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후)

임백거(任伯渠)의 넷째부인 주명(朱明) 자살의 수수께끼

중은우시 2022. 1. 7. 12:21

글: 왕우군(王友群)

 

임백거는 1886년 호남 안복현(安福縣)에서 태어났다. 동필무(董必武), 서특립(徐特立), 사각재(謝覺哉), 오옥장(吳玉章)과 더불은 "중공오로(中共五老)"로 불리는 인물이다. 평생 4번 결혼했는데, 첫째 부인은 오복명(伍復明)으로 고향사람이다. 1남4녀를 낳는다; 둘째부인은 범락춘(范樂春)으로 1남을 낳고 몇년후 병사한다; 셋째부인은 이준(李俊)이고, 두 사람은 1937년 연안(延安)에서 결혼했고, 1남을 낳는다. 그러나 4년후 불화로 이혼한다; 넷째부인은 주명이고 함께 15년을 산다.

 

26세의 주명이 60세의 임백거에게 시집가다.

 

주명의 본명은 왕균벽(王鈞璧)으로 안휘성 정원현(定遠縣) 사람이다. 1919년 관료집안에서 태어났고, 3살때 당시를 외웠고, 12살떄, <홍루몽>을 읽는다. 1930년대에 상해 광화대학(光華大學)에서 공부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한 후, 가족을 따라 사천으로 간다. 거기에서 중공선전의 영향을 받아 국민참의원으로 있던 중공관리 임백거를 흠모한다. 1939년 봄, 임백거의 도움으로, 한 무리의 열혈청년이 연안으로 간다. 거기서 중공여간부를 배양하기 위해 설립한 연안여자대학(延安女子大學)에 입학하고, 이름을 주명으로 고친다. 그후 중앙연구원에 들어가고 그후 중앙당교 제3부에서 학습힌다. '연안정풍운동'때 중공의 반복되는 세뇌를 받아 주명은 부잣집의 '규수'에서 '기꺼이 무산계급의 소가 되고자 하는 새로운 사람으로 개조된다. 그녀는 <원래의 계급에서 해방되다>라는 반성문을 썼고, 모범글로 인정받는다.

 

당시, 연안의 많은 중공고관은 상해, 북경등 대도시에서 온 예쁜 젊은 여성과 결혼했다. 예를 들면, 45세의 모택동은 자신의 세번째 부인 하자진을 버리고, 상해에서 온 삼류배우인 24살의 강청(江靑)과 결혼한다; 50세의 유소기는 다섯째부인을 취하는데 북경에서 온 대학원생 27살의 왕광미(王光美)였다. 39살의 임표는 22살의 섭군(葉群)을 부인으로 취한다; 40세의 진의는 17살의 장천(張茜)과 결혼한다; 43세의 주덕은 17살의 강극청(康克淸)과 결혼한다.

 

그때 임백거는 중공섬감녕변구정부 주석을 맡고, 섬감녕변구학습지도위원회 주임도 겸하면서 정부계통에서 정풍운동을 책임지고 있었다. 주명이라는 '정풍적극분자'는 '조직'의 안배하에 임백거와 자주 접촉하게 된다. 1945년 3월 28일 임백거는 60세 생일을 맞이한다. 중공중앙은 그를 위해 생일축하행사를 열어주었다. 1945년 4-6월 중공7대가 연안에서 개최되고, 임백거는 중앙위원, 중공정치국위원에 당선된다. 바로 그 7대가 개최되는 동안인 1945년 5월 60세의 임백거는 26살의 주명과 결혼한다.

 

1949년 10월 1일 중공이 정권을 잡은 후, 임백거는 전후로 중앙정부 비서장, 전인대상무위원회 제1기, 제2기 부위원장을 지내고, 주명은 중앙조직부, 중앙방직공업부감찰실에서 근무한다. 임백거는 '중공5로'중 하나로 나이가 많아서, 몸이 좋지 않았다. 그가 국내외에서 활동을 할 때면 주명이 항상 따라가서 그의 지팡이 겸 그림자가 되었다. 여산을 오르건, 항주를 가건, 아니면 모스크바를 가건 항상 두 사람을 같이 다닌다.

 

강청이 항주에서 익명서신을 받다.

 

1953년 12월 27일, 모택동과 강청이 항주로 간다. 서호에서 70여일간 머문다. 모택동은 1954년 3월 14일 떠나고, 강청은 계속 항주에 체류한다. 3월 18일, 강청은 익명서신을 한통 받는다. 서신은 상해에서 보낸 것인데, 강소성 교제처장 당위평(唐爲平)을 거쳐 그녀에게 온 것이다. 강청은 서신을 보고 극도로 분노한다. 서신에는 중공7기 4중전회가 막 열리고, 고강, 요수석이 발각되었는데, 너 강청의 역사는 타락했다. 나는 이미 너의 자료를 중공중앙조직부로 보냈다. 그리고 서신에는 1930년대 강청이 상해에 있을 때의 각종 스캔들과 체포당한 후 변절한 역사문제를 언급했다. 내용이 아주 구체적이었다. 서신을 쓴 사람은 강청의 역사를 잘 알고 있었고, 중공고위층의 상황도 잘 알고 있었다. 특별히 그녀의 행적을 알고 있었다. 강청은 이를 통해 이 서신을 쓴 사람은 반드시 중공고위간부이거나 문화게의 유명인사이거나 혹은 그들의 부인이라고 추측한다.

 

다음날, 강청은 절강성 공안청정으로 있던 왕방(王芳)을 만난다. 왕방의 회고에 따르면, 강청은 익명서신을 꺼내서 그에게 읽어보라고 했다. 나는 한번 훑어보고는 더 이상 읽을 수가 없었다. 강청은 엄숙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네가 안읽어보면 누가 읽어보겠는가? 이건 반혁명익명서신이다. 너 공안국장이 제대로 보고 범인을 밝혀내라. 누군가 거짓말로 나를 모함하고 있다. 취옹지의부재주. 창끝은 실제로 모주석을 향한 것이다." 강청은 나에게 익명서신을 다 읽게 한 후에 돌연 나에게 물었다: "너는 양범(揚帆)을 아는가?" 나는 바로 대답했다; "그는 상해에서 공안국장으로 있습니다. 우리는 내왕이 많고 관계도 긴밀합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강청은 조금 기분이 좋지 않은 듯했다. 그러면서 말을 이어갔다. "너는 그가 옛날에 무슨 이름이었는지 아느냐? 그는 과거에는 양범이라고 불리지 않았고, 은양(殷楊)이라고 불렸다. 국민당남경극전에서 일한 바 있다." 강청은 다시 물었다. "너는 담효청(譚曉晴)을 아는가?" 담효청은 당시 절강성 부련 복리부 부부장이었다. 1930년대 상해의 중공지하당원이었다. 나는 대답했다: "그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잘 알지는 못합니다." 나중에 나는 알게 되었다. 1934년 강청이 상해에서 체포되었을 때, 담효청과 강청이 같은 감옥방에 있었는데, 담효청의 회고에 따르면, 자신이 체포된 원인은 강청이 먼저 체포된 후에 적에게 그녀의 이름을 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신비한 "18호사건"

 

북경으로 돌아온 후, 강청은 익명서신을 받은 상황을 모택동에게 보고한다. 그리고 이것은 성격이 엄중한 반혁명사건이라고 말하면서 공안기관을 시켜 범인을 잡아내도록 요구하여 모택동의 동의를 받아낸다. 익명서신을 받은 날짜가 1953년 3월 18일이므로 이 사건은 "18호사건"으로 불렸다.

 

얼마 후, 중공중앙 화동국은 상해에서 전문회의를 개최한다. 화동국 제3서기 담진림(譚震林)이 주재하고, 화동국 제2서기 진의(陳毅), 절강성 공안청장 왕방, 상해시공안국장 황적파(黃赤波)가 참석했다. 회의는 이 익명서신사건을 '특대사건'으로 규정해 수사하기로 결정한다. 동시에 "18호사건"은 공안부장 나서경(羅瑞卿)이 총책임을 지고 상해시에서는 황적파가 책임지고, 절강성에서는 왕방이 책임지기로 한다. 회의후, 수사는 비밀리에 진행된다.

 

익면서신에는 '화동문위(華東文委)'라는 글자도 있고, 서신도 상해에서 보낸 것이므로, 강청은 수사부서에 상해시 당정부문과 1930년대에 상해문예계에서 일했던 사람들을 중점적으로 조사하도록 요구했다. 사건은 일시에 해결되지 않았다. 1954년, 가경시(柯慶施)가 상해시위서기로 가서, 직접 사건수사를 책임지고, 역량을 강화하여 밀어부친다. 전안조에 100여명이 소속되고, 며칠에 한번씩 회의를 진행했다. 전안조는 전후로 800여 혐의자의 필적을 수집했고, 과거에 강청과 관계가 좋지 않거나 그녀에 대하여 좋지 않은 말을 했던 사람은 모조리 혐의대상이 된다. 그중에는 동남함대사령관 도용(陶勇)의 부인 주람(朱嵐), 1930년대 강청이 상해에 살던 집주인집에서 일하던 진계정(秦桂貞)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사기간이 길어지면서 혐의가 가장 큰 사람은 전 상해시문화국장 뇌소기(賴少其)의 처인 증비(曾菲)였다. 당시 증비는 상해에서 모택동의 전처 하자진의 이웃이었고, 하자진의 생활처지에 대해 극히 동정적이어서 자주 가서 만났다. 모택동이 1952년 상해로 왔을 때 병석에서 외롭게 투명하는 하자진을 문병하지 않은데 대하여 불평을 한 바 있다. 뇌소기는 상해시 제1기당대회에서 하나의 의안을 제출한 바 있는데, 하자진의 생활을 보살펴주자는 것이었다. 가경시는 전안조회의에서 이렇게 말한다. 증비는 사건혐의가 크다. 전안조는 비밀리에 증비의 필적을 수집해서 감정했는데, 필적이 비슷했다. 다만, 전안조가 대량의 비밀조사를 거쳤지만, 직접적인 증거를 전혀 찾아내지 못한다. 단순히 필적이 비슷하다는 것만을 가지고 범인이라 단정할 수는 없었다.

 

강청은 여러번 사건의 진전에 대하여 물어보았고, 전안조내에 누군가 손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닌지도 의심했다. 여러번 공안부장 나서경, 부부장 서자영(徐子榮)에게 불만을 표시했다. 사건은 일시에 해결되지 못했지만, 전안조는 이 사건을 포기하지 않았다. 공안부에서도 대량의 인력, 물력을 투입했다. 1961년에 이르러, 중앙판공청주임 양상곤의 '의외의 발견'으로 사건은 방향을 틀게 된다.

 

주명 "외죄자살(畏罪自殺)"

 

 1960년 5월 29일, 74세의 임백거가 북경에서 병사한다. 그의 부인 주명은 한때 아주 비통해 했고, 기운이 없었다. 1961년 2월, 주명은 중앙판공청에 남방으로 가서 휴가를 보내고 싶다고 요구하여 비준을 받는다. 그동안 주명은 당중앙에 서신을 쓴다. 임백거가 죽은 후 일부 역사적인 문제(주로 문헌처리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보고한다. 서신은 당시 중앙판공청 주임 양상곤에게 올라간다. 1953년 업무관계로 양상곤은 여러번 강청이 받은 그 익명서신을 본 바 있다. 익명서신의 필적에 대하여 인상이 깊었다. 양상곤이 주명이 당중앙에 쓴 보고서를 보고는 거기의 필적이 익명서신의 필적과 아주 닮았다는 것을 발견한다.

 

양상곤은 즉시 공안부 부부장 서자영에게 전화를 건다. 공안부 전문가의 감정을 거쳐, 두 서신의 필적은 동일인이 쓴 것이라는 것이 확인된다. 그후 양상곤, 서자영은 주명을 찾아가서 얘기를 나눈다. 주명은 시원시원하게 그 익명서신은 자신이 썼다고 인정한다. 원래 모택동이 북경으로 돌아가고 강청이 그 익명서신을 받기 전의 기간동안 임백거와 주명도 항주에 며칠 머물렀다. 당시 절강성 공안청장인 왕방이 접대를 담당했다. 왕방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강청의 곁에는 함께 다녀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임백거부부와 전부인과의 사이의 딸인 임리(林莉)를 함게 강청을 만나게 어레인지 한다. 임리는 어려서부터 모스크바국제아동교양원에서 자랐고, 나중에 소련에서 대학을 다녔다. 1949년 강청이 소련으로 가서 치료하는 기간동안, 임리는 그녀의 통역을 담당했었다. 그때 두 사람은 아침저녁으로 같이 있었고, 서로 잘 맞았다. 당시 강청은 왕방이 그렇게 어레인지 한데 대하여 불만은 없었다. 그 익명서신은 아마도 주명이 항주에 있을 때 써서 상해로 간 후에 부친 것일 것이다.

 

주명은 이 일이 폭로되면 강청이 반드시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리하여 강청이 그녀에게 독수를 쓰기 전에, 집안에서 수면제를 다량 복용하고 자살한다. 그때 주명의 나이 42살이었다. 얼마 후, 주명의 죽음은 '반혁명외죄자살'로 규정된다. 문혁시기에 주명은 '반혁명분자'로 규정된다.

 

결론

 

당시 연안으로 갔던 젊은여성들은 그녀들의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에 중공과 함께하기로 결정했다. 특히 중공고관들과 결혼한 후, 비록 한동안 허영이 만족되고 특수한 대우를 받았지만, 대다수는 액운을 피하지 못했다. 임백거의 처 주명은 자살했다. 모택동의 처 강청도 결국은 자살했다. 유소기의 처 왕광미는 진성감옥에 11년간이나 갇혀 있었다. 임표의 처 섭군은 결국 임표와 함께 몽골 원두르칸에서 비행기추락으로 사망한다. 중공의 역사를 살펴보면, 비극들은 하나하나 주는 교훈이 크다. 후세인들이 당연히 거울로 삼고 경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