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취담역사(趣談歷史)
여포의 일생은 기복이 심하다. 원래 병주자사(幷州刺史) 정원(丁原) 휘하의 주부(主簿)였다. 그런데 정원을 죽인 후 동탁(董卓)의 부하가 되고, 다시 동탁을 죽인다. 이각(李傕), 곽사(郭汜)에 의해 장안에서 쫓겨난 후, 연주(䆓州)를 기습하여 조조의 본거지를 거의 박살낸다. 다시 조조에 쫓겨난 후 유비가 그를 거둔다. 그 결과 유비는 양호위환(養虎爲患)하게 된다. 유비가 원술(袁術)을 토벌하러 나섰을 때, 여포가 서주를 기습한다. 그리하여 여포는 서주의 주인이 된다.
여포가 이렇게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의 무공이 고강한 점도 있지만 그의 부하들 중에서 잘 싸우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용맹한 사대호장(四大虎將)을 꼽자면, 모두 잘 알고 있는 고순(高順), 장료(張遼)는 포함시켜야 하지만 다른 두 사람도 있다.
고순(高順)
복양(濮陽)전투에서 고순과 그의 함진영(陷陳營)은 이 일전으로 명성을 얻는다. 고순의 인생궤적을 보면, 그는 여포, 장료와 마찬가지로 병주군 출신이다. 그리고 여포의 직접 부하이다. 고순은 능력이 출중했고, 삼국시대 가장 강력한 중무장보병인 함진영을 그가 훈련시키고 지휘했다.
함진영의 가장 휘황한 전적은 관우, 장비가 이끄는 유비군대를 격파한 것이다. 이 단양병(丹陽兵)을 위주로 한 군대의 전투력도 결코 얕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함진영은 직접 맞부딛쳐 우세를 점한다. 둘째는 하후돈(夏侯惇)이 지휘하는 조조의 대군을 무찌른 것이다. 하후돈은 이 전투에서 눈 하나를 실명한다. 아쉽게도 고순은 용맹하고 여포에 충성심이 강했지만, 여포가 패전한 후, 고순은 투항하기를 거부하여 피살되고 만다.
장료(張遼)
장료와 여포의 관계은 약간 극적이다. 원래 그들은 동료관계로 같이 정원의 부하였다. 나중에 여포가 정원과 동탁을 죽이면서 일약 여포가 장료의 상사가 된다. 그러나 이런 관계로 인하여, 장료는 여포의 군대내에서 어느 정도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삼국지. 장료전>에는 이렇게 기록한다: "한나라말기, 병주자사 정원은 장료의 무력이 남들보다 뛰어난 것을 보고, 그를 불러 휘하에서 일하게 했다." 장료는 정원이 불러서 쓸 정도로 무력이 뛰어났던 것이다.
여포가 연주를 휩쓸고, 관우, 장비를 궤멸시키고 하후돈을 격파하는 여러 대전에서 공로를 가장 많이 세운 두 사람이 있다면, 한 사람은 고순이고, 다른 한 사람은 바로 장료이다. 그러나 여포가 패전한 후, 두 사람의 선택은 전혀 달랐다. 고순은 투항하지 않아서 피살되고, 장료는 투항한 후 능력을 인정받아 발탁되어 조조의 대장중 외성제일인이 된다.
성렴(成廉)과 위월(魏越)
비록 여포팔건장(呂布八健將)이라는 말이 있고, 거기에 장료, 장패(臧覇), 학맹(郝萌), 조성(曹性), 성령, 위속(魏續), 송헌(宋憲), 후성(侯成)의 여덟명을 꼽지만, 각각을 따져보면 조금 다른 점이 있다.
능력이 가장 강하고, 성취가 가장 뛰어난 사람은 장료와 장패이다. 그러나, 장패는 개양(開陽)일대에 주둔하고 있어 한 지방의 제후와 다름없다. 여포와의 관계는 상하관계라기보다 합작관계이다. 위속, 송헌, 후성 3사람은 병주군출신으로 여포의 적계라 할 수 있지만, 여포를 배반한 것도 이 세 사람이다. 학맹은 하내(河內) 사람으로 여포가 하내태수(河內太守) 장양(張楊)에 얹혀있을 때 거두었을 것이다. 조성은 서주 현지사람이다. 팔건장의 각자는 내력도 다르고, 계파도 서로 다르다.
용맹함을 따지자면, 장료, 고순 이외에 팔건장 중에서 별로 두드러지지 않는 성렴도 꼽아야 한다. 그외에 한 사람이 있는데, 비록 팔건장에 이름이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용맹함에 있어서는 성렴과 필적한다. 그는 바로 위월이다. (사료가 부족한데, 아마도 위속과 일정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왜 성렴과 위월 두 사람이 용맹하다고 말하는가? <후한서.여포전>에 이런 기록이 있다: "원소와 여포가 장연을 상산에서 공격했다. 연나라의 정예병사가 만여명이고, 말이 수천필니다. 여포는 좋은 말을 타고 다니는데, 이름이 적토이다. 성을 뛰어넘고 계곡을 뛰어넘었다. 그의 건장 성령, 위월등 수십기가 연나라 군진으로 돌진했고, 하루에 서너번, 모두 적의 머리를 베고 나왔다. 십여일간 연이어 싸워서 연군을 결국 격파했다." <삼국지.여포전>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연나라의 정예병사 만여명, 기병 수천이 있었다. 항상 그의 심복인 성렴, 위월등과 적의 선봉을 뚫고 돌진했고, 결국 연나라군대를 격파한다."
이를 보면, 성렴과 위월은 아마도 여포의 근위(近衛)일 것이다. 여포가 적진으로 돌진할 때, 곁에 있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아마도 병력을 이끄는 지휘관일 것이다. 성렴은 여포가 패배한 후 조조에 포로로 잡힌다. <삼국지>의 기록에 따르면, "크게 격파하고, 그 맹장 성렴을 붙잡았다." 여포의 심복으로 그도 고순과 함께 피살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위월은 행적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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