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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의 정치

보시라이(薄熙來)가 권력을 잡았다면....

by 중은우시 2022. 2. 14.

글: 마비홍(馬悲鴻)

 

최근에 <객관평가시진핑>과 <객관평가보시라이>의 두 글이 나왔다. 전자는 4만자, 후자는 1만7천자로 모두 짧지 않다.

 

기실 이 두 사람을 제외하고, 당시 중공은 또 한명의 후계자를 양성했다. 바로 류위안(劉源). 문혁이 끝난 후, 이 세 명은 거의 동시에 현위서기(縣委書記)를 맡는다. 현에서 시작하여 계속 승진했다. 이 방법은 우주비행사를 양성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매번 우주로 갈 때면 3개의 팀을 준비한다. 만일 1명이 타는 경우면 3명을 준비하고, 3명이 1팀인 경우에는 3팀 9명을 준비한다. 만일 첫째 팀에 문제가 생기면 둘째 팀이 우주로 가고, 둘째 팀에도 문제가 생기면 셋째 팀이 우주로 간다. 

 

만일 여러명이 우주로 가는 경우에는 서로 잘 알아야 한다. 각 팀의 구성원들이 함께 훈련을 받는다. 만일 어느 팀의 한명에게 문제가 생기면 그 사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전체 팀을 바꾸어 버린다.

 

중공이 준비한 세 명의 후계자중 결국 시진핑만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류위안은 아마도 자신의 부친(유소기)가 참혹하게 죽은데 대하여 마음 속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장무셩(張木生)을 시켜 언급하기도 했다. 그리고 아마도 부친이 군대내에 지지자가 없어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고 생각해서인지 허난성 부성장에서 돌연 군대로 들어가 소장(少將)이 되면서, 후계자 반열에서 떨어져 나간다.

 

그후 보시라이는 처인 구카이라이의 살인사건으로 무기징역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후계자 반열에서 물러났다. 결국은 시진핑만 남은 것이다.

 

이 세 사람 중에서 1949년생인 보시라이가 나이가 가장 많다. 1951년생인 류위안이 그 다음이고, 1953년생인 시진핑이 가장 어리다. 문혁때 보시라이는 고중(고등학교) 1학년, 류위안은 초중(중학교) 2학년, 시진핑은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문혁전에 보시라이는 소학교에서 초중, 그리고 초중에서 고중의 두번에 걸쳐 입학시험을 보았다. 실험2소(실험제2소학교)에서 북경4중(북경제4중학교)초중 그리고 사중고중. 류위안은 단지 1번 입학시험을 보았다. 실험2소에서 북경4중초중으로. 시진핑은 한번도 입학시험을 본 적이 없다.

 

보시라이와 류위안은 모두 문혁이 끝난 후 대학시험을 친다. 보시라이는 북경대학, 류위안은 수도사범학원. 보시라이는 다시 사회과학원 연구생시험도 친다. 

 

여기에서 보시라이는 4번의 정규입학시험을 치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학교에서 초중, 초중에서 고중, 대학입학시험과 연구생. 류위안은 두 번의 정규입학시험을 치렀다. 소학교에서 초중, 그리고 대학입학시험. 시진핑은 정규입학시험을 치른 적이 없다. 대학을 갈 때도 추천입학인 공농병학원(工農兵學員)으로 들어갔고, 박사연구생은 재직중에 들어간 것이어서 입학시험은 필요없었다.

 

류위안의 부친은 국가주석이고, 시진핑의 부친은 부총리, 보시라이의 부친도 부총리였다. 

 

중공이 막 정권을 잡았을 때, 외교는 주로 소련, 동구, 몽골, 북한과 베트남등 사회주의형제국가들과의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대약진으로 3년곤란시기를 맞이했을 때, 시진핑의 부친은 "소설을 이용하여 반당을 하는 것은 일대 발명"으로 인하여 연루받아 하야하게 된다. 그후에 보시라의 부친이 부총리로 승진한다.

 

그후, 류위안의 부모와 진의(陳毅) 부부는 비사회주의국가들과의 외교업무를 시작한다. 바로 <유소기주석의 인도네시아방문> <유소기주석의 미얀마방문>과 <유소기주석의 캄보디아방문>이다. 개략 같은 시기에, 네팔의 비란드라국왕부부가 중국을 방문한다. 이때 시중쉰(시진핑의 부친)은 이미 하야했고, 아들은 아직 어려서 이 일과 관련이 없었다. 유소기부부는 이 일을 직접 겪었고, 그 아들도 자연스럽게 익숙했다. 4번의 입학시험을 치른 보시라이 본인은 영어를 할 수 있으므로, 당연히 자연스럽게 생각했다.

 

외교는 전문적인 일이다. 북양정부의 외교관 고유균(顧維鈞)은 민국정부에서 계속하여 외교장관으로 있었고, 대만으로까지 따라갔다. 

 

소련의 주유엔대사 그로미코는 거의 종신제였다. 현임 러시아외무장관 라브로프도 거의 종신제에 가깝다. 중국의 최초 외교부장 주은래는 그후에 진의에게 넘겨주기는 했지만, 주은래가 사실상 외교를 주재했다.

 

중공의 외교업무는 연경대학, 성요한대학, 금릉여자대학등 교회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이 지하당에서 중하층외교업무에 참여했고, 구사회의 상층부를 보았기 때문에 외교업무에 익숙했다. 그리고 중국어와 영어를 다 할 줄 알았으며, 업무도 익숙하게 처리했다. 다만 이들은 거의 무산계급출신이 아니었다. 나중에 여러번의 정치운동에서 모두 숙청되어 버린다.

 

현임 외교부장인 왕이는 53년 출생한 69학번 지식청년이다. 문혁으로 중국의 외교업무인원의 단열이 생겨 후임자는 전임자의 이웃국가와 우호관계를 유지해야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이햐하지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어서, 현재의 강경한 전랑외교가 나오게 만들었다. 외부에서 보자면 똥통속의 돌맹이이다. 냄새도 나면서 강경하다. 

 

중공이 정권을 잡은 후 제국주의국가들에 대하여 "대내적으로 잔혹하게 탄압하고" "대외적으로 침략확장한다"고 비판하였다. 현재 바로 중국이 하고 있는 일들이다.

 

"대내적으로 잔혹하게 탄합"하는 것은 언론을 통제하여 외부에서 알지 못하게 하면 그만이다. 다만 "대외적으로 침략확장하는 것"은 드러내놓고 하는 것이다. 국제사회가 분명히 보고 있고, 감추고자 해도 감출 수가 없다.

 

이런 이리 승냥이의 얼굴과 입은 분명 왕의가 스스로 결정해서 하는 일이 아닐 것이다. 아래 위가 한 마음이라고 봐야 한다.

 

당연히 보시라이에게도 그의 문제는 있다. 버마제비가 매미를 잡는데, 참새가 뒤에 있다. 참새의 뒤에는 새총을 든 소년이 있다. 새총을 든 소년의 뒤에는 회초리를 든 가법이 있다.

 

공안국장 원창(文强)은 장쥔(張君)을 잡아 죽이고, 왕리쥔은 원창을 잡아 죽이고, 보시라이는 다시 왕리쥔을 잡고, 당중앙은 보시라이를 잡았다. 원창을 죽인 것은 좀 심한 느낌이다.

 

만일 보시라이가 후계자로 순조롭게 정권을 이어받아 당과 국가의 최고지도자가 되었다면, 아마도 사람을 죽이는 것은 별로 꺼리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대외적으로 전랑외교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만에 대하여 호시탐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는 송추위(宋楚瑜)가 보시라이를 만난 후에 그를 높이 평가했던데서도 알 수가 있다.

 

대내적으로는 잔혹하게 탄압했지만, 대외적으로 침략확장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내적으로 강경하면, 대외적으로는 유화책을 썼을 것이다. 현재처럼 대내적으로도 강경하고, 대외적으로도 강경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