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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후)

농민출신 부총리 진영귀(陳永貴): 문혁이 만든 또 한명의 비극적 인물

by 중은우시 2022. 1. 3.

글: 임휘(林輝)

 

"대채(大寨)"는 산서성(山西省) 진중시(晋中市) 석양현(昔陽縣)에 있으며, 자연환경이 아주 열악하다. 나중에 진영귀가 앞장서서 여러 층의 계단밭을 일구었고, 물을 끌어들여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만 기다리던 상황을 바꾸었다. "농업학대채(농업은 대채를 배워라)"는 1960년대 모택동이 직접 수립한 구호이고, 전국에 영향을 크게 끼친다. 진영귀는 심지어 모택동의 직접적인 발탁으로 국무원의 농업부문을 관장하는 부총리에 오른다. 그러나, 진실한 '대채'는 과연 어떠했을까? 진실한 진영귀는 선전하는 것과 같을까? 1978년 전문가들이 본 대채부터 얘기해보기로 하자.

 

1978년 여름, 중국농학회는 산서성 태원에서 전국대표대회를 개최한다. 회의가 끝난 후, 대표단은 대채를 참관한다. 당시 부총리를 맡고 있던 진영귀가 직접 맞이한다. 그리고 대표발언을 한다. 회의참석자가 회고한 바에 따르면, 당시 진영귀는 자신이 직접 겪은 경력을 결합하여 농업과학의 중요성을 얘기했다. 예를 들어, 대채의 옥수수가 몇년전에 어떤 병에 걸렸는데, 농업기술자가 그에게 병든 옥수수는 뽑아내서 불태워버려야 병의 전파를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믿지 않았고, 뽑아버리지 않았다. 그랬더니 옥수수가 모조리 병들어 죽었고, 한올도 수확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믿게 되었다는 등등의 이야기였다. 진영귀는 솔직함에 회의참석자들은 벌린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농업을 담당하는 부총리가 농업과학상식을 이렇게 전혀 모를 수있단 말인가. 그런데 전국에서 농업은 그에게 배우라고 한단 말인가.

 

재미있는 것은 진영귀가 발언할 때, 강연대의 오른쪽 귀퉁이에 한 젊은이가 앉아서 그에게 농업의 통계수치와 각종 용어를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참석자들은 확성기에서 그 젊은이의 목소리를 다 들을 수 있었다.

 

진영귀의 발언을 다 들은 후, 대표들은 조를 나누어 대채촌을 참관했다. 노선은 고정되어 있었고, 모두 안내인원이 있었다. 대표들은 참관과정에서 대채의 농민은 볼 수 없었을 뿐아니라, 밭에서 일하는 농민도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집집마다 대문이 걸어잠겨 있어서 안에 들어가 살펴볼 수도 없었다. 재미있는 것은 집집마다 창문에는 모두 어항을 놓아 두고 금붕어를 기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동시에 집집마다 우물에도 큰 항아리를 놓아두었는데, 거기에는 꽃나무를 심어두었고, 모두 꽃을 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대표들은 이건 보여주기 위한 '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연해도시들도 집집마다 금붕어를 기르지 않았고, 집집마다 꽃을 심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물며 대채의 사람들은 하루종일 밭일을 해야 하는데, 어찌 이런 일에 신경쓸 겨를이 있단 말인가?

 

대표들이 오랫동안 기대해왔던 대채산의 가장 높은 곳에 도착했을 때, 사방을 둘러보고는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대채는 산 속에 작은 평원을 조성하기 위해 나무를 모조리 살라내고, 보리를 산꼭대기까지 심었던 것이다. 그러나, 보리싹은 사람의 뜻만큼 자라질 않았다. 여름수확계절이 이미 지났는데도, 보리싹은 겨우 6,7촌가량의 높이였고, 보리이삭은 나오지 않았다. 설사 나온 이삭이라 하더라도 너무나 작았고, 이삭마다 겨우 몇알의 조그만 보리만 거둘 수 있을 뿐이다. 옥수수는 대체 부근의 생산대에서는 모두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있었다. 오직 대채의 범위내의 옥수수만이 잘 자라고 있었다. 이는 대채의 옥수수는 비료를 잘 먹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국가가 추가로 지원한 화학비료같은 것을 뿌려주었기 때문인 것이다. 대표들은 의론이 분분했다. 어떤 사람은 나무도 없고, 목축업도 없는데 무슨 종합경영이냐고 말했고, 또 어떤 사람은 대체의 경험은 자기 부근의 생산대에도 보급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전국에서 배우라고 한단 말이냐고 말했다.

 

당시 회의에 참석한 농업전문가이자 농업부 부부장인 양현동(楊顯東)은 대채는 비과학적이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북경으로 돌아간 후, 60여명이 참석하는 좌담회를 조직하여 '대채의 면사를 벗겨버리기로' 결정한다.

 

1979년봄, 전국정협 소조회의에서 양현동은 대채의 진면목을 까발린다. 그리고, "전국각지를 동원하여 대채를 배우게 하는 것은 크나큰 낭비이다. 농업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것이며, 농민을 가난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비판한다: "진영귀는 부총리로 있으면서 지금까지도 자신의 엄중한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양현동의 발언은 큰 파란을 불러온다. 대채에서 온 정협위원은 양현동이 대채를 능멸하고, 대채를 공격하며, 모주석이 직접 수립한 깃발을 베어버리려 한다고 크게 소리쳤다. 그러나 양현동은 대다수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1981년 국무원은 국무회의를 개최하여, 정식으로 대채문제를 제기한다. 그리하여 대채의 진면목은 철저히 까발려진다. 대채의 주요문제는 허위조작이다. 그리고 문혁때 무고한 사람을 박해하여, 적지 않은 억울한 사건 잘못된 사건을 만들어 낸 것이다. 대채의 사람들은 그 시절에 자랑스러워하던 마을의 영아가 하나 있었다. 만으로 1살이 되었는데 말도 하지 못하지만 애증은 분명히 표현했다는 것이다: 부친이 '모주석'이라고 소리치기만 하면, 그는 손을 들어 웃는 모습을 했다는 것이다. 만일 '유소기'라고 소리치면 그는 이를 악물고 통한의 모습을 지었다고 한다. 

 

대채의 조작이 가장 먼저 들통난 것은 1964년이다. 그해 겨울, 대채는 상급에서 파견나온 '사청(四淸)'공작대에 조사를 받는데, 양식의 실제 생산량이 진영귀의 보고내용보다 적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이 일은 대채의 선진적이라는 것이 기망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로 인한 파장은 상상이 갈 것이다. 결과 중앙정부에까지 보고가 되고, 주은래가 직접 추궁한다. 그런데 바로 이때, 모택동이 진영귀를 자신의 생일연회에 초청한다. 대채의 문제는 하룻밤만에 더 이상 양식생산량이 얼마인지가 아니라, 모택동의 태도에 따르게 된다. 이렇게 되니 진영귀는 거대한 정치적 자원을 얻은 셈이고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모택동의 지지로 대채는 선명한 기치가 되었으며 진영귀는 계속 허위조작하면서도 무서울 것이 없게 된 것이다.

 

대채는 전국의 모범이 되었으므로, 석양으로 통하는 도로는 1978년에 아스팔트길로 넓게 뚫린다. 석양에는 기백이 있는 초대소도 만들어진다. 한꺼번에 천명이 동시에 식사할 수 있는 대식당도 있었다. 참관자들은 이 곳에서 대채의 옥수수를 먹는 것이 아니라, 전국각지의 산해진미를 맛볼 수 있었다. 이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당시 중앙에서 성까지 대채를 위해 얼마나 많은 자금과 물자를 보내주었는지, 그렇게 하여 비로소 농업의 모범을 수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현지(縣誌)의 기재에 따르면, 1967년부터 1979년까지, 진영귀가 석양을 통할하던 13년간, 석양은 모두 농업수리기본건설공사를 9,330곳이나 하고, 경작지개조면적이 9.8만무에 이른다. 석양의 농민들은 이로 인하여, 1,040명의 사상자를 냈고, 그중 310명이 사망한다. 석양의 양식생산은 1.89배 는다. 동시에 허위조작하여 늘인 생산량이 2.7억근이며 실제생산량의 26%였다. 허위보고의 책임은 석양의 농민들이 부담해야 했다. 국가에 수매하는 양식은 1근도 적게 낼 수 없었다.

 

그외에 석양에서 비판을 받고 각종 오명을 뒤집어쓴 사람이 2천여명이다. 이는 전체현 인구의 1%이다. 입건처리된 사람의 수는 3천이 넘는다. 70명당 1명이다. 유수강(劉樹崗)이 취임한 후, 석양은 대거 명예회복이 이루어진다. 1979년 전체 현에서 재조사하여 명예회복된 건이 70여건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축판매, 양식판매, 자잘한 이익챙기기, 기율위반, 혼외남녀관계, 대채를 배우지 않은 것등등의 문제로 처분을 받은 사람들은 모조리 처분이 취소된다. 일부 양식을 훔치거나, 간부에게 몇마디 욕을 하거나, 몇 마디 '반동적인 말'을 해서 형을 받았던 백성들도 석방된다. 1980년, 석양의 명예회복은 최고조에 이르고, 다음 해까지 지속된다. 전체 현에서 모두 3,028건의 억울한 사건 잘못된 사건이 바로잡힌다. 대채를 배우자는 운동중 각종 죄명을 뒤집어쓰고 비판을 받은 2,061명은 명예회복된다.

 

전국에서 십여년간 일었던 '농업학대채'운동은 중국농업에 엄청난 피해를 가져다 주었다. 기이한 것은 비록 1960년대중반부터 1970년대후반까지 대체는 모구 960만명의 참관자를 접대했지만, 대채를 배우자는 운동을 시작한 모택동은 한번도 가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대채를 한번 가보고 싶다는 말조차 꺼낸 적이 없다. 그가 파격적으로 부총리로 발탁한 진영귀는 1980년 사임하고, 이어서 당매체가 집중적으로 대채를 비판하자, 진영귀는 정치국위원의 지위도 잃는다.

 

1983년, 진영귀는 북경의 동교농장으로 배치되어 고문이 된다. 1986년 3월 폐암으로 북경에서 사망한다. 향년 71세이다. 사망후 중국지도자들 중에서는 오직 화국봉 1명만이 추도회에 참석한다. 생각해보면 진영귀도 모택동시대가 남긴 또 한명의 비극적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