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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초미제근(斬草未除根)": 보시라이 아들 보과과(薄瓜瓜)의 시진핑에 대한 복수극

중은우시 2022. 2. 17. 12:19

글: 두정(杜政)

 

금년 1월하순부터 <객관평가시진핑>이라는 4만자의 장문의 글이 인터넷에 올라왔으며, 주로 시진핑 집정의 여러가지 실퍠와 위기를 논했다. 다만 보시라이(薄熙來)와 그를 발탁한 장쩌민(江澤民)은 높이 띄워주고 있다. 또한 반시(反習, 반시진핑)이지 반공(反共)은 아니다. 조금 뒤에 발표된 1.7만자의 <객관평가보시라이>는 보시라이를 당내의 의거자로 높이 띄워줄 뿐아니라, 직접적으로 보시라이가 다시 나와주기를 희망하고 있다. 이 두 글이 조성한 어지러운 국면은 지금 어느 정도 명확해지고 있다.

 

<객관평가시진핑>의 글에 대하여, 중공당사전문가이자 <만년주은래>의 작자인 가오원쳰(高文謙)이 살펴본 결과 이는 반시진핑세력이 최근에 내보낸 중대한 폭탄이라고 말했다. 그 의도는 시진핑의 20대에서의 연임을 막는 것이라고. 다만 '반시'이지만 '반공'은 아니다.

 

필자는 <객관평가시진핑>이라는 글에는 최소한 두 군데 실수가 있다: 하나는 모택동이 중앙문혁소조 조장이었다고 했는데, 모택동은 그 직위를 맡은 적이 없다. 다른 하나는 '일대일로(一帶一路)'를 '일대일로(一代一路)'라고 적은 것이다.

 

<객관평가보시라이>라는 글에도 분명한 실수가 한 곳있다. 관건이 되는 보시라이사건이 터진 해는 2012년인데 글에서는 2013년이라고 적은 것이다.

 

이 두 글은 사람들이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 해외의 류위안(留園)망에 실렸고, 작자는 "방주와중국(方舟與中國)"이다. 필자는 글에서 보시라이에 대한 애정이 나타나는 것을 보아서, 작자는 보시라이집안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혹은 보시라이의 아들 보과과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문장은 아마도 보시라이집안이 거둔 문인들이 썼을 것이다. 이런 견해는 일부 관찰가들도 동의하는 부분이다.

 

그렇다. 이미 혼란에 빠진 중공은 곧 침몰할 배이다. 그런데 두 글의 작자가 어찌 '방주'가 될 수 있겠는가. 필자는 문혁때의 옛일을 통해서 보시라이에 대해 명확하게 인식하고, 이 중공의 썩어빠진 세력을 부정하고, 여론을 혼란에 빠트리는 것을 방지하여, 진정한 우국 애국지사가 대사를 이루기를 희망한다.

 

시진핑이 참초미제근하여 보시라이의 아들 보과과가 복수에 나섰다.

 

<객관평가시진핑>에서는 여러번 보시라이를 칭찬하고, 보시라이가 억울하다고 썼다. "오늘 날에 이르러 많은 사람들은 차라리 감옥에 갇혀 있는 보시라이를 지지할지언정, 용상에 앉은 시진핑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지금까지 믿어왔다. 보시라이는 시진핑보다 중국을 통치하는데 더욱 적합하다고."

 

<객관평가보시라이>에서 작자는 이렇게 묻는다: "액운의 그는 나이 칠십이 넘었는데, 다시 나타날 수 있을까?" "그래서 지금까지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보시라이가 다시 나오기를 바라고 있고, 그의 집권하의 중국을 다시 보고싶어한다." 글에서는 보시라이를 당내에서 의거를 일으킨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글은 맨 끝에 "당국은 아마도 병을 앓고 있다는 이유로 그(보시라이)를 병보석해줄 수 있을 것이다. 풍파가 평정된 후에 그는 쾌적한 곳에서 말년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글은 중공20대 전에 나왔다. 아마도 보과과가 부친 보시라이를 꺽고 최고권력자가 된 시진핑에 대한 '복수극'인지도 모르겠다.

 

일찌기 미국에 유학하고, 방탕하기로 이름났으며, 자주 외국여자들과 어울려 다니던 보과과는 부친에게 일이 터지기 전에는 귀국하여 정치에 참여할 계획이었다고 말한다. 다만 보시라이사건이 터진 후, 당국은 보과과에 대하여 참초제근(풀을 뽑을 때는 뿌리까지 뽑는다)하지 않았다. 2019년 변호사라이센스를 얻은 보과과는 캐나다의 한 회사에 출근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홍색권력귀족가족으로서 보시라이집안의 세력은 여전히 남아 있다. 보시라이의 동생 보시청(薄熙成)은 작년에 홍얼다이로서 중공건당100주년기념식에 참가했다. 보과과는 해외에 남아 있으면서 지금 반시진핑활동을 통해 향후 보시라이의 재등장을 위한 밑밥을 깔고 있다. 이는 시진핑이 직면한 중대한 위기중 하나이다.

 

반시진핑은 당연히 문제가 없다. 시진핑은 총가속사로 불린다. 그가 당을 지키기로 마음을 굳게 먹은 이후로 계속 좌회전을 하여 비극적인 결말은 이미 예정되었다. 다만 설사 정말 반드시 당내에서 시진핑을 대체할 사람을 찾아야 한다면, 왜 보시라이를 굳이 찾아야 할까?

 

어떤 친구는 나와 토론할 때 이렇게 말했다: 보과과의 반시진핑은 자신을 위해 길을 닦는 것이라고. 일단 일을 이루고 나면, 부친을 출옥시켜 태상황이 되게 하려는 것이며, 야심이 적지 않다고.

 

문혁으로 본 보시라이: 보시라이의 부친은 후야오방을 낙마시켜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왜 보시라이가 동산재기하면 안되는가? 사람들은 보시라이의 본성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그를 아는 사람의 입에서 문혁때의 보시라이에 대하여 들었다. 소위 강산은 쉽게 바뀌지만, 본성은 바뀌기 어렵다는 말이 있다. 어렸을 때 같이 놀던 친구들은 보시라이를 더욱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아버지를 보면 그 아들을 알 수 있다. 먼저 보시라이의 부친인 중공원로 보이보(薄一波)에 대하여 알아보자. 모택동이 '문화대혁명'을 일으켰을 때, 보이보는 문혁때의 최대사건인 '61인반도집단사건'의 우두머리였다. 1967년초, 홍위병은 광저우요양원에서 그를 끌고 베이징으로 온다. 강생(康生)등으로부터 비투와 박해를 받았다. 보이보의 전여비서이자 두번째 부인인 후밍(胡明)은 박해를 받아 사망한다.

 

1978년, 당시 중앙조직부 부장이던 후야오방은 압력을 버텨내며 문혁때의 억울한 사건, 잘못된 사건을 바로잡았다. 불가사의한 일은 후야오방에 의하여 명예를 회복한 보이보가 1986년 중공좌파의 힘을 빌어 '자산계급자유화'운동에 반대하며 그의 은인이자 당시 중공총서기인 후야오방을 공격하고, 결국 후야오방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렸다는 것이다. 후야오방은 그후 우울하게 살다가 죽는다.

 

이미 고인이 된 중공의 홍얼다이(태자당) 뤄위(羅宇, 뤄루이칭(羅瑞卿)의 아들)는 어려서부터 보시라이와 학교동기동창이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렸을 때, 보이보는 재물을 아주 중시하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후야오방을 끌어내릴 때, 보이보가 크게 힘을 썼다. "보이보는 고위관료중에서 가장 비도덕적인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지위, 관직을 위해서라면, 혹은 자신의 아들을 높은 자리에 앉히기 위해서라면, 그는 은혜를 원수로 갚을 수 있는 사람이다."

 

문혁으로 본 보시라이: 부친의 늑골 3개를 부러뜨리다.

 

2013년 9월, 보시라이는 뇌물수수, 부정부패와 직권남용의 죄로 무기징역의 형을 받고, 지금은 진성감옥에 갇혀 있다.

 

보시라이가 낙마하기 전에 충칭에서 문혁식의 '창홍타흑(唱紅打黑)'으로 기세를 올렸다. 그는 문혁때도 남다른 인생을 겪는다.

 

일본의 아사히신문은 <"모"자식시대>라는 글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발발할 때, 보시라이는 고위간부자제들이 모여 있는 북경4중을 다니고 있었다. 한 교우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보시라이와 다른 고위간부자제들은 교실에서 "미래의 중국은 우리가 이끈다!"는 구호를 외치며, 흥분해서 얼굴이 벌개지곤 했다고 한다. 나중에, 보시라이는 홍위병규찰대에 가담한다. 그런데, 다음 해에 당시 부총리이던 보이보가 비판대상이 된다.

 

작자 양광(楊光)은 <내가 겪은 역사이야기: 유소기의 반도죄(叛徒罪)는 이렇게 인정되었다>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다: 보이보는 일찌기 1983년 양병성(楊秉誠)이 이런 말을 했다: "문화대혁명때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아들 시라이(보시라이)가 나를 심하게 때렸기 때문이다. 나는 맞고서 눈앞이 새카매져서 땅바닥에 쓰러졌다. 이 독한 녀석은 다시 발로 내 가슴을 몇번 밟았다. 당시 늑골 3개가 부러졌다. 그가 이렇게 육친불인(六親不認), 수독심한(手毒心狠)하여 애비조차도 죽음으로 내모는 모습을 보니, 이 아이는 우리당 미래의 후계자가 될 좋은 자질을 가졌다."

 

<아사히신문>의 <"모"자식시대>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공개적으로 부모와 결렬을 표명한 보시라이는 더욱 미친 듯이 날뛰었다. 한번은 그가 훔친 자동차를 몰고가다가 나귀 한 마리를 부딛쳐 죽였다. 보시라이는 이 일로 체포된 후 북경교외농장에 보내어져 강제노동으로 개조를 받는다. 거주한 곳은 철조망이 쳐진 감옥과 같았다.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해가 떨어지면 '모택동사상'을 학습해야 했다."

 

함께 농장으로 보내어진 한 남자는 이렇게 회고한다: 당시 보시라이등은 너무 배가 고파서, 창으로 날아들어오는 참새도 서로 빼앗으려고 했으며  털을 뽑고 먹어치웠다. 

 

이 모든 것은 1976년까지 지속된다. 모택동이 사망한 후, 문화대혁명은 끝이 난다.

 

뤄위는 이렇게 말한다: 어려서부터 보이보의 이 아들은 항상 '피소육불소(皮笑肉不笑, 가죽은 웃지만 살은 웃지 않는다. 거짓웃음을 짓는다는 의미임)'했다.

 

뤄위는 이런 말도 한다: 문화대혁명때 자신은 큰 고통을 받고, 감옥에 갇히면서 내린 결론은 바로 일당독재는 안된다. 반드시 민주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보시라이는 7,8년간 감옥에 있었으면서도 독재제도로 다른 사람을 박해하려고 생각했다.

 

보시라이는 장쩌민에 빌붙다.

 

뤄위는 이런 말도 했다: 보시라이는 바로 샤오볘산(小瘪三, 깡패, 무뢰한등의 의미를 지닌 말)이다. '무모(無謀), 무략(無略), 무지(無智), 무상(無商)의 샤오볘산이다." 그는 주로 보이보와 장쩌민의 힘을 빌어 득세했다.

 

당시 중공당수이던 장쩌민에게 빌붙은 것은 보시라이가 당시 정치야심을 실현하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1997년, 보시라이는 전국의 모든 관리들보다 앞장서서 한가지 보기드문 일을 벌인다. 장쩌민의 대형사신을 다롄시중심의 인민광장에 내건 것이다.

 

1999년 8월 10일, 장쩌민이 다롄으로 시찰을 온다. 8월 17일은 장쩌민의 73세생일날이었다. 보시라이는 이를 기회로 여기고, 홍콩의 <풍성(風聲)>잡지에 이렇게 토로한다. 보시라이 일가 3명과 장쩌민일가의 노소가 "파비동유(把譬同遊), 입방창K(入房唱K)"(팔을 붙잡고 같이 놀았으며, 카라오케에서 노래를 불렀다). 보시라이의 처 구카이라이는 장쩌민과 이탈리아노래 <오솔레미오>를 불렀고,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을 보면 장쩌민은 한손으로 마이크를 잡고, 한손은 바지에 찔러넣고 있으며, 곁에는 구카이라이가 장쩌민에게 기대고 있다....

 

그러나, 처를 내세워서 장쩌민과 함께 식사하고 노래를 부르게 한 것은 그저 표면적인 것이다. 보시라이는 계속 장쩌민의 노선을 따라 인권을 박해하고, 장쩌민은 보시라이를 챙겨준다. 보시라이가 장쩌민의 생일을 축하해준지 며칠 지나지 않아, 보시라이는 랴오닝성성위 상위, 다롄시위서기로 승진한다. 그후 랴오닝성장, 상무부장, 중공정치국위원, 충칭시위서기로 계속 승진했으며 권력투쟁에서 패배하여 낙마한다.

 

보시라이는 관료생애동안 부패, 음란스캔들과 인권죄행이 널리 알려져 있다. 여기에서 다시 얘기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시진핑반대, 보시라이찬양의 장문은 원천도 불분명하며, 반공멸공대업에 방해가 된다.

 

필자는 위에서 문혁때의 역사를 통하여 여러분들에게 보시라이의 품행을 알려주고자 했다. 특히 소년 보시라이의 이야기는 아마도 두 글에서 시진핑반대, 보시라이찬양에 반공하지 않는 글이 남기는 악영향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 두 굴은 원천이 불분명하다. 시진핑에 반대하면서 공산당에 반대하지 않는다니. 인권을 탄압한 악당 장쩌민을 치켜세우고, 보시라이가 재등장해야 한다고 말하다니. 이는 국내외의 반공지사의 뜻과 출발점이나 구국구민의 노선에서 서로 배치되는 일이다. 심지어 일종의 방해이다.

 

미래의 중국지도자는 확실히 현재 중국의 감옥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나올 것이다. 다만 절대로 진성감옥의 보시라이같은 낙마한 호랑이들은 아니다. 오히려 실종되고 구금된 인권변호사, 반대파인사, 신앙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당연히 국내외를 오가면서, 반공에 투신한 지사일 수도 있다. 보과과같은 류가 무슨 덕망이나 능력이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