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계설필담(溪說筆談)
여포가 조조에게 죽임을 당한 후, 적토마는 조조에 의해 관우에게 하사된다. 그렇다면, 그의 병기인 방천화극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 이런 무기는 사용하는 사람이 원래 많지 않다. 방천화극을 주병기로 사용할 수 있는 무장은 더욱 적다. 대장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손에 익은 무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무명소졸은 여포의 병기를 쓸만한 자격이 없다. 그래서 조조가 누구에게 하사하고 싶어도 줄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방천화극은 여포의 상징이 되었고, 아마도 전리품으로 조조가 소장했을 것이다.
기실 이 문제는 소설의 후반부에 언급되어 있다. 조비(曹丕)가 칭제하기 전에, 그의 동생인 황수아(黃鬚兒) 조창(曹彰)이 불복하여 병력을 이끌고 온다. 이때 사마(司馬) 왕랑(王郞)이 한헌제를 찾아가서 그에게 빨리 황위를 선양하도록 건의한다. 이때 그는 한헌제를 이렇게 협박한다: 만일 조창이 쳐들어오면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조비만이 목숨을 구해줄 수 있다.
한헌제는 조비는 자신의 황후인 조절(曹節)과 친오누이간인 것을 고려하여, 왕랑의 의견에 따른다. 조비가 황제로 즉위한 후, 조창의 대군은 전진을 멈춘다. 그가 더 이상 전진한다면 그것은 조비에 불충하는 것이고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조창은 바보가 아니다. 자신이 실력이 아직은 조비를 이길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 자리에서 병력을 되돌리면서, 자신의 충성심을 표시하기 위해 자신이 쓰는 무기인 방천화극을 조비에게 보낸다. 이렇게 그에게 굴복하였다는 것을 표시한 것이다.
이 방천화극이 바로 여포의 그 방천화극일 것이다.
삼국시대에 극(戟)을 쓰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전위(典韋)가 단극(短戟)을 썼다. 그외에는 태사자(太史慈)가 소극(小戟)을 보조병기로 썼다. 장극(長戟)을 쓰는 사람은 오직 조조의 셋째아들, 사람들이 황수아라고 부르는 조창이다. 그래서 여포가 피살된 후, 조조는 방천화극을 조창에게 주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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