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후)

관우겸(關愚謙): 중국판 "쇼생크탈출"

중은우시 2021. 9. 28. 01:13

글: 덕국우재계획(德國優才計劃)

 

<쇼생크탈출>에서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남자주인공 앤디는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하에서 성경 1권과 섹시여배우의 포스트로 은폐하면서 꼬챙이 하나로 500미터의 비밀통로를 만든 후 탈옥할 수 있었다.

 

그는 19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자신의 하반생을 열었으며 스스로에 대한 탈출을 성공시켰으며 불가사의한 장거를 이루었다.

 

한 중국인이 남자주인공 앤디와 마찬가지로 스스로에 대한 구원을 완성한 바 있다. 그가 그런 생각을 가진 때로부터 출국하는데까지 그는 단지 10분을 썼을 뿐이고, 그가 성공적으로 빠져나갈 가능성은 겨우 0.01%에 불과했었다.

 

 

그는 총설계사 등소평의 러시아어통역이었고, 주룽지가 계속 관심을 가졌던 칼럼작가였으며, 독일 함부르크대학의 저명한 학자였다. 일찌기 중국어, 독일어, 영어, 이탈리아어, 러시아어등 여러 언어로 저작을 출판했고, <노신전집>의 독일어판도 번역한 바 있는 세계적인 문화교류분야의 전문가였다.

 

그는 문혁때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도박을 건 절지구생의 망명객이었으며 중국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운좋은 '반도'이기도 하다.

 

그는 바로 관우겸이다.

 

1931년 2월 관우겸은 광주(廣州) 봉황촌(鳳凰村)에서 태어난다. 부친은 영남대학의 교수였고, 모친도 선비집안 출신으로 공자의 제자인 언언(言堰)의 후예이며, 자녀들에게 모범을 보이면서 잘 가르쳤다. 그와 그의 형, 누나는 모두 양호한 교육을 받았다.

 

이 가정은 서향기(書香氣)가 충만했고, 아주 아주 가난했다. 어려서부터 그는 배고픈 아픔을 느끼면서 자랐다.

 

게다가 당시는 중국이 내우외환을 겪고 있어서, 그의 어린 시절은 포화성을 들으면서 보내야 했다. 그는 '상가지욕(喪家之辱), 망국지한(亡國之恨)'을 깊이 느꼈다.

 

그는 가족들과 사방을 떠돌아다녔고, 마지막에는 상해로 간다. 거기에서 상해교회학교인 성방제중학(聖芳濟中學)에서 공부하고, 1945년에 상해시서중학(上海市西中學)으로 전학간다.

 

신중국이 성립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외교부에서 연 북경외국어학원에 입학하여 영어를 배우다가 나중에 러시아어로 전공을 바꾼다.

 

22살때, 국가에서는 외국어인재가 시급히 필요하였다. 실력이 뛰어난 그는 사전에 직장을 분배받아 중앙재정부 소련전문가공작실에서 일한다. 거기에서 그는 중앙지도자와 소련전문가들 사이의 통역을 맡았다. 그는 일찌기 진운, 등소평등 중앙지도자들의 통역을 담당했고, 남는 시간에 그는 여러 권의 책을 번역했다. 러시아의 경제전문서적과 러시아문학저작들이었다. 그는 재기가 넘쳤고, 지도자들이 중시하던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다.

 

2

 

25세는 그의 운명의 전환점이 된다.

 

당시 전국에서는 정풍운동이 불었고, 사람들에게 당에 의견을 제시하도록 요구했다.

 

모든 사람은 잘 알고 있었다.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당연히 적당해야 하며 너무 노골적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오직 그만이 솔직하고 아무런 거리낌없이 모든 의견을 다 적어서 내버린다.

 

결과는 바로 그가 돌아가면서 비판을 받고, 정치적으로 중우분자(中右分子)로 낙인찍혀 버리게 된다.

 

화는 입에서 나온다. 2년후, 그는 구름 위에서 골짜기로 떨어져 버린다. 그는 청해로 보내어져 개조를 받게 된다. 그는 <청해화보>사에서 촬영기자가 된다.

 

1959년 중국에서는 '반우경기회주의'운동이 벌어진다. 그에게는 옛날 일을 들춰내어 다시 한번 더욱 궁벽진 골짜기로 보내어진다. 황원현 일원산의 산꼭대기에서 노동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의지가 굳었고, 의지로 난관을 헤쳐나갔다. 1960년 <청해일보>는 그를 기자로 채용한다. 그는 다시 대도시 시닝으로 돌아왔고,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운나쁘게도, 다음 해에 중국에서는 대기근이 벌어져, 청해에는 식량이 부족하게 된다. 청해성위는 그를 뽑아서 생활조건이 극단적으로 험악한 청해호로 가서 물고기를 잡게 한다. 그는 여러번 굶어죽을 뻔하고, 몸도 고생을 겪으면서 퉁퉁붓고 온갖 병을 앓게 된다.

 

1962년이 되어서야 그는 다시 북경으로 돌아간다. 거기서 "중국인민보위세계화평위원회"의 대외연락업무를 책임진다.

 

그가 마침내 잘 지내게 되었다고 생각하는가? 아직 그의 액운을 끝나지 않았다.

 

1966년 문혁이 시작된다. 과오를 저질렀던 그는 다시 정치낭조에 휩쓸려 중점투쟁대상이 된다. 매일 비판받고, 살아도 죽은 것만 같지 못한 생활이 이어진다.

 

1968년 2월 그는 다시 한번 혼자 사무실에 남아 반성문을 쓰도록 명령받고, 군중비판을 기다리는 신세가 된다.

 

그는 마음 속으로 이번에는 정말 끝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를 기다리는 것이 도대체 수백번의 비투인지 아니면 다시 변방으로 쫓겨가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존엄이라고는 없는 생활을 생각하자 그는 가슴이 뛰었다. 거기에 우물에 빠진 그에게 돌을 던지는 식의 고발과 그에 대한 대자보, 그리고 이혼하자고 요구하는 처를 생각하자 더더욱 절망적이 된다. 모든 것을 포기한 그는 사무실의 서랍을 뒤져서 면도칼을 찾아내 팔목을 잘라 자살할 생각을 한다. 그런데, 그의 눈에 띈 것은 면도칼이 아니라 몇몇 외국인의 여권이었다. 원래 그의 업무중에는 중국에 온 외국인의 출입국절차를 처리하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외국손님들의 여권을 그가 모아서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가장 위에 놓여 있는 여권은 바로 일본인 사이온지 카즈테루(西園寺一晃)의 여권이었다. 사이온지 카즈테루의 부친 사이온지 킨카즈(西園寺公一)는 모택동의 귀빈이었다. 주은래도 그를 중국에 주재하는 일본민간대사라고 칭송했고, 중국정부는 "중국인민의 친구"라고 불렀다.

 

관우겸은 여권을 한번 살펴보았고, 여권의 사이온지 카즈케루의 사진은 보면볼수록 자신과 닮았다고 여긴다. 더더구나 여권에는 이집트와 프랑스를 갈 수 있는 비자까지 있었던 것이다.

 

그는 거기서 그를 사칭하기로 결심한다. 마음 속에서 계속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가자! 멀리가면 멀리갈수록 좋다, 여기는 너에게 맞지 않는다.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 가자, 가자,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멀면 멀수록 좋다!"

 

그러나 이는 죽는 길이다. 99.99%의 확률로 걸려서 총살당할 터였고, 겨우 0.01%의 확률로 요행히 걸리지 않고 나갈 수 있었다.

 

그는 10분만에 결정을 내려야 했다: 남아봐야 존엄도 없고, 살아도 죽은 것만 같지 못하다. 사칭헤서 도망치다가 걸리면 죽는 것이다. 한번 도박을 걸자 그러면 살 기회가 생길 수도 있지 않은가. 그는 0.01%에 도박을 걸기로 한다. 자유가 없으면 죽는 것이 낫다.

 

당시는 이미 오후 3시경이었다. 그는 민항 발권소에 전화를 건다. 일본외빈이 다음날 출국하기로 결정했다고 거짓말 하면서, 상대방에게 가장 빠른 속도로 국제선비행기표를 예약해달라고 한다. 

 

민항 발권소는 원래 한마디로 거절하겠지만, 사이온지 킨카츠의 아들이 나간다는 말을 듣자, 즉시 방법을 강구해서 6시반 퇴근전에 비행기표를 하나 구해준다.

 

그는 의자에 앉아, 컵을 들고, 컵안에 남아 있던 이미 식은 차를 마셨다. 힘껏 식지를 깨물며 최대한 냉정을 유지하려 애쓴다.

 

이어서, 그는 평상시에 업무계획을 세우는 것처럼 차근차근 해야할 일을 정리한다:

 

1. 여권을 가지고 공안국에 가서 출국도장을 받는다;

2. 재무과로 가서 수표를 받는다;

3. 6시 퇴근때 비행기표를 받는다

4. 집안에 있는 친구들의 서신을 모두 불태운다. 그들이 연루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5. 간단한 행장을 준비한다.

 

그러나 일본여권은 가졌지만, 일본어라고는 할 줄도 모르는 그가 여러 난관을 돌파할 수 있을까? 그 자신도 이 생각은 미친 짓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미 호랑이등에 올라탄 형국이어서, 그는 결심을 다시 하고 10분동안 급히 자신이 선택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계속 가기로 한다.

 

그는 퇴근 전에 자전거를 타고 공안국에 도착하여 외빈출국신청표는 이미 작성완료했는데, 사무실에 두고 왔으니, 내일 아침에 보완해서 가져다 주겠다고 화려한 언변으로 설득하여 결국 출국신청표를 잊고 왔음에도 외사경찰은 그에게 출국도장을 찍어준다.

 

그후 그는 바로 직장의 재무과로 가서 수표를 받는다. 그는 마음 속으로 기도했다. 절대로 골치아픈 왕과장은 만나지 말도록 이 왕과장은 그의 앙숙이었다. 매번 그의 약점을 잡아 그를 공격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문을 들어서자마자 왕과장도 들어왔다. 그가 마음 속으로 끝장이라고 외치고 있을 때, 왠일인지 왕과장은 그를 한번 쳐다보고는 몸을 돌려 떠났다. 그는 마음 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왕과장이 조금만 세심하게 대조확인하면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들통날 것이기 때문이다.

 

왕과장이 떠나자, 그는 즉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정을 잘 모르는 출납직원을 통해 수표를 받아낸다.

 

비행기표를 받아내는 것은 아주 순조로웠다. 그는 심지어 시간을 내서 저축소에서 200위안의 비상금까지 찾을 수 있었다. 우연이 여러번 겹치면서 그의 앞길에는 파란등이 켜졌고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았다.

 

평상시에는 3일이 걸려야 해내는 일을 그날은 겨우 3시간만에 모두 해낸 것이다.

 

그날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서 나이든 모친과 어린 아들을 보았다. 그는 억지로 웃음을 보였지만, 마음은 아주 무거웠다.

 

그는 다시 거짓말을 한다. 그는 모친을 구슬려서 누나집으로 가게 했고, 처에게는 아들을 데리고 친척집에 며칠 머무르게 했다. 

 

그날 밤에 그는 몸을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한다.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고요한 밤에 그는 조용히 여권을 꺼내서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여권 속의 인물이 자신과 닮지 않은 것처럼 여겨졌다.

 

그리하여 그는 원래의 사진을 떼어내고 자신의 사진으로 바꿔 붙인다. 그리고 손톱으로 사진에 날인한 윤곽을 표시했다.

 

다음 날 그는 공항으로 간다.

 

짐은 간단했다. 그저 모친이 그에게 생일선물로 준 바이올린과 4권의 <모택동선집>과 1권의 <모택동어록>이렀다. '홍위병'이 영국사무처를 불지르는 황당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중국에 오는 외국인은 갈수록 적어졌고, 그래서 공항터미널은 조용했다.

 

그가 나타나자, 외국인출국수속을 담당하는 해관검사원 소김(小金)은 반갑게 그를 맞이한다: "소관(小關). 외국손님을 배웅하는 구나!" 

 

당시 그의 마음은 두근반세근반이었다. 그는 소김이 짐을 열어 검사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마음을 진정시킨 다음 트렁크를 짐검사대에 올려놓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대답했다: "그래, 사이온지의 아들이 출국하는 거야!"

 

소김은 그의 말을 듣고는 두말없이 트렁크에 "면검방행(免檢放行)"이라는 태그를 붙여준다.

 

소김이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리면서 말했다: "소관이 배웅하는 외국손님의 짐을 어떻게 검사할 수 있단 말이야!"

 

그러나, 이건 겨우 첫번째 관문이었다. 다음에는 여권을 변방경찰에게 내밀어야 했다.

 

만일 그가 잘 아는 노류(老劉)가 담당하고 있었다면, 그는 분명 알아차릴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날 당직은 새로온 젊은 변방경찰이었고, 한번도 그와 얼굴을 마주친 적이 없었다. 그가 여권을 내밀고는 담담하게 지하실 화장실로 갔다. 거기서 제복을 벗고 화장실에서 준비한 넥타이를 꺼내서 매었다.

 

곧 화장실에서는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선글라스를 끼었으며, 베이징의 황사를 막기 위해 마스크까지 낀 "외국신사"가 나타났다.

 

그날 커다란 외국인대기실에는 그 혼자만 앉아 있었다. 가짜 외국인인 그 만이. 비행기가 이륙하기 10분전까지도 그 신입 변방경찰은 여권을 그에게 돌려주지 않았다. 그는 멘붕이 왔다. 혹시 뭔가 잘못된 것인가? 

 

그는 심지어 이런 준비까지 했다. 만일 군경이 포위해서 오면 그는 일부러 출구로 도망치겠다고. 그러면 군경은 그 자리에서 그에게 총을 발사할 것이고, 최소한 바로 죽을 수는 있으니까. 힘든 고문을 받지 않고서...

 

마침내 변방경찰이 를 찾았다. 그런데 온 사람은 그 신입 변방경찰이 아니고, 그가 자주 어깨를 치면서 농담을 주고받던 노류였다. 노류가 곧바로 걸어왔고, 그는 완전히 넋이 나갔다. 그저 노류가 여권의 사진을 살펴보는 것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그는 마음 속으로 끝났다고 여기면서 '사형'을 기다렸다.

 

그런데 노류가 영어로 그에게 묻는다. '이것이 당신의 여권입니까?' 그는 그제서야 안정을 되찾았다. 원래 노류는 그를 못알아본 것이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를 최대한 억누르면서 영어로 노류에게 대답한다. 다시 한번 행운은 그의 편이었다.

 

그에게는 주인공에게 주어지는 것처럼 행운의 여신이 그를 돌봐주어 여러 난관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제 그에게는 마지막 관문만 남았다. 출국게이트.

 

출국게이트만 통과하면 그 밖은 이제 자유의 천지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이전처럼 운이 따라줄 것인가?

 

3개의 출국게이트 옆에는 모두 2명의 여직원이 지키고 있었다. 이들 여직원들은 모두 낯이 익었다. 매번 외국손님들을 배웅할 때마다 그녀들과 농담을 주고받곤 했다. 그녀들 중에 누구 하나만 그를 알아보고 '소관!'이라고 부르면 끝장이었다. 

 

비행기는 곧 떠날 터이지만, 그는 감히 다가가지 못했다. 제자리에서 망설이고 있을 때 그는 뜨거운 솥 안에 갇힌 개미같았다. 그런데 돌연 방송이 나왔다: "수장(首長)이 도착했습니다. 모든 직원은 즉시 2호문에서 환영해주십시오!" 

 

여직원들이 금방 몰려갔고, 출국게이트에는 아무도 지키고 있지 않았다. 그는 신속히 이 하늘이 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출국게이트를 통과했다. 그는 소형여객기까지 숨차게 달려갔다.

 

그후 비행기가 이륙했다. 이륙할 때 하늘은 이미 어두웠다. 그러나 그에게는 눈앞이 광명처럼 여겨졌다.

 

그는 만천과해(瞞天過海), 절처봉생(絶處逢生)했다. 불가능한 도박이 백퍼센트 성공을 거둔 것이다. 그는 격동했고, 평정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소리높여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머리 속으로는 계속 한 마디를 반복했다: "나는 자유다! 나는 자유다!...."

 

3

 

매번 그는 이 경심동백의 도주극을 떠올릴 때마다 그는 그것이 순수한 기적, 절대적인 기적이라고 믿는다. 그는 심지어 변방경찰 노류가 고의로 그를 보내준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까지 했다.

 

20여년후, 그는 노류와 공항에서 다시 만난다. 아주 진지하게 노류에게 물어보았는데, 노류는 알아보지 못했다고 부인했다. 그의 운은 과연 엄청나게 좋았던 것이다.

 

이번 망명을 계획할 때, 여권에는 프랑스와 이집트 비자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여러 해동안의 외사경험에 비추어 이집트를 선택한다. 프랑스는 당시에 이미 중국과 수교했고, 착륙하자마자 송환시킬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집트는 당시 아직 중국과 수교하지 않은 상태였다.

 

국경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만든 것이다. 인류의 자유를 위하여 만든 것이고, 인류의 자유를 위하여 죽는다.

 

비행기에서 놀라운 경험을 한 그는 자신의 가족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도망치면 가족들에게 엄청난 재난이 닥칠 것이라는 것을. 창로한 모친, 나이어린 아들, 그리고 고생을 겪고 있는 부친, 그들을 생각하면 그는 마음이 찢어지는 것같았다. 그래서 돌연 통곡하기 시작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마음씨 좋은 승객은 그가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고 오히려 그를 위로해 주었다. 심리적인 방어선이 완전히 무너진 후 그는 솔직하게 자신은 중국에서 도망쳐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마음씨좋은 승객은 그가 몸에 지닌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자 그를 도와주기로 결정한다.

 

도착후, 그들은 그를 소련대사관으로 데려가서 한 소련작가에게 부탁한다. 

 

소련작가는 그의 처지를 들은 후, 동정을 표시했고, 그에게 이집트에서의 임시거처를 마련해 준다.

 

안정을 찾은 그는 이집트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준비를 한다. 그러나 그가 생각했던 것처럼 진행되지는 않았다.

 

다음 날 이집트경찰이 그를 찾아온다.

 

원래 소련대사관이 그의 행적을 알려준 것이고, 중국의 주이집트대사관의 홍위병은 이미 사방으로 그가 몸을 숨긴 곳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이집트경찰은 이를 알고, 앞서서 그를 데리고 간 것이다. 비록 그는 귀환당해서 심문을 당하는 재난을 피했지만, 이집트정부는 그로 인하여 양국관계가 경색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그를 안전하면서도 사람들이 잘 모르는 곳으로 보내기로 결정한다.

 

그 안전한 곳은 바로 이집트 최대의 감옥이었다.

 

그가 언제 출옥할지 모르고 있을 때, 1년후에 돌연 전기가 마련된다. 이집트당국은 그에게 통지한다. 중국이 정식으로 그의 송환요청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이집트당국은 그를 제3국으로 보내려 했다. 그리고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최선의 선택지는 미국일 겁니다!"

 

그는 한 마디로 거절했다: "안됩니다! 나는 미국에 가지 않을 겁니다. 미국은 제국주의입니다! 미국은 한반도에 파병했고, 베트남에서 싸웠고, 중국에 경제봉쇄를 진행했습니다." 

 

이집트당국은 그에게 소련으로 갈 것을 권했지만, 그는 정중히 거절한다: "저는 소련으로 가지 않습니다." 그는 아직도 중소분쟁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라를 떠났지만, 그는 나라를 걱정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자신이 비록 '반도'의 죄명을 뒤집어 썼지만 뼛속까지 애국자라고 생각했고, 중국을 배반하는 여하한 일도 하지 않겠다고 생각한다. 외국에 망명했지만, 그가 배반한 것은 암흑세력이지 민족대의는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4

 

당시 많은 중국의 지식인들은 문화대혁명으로 겁난을 당했다 혹은 자살하고 혹은 박해를 받아죽었다. 오직 그와 음악가 마사총(馬思聰)만이 출국에 성공할 수 있었다. 원래 같은 고난을 겪은 사람들끼리는 서로를 아껴주어야 하는데, 그는 미국으로 간 마사총을 멸시했다. 마사총은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기자회견을 열고 사방에 자신이 중국을 벗어났음을 알렸다. 마사총의 행위는 그가 역겹게 여기는 것이었다.

 

그는 정치적으로 중립이며, 중국과 적대하지 않는 국가를 선택했다. 그래서 그는 스위스, 스웨덴등 대사관의 관리를 만난다. 그러나 듣는 소식은 실망에 실망이었다. "도와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도와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도와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는 말들 뿐이었다.

 

5개월여를 기다렸지만, 그가 마음 속으로 이상적이라고 생각한 나라들은 모두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국적도 없고, 자유도 없고, 아무도 신경써주지 않는다. 희망은 무너졌다. 이때의 절망감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는 심지어 다시 중국으로 돌아갈 생각까지 한다. 설사 돌아간 후에 그를 기다리는 것이 총살형이라고 하더라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을 때, 이 하늘의 총아에게는 다시 행운이 다가온다.

 

독일이 그에게 잠시체류하는 것을 허용하겠다는 것이다. 여러번의 곡절을 겪은 끝에 마침내 자신이 몸을 의탁한 나라를 구한 것이다.

 

독일에 도착한 후, 가장 먼저 직면한 것은 먹고 잠자는 문제였다. 독일어를 모르기 때문에 그의 문학적인 장점은 발휘될 수 없었다. 이미 불혹의 나이에 이른 그는 부득이 부두로 가서 철근을 옮기고, 아시아식당에 가서 식사를 해결해야 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그는 자주 모친이 선물한 바이올린을 가지고 자신이 편곡한 <이천영월(二泉映月)>을 연주하곤 했다. 비감한 선율은 신산고초를 다 말해주었다. 고향은 그에게 만질 수 없는 달과 같았다.

 

깊이 생각한 후에 인생은 다시 시작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여기고, 독일어를 처음부터 배우기 시작한다. 현지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하기로 한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반드시 학력증명이 있어야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황급히 도망치느라고 아무런 학력증빙을 가져오지 못했다. 전공학문도 러시아어이고, 영어도 어느 정도 했다. 그렇지만 행운의 여신은 다시 한번 그를 돌봐준다. 누군가 그에게 함부르크대학 중국언어문학과의 중국계 교수인 류마오차이(劉茂才)를 찾아가보라고 한 것이다. 그는 류교수에게 자신의 경력을 얘기했고, 류교수는 즉시 그에게 증명서를 만들어준다. 이렇게 하여 천리마를 알아보는 백락을 만나 그는 함부르크대학에서 언어학을 공부할 수 있게 된다.

 

그뿐 아니라 류교수는 그에게 일자리도 제공해준다. 중국언어문학과의 교원직위였다. 독일대학 2학년생에게 중국어를 가르치는 것인데, 급여가 높지는 않았지만, 그가 2년내에 석사학위를 받는다면, 정식 강사의 자리도 신청할 수 있었다.

 

그는 열심히 고우하고 자신이 러시아어를 배우던 경험까지 합쳐서 학생들이 즐겨듣는 방식으로 가르친다. 그는 간단한 중문을 동화와 민간고사로 고쳐서 가르치고, 중국민가를 부르도록 가르쳤다. 이런 활발한 수단은 아주 좋은 효과를 불러왔고, 독일학생들은 이 중국교사를 좋아하게 된다.

 

2년후 그는 석사학위를 취득한다. 그러나 학교는 그에게 정식강사신청을 못하게 했다.

 

학생들이 그를 위하여 자발적으로 스트라이크가지 일으켜 온 시를 놀라게 만든다. 결국 교육국은 여론의 압력에 굴복하여 강사편제를 특별히 허가한다. 그리고 공개모집과 선발절차를 거치지 않고 직접 그를 채용한다.

 

5

 

운명은 누구에게도 잘 대해 준다. 노력하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면. 독일에서 그는 사업에서 성취를 거두는 동시에 애정도 얻는다.

 

해패춘(海珮春)은 순수한 독일아가씨이다. 그녀는 TV에서 중국사람을 보았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때 중국인은 항상 남색옷을 입었고, 촌스럽고 보수적이라는 것이 당시 중국인들에 대한 평가였다. 현지의 무도회에서 그녀를 만났는데, 그녀는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같았다. 

 

그는 검은색 바지와 흰색상의를 입었고, 중년이 되었지만 머리카락은 새카맣다. 그리고 춤도 그녀보다 잘 추었다. 그는 바이올린도 연주할 수 있었고, 피아노도 칠 수 있었으며, 서방문학을 아주 많이 알았다. 아직 스무살도 되지 않은 해패춘은 마음 속으로 그에 대한 연모의 정이 일어났다. 이 출중한 중국인에게 강력한 호감이 든 것이다.

 

그녀는 고집있는 아가씨였다. 첫눈에 관우겸을 찍은 후 적극적으로 그를 자신의 집에서 열리는 크리스마스만찬에 초대한다. 그리고 그를 온가족에게 소개했다. 이를 통해 연인관계를 확정시킨다. 중국인에게 시집간다는 것은 당시 독일에서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물며 관우겸은 아직 무국적자였고, 앞날이 불투명했다. 내일이라도 독일에서 추방당할 수 있었다(당시 독일정부가 그에게 준 것은 임시거주자격이었다).

 

비록 모든 사람들이 그를 좋게 보지 않았지만, 이 독일아가씨는 고집불통이었다.

 

1977년 그는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그가 북경에 있을 때의 이웃사람이 독일에 출장왔다가 그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의 처는 이미 일방적으로 그와 이혼절차를 끝냈다고 전해준다.

 

해패춘은 그가 이미 혼인에 제약이 없음을 알고 서둘러 그와 혼인관계를 확정시킨다. 그러나 그는 독일에서 무국적인사이기 때문에 혼인절차를 진행할 수 없었다.

 

마 후, 그는 해패춘과 홍콩여행을 간다. 홍콩의 길거리에 혼인등록처가 있는 것을 보고, 두 사람은 운에 맡기자는 심정으로 들어갔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혼인등기절차를 마칠 수 있었다.

 

필요한 자료도 독일에서처럼 엄격하지 않았다. 이들의 혼인은 이렇게 홍콩에서 결과를 얻게 된 것이다.

 

비록 나이차이가 나는 결혼이지만, 40년동안 서로 알아가면서 두 사람간의 사랑은 깊어갔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처의 성격은 그녀의 시원시원함이었다. 그는 사람들 만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의 학생들 중에서 그의 집에 들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개혁개방후에는 더더구나 중국에서 독일로 오는 고향사람들도 많았다. 이들에게 식사, 과일, 커피, 간식을 대접하고 집에서 머물게 하는 일도 잦았다. 이에 대하여 독일부인은 아무런 원망도 없었고, 그들은 금전문제로 서로 얼굴을 붉힌 적도 없었다.

 

그의 처는 진지하게 중국어를 공부했고, 함부르크대학의 중문학과에 입학한다. 중국어로 듣기, 말하기, 쓰기에 모두 문제가 없었다. 심지어 중의침구분야도 그녀는 잘 알았다.

 

중국남편에 대한 사랑은 중국문화에 대한 호감으로 발전한다. 그들이 공동으로 독일어로 책을 썼다. <중국민간고사집>과 <중국문화가이드> 지금까지 부부가 합작으로 써서 중국을 소개하는 저작은 이미 십여권에 이른다.

 

1981년 그는 유럽의 중국계학자들과 함께 유럽화인학회를 조직하고 여러번 학술세미나를 개최한다.

 

그리고 중국계예술가들을 위하여 여러번 음악회, 예술전을 열고, 대형중국문화제등의 활동도 벌인다. 80년대중반 그는 <구화학보>와 <덕중논단>등 잡지의 편집도 맡았다.

 

그는 외국어로 글을 쓰기 시작했고, 독자는 전세계에 분포되어 있다. 1994년 그는 15년의 시간을 들여 독일어판 <노신전집>을 발간하여, 중국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도망친지 10년만에 그는 마침내 정보에서 국내와 서로 소통할 수 있게 된다. 차례차례 국내가족들의 서신을 받을 수 있었다. 이때 그가 가장 사랑하는 모친이 돌아가신다. 그는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했고, 그것은 영원한 유감과 가슴을 찌르는 고통으로 남는다.

 

당시 그의 가족들은 그가 도망침으로 인해 감옥에 갇혀야 했었다.

 

그가 가장 미안해 하는 것은 아들 관신(關新)이다. 아들은 부친의 관심도 받지 못했다. 그는 그런 못다한 사랑을 보완하기 위해 그는 해패춘과 함께 자금을 지원해서 아들의 출국유학을 돕는다. 다시 아들을 만났을 때, 그가 힘들게 성장한 경력을 들으면서 그는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다. 자신은 눈물을 흘릴 자격조차 없는 것이다. 아들이 어린 나이에 여기저기를 떠돌게 만들었으니...그는 아들을 꼭 끌어안고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와 해패춘의 사이에는 자식이 없다.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해패춘과 관신이 모자처럼 사이가 좋다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1981년이 되었고, 이 애국적인 '반도'는 마침내 다시 귀국할 수 있도록 허락받는다. 13년만에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조국으로 돌아갔고, 항주대학과 절강대학에서 겸직교수가 된다.

 

지금 그와 독일부친은 봄가을에는 중국여행을 하면서 강의를 하고, 겨울과 여름에는 독일에서 지낸다.

 

옛날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어떤 것은 잊어버렸지만, 그래도 어떤 것은 시종일관 지켰다.

 

그는 자신의 전기 <랑(浪)>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나는 천당의 가장 아름다운 곳에서 너를 찾겠다. 그후 영원히 너의 곁에 머물겠다. 영원히 떠나지 않겠다."

 

왜 그는 항상 위기를 만나면 해결되곤 했을까? 그 자신도 잘 모르겠다고 한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무슨 일이 생기든 그는 항상 마음을 써가면서 생활했다는 것이다.

 

그의 내심 깊은 곳에는 마찬가지로 모든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희망이다.

 

누가 알 것인가. 우리의 꿈이 어디로 향하는지, 누가 알 것인가 존엄이라는 것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저 이유를 찾아서 시류의 흐름에 따라갈 것인지, 아니면 핑계를 찾아 계속 구차하게 살 것인지, 날개를 펴고 높이 날아서 분노를 유지할 것인지, 혹은 용감하게 새장에서 벗어나도록 발버둥칠 것인지.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 그의 범상치않은 도망경력, 복잡다단한 은원과 애정, 그 강력한 스스로를 구하겠다는 신념은 그로 하여근 한 마리의 새장을 뚫고 나가 분노의 비상을 하는 새가 되게 하였고, 전설적으로 스스로에 대한 구원을 이루어냈다. 그는 우리에게 말해준다. 생명은 어떻게 존재해야하는지를.

 

어떤 새는 새장 안에 갇혀있을 운명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깃털에는 자유의 광휘가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