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후)

왕력(王力): 모택동의 어용문인인 그는 왜 타도되었는가?

중은우시 2022. 1. 10. 10:31

글: 왕우군(王友群)

 

1967년 8월 26일, 상하이를 순시하던 모택동은 당시 중공군대 대리총참모장을 맡고 있던 양성무(楊成武)에게 이렇게 말한다: "왕(王), 관(關), 척(戚)은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을 파괴하니 나쁜 자들이다. 네가 오직 (주은래)총리 한 사람에게만 보고해서 그들을 체포하도록 보고하여, 총리가 책임지고 처리하라고 해라."

 

왕은 왕력(王力), 관은 관봉(關鋒), 척은 척본우(戚本禹)이다. 당시 왕, 관, 척은 모두 중앙문혁소조의 구성원이고, 문혁초기 모택동과 모택동의 처이자 중앙문혁소조 부조장인 강청의 직접 영도하에 호풍환우하던 인물들이다.

 

다만, 모택동의 한 마디로 모택동의 3대 붓잡이 왕, 관, 척은 모두 타도되어 버린다.

 

왕력은 처음에 조어대 국빈관 2호루에 연금되었다. 그후, 북경 서산의 한 빌라내에 계속 연금되어 있으면서, 북경위수구에서 감시했다. 1968년 1월 26일, 구정 전날, 왕력은 진성감옥(秦城監獄)에 갇히고, 이때부터 14년간 갇혀 있게 된다.

 

진성감옥의 왕력

 

<왕력반사록(王力反思錄)>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진성감옥에 들어간 후 계속 독방에 갇혀 있었으며, 아무도 심문하지 않았다.

 

전반 5년간은 나가지도 못하고, 그 어떤 문자로 볼 수 없었다. 매일 24시간 문에 뚫린 작은 감시구명으로 감시받았다. 잠잘때도 몸을 뒤집을 수 없었고, 반드시 그 감시구멍을 향해서 자야 했다. 잠을 자는 침대는 2개의 등받이없는 의자를 붙여서 만든 낡은 나무판이었다. 낡은 요 하나와 낡은 이불 하나가 전부였다. 낮에는 요 위에 앉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고, 나무판 위에 앉아 있어야 했다. 그것도 지정된 위치에. 식사는 충분하지 않았는데, 더욱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물을 조금밖에 주지 않는 것이었다.

 

왕력이 타도된 것은 공개적으로 요란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왕력이 타도되는 과정은 바로 왕력이 '실종되는' 과정이다.

 

1978년 왕력의 딸이 처음 허가를 받아 진성감옥에서 그를 만난다. 꼬박 10년간 왕력의 가족들은 그가 어디에 있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지 못했다.

 

왕력은 재판을 거치지도 않았고, 형을 받지도 않았는데, 무슨 이유인지도 모르고 14년이나 갇혀 있었던 것이다.

 

1982년 1월 15일, 왕력은 최고인민감찰원 특별검찰청장의 명의로 된 <면소서>를 받는다. 같은 해 1월 28일, 왕력을 석방된다. 다만 <면소서>에 열거된 문제는 모두 합법적인 증거조사나 사실확인을 거치지 않은 것들이어서, 입증이 되기에는 부족했다. 왕력의 출옥도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었는지 모른다.

 

왕력은 어떤 사람인가?

 

문혁이 발발하기 전에, 왕력은 중공이 소련공산당과 논쟁할 때 가장 중요한 붓잡이중 한명이다.

 

1956년 소련공산당 20대에 스탈린을 비판하기 시작한 이후, 소련공산당의 내정과 외교에 큰 변화가 발생한다. 중공은 소련공산당의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양당간이 이견이 갈수록 커진다. 그리하여 격렬한 논전까지 벌어진다. 결국 중공은 소련공산당이 하는 것은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아니라 수정주의라고 규정하게 된다.

 

왕력은 1960년부터 중공중앙의 북경조어대 국빈관에 설립된 사작조(寫作組)에 들어가, 중소양당의 논전에 참여한다. 1962년 12월 15일부터 1963년 3월 8일까지, 왕력은 여러 편의 소련공산당을 비판하는 글의 기초에 참여한다. 그동안, 중공은 여러번 대표단을 소련에 보내어 소련공산당중앙과 담판을 벌인다. 대표단의 단장은 어떤 때는 국무원총리 주은래나 중공중앙총서기 등소평이었고, 어떠 ㄴ때는 중공정치국위원 팽진, 중공정치국후보위원 강생이었다. 대표단의 구성도 자주 바뀌었다. 유일하게 바뀌지 않은 사람은 왕력이었다. 그리하여, 모주석의 또 다른 '어용문인' 곽말약(郭沫若)은 왕력에게 이렇게 농담했다: "십하막사과(十下莫斯科), 온좌조어대(穩坐釣魚臺)".  막사과는 모스크바이다.

 

1963년, 중소양당의 논쟁이 가열되고, 중공중앙은 연이어 9편의 글을 발표한다. 당시 저명한 <구평소련공산당(九評蘇聯共産黨)>이다. 왕력은 8편의 작성에 참여하고, 5편은 왕력 혼자서 집필한다. "구평소련공산당"은 모택동이 국내외에서 계급투쟁을 대거 벌이겠다는 극좌사상을 나타냈고, 모택동의 극좌사상을 이론화하고 계통화하는데는 왕력이 가장 큰 힘을 보탰다.

 

1966년 5월 문혁이 발발한 때부터 1967년 8월 타도될 때까지, 15개월동안, 왕력의 가장 주요한 업무는 자신의 말에 따르면, 가장 빠르게, 가장 정확하게 모택동의 '최고지시'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중공9대, 10대, 11대에 사회주의혁명역사단계의 기본노선으로 떠받들어진 '무산계급독재하의 계속혁명'이론은 바로 왕력이 모택동의 관련 발언을 '통합'하여 만들어낸 것이다. 이는 10년문혁때 모택동이 사람을 숙청하고, 사람을 죽이고, 나라와 백성에 해를 끼치는데 가장 중요한 이론적 기초가 된다.

 

15개월동안, 왕력은 중공중앙을 위하여 대량의 문건을 초안했을 뿐아니라, <홍기>잡지와 <인민일보>에도 많은 사론과 평론글을 실어, 모택동의 '권력탈취', '주자파타도', 유소기의 수정주의노선비판의 의도를 충분히 관철했다. 모택동의 일부 지시, 비시(批示), 담화등은 이들 사론과 평론글을 통해 신속히 전국각지에 전파되었다.

 

모택동은 이들 글에 대하여 한 비시를 보면, "아주 잘 썼다" "이 문건은 내가 보았다. 잘 썼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수정을 했다." "그대로 발송하라" "이 문건은 아주 좋다. 공개발표하고 방송해도 좋다."등등이다.

 

1967년 1월, 전 중공중앙 선전부장 도주(陶鑄)가 타도된 후, 모택동은 왕력을 중공중앙선전조 조장으로 지정한다. 실제로는 중앙선전부장인 셈이다. 전당의 선전업물르 책임졌다. 이때의 왕력은 그의 정치생애에서 최고봉에 올라서고, 모택동의 가장 중요한 '메가폰'이 되었다.

 

왕력은 왜 타도되었는가?

 

하나의 견해는 이러하다: 왕력이 당보,당간에 공개적으로 '군내의 한줌무리를 솎아내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의 견해는 왕력이 괴교부에 충격을 가하는 '왕8.7강화'를 발표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문혁이 끝난 후, 왕력 본인의 말에 따르면 이 두 가지 주장은 모두 성립되지 않는다.

 

우선 '군내 한줌'무리를 솎아내야 한다'는 것에 대하여 보자.

 

왕력은 <기타 몇 가지 문제의 진상을 명확히 한다>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왕력은 "군내의 한줌무리"라는 단어 자체를 모른다. 무한사변이후, 7.20사건의 선전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토론할 때, (중앙문혁소조 고문인) 강생은 (호북성위서기) 왕임중(王任重), (무한군구사령원) 진재도(陳再道)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지 않으면서 '무한지구당내군내한줌주자파'라고 칭한 바 있다. 강생은 상해의 (중앙판공청주임) 왕동흥에게 전화를 걸어, 왕동흥에게 주석에 보고하여 주석의 비시를 받도록 요청했다. 주석은 비시를 내렸다. 그리하여 무한사건의 선전에서 '당내군내한줌주자파'라는 말이 들어간 것이다.

 

왕력은 이때 다리를 조반파에게 맞아 부러졌기 때문에 휴가를 받아 일을 하지 않았다. 이 시기의 선전업무는 왕력이 주관하지 않았다. 이때 신문에는 일련의 '당내군내한줌주자파'라는 말이 나왔지만 이것은 왕력과 무관한 것이다.

 

다음으로 왕8.7강화에 대하여 살펴보자.

 

왕력은 <현장역사 - 문화대혁명기사>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1967년 8월 7일, 그는 명을 받아 와교부로 가서 상황을 파악한다; "계통적으로 무슨 발언을 한 것은 아니고, 단지 보고를 받을 대 일부 끼어들어 말한 것만 있다" 다른 사람이 이것을 정리하여 소위 "왕8.7강화"로 정리한 것이다. 그리고 '일부 중요한 내용은 그들이 정리해서 넣지 않았다.'"

 

왕력은 이렇게 말한다. 그가 끼어들어 말한 것은 "모주석의 말씀에 근거하여 말한 것이고, 거의 모주석이 한 말 그대로였다" 예를 들어, '타도진의' 구호에 대하여 모택동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군중들이 타도하라고 소리치면 그들에게 소리치게 하라!" 그리고 홍위병이 외교를 하는 것에 대하여 "나는 '홍위병은 외교를 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말한 것은 '홍위병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은 외교도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내 뜻이 아니다 모주석의 뜻이다. 그리고 "약간의 권력이 있으면 위세를 부린다" 이것도 내 말이 아니라 모주석이 한 말이다.

 

왕력은 또한 모주석이 "일찌기 왕력의 8.7강화를 본 적이 있는데, 뭐 특별할 게 없었다. 왜냐하면 그 안의 지나친 부분은 내가 한 말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두 가지가 모두 성립되지 않는데, 그렇다면 모택동은 왜 왕력을 타도했을까?

 

모택동이 왕력을 타도한 진실한 원인은 두 가지이다.

 

첫째, 1967년 무한에서 "7.20"사건이 발생한다. 무한군구사령원 진재도등이 일부군중의 문혁에 반대하는 극단적인 방식에 지지한 것이다. 이는 문혁이 발발한 이래 군대계통에서 나온 최초의 반항행동이다.

 

둘째, 1967년 8월 22일, 모택동의 홍위병이 영국의 주북경대표처를 불태운다. 그리하여 중국건정이래 가장 엄중한 외교사건을 일으켜, 국제적으로 강력한 항의를 받고 있었다.

 

대내적으로 군대고위장군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대외적으로 국제사회의 분노를 가라앉혀야 했다. 그래서 모주석은 왕, 관, 척을 버려야 했고, 그들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결론

 

왕력은 도대체 무슨 죄로 진성감옥에 갇힌 것일까? 중공중앙은 아직도 이에 대한 제대로 된 답변을 내놓지 않고 있다.

 

왜 그런가? 왕력의 말이 정곡을 찌른다: "모주석은 전안조에게 왕력을 심문하지 못하게 했다." 왜냐하면 왕력이 한 모든 언행은 모택동의 지시를 충실하게 선전하고 집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왕력을 심문하면, 그것은 모택동을 심문하는 것이나 같기 때문이다.

 

왕력, 관펑에 체포된 후, 척본우는 동시에 모택동과 강청의 비서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즉시 체포되지 않았다. 단지 정직심사만 받았다. 1967년 9월 4일, 척본우는 모택동에게 반성문을 써서 올린다. 9월 7일, 모택동이 이렇게 비시한다: "살펴보았다. 척본우동지에게 돌려주라. 잘못하는 것도 유익하다. 그것으로 깊이 반성할 수 있고, 잘못을 시정할 수 있으니까. 때가 되면 네가 관, 왕 두 동지에게 말해주어라."

 

1967년 8월 26일에는 모택동이 양성무에게 왕, 관, 척은 나쁜 사람이라고 하면서 주은래에게 체포하도록 시키더니, 왜 19967년 9월 7일에는 모택동이 왕, 관, 척을 '동지'라고 불렀을까? 그것은 모택동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 관, 척은 그저 모택동의 '메가폰'에 불과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