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평(史平)
대륙의 관방에 의해 절반이 잘려버린 <후야오방전(胡耀邦傳)>은 당시 후야오방이 축출된 경위를 공개했다. 이 전기는 일찌기 공청단중앙에서 일했던 은퇴한 노인들이 집단으로 쓴 것이다. 장리췬(張黎群)이 앞장서서, 대량의 자료를 수집정리하고 관련인물들을 인터뷰하여 10년의 시간을 들여 전체 약 100만자를 3권으로 나누었다. 전기를 쓰는 과정에서 작자들은 '춘추필법'으로 사실을 그대로 적는 방식을 취했다. 책안의 내용에는 후야오방이 낙마한 내막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당국에 의해 절반이 잘려서 단지 제1권만 출판할 수 있었고, 제2권, 제3권은 출판을 할 수 없었다.
후야오방이 낙마한 원인은 비록 복잡하기는 하지만, 근본원인은 후야오방과 덩샤오핑(鄧小平)간의 덩샤오핑본인의 전면은퇴문제에서의 이견때문이다. <후야오방전>에 따르면, 1986년 5월, 덩샤오핑은 후야오방의 집으로 가서 중공13대인사배치문제를 논의했다. 후야오방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나이가 이미 70이 넘었습니다. 13대에서는 그만두겠습니다." 덩샤오핑이 말한다: "나, 천윈(陳雲), 리셴넨(李先念)은 모두 그만두겠다. 너도 그만두려면 절반만 그만둬라 더 이상 총서기는 맡지 않지만, 다시 군사위주석 혹은 국가주석은 한 기 더 맡아라. 그후의 일은 다시 얘기하자."
같은 해 8월 22일, 덩샤오핑은 81세 생일을 맞이하여 베이다이허(北戴河)에서 몇 테이블의 연회를 준비한다. 거기서 2년후의 중공13대에서 완전은퇴하겠다고 말한다. 후야오방은 그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 10월, 그는 정치국회의에서 공개적으로 말한다. "오늘 나는 아주 구체적이고 솔직하게 말하겠다. 나는 샤오핑동지가 앞장서서 물러나겠다는 것에 찬성한다. 이는 아주 좋은 모범이다. 샤오핑동지가 물러나면 다른 원로동지들의 업무도 하기 좋다. 나의 총서기 임기도 만료되었으니, 물러나야 한다. 충분히 젊은 동지들에게 길을 양보하겠다."
후야오방의 말이 끝나자, 덩샤오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얼굴은 굳어 있었다. 후야오방의 발언에 전인대위원장 완리(萬里), 중앙서기처 서기 양더즈(楊得志), 전인대 부위원장 녜룽전(聶榮臻), 니즈푸(倪志福)과 국가부주석 우란푸(烏蘭夫)등이 찬동한다. 중앙서기처서기 시중쉰(習仲勛)도 회의에서 후야오방의 발언을 지지하는 발언을 한다.
회의에서 왕쩐(王震)이 격노하여 말한다: "너희는 실제로 하나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권위가 필요한지 아닌지. 샤오핑동지가 우리 당의 최고권위라는 것을 인정할지 아닐지." 이때 완리가 끼어들어 말한다: "왕라오(王老). 격동하지 마십시오, 샤오핑 동지가 이끈다는 나는 이견이 없습니다. 나는 그저 시정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권위를 수립해야 하지만 그것은 개인이 아니라 집단입니다. 민주야말로 우리의 최고권위입니다."
사후, 덩샤오핑은 완리에게 물어본다. "야오방이 왜 굳이 나를 물러나야한다고 말했지?" 완리가 대답한다: "아마도 실언일 겁니다." 덩샤오핑이 말했다: "자신의 권위를 수립하려는 거겠지." 완리가 말한다: "야오방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후 후야오방의 권력을 축소된다. 중공13대의 인사주도권도 빼앗겨 버린다. 그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황하에서 덩샤오핑은 인사권을 중앙고문위원회 부주임 보이보(薄一波)에게 넘긴다. 보이보등 7명으로 소조를 구성하여 각각 당내의 13대에 대한 인사배치의견을 수집한다. 특히 후야오방에 대한 의견을.
같은 해 12월, 안후이의 중국과기대학에서 학생운동붐이 일어나 베이징까지 만연한다. 이는 덩샤오핑이 후야오방을 끌어내리는 핑계가 된다. 12월 30일, 후야오방은 정치국상임위원회 회의를 개최하여, 중앙서기처의 학생운동처리에 관한 의견을 토론하고자 한다. 덩샤오핑은 회의개최에 동의하지 않고, 후야오방에게 그가 지정한 곳으로 와서 얘기하자고 한다. 덩샤오핑은 학생운동이 "몇년동안 자산계급자유화사조에 반대하는 기치가 선명하지 못하고, 태도가 굳건하지 못한 결과"라고 여겼다. 그리고 후야오방을 질책한다: "너에게 설마 책임이 없단 말이냐?" 후야오방은 대답한다: "저는 저의 의견을 보류하겠습니다." 덩샤오핑이 말한다: "보류하는게 아니라, 너는 즉시 일어나 사항기본원칙을 견지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산계급자유화를 방임하게 된다." 덩샤오핑은 이런 말도 덧붙인다: "전제수단이 아니면 안된다. 전제수단에 대하여 말로만이 아니라 필요할 때는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
다음 해 1월 10일, 중앙고문위원회 부주임 보이보는 "정치국생활회"를 소집한다. 후야오방은 회의에서 원로들의 집중공격을 받는다. 보이보는 이렇게 말한다: "후야오방은 하루종일 도처를 마구잡이로 돌아다닌다. 전국의 2천여개현을 너는 모두 돌아다녔다. 너는 당의 주석, 총서기중에서 돌아다닌 최고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건 지도공작이 아니라, 유산완수(遊山玩水)이고, 사람들의 환심이나 사려는 행동이다." 양샹쿤(楊尙昆)은 이렇게 말한다: "후야오방. 네가 말일 당을 망하게 하고 나라를 망하게 하려면, 자산계급자유화분자들과 연맹을 맺어라." 쑹런츙(宋任窮)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가장 용인할 수 없는 것은 바로 후야오방이 덩샤오핑을 대하는 태도이다." 회의에서 덩리췬(鄧力群)은 후야오방에 대하여 무려 5,6시간에 이르는 비판발언을 한다.
회의에서 보이보, 펑전(彭眞)은 후야오방의 사직을 요구한다. 왕전은 이렇게 말한다: "보이보, 펑전은 우리 대다수의 의견을 대표한다." 이런 장면에 직면하여 시중쉰이 책상을 치며 일어섰다: 보이보등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한다: "너희는 이게 뭐하자는 거냐? 이건 쿠데타 아니냐?" 후야오방은 시중쉰이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하게 막고 일어섰다. "중쉰동지, 나는 이미 생각해봤습니다. 나보고 하지 마라고 하면 나는 사직하겠습니다."
1월 15일, 생활회가 끝난 후, 후야오방은 문을 나서서 계단에 앉아 대성통곡했다. 텐지윈(田紀雲)은 묵묵히 옆에 서있었고 오랫동안 떠나지 않았다. 완리는 집으로 돌아와서 마음 속으로부터 불평을 내뱉는다: "야오방은 잘못한 게 없다." 그리고 후야오방은 위로하기 위해 완리는 주방장에게 후야오방이 가장 좋아하는 개고기를 삶아서 후야오방의 집으로 보내게 한다. 후야오방은 압력을 받아 총서기직을 사직한 후, 집으로 돌아가 부인 리자오(李昭)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잘못이 없다. 대국을 고려하여 나는 사직할 수밖에 없었다."
시비와 공도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었다. 중공 13대에서 중앙위원을 선출할 때, 후야오방은 1,800여표를 얻어 몇십표만 얻었으면 100%를 취득할 수 있을 정도였고, 정치국위원을 선출할 때도 후야오방은 다시 최고득표를 한다. 단 7표만 더 얻었으면 100%득표였다. 거기에는 투표하지 않은 본인이 포함된다. 그러나 당초 후야오방을 밀어내는데 전력을 다 했던 덩리췬과 후차오무(胡喬木)은 선거에서 최소득표로 낙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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