하는 탱크를 만난다. 그들의 오토바이는 두 대의 탱크 사이에 끼게 되었다. 손만 뻗으면 탱크를 만져볼 수 있을 정도로.

 

길을 막지 않기 위해, 그들은 탱크 중간을 빠져나와 길가에 세우고, 탱크가 먼저 지나가도록 양보했다. 탱크를 탄 병사들은 철모를 쓰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마스크도 하고 있어서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는 말했다: "나는 길 가에 서서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길가의 행인들도 따라서 손을 흔들었다. 우리는 그저 이렇게 지지를 표시할 수밖에 없었다."

 

하늘이 점점 더 어두워지고, 앞길이 잘 보이지 않았다. 밤에는 온도가 낮보다 더 낮았다. 주유소를 지날 때마다 샤오텐과 이란친구는 들러서 기름을 넣었다. 그리고 따뜻한 차를 마시면서 몸을 녹였다. 12시가 되었고, 그들은 겨우 10%의 거리만을 왔을 뿐이었다. 지토미르라는 도시에 가까워졌다. 지토미르는 우크라이나 서북부 지토미르주의 주도였다. 그들은 자동차여관에서 하룻밤을 쉬고 다시 출발하기로 결정한다.

 

비록 한밤중이었지만, 자동차여관도 손님이 가득 차 있었다. 다행히 여관에는 24시간 식당이 있었다.

"우리가 여기서 밤을 새워도 되나요?" 샤오텐이 프론트에 물어보았다.

"있고 싶으면 언제까지 있어도 괜찮습니다." 직원이 대답했다.

 

식당에 앉아서, 샤오텐은 전혀 잠들지 못했다. 무수히 많은 자동차, 오토바이, 버스가 리비우방향으로 달려가는 것을 보았다. 도로상의 차량흐름은 머리도 보이지 않고 꼬리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어졌다.

 

도로에서 서쪽으로 향하는 길은 항상 길게 줄이 늘어서 있었다. 많은 차에는 일가족을 가득 태우고 있었다. 조수석에는 개를 태우고, 뒷자리에는 아이들이 있었다. 차에는 큰 트렁크를 묶어놓았다. 동쪽으로 향하는 길에는 거의 차량이 없었다. 가끔 군인을 가득태운 군용트럭이 질주할 뿐이었다.

 

"막 출발했을 때, 나는 아주 낙관적이었다. 분명히 순조롭게 리비우까지 갈 수 있고, 폴란드국경을 넘을 수 있을 것이며 그러면 모든 것이 좋아질 것이라고 여겼다. 길을 떠난 후, 나는 무수히 많은 똑같은 탈출자들을 볼 수 있었고, 낙담한 얼굴, 표정없는 모습을 보면서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정말 탈출할 수 있을까? 탈출한 후에는 또 무슨 일이 생길까? 나는 순조롭게 전학할 수 있을까?

 

2월 25일 새벽 6시, 샤오텐과 친구는 다시 출발한다. 가는 길은 일망무제의 동유럽평원이었다. 우크라이나의 국기와 마찬가지로 위에는 푸른 색의 하늘, 발아래는 평탄한 황토평원이다. 어느 검문소까지 갔을 때, 총을 든 경찰이 그와 친구를 막았고, 짐검사를 요구했다. 그때 키이우는 이미 민간인들에게도 총을 쏘고 있었다. 이번 검사는 동쪽에서 온 주민들이 총을 들고 서쪽에서 총격을 벌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어느 주유소에 들렀을 때, 그들이 식당에서 뜨거운 차를 마시고 막 밖으로 나왔는데, 돌연 누군가 그들쪽으로 달려왔다. 그러면서 소리쳤다: "러시아군이 왔다!" 식당안의 모든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밖으로 뛰어나갔고, 신속히 차 안으로 들어갔다. 마치 달리기경주를 하는 것처럼. 차를 몰아 주유소를 벗어난다. 떠나기 전에 동쪽을 쳐다보았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저녁 7시, 450킬로미터를 왔다. 샤오텐과 이란친구는 마침내 친구집에 도착한다. 이때 그의 체온은 35도였다. 너무 추웠다. 

 

하룻밤 휴식을 취하고, 계속 길을 떠나, 리비우로 간 다음 방법을 찾아서 폴란드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이것이 원래 계획이다. 다만 우크라이나의 많은 도시는 통행금지를 실시했고,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친구집에서 머물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4

 

2월 27일, 샤오텐은 여전히 친구집에서 쉬고 있었다. 통행금지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오후 나는 샤오텐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는 그의 다음 계획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폴란드로 입국하는 상황은 어떤가?" 내가 그에게 물었다.

"전체 국경의 3개 고속도로는 이미 40킬로미터나 막혀 있다. 우리는 기차를 타고 갈 생각이다. 현재 모든 공공교통은 무료이다." 그의 말이었다.

 

전화에서, 샤오텐은 친구집에 도착해서 조금 마음이 놓인 것같았다. 나와 전화를 끊은 후, 그는 친구들과 함께 고기를 구웠으며, 그동안의 긴장을 풀었다.

 

그와 함께 탈출하는 이란친구외에 또 한명의 우크라이나 친구가 친구집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크리미아반도 사람인데, 키이우에서 공부하고 있었으며, 우크라이나여권을 가지고 있었다. 2014년 크리미아의 주민투표이후, 그는 매번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러시아비자를 신청해야 했다. 현재, 전쟁으로 비자업무가 잠정 중단되었다. 집으로 돌아가려면 여권을 바꾸는 것 외에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우크라이나여권을 러시아여권으로 바꾸고 싶지 않았다.

 

샤오텐의 곁에 있던 우크라이나친구들의 7할이상은 모두 이미 키이우를 떠났다. 심지어 우크라이나를 떠났다. 그리고 떠나길 원치 않는 사람도 있었다. 전쟁이 발생한 후, 샤오텐은 모든 키이우에 있는 친구들의 안전을 확인했고, 그들에게 우크라이나를 떠날 것을 권유했다. 다만 그의 친구들의 대답은 이러했다:

 

"나는 떠나고 싶지 않아. 여기가 내 집이야"

"나는 여전히 키이우에 있어. 할수있는 한 도울거야."

 

1월부터, 자국민을 우크라이나에서 떠나게 하는 것이 각국의 컨센서스였다. 전쟁개시후, 중국대사관은 적극적으로 교민철수업무를 추진했다.

개전이후, 샤오텐이 머물던 키이우의 중국친구들은 집을 나가 야채를 살 때, 길에서 총든 군인을 만나면, 어디서 왔는지 물어본다. 그러면 놀라서 말을 하지 못한다. 그저 어버버버할 뿐이었다.

얘기하는 도중에 샤오텐이 돌연 "아"하고 소리친다.

"무슨 일이라고 있어?"

"친구의 여자친구가 우크라이나 중부도시에 사는데, 그녀가 말하기를 하늘에 비행기가 많다고 해. 친구가 막 소식을 듣고, 그녀에게 상황이 어떤지 물어보는데 계속 대답이 없다고 하네."

 

러시아는 이미 우크라이나의 제2대도시 하르키우를 향해 공습을 감행했고, 50만이 넘는 난민이 우크라이나를 떠났다. 전장외에 국제사회의 반응은 신속했고, 러시아에 제재를 선언하고, 우크라이나에 원조를 제공하는 국가의 범위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정부조직의 제재외에 무수한 보통사람들도 길거리로 나와 전쟁에 반대하고, 우크라이나를 응원했다. 지난주말, 여러 반전시위가 베를린, 프라하, 워싱턴, 세인트페테르스부르크등지에서 일어났다.

 

지난주토요일, 내가 살고 있는 덴마크 제2의 도시 오르후스에서는 공개 반전시위가 있었고 천명이상이 참여했다. 덴마크에 있는 우크라이나인들은 국기를 들고나와 광장에서 반전연설을 하고, 우크라이나 가무를 공연했다. 서로 다른 국가와 지역에서 온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만든 팻말을 들고 왔는데, 우크라이나어, 영어, 덴마크어로 전쟁에 대한 분노를 표현했다. 사람들은 한 목소리로 외쳤다. 우리의 하늘을 지키자. 너비가 수십미터에 달하는 우크라이나국기를 광장의 오른쪽에 있는 사람에게서 왼쪽에 있는 사랑메게 전해지고, 모든 사람이 두 손을 높이 들어 앞사람에게서 받아 뒷사람에게 전했다.

 

비록 전쟁터에서 천리멀리 떨어져 있고, 덴마크는 여전히 평화롭고 생활도 예전과 같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무언가 달라졌다는 것을.

 

월요일의 수업때, 독일교수는 전체 학생들에게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현재의 상황에 따르면, 나는 우리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직접 수업을 시작할 수가 없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을 얘기해보아야 한다."

 

러시아학생 B가 맨먼저 발언했다: "이 전쟁은 전체 국가를 대표하지 않는다. 모스크바, 세인트페테르스부르크에도 많은 사람이 항의하고 있다." 입을 열자마자 5초도 지나지 않아 그녀는 눈가가 붉어진다. "이것은 마찬가지로 많은 러시아인들에게 치욕과 고통이다." 

 

러시아학생 D는 오늘 아침 어머니의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그녀는 전화 속에서 울면서, 딸이 국적때문에 다른 학생들에게 비난받지 않을까봐 우려하고 있었다고한다.

 

2월 28일, 루블화가 엄청나게 평가절하된다. 덴마크 크로네와의 환율이 1:7에서 1:21로 줄어들었다. 금년 여름, 나의 친구들은 각각 런던, 암스테르담과 프라하의 세 속의 학교로 가서 공부한다. 현지유학비자를 신청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은행예금증명을 제출하는 것이다. 루블화의 평가절하로, 러시아학생들은 다음해의 생활비와 학비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C는 나에게 말했다. 만일 2,3년전에 누군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면 그녀는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라고.

 

5

 

2월 28일, 샤오텐은 새벽4시에 일어나 우크라이나 서부변경도시 리비우로 떠난다. 거기서 기차를 타고 폴란드로 들어갈 계획이었다. 나는 그와 연락을 유지했지만 그에게 전화를 걸어 귀찮게 할 수는 없었다. 핸드폰의 밧데리량이 한정이 있으니까. 나는 나로 인하여 그의 시간과 충전량을 빼앗고 싶지 않았다.

 

샤오텐의 친구들을 통하여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는 기차표를 구하지 못했다. 이리저리 하여 그들을 변경까지 태워다줄 차량은 구한다. 그런데 국경에서 2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내려주었고, 도보로 국경선까지 걸어가야만 했다.

 

3월 1일 오후, 나는 마침내 샤오텐의 소식을 듣는다. 그는 이미 국경선에 도착했고, 현재 줄을 서서 폴란드로 들어가려고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폴란드정부는 막 통지했다. 현재 모든 우크라이나경내에서 전란을 피해서 입국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모두 받아주겠다고.

 

앞의 긴 줄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언제 그의 차례가 돌아올지는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