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너는 장춘교의 큰 딸이다. 부친은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자신은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답: 나는 1947년 1월 6일생이다. 금년 허세로 칠십이다. 나는 집안에서 첫째이고, 큰여동생은 나와 2살도 차이나지 않는다. 막내여동생은 5살 차이가 난다. 남동생은 막내여동생과 다시 5살차이가 난다.
나의 부친은 개인적 야심이 없었다. 그는 자신을 모주석의 비서라고 생각했고, 모주석의 말을 들었고, 모주석을 위해 일했다. 그뿐이다. 그래서 만일 화국봉(華國鋒)이 그를 기용했으면 그는 계속 도와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쓰지 않으니, 그로서도 방법이 없었다. 당연히 그는 모주석을 숭배하는 것처럼 화국봉을 숭배하지는 않았다. 그는 화국봉에게 의견을 냈고, 화국봉은 아마도 그게 기분좋지 않았을 것이다. 무대랑이 점포를 내면 자기보다 키작은 사람을 점원으로 쓰지 않겠는가. 화국봉은 당연히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친은 절대로 화국봉에 불경하지 않았다. 이것은 부친의 일관된 조직원칙과 업무방식에 부합한다. 다만 그에게 마음 속으로부터 화국봉을 숭배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문: 너의 부친이 그렇게 모택동(毛澤東)을 숭배했으면, 모택동은 그를 어떻게 보았는가?
답: 그 문제는 나도 알고 싶다.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나는 모주석이 나의 부친에 대하여 좋지 않게 말한 적이 있는지 알고 싶었다. 물어봤는데 대답은 한번도 모주석이 부친을 나쁘게 말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내 느낌에 모주석은 나의 부친을 지음(知音)으로 여겼던 것같다. 모주석은 그가 곁에 있으면 마음이 편했던 것같다.
강음(江陰)에 있을 때 부친은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모주석은 여러번 그와 단독으로 얘기를 나누었고, 그의 개인상황, 가정상황을 물어보았다. 그리고 그와 '7대'이전의 당내 두 노선투쟁의 역사를 얘기하기도 했다. 거기에는 홍군시기, 모주석이 어떻게 권력을 빼앗기고, 당적을 박탈당했는지, 글고 3차 포위소탕에서 어떻게 싸웠는지, 4차와 5차 포위소탕시 어떻게 밀려났는지, 이건 현재 TV드라마에서 나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부친같은 간부도 모르는 것이었다.
부친은 나중에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주총리(周總理, 주은래)가 그때 당중앙을 대표했다. 진의(陳毅)가 그때 아주 대단했다고 했고, 섭검영(葉劍英)이 장국도(張國濤)의 그 비밀전보를 낚아챈 것도 얘기했다. 그들은 밤을 새워 북상하였고, 섭검영은 큰 공을 세운다. 모주석은 그에게 이런 말도 해준 적이 있다. 준의회의에서 모주석의 당내 지도자지위가 확립되지 않았고, 단지 그가 군사지휘에 참여할 수 있었다. 모주석은 이런 말도 덧붙였다: 다행히 장문천(張聞天)이 내 말을 들어주었다.
부친은 1992년 12월 20일의 서신에서 상세히 1958년 정월 초이틀 항주(杭州)에서 모주석과 얘기를 나눈 것과 그후의 업무에 대하여 상세히 썼다. 부친은 문예(文藝)분야에서 강청(江靑)은 확실히 능력이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는 한번도 강청의 업무를 도와준 적은 없다. 양판희(樣板戱)와 <해서파관을 평한다>를 쓰는 것을 포함해서. 그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모주석이 여러번 그에게 말했다고 한다: "강청을 도와주어라. 그녀를 돕는 것이 나를 돕는 것이다."
당연히 모주석도 부친 한 사람에게만 강청을 도우라고 한 것이 아니다. 그는 강청 주변의 업무인원들에게도 "강청동지의 몸이 좋지 않고, 성격도 좋지 않다. 너희가 나를 대신하여 그녀를 보살펴 주니, 고맙다."
중국역사는 아주 침중한 과정이다. 부친은 정말 십자가를 등에 진 것처럼 모주석을 위해 십자가를 졌다. 나는 이탈리아의 바티칸에 갔을 때 거기의 예수수난도를 보았다. 내 느낌에 역사는 반복되는 것같다. 부친은 바로 그의 이상을 위하여 그 무거운 십자가를 졌다. 그래서 어렸을 때 나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고, 그가 뭐 대단할 것이 없다고 여겼는데, 나중에 나는 확실히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문: 너는 너의 부친의 성격을 어떻게 평가하느냐. 어떤 사람은"노간거활(老奸巨滑)"이라고 불렀고, 어떤 사람은 "고집오만(固執傲慢)"이라고 했었다. 너는 어떻게 보느냐?
답: 나의 부친은 강직한 사람이다.
그 자신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홍콩의 신문에서 나를 '노간거활'이라고 했다. 이상하다. 기실 나는 아주 바른 사람이다."
내 생각에 그는 그저 일만 할 줄 알았다. 워크홀릭이다. 독서는 일이다. 영화를 보고 극을 보는 것도 일이다. 일 이외에는 다른 것이 없었다. 한번은 내가 한 글에서 9.13 임표(林彪)의 도망후, 그들은 인민대회당에서 카드를 쳤다는 것을 보았다. 나는 기이하게 여겨서 물어보았다: "카드를 칠 줄 아세요?" 그는 말했다: "모두 대회당 안에 갇혀 있고, 아무도 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카드를 쳤다. 나는 카드를 칠 줄 모른다. 그저 높고 낮은 것은 안다." 그래서 그가 카드를 칠 때는 다른 사람과 높은지 낮은지만 겨루었다. 그는 놀 줄도 몰랐다. 그에게 몸을 단련시키게 하는 것은 그저 정원을 걷게 하는 것이다. 그는 빨리 걷는 것을 좋아했다. 강음(장춘교의 병보석후 감시거주지)에서 몸을 움직일 수만 있고 비가 오지 않으면 정원을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30분에서 40분정도 계속 걸었다.
그는 특별히 기율을 잘 지켰다. 말하지 말아야할 것은 절대로 말하지 않았다. 관여하지 않아야할 곳은 절대로 관여하지 않았다. 역시 강음에 있을 때, 이숙(二叔. 張秋橋, 당시 해방군보 부총편집인)을 얘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시 이눌(李訥, 모택동의 딸)이 외지로 나갈 때 그녀의 안전을 우려해서 그녀에게 <해방군보> 기자증을 하나 만들어 주었다. 왜냐하면 <해방군보>는 각지에 모두 기자사무실이 있었기 떄문에 그녀를 도와주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눌이 나중에 어떻게 해방군보로 가서 권력을 빼앗고, 장추교를 타도하였는지 그는 잘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자신의 동생에 관련되는 일이므로 그는 관여하지 않았다. 부친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부친은 모주석이 불을 한번 지르라고 했으므로, 모두가 불 속에서 경험을 해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 생각에 문혁때, 내 주변에도 어떤 사람들이 나에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부추긴 적이 있었다. 이눌의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교훈을 많이 얻었고, 부친에게 골치를 떠안겨드릴까봐 겁났다. 그래서 '소성익적(銷聲匿迹)'했ㄷ.
문: 1955년 부친의 업무에 어떤 변화가 발생했는가?
답: 부친은 1951년 10월 <해방일보> 사장을 맡았다. 1955년, 그는 <해방일보>를 떠나 상해시위 선전부로 간다. 지금 내가 보는 일부 자료에서 나는 비로소 나의 부친이 <해방일보>에서 일할 때, 너무나 많은 군중의견, 인민서신같은 글을 발표했다는 것을 알았다. 진의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나중에 나는 부친과 이 일을 얘기했는데, 그는 당시 반한년(潘漢年)이 직접 그를 찾아와서 얘기했다고 한다. 반한년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진의가 말하기를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가 전혀 다른 사람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느끼게 하지 말라. 왜냐하면 부친은 팔로군출신이고, 신사군 계통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문혁때 한 가기 사건은 나의 기억에 깊이 박혀 있다. 나는 어디를 가든 책을 찾아보는 습관이 있는데, 한번은 일요일에 그를 보러 갔다. 그의 서재에서 장국도의 회고록을 발견했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나는 그 책에 흥미를 느껴서 너무 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것을 꺼내서 읽었다. 나는 곁의 부속건물의 표준방에 있었다. 그러나 나는 감히 그 책을 가지고 나가지는 못했다. 월요일에 돌아와서 출근할 때 나는 책을 방의 머리맡에 두었다. 1주일이 지나서 돌아왔는데, 그 책이 없었다. 나는 도처에 그 책을 찾아다녔다. 부친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책을 잃어버린 건 아닌지 겁이 나서, 그에게 그 책을 보았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단 한마디로 하지 않았다.
나중에 그가 죽기 직전에 나에게 말했다: "총리가 사람을 보내 책을 회수해갔다." 나는 그에게 왜 그런지 물어보았다. 그는 다시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계속 책을 잃어버린 건지 걱정했으며, 오랫동안 마음 속에 죄책감으로 남아 있었다고 말했다. 그 책은 아마도 홍콩에서 출판한 것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내부에서 몇 권이 나왔는데, 누가 보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총리가 나중에 발견하고 모조리 회수해간 것이다.
나는 나중에 기억한다. 장국도는 젊었을 때 그렇게 능력이 있고, 그렇게 일을 잘하고, 말도 잘하고 글도 잘썼다. 나는 마지막의 그 비밀전보가 사실인지 아닌지를 알고 싶었다. 장정때, 섭검영이 말하기를 그가 전보를 가로챘다고 했으며, 장국도가 곧 모택동에게 손을 쓸 것이라고 했다. 그 전보는 도대체 존재하는 것인가 아닌가. 나는 장국도가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는지를 알고 싶었다. 이 건에 관하여 나는 아직 답을 얻지 못했다. 책을 거두어 갔으니까. 그래서 계속 답을 찾지 못했다. 지금에서야 나는 확실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당연히 누군가는 그런 전보를 보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이선념(李先念)을 포함해서. 모두 없었다고 말한다. 이건 섭검영이 한 일이 아니냐. 섭검영은 유사한 일을 너무나 많이 저질렀다.
문: 진비현(陳丕顯)이 권한을 빼앗긴 건은 어떻게 된 것인가? 너희 집안과 진씨집안의 관계는 좋지 않았는가?
나는 1월혁명의 대회전에 부친이 진비현을 만나 얘기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저녁내내 얘기를 나누었다. 이 일은 아무도 쓴 적이 없다. 진비현은 절대로 이 건을 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주 주목하고 있다.
우리 집안과 진비현의 집안의 관계는 계속 아주 좋았다. 그는 나의 육숙(六叔)에게 여자친구를 소개해주었고, 나는 육숙과 함께 그들 집에 간 적도 있다. 내가 처음으로 신선한 용안(龍眼)을 맛본 것도 진비현의 집에서였다. 모주석은<무산계급의 혁명후계자를 배양해야 한다>를 발표했는데, 나는 입당한 후, 강평로(康平路) 소예당(小禮堂)에서 간부자제대회를 열었다. 그때 진비현이 나의 손을 잡고 입장했다. 그리고 나를 그의 옆에 앉게 했다. 그는 당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장래 무산계급혁명사업의 후계자는 바로 너희들 중에서 나올 것이다." 그는 나를 칭찬해주기도 했다.
그래서 부친이 진비현을 만나 얘기를 나눈 것은 내 생각에 그가 올바른 일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진비현과 얘기를 마친 후, 나는 그에게 얘기가 어땠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진비현이 나와서 일하려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들은 후에 아주 실망했다. 다만 나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나중에 부친이 감옥병원에 있을 때, 진비현이 "일월폭풍"에 관해 쓴 글이 <신민만보>에 실렸다. 부친은 그 글을 얘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도 진비현의 배후가 주은래라는 것을 몰랐다."
문: 너는 1967년 베이징의 사숙(四叔)의 집에 한동안 머문 후, 다시 상해로 되돌아왔다. 일을 시작한 것인가?
수업재개와 혁명은 우리와 그다지 큰 관계가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졸업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먼저 항무국(港務局) 물자공급공사로 가서 반년간 노동을 했다. 우리가 간 곳은 상해항 7구 공급참이었다. 바로 당교(塘橋) 백련경(白蓮涇)에 있는 것이다. 참장이 학생을 고를 때, 내가 장춘교의 딸이라는 것을 알고 나를 뽑아갔다. 참장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그는 그들이 일하는 곳은 가장 힘든 곳이라고 말한다. 바로 부두이다. 그의 생각에 장춘교의 딸에게 그런 힘든 일을 시킬 수 없다는 것이었다. 거기에서 매일 일을 분배하고, 소삼트럭, 십륜대형트럭에서 운반공의 일을 했다. 그건 모두 체력노동이다. 부두에 필요한 시멘트, 모래, 철근, 강판등의 물건을 운송했다.
반년을 하면서 나는 트럭운전을 배웠다. 부대에서 퇴역한 운전기사에게 배웠다. 차를 아주 험하게 몰았다. 나는 포동대교(浦東大橋)에서 소삼트럭을 몬 적이 있는데, 한번은 브레이크를 밟을 줄 몰라서 하마터면 황포강에 빠질 뻔했다.
나와 동기동창인 친구들은 모두 서로 다른 물자공급참에 배치되었다. 어떤 친구는 황포강으로 갔다. 이 경력은 나로 하여금 상해를 알게 해주었다. 이렇게 반년간 노동을 하고나서 정식 업무가 주어졌다.
허세우(許世友)는 나에게 군대에 들어오라고 했다. 내 생각에 나는 부대에 가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여겼다. 나는 자유주의가 비교적 심했고, 나 자신의 생각도 있다. 그래서 반장, 소대장의 지휘에 복종하는 것은 맞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근시안이다. 만일 긴급하게 집합해야하면 엉망인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군대에 가지 않았다. 그리고 나의 큰여동생은 군대에 들어가고 싶어했다. 남경군구는 서회구(徐匯區)에서 여군을 모집했는데 그녀가 갔다. 가경시(柯慶施)의 둘째딸과 함께 갔다. 나는 농촌으로 가고 싶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부중(附中)을 다닐 때 나점(羅店) 농촌으로 가서 노동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3주간이나. 고1때, 부모님은 나를 공장으로 가서 1달간 노동하게 한 적이 있다. 거기서 라디오를 조립했다. 간단하고 중복되는 노동으로 나는 노동자들의 생활이 어떤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공장으로 가서 일하고 싶었다.
일을 분배할 때, 부친은 상해에 있지 않았다. 모친은 우리를 신경쓰지 않았다. 나는 학교로 가는 것은 원치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동기들을 떠나고 싶었고, 상해에 남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 사람을 찾아서 부탁해야 했다. 나는 왕홍문(王洪文)에게 전화했고, 그는 나를 상해의표창(上海儀表廠)에 배치되도록 해주었다. 이 공장은 삼선(三線)과 합작임무가 있었다. 당시 그들은 귀주(貴州)에 분공장이 있었는데, 직원들은 3년간 훈련을 마친 후 귀주로 가서 일해야 했다. 나는 좋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는 정말 상해에 남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공장에서 나는 8년을 일한다. 사건이 날 때까지.
문: 네가 공장에서 일할 때, 외부에는 거대한 정치사건이 있었는데 분명히 관심이 있었지 않았는가?
답: 당시 모두 국가대사에 관심이 있었다. 매일 정치학습이 있었다. 수습생은 공장에 거주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첫해에는 공장에서 살고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때 부친은 자주 상해에 있었다. 나는 그와 비교적 많이 접촉하고 교류했다.
그는 일반적으로 오후에 일을 시작했다. 새벽에 잠들 때까지. 그리고 정오에 일어났다. 그의 자고 일어나는 시간은 기실 총리를 따라한 것이다. 총리는 아침일찍 자서 정오에 기상한다. 그리고 부친은 계속 신문사에서 일했는데, 이렇게 자고 일어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모주석은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난다. 규율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권력상의 일을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 그는 문건을 거기에 놔두었지만, 우리는 보지 않았다. 당연히 가끔 큰 제목은 보았다. 내 기억에 비교적 깊이 남은 것은 임표사건이다. 처음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된 일인지 우리는 몰랐다.
되돌아 회상해보면, 나의 막내동생은 공사군(空四軍)에 있었는데, 그녀는 감시를 받았다. 나는 항천국(航天局) 22소(所)에 있었고 삼결합에 참가했다. 의표창에서 옮겨간 것이다. 그들과 함께 홍기4호미사일의 자동제어기를 만들었다. 과학연구활동에 참가할 때 거기에는 군대표가 있었다. 바로 공4군의 사람이다. 그는 나에게 얘기했다. 눈을 똑바로 뜨고 나를 보면서 나의 눈은 왜 노란색인지 물어보았다. 아주 웃기게도, 나의 특징을 알고 있는 것같았다. 실제로는 사람을 확인하기 위해 온 것이고, 만일 일이 새기면 나를 체포하려는 것이었다.
임표사건후, 나는 부친에게 말했다: "다음에 너희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우리에게 좀 말해달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죽어도 왜 죽었는지 모를테니까." 부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 1976년, 주은래, 주덕(朱德), 모택동이 차례로 사망한다. 중국의 정치판도는 분명히 바뀔 것이다. 너의 부친은 나중에 집에 보낸 서신에서 그 자신의 신체상황을 얘기하면서 그가 세 노인의 의료팀에 참가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한가?
맞다. 주총리, 모주석의 의료팀은 나의 부친이 책임졌다. 그리고 하나는 강생(康生)의 의료팀인지 아닌지 기억이 불분명하다. 그들의 치료과정에서 부친은 전심전력을 다했다.
문: 그떄 총리를 비판한 것은 무슨 일인가?
내가 듣기로 1973년 정말 총리를 비판하는 사건이 있었다. 깜짝 놀랐다. 나는 부친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탁구외교로 미중대화의 대문이 열렸고 미국인들과 교류를 시작했다. 키신저가 온 후에는 마치 핫라인이 연결된 것같았다. 총리의 당시 처리방식은 모주석으로 하여금 우려하게 만들었다. 모주석은 이렇게 말한다: "싸울 때는 좌(左)를 경계해야 하고, 대화를 할 때는 우(右)를 경계해야 한다" 그 뜻은 싸울 때는 모든 것을 타도하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고, 대화를 할 때는 경계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를 망하게 하려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모주석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당의 역사상 이런 교훈이 한두번인가?" 제1차 국공합작때, 진독수(陳獨秀)는 자주권을 포기하고, 일체 장개석의 말을 들었고 결국은 "4.12"대도살이 벌어져 피가 강을 이룬다. 제2차국공합작때 모주석은 중경담판을 하러 갔고, 유소기가 업무를 주재했다. 그리고 '중앙정부의 말을 듣는다'는 견해를 낸다. 모주석은 말했다: '그(주총리)에게 몇번을 말했는데, 그는 어찌 이런 잘못을 범한단 말인가?'라고 말했다.
이는 부친이 나중에 나에게 말해준 것이다. 그의 모주석에 대한 인식과 이해이다.
누군가 나에게 말해주었다. 부친의 총리에 대한 비판은 일찌감치 끝났다고. 그는 말했다. 총리의 몸이 좋지 않으니 총리께서 돌아가 쉬게 하자고. 이 일은 1976년의 '4.5사건'으로 바뀌어버렸다. 정말 마음이 아프다.
문: "4.5사건"은 어떻게 발전한 것인가?
답: "4.5사건"후 나는 베이징을 한번 갔었다. 부핀도 나에게 다른 사람들이 쓴 대자보등을 보여주었다. 그중에는 모주석에 반대하는 것도 있었다. 이건 예상 밖이었다. 창끝은 단순히 사인방만 향하는 것이 아니었다. 선을 넘었다. 그래서 모주석이 붙잡아서 반격한 것이다. 당시 우리는 당연히 등소평이 뒤에서 "4.5"를 주도하는 줄 몰랐다. 나의 부친마저도 몰랐다. 내가 북경에 갔을 때, 모주석은 이미 말했고, 전체 사건은 이미 뒤집혀 있었다.
문: 부친은 나중에 정치국상위, 부총리까지 지낸다. 정치적으로 평보청운(平步靑雲)했다고 할 수 있다. 너는 기쁘지 않은가?
답: 조금도 기쁘거나 즐겁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는 많은 사람들의 표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게 뭐 기쁜 일이겠는가. 그 자신도 그렇게 기쁘지 않았다. 2월 역류때, 그들 원수는 손자를 욕하듯이 그를 욕했다. 누가 그를 멸시하지 않았는가? 그 자신이 자신을 멸시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를 멸시한 것이다. 그들은 감히 모주석을 욕하지는 못해서 모두 그를 욕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임표에 의해 그런 모습이 된 것이다.
1975년 모주석은 그를 해방군총정치부주임으로 임명하려 했다. 나는 부친에게 말했다: "모주석이 굳이 총정치부주임의 임무를 당신에게 맡긴다면 그가 당신을 신임하는 것이 아닌가. 가서 하세요." 그는 말했다: "내가 가서 말해봐야, 누가 듣겠는가?"
당연히 모주석이 그를 임명하면, 그가 하지 않을 수 없다. 임명된 후, 그는 군대로 가서 얘기를 하고, 보고를 했고, 대화를 나누었다. 다만 아무도 그가 말한대로 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의 질투와 원한만 샀다. 그가 손을 군대까지 뻗쳤다고 말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참단마조(斬斷魔爪)"해야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부친은 자신에게 좋은 결과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문혁초기 정치국위원의 권력을 빼앗을 때, 중앙문혁소조의 구성원이 모두 정치인물이 되었을 때 그는 이미 느꼈을 것이다. 모주석이 그들에게 말한 것은 권력을 빼앗으라는 것이고 함께 사진을 찍어주었다. 모주석은 다시 한번 강조했다. "목이 날아가는 것을 겁내지 말라"는 등 5가지 겁내지말라는 말이다.
문: 나중에 그는 자신의 처지가 아주 위험하다는 것을 알지 않았는가?
답: 부친은 아주 경계했다. 예를 들어 그는 방을 떠났다가 돌아오면 잔의 물을 절대 마시지 않았다. 바꾸었다. 그는 분명히 대비했을 것이다. 다만 그는 도대체 누구를 방비하는 것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내 생각에 분명히 왕동흥(汪東興)을 방비하는 것일 것이다.
당연히 여러가지 일은 나중에 내가 인터넷에서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진짜인지 아닌지도 알지 못한다. 제9기 2중전회후, 모주석은 왕동흥을 바꾸지 않으려 했고 그를 계속 쓰겠다고 했다. 그래서 시실은 근본적으로 왕동흥이 나중에 말한 것이 아니다. 나의 동기동창은 나중에 나에게 물었다: "누구의 말이 가장 믿을 만하지?" 나는 분명 왕동흥일 것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는 다 태워버렸기 때문이다. 현재 내가 보고 있는 자료는 등영초(鄧潁超), 왕동흥이 자료를 불태웠다고 했다. 모주석이 그들에게 태워버리라고 한 것이다. 다만 모주석이 그들에게 태우라고 했을 때는 태워버리지 않았다. 나중에 불태운 것은 증거를 없애버린 것이 아닌가?
부친은 나에게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 "봐라. 이 금고는 모두 비어 있다. 무슨 문서가 오면, 내가 보고 나면 동그라미를 그린다. 내가 동그라미를 그리면 가지고 나간다. 여기에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다." 그는 언제든지 잡혀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어떻게 잡혀갈지를 얘기한 적이 있는데, 그는 말했다: "아주 간단하다. 회의만 열면 된다. 그들이 나에게 회의에 참가하라고 하면, 내가 가지 않을 수 없다." 나중에 그들은 과연 그렇게 처리했다. 그래서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문: 너는 체포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부친을 본 상황을 기억하는가?
답: 그때는 1976년 여름이다. 내가 북경으로 출장을 가서 그를 만났다. 그와 약간의 문제를 토론했는데, 토론문제는 노동자계급대오의 문제도 있고, 중국이 이후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의 문제도 있다. 당시 주은래와 주덕은 이미 사망했다. 모택동도 병이 위중했다. 우리는 여러가지 문제를 많이 토론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는 말했다. "내가 어떻게 하겠는가. 천도만과(千刀萬剐)이다." 나는 그가 다른 사람을 그렇게 하겠다는 것으로 알아들었는데,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다른 사람이 그를 그렇게 할 것이라는 것을. 그는 다른 사람의 말을 반복했다. "다시 한칼을 더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모주석이 본래 말하지 않았던가. 공산당원은 5가지를 겁내서는 안된다고."
"다섯가지 겁내지 않는 것"은 이혼을 겁내지 말고, 출당제명을 겁내지 말고, 목이 달아나는 것을 겁내지 말고, 감옥에 가는 것을 겁내지 말고, 관직에서 잘리는 것을 겁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가 이렇게 말하자 나는 다시 물었다: 아빠가 천도만과되면 나는 어쩌면 좋은가?
그는 말했다: "나도 모른다. 누가 너보고 장춘교의 딸로 태어나라고 했느냐?" 이런 말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면은 너무나 분명했다. 그래서 그가 나중에 잡혀가도 나는 전혀 놀라지 않았고, 긴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을 내려 놓았다. 나의 느낌은 그저 "왔다. 정말 왔다"는 것이었다. 아주 기이한 느낌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런 방법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문: 너희가 이미 그런 말까지 할 정도였다면 그때 만난 것이 이별이 될 것이라고 느끼지는 않았는가?
답: 약간은 이별하는 느낌이 있었다. 그러나 분명하지는 않았다. 그는 어떻게 진전되는지 보자고 했다. 그는 아마도 연말이 되면 결과가 나올 것같다고 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십월에 결과가 나와버렸다.
4인방을 체포한 후, 상해시위서기인 마천수(馬天水)는 북경에서 돌아온 후 그들 몇명과의 관계를 자르기 시작했다. 이어서 모친을 잡아갔다. 제2차 강평로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우리 집으로 몰려왔다. 아무도 우리를 돌봐주지 않았다. 우리와의 관계를 끊었다. 이번에는 집안의 장과 상자를 모조리 뒤집어놓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았다. 다만 왜 그런지 그들은 나의 방에 봉조(封條)를 붙였다. 자녀의 방까지 봉쇄해버린 것이다. 나머지 몇개의 방은 거의 다 쓸어갔다.
가장 재미있는 것은 허세우는 이전에 우리 집에 표범을 한 마리 보낸 적이 있다. 다 먹고나서 가죽을 처리한 후 상자 속에 넣어 두었다. 나중에 이 금전표(金錢豹)의 가죽이 사라져버렸다. 왜 이걸 가져갔을까? 혹시 허세우가 우리와 선을 긋기 위해서 마음이 급해졌기 때문일까? 나중에 양성무(楊成武)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허세우는 양성무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는 장춘교와 관계가 계속 좋지 못ㅎㅆ다. 허세우가 태행산에서 표범을 잡은 후 양성무에게 보내고, 꿩과 토끼는 장춘교에게 주었다고.
그러나 사실은 1973년, 허세우는 확실히 두 마리의 표범을 잡았다. 부친과 양성무에게 한 마리씩 보냈다. 그때 부친은 상해에 있지 않았고, 경위비서도 있었다. 모두 흥국로에 있었는데, 허세우가 표범을 보내왔다. 주방장이 요리를 해서 큰 탁자에 내놓았다. 당시 경비구의 몇명까지 불러서 같이 먹었다. 모친은 먹지 않았고, 우리는 모두 먹었다. 먹어보니 소고기와 비슷한 맛이었다.
문: 지금 보편적으로 말하는 것은 1930년대 너의 부친은 '적극(狄克)'이라는 필명으로 노신(魯迅)과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너의 부친은 말년에 이에 대해 어떻게 말했는가? 그리고, '반도', '특무'의 일은 너도 알고 있는가?
답: 1968년 상해의 "4.12" 포타(炮打)때 나는 백련경에서 남부두로 가고 있었다. 가는 길에 외탄에서 대자보를 보았다. 그리고 외찬에서 적지 않은 전단지도 보았다. 나는 왜 '적극' '잔도'등등의 말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전단에는 서북국의 한 지도자가 고발했다고 했는데 유란도(劉瀾濤)였는지, 곽사렴(霍思廉)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부친에게 물어보았다. 부친이 말하기를 그 두 사람과는 함께 일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반도의 일에 관해서 부친은 자신은 한번도 체포된 적이 없는데 어떻게 반도가 되느냐는 것이었다.
그가 노신과 논쟁을 벌인 건에 관해서 그는 필명을 쓴 적은 없다고 했다. 다만 밥을 먹고 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필명으로 다른 사람을 도와 글을 써준 일은 있다고 했다. 그는 18살때 상해로 왔고, 글을 써서 먹고 살았다. 처음에는 산동로에 거주했고, 나중에는 서가회로 이사갔다. <대공보> <신보>등에 투고했으며 어떤 때는 전차를 탈 돈조차 없었다. 3푼에 1개주는 대병(大餠)도 사먹을 수 없었다. 새 영화가 나오면 누군가 그에게 영화표를 주면서 영화평을 써달라고 했다. 혹은 어느 사건에 대하여 그에게 글을 쓰게 했다. 그런 일은 있었다. 그건 먹고 살기 위해서였다. 나중에 약간 사정이 좋아지면서 그 자신이 정자간을 하나 빌렸고, 자신의 글도 쓰고 다른 사람을 도와서 글을 써주기도 했다. 그는 한번도 집에 돈을 달라고 한 적이 없고, 할아버지도 부친에게 돈을 준 적이 없다.
나중에 상해에서 누군가 이 건을 조사하러 왔고, 최종적으로 내린 결론은 '적극'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다.
문: 모친은 언제 풀려났는가?
답: 모친은 3,4년간 갇혀 있었다. 그녀가 나온 후에 몸이 아주 좋지 않았다. 먼저 화동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우리도 몰랐다. 나중에 공안국의 사람들이 우리를 찾아와서 그녀를 집으로 데려가라고 했다. 우리는 그녀에게 무슨 문제가 있어서인지도 몰랐다. 우리는 공안국의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너희는 우리 모친이 많은 문제가 있어서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했는데, 지금은 우리에게 그녀를 데려가라고 하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바로 역사문제이다. 이전에 모두 결론이 났다."라고 대답한다.
문: 한 글에서 모친이 '반도'이거나 혹은 중대한 반변(叛變)행위를 벌였다고 했는데, 사실은 어떠한가?
답: 1982년에서 1983년 사이에 모친이 집으로 돌아온 후, 공안국 전안조의 사람이 우리 집을 찾아왔다. 그녀에게 최종결온을 얘기해 주었다.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 나는 그녀에 대한 결론을 보았다: 위에 쓴 것은 역사문제는 '변절'행위가 있다는 것이다. 나도 알 수 있었다. 변절이 무엇을 말하는지. '변절'은 '반도'와 다르다. 만일 반도라면 조직을 팔아먹었다는 것이고, 동지를 팔아먹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런 적은 없다. 그녀는 기관에서 내려가 현에서 현위선전부장을 지냈다. 일본인의 소탕때 철수하지 못해서 전체 현위가 체포된다. 모친은 부상으로 혼절한 상태에서 체포되었다.
그녀에 관한 이 결론은 1945년에 내려졌다. 1949년에 그녀는 다시 입당한다. 당시 조직부의 통일된 의견은 이러했다. 누군가 그녀는 글을 써서 일제에 협력했다고 했다. 이름은 이숙문(李淑文)이라고 했다. 이건 장관이대(張冠李戴)이다. 모친의 집안에는 고모의 배분에 이름 중간에 '숙(淑)'을 헌었다. 그녀의 가족중에서 8,9명이 모두 이숙X이다. 모친대의 사람들은 이름의 가운데가 모두 '약(若)'이다. 모친의 이름은 이약문(李若文)이다. 사촌오빠의 <직고세가(直沽世家)>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문: 1981년 11월 사인방공개재판때 너희는 TV중계를 보았는가?
답: 공개재판때, 모친은 이미 집에 돌아와 있었다. 그때 우리는 막 12인치짜리 흑백TV를 샀을 때였다. 이건 우리집에서 최초의 TV이다. 지금도 나의 남편의 사무실에 놓여 있다. 그는 버리려고 하지 않는다. 그때 TV를 사려면 표가 필요했다.
공개재판에 관한 소식은 아무도 우리에게 특별히 알려주지 않았다. 우리는 다른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방송과 신문을 보고 알았다. 처음에 우리는 모친은 보지 못하게 했다. 그녀가 너무 흥분할까봐. 그녀는 심장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그녀도 보게 했다. 처음에 부친을 보았을 때 우리는 깜짝 놀랐다. 얼마나 괴롭혔으면 저런 모습일까. 내가 마지막으로 부친을 본 것은 1976년여름에 내가 북경에 갔을 때이고 이미 4년이 지났을 때였다.
문: 그 4년동안, 그가 체포된 후 공개재판을 받을 때까지 너희는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는가?
당연히 연락하지 못했다.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다.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공개재판때, 그의 수염이 엉망진창이며 하얗게 된 것을 보았다. 당시 우리는 그가 수염정리하는 것을 거절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는 분명히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내가 이런 모습인 것은 너희가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이다. 그럼 나는 그냥 이런 모습으로 나가겠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어떤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우리가 연루되었는지 아닌지도 알지 못했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나중에 그를 만나러 갔을 때 그는 우리의 상황에 대하여 전혀 알지를 못하고 있었다.
문: 당시 TV에서 공개재판을 보면서 너희의 감정은 어떠했는가?
큰여동생은 양포구에 거주해서 그녀를 제외하고 집안의 나머지 사람들은 같이 공개재판을 보았다. 부친이 한 마디도 하지 않고, 태도가 강경한 것을 보고 나는 그는 바로 이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기개없는 사람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다. 나도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무엇을 말한단 말인가? 어떻게 말한단 말인가? 어쨌든 내가 보기에 그는 기개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이 최대의 안위였다. 초조했던 마음이 조금은 풀어졌다. 무슨 감정이랄 것은 없었다.
문: 너희가 다시 부친을 만났을 때는 언제인가? 당시 상황은 어땠는가?
답: 다시 부친을 만난 것은 1984년 11월이다. 8년간 보질 못했다. 처음 내가 남동생과 둘이서 그를 보러 갔다. 그는 전립선비대로 진성감옥(秦城監獄)에서 부흥의원으로 옮겨와 있었다. 그를 치료하는 의사는 총리의 병도 진료한 사람이다. 나의 부친과도 원래 아는 사이였다. 나중에 부친의 수술을 해주었는데, 수술도 아주 잘 해주었다. 이들 의사는 부친에게 잘 대해주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총리의 병을 본 사람들이고 총리의 치료과정에서 부친이 성실하게 책임졌고 그것을 의사들도 보았기 때문이다.
공안국에서 우리에게 북경으로 오라고 했다. 나의 조직관념은 아주 강하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가 나를 오라고 하면 내가 가야 하는가? 나는 공산당원이다. 나도 단위가 있다. 너희가 우리를 북경으로 오라고 하려면 먼저 나의 단위와 얘기해라." 그들은 할 수 없이 단위로 왔다. 이렇게 하여 내가 북경으로 가서 부친을 만나는 일이 공개되었다. 당시에 도처에 장춘교가 이미 죽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나의 동기동창까지도 물어보았다. 신문을 잘라서 나에게 부쳐주면서. 그리고 어떤 동기는 나에게 <호북문적보>를 고발하라고 했다. 왜냐하면 장춘교가 이미 죽었다는 뉴스를 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홍콩신문도 있었다.
나는 공안국에게 단위를 먼저 찾아가라고 한 것은 단위에서 부친을 만나는데 동의해달라고 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나의 목적은 모두에게 부친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단위에서 공안국이 불러서 간 것이라고 하면 나중에 골치아픈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1996년 부친이 여든에 가까웠다. 누군가 나에게 병보석을 신청해보라고 말해주었다. 1996년이후 나는 모친과 함께 북경으로 두번 갔고, 사람을 찾아서 서신을 보냈다. 그들이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해주었다. 만일 부친이 병보석이나 가석방을 받게 되더라도 상해로 돌아가는 것은 허가하지 않겠다고. 1998년, 병보석이 허가된다. 그들은 강음에 부친을 위해 집을 마련해준다. 집에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모친이 거기로 갔다. 기실 모친은 부친과 함께 갇힌 셈이다. 모친은 기꺼이 상해의 생활을 포기하고 부친에게로 갔다.
그때 모친과 남동생, 남동생의 처는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었고, 모두 다른 사람들이 돌봐주었다. 이것들을 그녀는 모두 포기했고, 혼자서 강음으로 가서 부친을 돌봤다. 부모님은 강음에서 살기 시작한 후에도 부친은 신체의 자유가 없었다. 그들의 거처는 담장이 아주 높았다. 보통사람의 집보다도 높았다. 건물위층에는 공안국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대문을 나갈 수도 없었고, 외부인을 만날 수도 없었다. 완전히 격리된 것이다. 우리는 그를 만나러 갈 수는 있었지만, 같이 밤을 새울 수는 없었다.
문: 서신을 보면, 국제대사에 그는 아주 관심이 많던데, 예를 들어 소련해체등. 정말 그러했는가?
그렇다. 그는 국제대사에도 관심이 많았다. 예를 들어, 이라크, 사담후세인.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하면 이길 수 있을지. 부친은 처음에 이렇게 말했다. 사담후세인은 미국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모택동사상이 없기 때문이고, 무산계급정당이 없기 때문이다.
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싶어한다. 만일 부친이 당시 성공했더라면, 중국은 현재 어떤 모습일지. 마찬가지로 경제적으로 발전했을까? 부친은 현재 백성의 생활이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다는 것을 인정했는가?
답: 부친은 당연히 현재 백성들의 생활이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다고 인정했다. 다만, 만일 그들이 당시에 계획한 길로 계속 나아가ㅏㅆ다면 백성의 생활은 더욱 좋아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회는 항상 진보한다. 그들도 생산을 발전시켰다. 혁명을 하면서 생산을 촉진했다. 등소평만 생산을 발전시키려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부친의 계획은 공동부유의 길이다. 일부분의 사람들이 먼저 부유해지는 것이 아니라.
문: 그는 등소평이 장악한 후 중국에서 자본주의를 실행할 것이라고 생각했는가?
답: 아니다. 그는 중국이 자본주의로 바뀔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1976년 여름, 나는 그와 이 문제를 토론했다. 나는 그에게 중국에 장래 자본주의가 복벽할지 물어보았다. 그는 말했다. 중국은 자본주의가 복벽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은 한번도 진정한 자본주의를 실행한 적이 없다. 중국은 그저 반식민지 반봉건의 관료매판자본주의상태였다.
문: 부친은 등소평을 어떻게 보았는가?
답: 등소평에 관하여 부친은 계속 그의 업무능력이 아주 강하다고 말했다. 부친은 나중에 나에게 말했다: "등소평이 업무에 되돌아왔을 때 북경으로 돌아오면 스스로 자신이 거주할 곳을 찾았다. 우리와 달랐다. 우리는 모두 총리가 안배해서 우리를 조어대에 거주하게 했다." 등소평은 처음에 회의를 개최했을 때, 100여명의 명단을 내놓으며 그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줄 것을 요구했다. 다만 당시 각 부문은 모두 인원을 줄여둔 상태였다. 부친은 이런 말도 했다: "주석은 나로 하여금 그에게 상황을 설명하게 했는데, 그는 아예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부친은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 서사해전(西沙海戰)을 지휘할 때, 등소평은 아주 숙련되었고, 지휘는 과감했다. 명령 하나하나는 아주 명확했다. 그래서 등소평이 다시 일을 시작했을 때 약간은 전공이 혁혁한 늙은 말과 같이 되돌아와서 길을 이끌어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아쉽게도 늙은 말은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문: 부친은 사인방의 다른 사람들을 평가한 적이 있는가?
답: 그는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적이 드물었다. 사인방의 몰락에 대하여 거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모씨집안의 일에 대하여 그는 더더욱 말을 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설사 육체적으로 고통스럽더라도 인내해야 한다고 여겼다. 공산당원은 특수한 재료로 만들어지지 않았는가. 무엇을 참지 못하겠는가.
문: 그가 서거하기 전의 상황은 어떠했는가? 듣기로 그의 병이 위중할 때 등소평에 관한 꿈을 꾸었다던데, 그건 어떻게 된 일인가?
답: 2005년 연초, 부친은 설날부터 병이 났다. 1월에 병이 들어 4월까지. 그의 병세는 내가 아주 잘 알았다. 또한 계속 그를 상해로 데려가서 치료하고자 했다. 그러나 상부에서 동의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강음의 병원에 있었고, 그의 감시인은 그의 곁에 있는 침대에서 잠을 잤다. 손자가 그때 두 살이었고, 그를 돌보던 보모의 부친이 병들어 휴가를 청했다. 그래서 나는 손자를 데리고 가야 했다. 어쨌든 나는 두 곳 모두 돌봐야 해서 아주 조급했다. 강음의 병원에 있을 때 감시인은 수시로 병원의 비용내역을 보여주면서 부친에게 얼마나 많은 돈을 쓰고 있는지 말하곤 했다.
마지막에 그들이 수십만위안을 썼다고 했을 때 나는 결국 참지 못했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만일 네가 나에게 그들 데리고 상해로 갈 수 있게 해준다면, 한푼도 너희가 내지 않아도 되도록 하겠다. 지금 내가 그를 데리고 가겠다. 그럼 너희는 돈을 쓸 필요가 없다. 그리고나서는 그들이 나에게 더 이상 돈얘기를 하지 않았다.
부친은 생로병사를 잘 알았다. 그는 말했다: "나는 죽는게 겁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죽으러 가지는 않겠다." 그도 노인이 병드는 과정을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세 노인의 의료팀을 맡았었기 때문이다. 나는 결국 서명을 했다: 인공호흡기를 꽂지 않고, 응급조치를 하지 말도록. 그의 병이 위급했을 때, 우리 몇몇 자식들이 그의 곁에 있었다. 나는 그가 숨을 거두는 것을 보았다.
마지막에, 나의 남편이 나에게 부친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우리에게 할 말이 뭐가 있는지. 그러나 나는 입밖에 내지 못했다. 어쨌든 나는 극력 감추려고 했다. 그러나 부친은 자신이 위중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위중할 때 한번은 그가 나에게 말했다: "모주석이 말하기를 노인이 죽으면 경축행사를 열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화장하라고 했다. 서명까지 했다. 다만 화국봉은 둘 다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나를 위해 경축행사는 열어주었다. 그것도 천안문광장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 그렇게 큰 장면으로. 나는 나중에 TV에서도 보았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나를 위하여 그렇게 해줄 줄은. 나의 이번 생애는 충분하다." 여기에서 부친이 얘기하는 것은 1976년 10월 천안문광장의 타도사인방대회이다.
그리고, 위중할 때, 그는 그가 꾼 기괴한 꿈에 대하여도 얘기했다: "나는 요 며칠 계속 꿈을 꾼다. 꿈에 등소평이 나를 찾아왔다. 나는 말했다. 너는 태평양에 있지 않느냐? 어떻게 여기를 왔느냐? 등소평이 말했다. 나는 지금 갈 곳이 없다. 누구도 나를 원하지 않는다. 내가 모주석에게 갔더니 주석이 말하기를 요 며칠 아주 바쁘다. 와서 할 말이 뭐가 있느냐 무슨 흑묘백묘같은 것 아니냐. 기다려라. 강청이 뛰어와서 욕을 했다. '등적(鄧賊)!' 나는 다시 총리를 찾아갔다. 총리도 뭐 할 말이 없었다. 총리가 말하기를 너도 나를 욕했고, 나도 너를 욕했다. 우리 둘 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등소평은 나에게 말했다. 주석은 현재 네 말을 들으니 나를 도와서 말좀 해달라. 나는 등소평에게 말했다: 현재 주석은 나도 부르지 않는다. 내가 간다고 하더라도 너를 도와 무슨 말을 할수 있겠는가."
부친은 이렇게 길게 말한 후 나에게 말했다: "네가 보기에 내 컨디션이 아직 괜찮은 것같지 않냐?" 이 말은 당시 내가 가지고 다니던 수첩에 적어 놓았다. 요 이틀간 나는 원시기록을 찾아보았다. 지금은 아는 것이 많아졌다. 그래서 좀더 알게 되었다. 즉 부친의 꿈에서 주은래와 등소평의 관계를 알 수 있고, 부친과 등소평의 관계도 알 수 있었다. 만일 '4.5사건'이 없었더라면 역사는 아마도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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