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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후)

웨이징셩(魏京生): 홍얼다이인 그는 어떻게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는가?

by 중은우시 2022. 4. 12.

글: 소우(蕭雨)

 

웨이징셩, 1950년생. 부모는 모두 중국의 고위간부이다. 어려서부터 한편으로 베이징의 가장 좋은 학교에서 중국공산당을 사랑하자는 홍색교육을 받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중공 고위층의 권력투쟁을 보고 들었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발발하면서, 16세의 웨이징셩도 홍위병에 참가한다. 그는 말했다. 그때는 열정이 넘쳤다. 공산당을 보위하고, 모주석을 보위하고, 정말 죽음도 겁나지 않았다. 남북으로 돌아다니면서 이 고관자제는 처음으로 하층민중들의 질고(疾苦)를 목격하게 된다. 시골지역의 가난은 그를 깜작 놀라게 만들었다. 

 

당국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부모는 그를 안후이의 고향으로 보내어 농사를 짓게 했다. 일찌기 어미지향(魚米之鄕)이던 그곳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이는 1950-60년대 중국독재자 모택동이 경제정책을 엉망으로 진행한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수천만명이 아사하는 대기근의 참화가 일어났다. 웨이징셩은 말한다. 농촌의 이 경력은 그로 하여금 공산당에 대한 회의가 들게 만들었다고.

 

1970년, 많은 간부자녀들과 마찬가지로, 웨이징셩은 부모의 도움으로 군대에 들어간다. 1973년 제대후에는 베이징으로 돌아와 베이징동물원의 전기노동자가 된다. 그는 말했다. 군인과 노동자로 지냈던 이 시기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고귀한 시기라고. 그는 사회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접촉했으며, 많은 책을 읽었다. 중국과 역사와 사회현상에 대하여 깊은 이해를 가지게 되었고, 공산당에 대한 인식에 큰 변화가 발생한다.

 

1978년, 시단(西單)의 민주장(民主墻)운동이 일어난다. 일부 노동자와 지식인들은 자발적으로 베이징의 시단에 대자보의 형식으로 민주, 자유를 선양한다. 웨이징셩은 그중 지도자격인 인물이었다. 그는 전후로 <제5의 현대화: 민주와 기타>등 일련의 글을 쓰고, 지하간행물 <탐색>의 창간에 참여한다.

 

다음 해 3월, 그는 대자보 <민주를 원하는가 아니면 새로운 독재를 원하는가>를 서서 실명으로 최고지도자 등소평이 독재자의 길을 걷고 있다고 비판한다. 며칠 후 그는 체포된다. 그리고 '반혁명'의 죄명으로 15년형을 받는다. 시단민주장도 단속당한다.

 

1993년, 웨이징셩은 두번째로 체포되어 14년형을 받는다. 국제사회의 강력한 압력하에, 1997년 웨이징셩은 석방되어 미국으로 치료를 받으러 갈 수 있었다. 감옥에서 직접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로 보내어진 것이다.

 

민주장은 홍색중국역사상 최초로 진압된 공개적인 반대활동이다. 웨이징셩은 미국의 소리에 이렇게 말했다: 비록 그는 이것이 '목이 날아갈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그 운동에 뛰어든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민주장이후, 중국에는 계속하여 민주자유운동이 나타났다. 설사 그때 그가 뛰어들지 않았더라도 아마 그 후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해외로 망명한 후, 하루는 그가 부친의 전화를 받는다. 오랜 공산당원인 그의 부친은 그에게 말했다: 베이징의 많은 "노대저(老大姐, 공산당내부에서 고위여간부를 부르는 말)"들이 미국으로 가서 그를 만나고 싶다고 한다고. 그녀들은 "징셩은 좋은 아이였다. 그는 우리가 옛날에 하고 싶어했지만 하지 못했던 일을 했었다."라고 말한다고.

 

어떤 때는 한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 것은 운명이 정해준 것같다. 새로 인생을 산다고 하더라도 나는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다. 민주장이후, 중국은 점차 이런 민주와 자유를 원하는 활동이 일어난다. 민주장은 첫번째 활동이었다. 설사 '민주장'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나는 그후에라도 민주화운동에 참여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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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은 모두 내가 간부자제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문혁때 여러분들도 모두 집안의 사진을 태워버리지 않았는가? 이들 간부들도 모두 만일 자신때문에 친구들가지 연루될 것을 겁냈다. 나도 엄마를 도와 사진을 태웠는데, 그중 한장의 사진을 보고 내가 말했다. 이 사람은 강청이 아닌가? 그럼 안겨 있는 아이는 누구지? 나의 엄마가 말했다. 너 아니냐. 나는 말했다. 엄마가 어떻게 강청을 알아요? 엄마가 말했다. 그때 두 집은 이웃이었다고. 그리고 나의 모친은 강청과 같이 칭다오가 고향이다. 그녀들 둘은 처음에 아주 사이가 좋았다. 그러나 나중에는 사이가 나빠진다. 그리고 특별히 나에게 당부했다: "우리 집에 어떤 재난이 닥치더라도, 너는 절대 그녀를 찾아가지 말라."

 

나의 모친의 이 분야의 인식은 기실 나의 부친보다 훨씬 빨랐다. 그녀는 일찌감치 공산당에 대하여, 모택동에 대하여 불만이 있었다. 1960년대초, 중국과 소련이 아직 공개적으로 반목하기 전에, 공산당내에는 이미 그 소식이 전달되어 있었다. 나의 모친은 당시 아주 큰 기업의 당위서기였다. 그녀는 공개대회에서 사전이 이 일을 말해버렸다. 아직 이 일을 공개하기 전이었고, 단지 당내에서만 전달된 것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큰 과오를 범한 셈이 되었다. 일거에 그녀는 보통노동자로 격하된다. 당위서기에서 하층노동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때 그녀는 아마도 공산당에 회의감이 들었던 것같다. 그녀는 나의 부친보다 먼저 공산당이 하나의 사기극이라는 것을 각성한 것같다.

 

간부자제였기 때문에, 생활조건은 일반백성들보다 많이 좋았다. 다닌 학교도 일반 백성들보다는 좋은 곳이었다. 우리같은 간부자제는 어려서부터 학교에서 공산당이 얼마나 좋은지, 백성들이 얼마나 옹호하는지, 백성들의 생활이 얼마나 행복한지, 타이완의 인민들은 모두 바나나껍질만 먹고 있고, 미국인민들은 도탄에 빠져있다는 등등을 배웠다. 당시 확실히 나의 머리 속에는 이런 생각이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문화대혁명때, 우리들은 홍위병에 참가한다. 모주석을 보위하고, 공산당을 보위하고, 열정이 넘쳤다. 정말 죽어도 겁날 것이 없다는 그런 모습이었다.

 

내가 처음 회의를 품게 된 것은 그 다촨롄(大串連)때였다. 우리는 가장 먼저 촨련했다. 그때는 아직 대규모로 촨련할 때가 아니었고, 보통의 열차를 타고, 보통의 여객들과 섞여서 서북으로 갔다. 감숙 정원(定遠)일대를 갔다. 천수(天水)를 지나서. 한 임시정거장에서 나는 머리를 내밀었다. 당시 천수에서 산 소병(燒餠)은 먹을 수가 없었다. 여러개를 섞었는데 정말 먹기 힘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 소병을 구걸하는 사람들에게 주려고 했다.

 

나는 당시 깜짝 놀랐다. 내 앞에 구걸하는 사람은 17,18세된 여자아이였다. 아예 옷도 입고 있지 않았다. 몸은 새카맣고, 더러웠다. 아마도 남동생인 것처럼 보이는 아이를 잡고 마대를 끌고 있었다. 나는 당시 깜짝 놀랐다. 어떻게 이런 상황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나의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아마도 공무원일텐데, 그는 말했다. 어이쿠, 이런 상황은 아주 보편적입니다. 이렇게 가난한 곳에서는 10위안만 주면 이런 여자아이를 살 수 있습니다. 나는 당시 이런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깜짝 놀란다. 그때부터 나는 당시 학교에서 배운 교육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공산당이 정말 그렇게 좋단 말인가. 왜 이런 상황이 발생하는가.

 

[편집자주: 1966년 12월 많은 중공의 고관자제들은 문혁의 영향으로 고관자제를 우두머리로 하는 홍위병이 '수도홍위병연합행동위원회'(약칭 '연동')을 성립하고, 공개적으로 중앙문혁에 대항한다. 자신의 부모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큰소리쳤다: 중앙문혁은 우리를 양산으로 몰고 있다. 우리는 반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1달도 되지 않아, '연동'은 반혁명조직으로 선포되고, 100여명의 '연동' 핵심인원은 체포된다.]

 

문혁중후기에 공안부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나는 시골로 도망쳐서 우리의 고향으로 갔다. 우리의 고향은 기실 전국에서 유명한 '어미지향'이었다. 즉 안후이 소호(巢湖) 주위였다. 자고이래로 양식이 특히 많은 곳이다. 나중에 나는 발견했다. 우리 고향도 대약진때 인구의 절반이 죽었다. 우리의 마을 곁에도 굶어죽은 사람이 절반이었다. 우리의 그 마을에도 우리의 친척들은 공용식량을 목숨을 걸고 나눠먹었다. 그들은 하마터면 처형당할 뻔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원로 공산당원이었기 때문에, 형벌을 내리지는 않았고, 그저 당적만 박탈당했다.

 

나는 현지에서 조사를 해보았다. 그때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때는 쥐까지도 다 먹어치웠다. 쥐굴도 모두 파냈고, 그후에는 사람을 먹었다. 나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놀랐다. 사람을 먹었다고? 그들은 말했다. 곁에 마을이 있는데 우리 마을에서 2,3리 떨어져 있는데 모조리 흙담장이다. 8년이 지났다. 내가 이 말을 했을 대는 1968년이었고, 대기근으로부터 8년이 지난 때였다. 그런데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 마을은 모조리 굶어죽은 것이다. 이때부터 나는 공산당에 크게 회의를 품게 된다.

 

공산당에 대하여 철저히 이해하게 된 것은 내가 군대에 간 이후이다. 그때 전국각지의 사람들을 접했다. 나는 우리 고향에서 굶어죽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게 그 곳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전국각지가 모두 비슷했던 것이다. 단지 일부 가난한 지역의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어떻게 기근에 살아남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풀을 캐고, 나무뿌리를 캐서, 죽은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고향은 비록 어미지향이어서 자고이래로 먹는 것이 문제된 적이 없었다. 그러니 대기근이 닥치자 사람들은 굶어죽어버린 것이다. 아주 처참했다. 나는 그 상황을 보고난 후, 공산당에 대한 인상이 점점 부정적으로 되어 갔다.

 

군대에 있을 때, 일요일에 나는 자주 마을로 가서 물건을 샀다. 마을에는 서점이 하나 있었는데, 서점에믄 마르크스주의서적이 많았다. 팔리지 않았다. 농촌에서 누가 그런 책을 읽는단 말인가. 나는 모조리 샀다.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할 때, 과거처럼 존경하는 마음이 아니었고, 이때는 비판적인 태도로 보았다. 나는 마르크스주의외의 책도 많이 읽었다. 그때 중국에는 내부간행물이 많이 있었다. 많은 공산당원들은 여러 금지된 책도 볼 수 있었다. 고위간부는 매일 2부의 <내참(內參)> 혹은 <대참고(大參考)>를 볼 수 있었다. <대참고>에는 주로 외국의 일이 적혀 있고, <내참>에는 주로 중국내부의 일이 적혀 있었다. 이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중국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객관적인 각도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즉 기본적인 논리착오라는 것을. 어떻게 독재를 통하여 폭정으로 민주를 건립한단 말인가? 어떻게 폭정으로 백성의 이익을 보호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군대에 들어간 기간동안 공산당에 대한 인식이 전면적으로 바뀌어버렸다. 군인과 노동자로 있는 기간동안 나는 중국의 역사, 중국사회의 현상에 대하여 깊은 이해를 가질 수 있었다. 이것은 나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고귀한 시간이었다.

 

[편집자주: 1970년대말, 베이징동물원에서 전기노동자로 있던 웨이징셩은 시단민주장운동에 참여하고, 소자보 <제5의 현대화: 민주와 기타>를 붙이고, 지하간행물 <탐색>을 창ㅇ간한다. 그리고 실명으로 등소평을 비판한 4일후, 그는 체포딘다. 전후로 2번 감옥에 갇혔고 모두 18년간 감옥에 있었다]

 

민주장때 내가 그 일에 참여하지 않았는가. 부친은 반대하지 않으셨다. 그의 생각도 실제로 바뀌어져 있었다. 민주장이 진압될 때쯤, 그는 많은 내부소식을 들었고,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하는 일은 목이 달아나는 일이다. 너는 빨리 멈춰라. 나는 당연히 말했다. 나는 이미 멈출 수가 없습니다.

 

어떤 때는 한 사람이 해야하는 일을 운명이 결정하는 것같다. 다시 그 때로 되돌아가더라도 나는 아마도 그렇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민주장이후, 중국에서는 점차 이런 민주를 요구하고 자유를 요구하는 일이 많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민주장이 첫번째 기회였다. 설사 그때 민주장에 참여하지 않았더라도, 그 이후의 민주자유를 요구하는 일에 참여했을 것이다.

 

현재의 청년들을 잘 살고 있다. 문혁도 없고, 대기근도 없다. 6.4도살도 없다. 청년들은 현재 그때의 일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국가의 역사는 볼 수 있다. 다시 다른 나라의 국가의 역사를 보고, 귀감으로 삼을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소리친다고 하여 그것을 따라가지 말라. 예를 들어, 독일의 역사를 보라. 독일의 히틀러도 경제를 급속히 발전시켰다. 인민의 생활도 개선되었다. 그후에 히틀러와 나치는 인종주의를 선동한다. 중국이 현재 선동하는 소위 애국주의와 내용에 차이가 없다. 이런 선동하에 첫째, 독재정권은 공고해지고, 둘째, 독재정권이 공고해지면서 야심이 팽창한다. 지금의 시진핑이 한느 전랑이 갈수록 흉맹해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다음 단계는 대외확장이다. 독일인민뿐아니라 주변인민들에게도 재난을 초래하는.

 

나는 항상 현재의 젊은이들에게 무엇을 숭배하지 말고, 무슨 사람을 숭배하지 말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도 다시 한번 스스로 생각해보라고 말한다. 자신의 눈으로 보라고 말한다. 자신의 눈으로 본 것만 믿고, 자신이 생각해서 도출한 결론만을 믿으라고 말한다. 50년대부터 현재까지 중국에서 70년간 지솓괸 재난을 보라. 1921년 공산당이 성립되었을 때부터 재난의 씨는 뿌려져 있었다. 사기의 씨이다. 현재까지 100년이나 유지했으니 이제 수종정침할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