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의사리(衣賜履)
건흥3년(225년)의 봄날, 제갈량은 병력을 세 갈래로 나누어 남하한다: 문하독(門下督), 파서군(巴西郡, 사천성 낭중시)사람인 마충(馬忠)이 장가군(牂牁郡, 귀주성 복천현)을 공격하고, 내항도독(庲降都督) 이회(李恢, 이때의 이회는 평이현에 주둔하고 있었고, 평이현은 장가군 소속이며 귀주성의 필절시이다)은 익주군을 공격하고, 제갈량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수로를 통해 월전군(越嶲郡, 사천성 서창시)으로 들어갔다. 동시에 건위군태수이자 광한 사람인 왕사(王士)를 익주군태수로 임명한다.
오랑캐왕 고정(高定)은 모우현(旄牛縣, 사천성 한원현 동북), 정작현(定筰縣, 사천성 염원현), 비수현(卑水縣, 사천성 소각현)의 일선을 따라서 내려오며 많은 보루에 주둔시켰다. 제갈량은 고정의 인마가 모두 집결하기를 기다려, 한꺼번에 승리를 거두고자 했고, 그리하여 군대를 비수에 주둔시킨다.
얼마 후, 제갈량은 고정의 부대를 궤멸시키고, 고정을 참한다; 마충도 장가의 반군을 크게 격파한다.
다만 이회는 전투가 순조롭지 못했다.
이회는 익주군 사람이다(익주군은 나중에 건녕군으로 개명한다). 일찌기 군내에서 독우(督郵)를 지낸다. 그의 고모부는 찬습(爨習)으로 건령군(建伶郡, 운남성 진녕현)의 현령이었다. 그런데 범죄를 저질러 이회도 연좌로 관직에서 면직된다. 당시의 태수는 동화(董和, 촉한사상(蜀漢四相)중 하나인 동윤의 부친)는 찬씨집안이 현지의 명문거족인 점을 감안하여 그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나중에 동화는 이회를 추천하여 주에서 일하게 한다. 그런데 부임하러 가는 도중에 유비가 유장을 친다는 말을 듣는다. 이회는 마음 속으로 생각하기를 유장은 유비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고 여겨, 유장을 따라서 싸우다가 패배한 후에 다시 투항하는 것보다는 지금 직접 투항하는 것이 낫겠다고 여긴다. 유비는 이회를 보고 마음 속으로 크게 기뻐한다. 그리고 즉시 중임을 맡긴다. 그로 하여금 마초(馬超)를 귀순하도록 설득하게 보낸 것이다. 과연, 마초가 귀순해 온다. 그후 십여일만에 유비는 성도를 함락시키고 유비 스스로 익주목이 된다. 그리고 이회는 공조서좌주부로 임명했다가 다시 별가종사(이 직급은 낮지 않다. 옛날 전풍이 바로 원소의 별가종사였다)로 승진시킨다. 유비가 황제를 칭한 후, 당초 내항도독이던 등방(鄧方)이 사망했고, 유비는 이회에게 물어본다. 누구를 내항도독에 앉히면 좋겠는가?
이회가 대답한다: 사람의 재능에는 각각 장단점이 있습니다. 현명한 군주께서 계시니 신하로서 아는 것은 모두 아뢰어야 합니다. 옛날에 조정이 선령강(先零羌)을 토벌할 때, 선제께서 조충국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누가 출정하면 좋겠는가. 그때 조충국이 대답합니다. 노신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저는 스스로의 역량을 고려하지 않고, 폐하께서 결정해주시기 바랍니다.
유비는 크게 웃으면서, 짐의 본뜻은 원래 경이었다.
그리하여, 이회는 내항도독, 지절영교주자사(持節領交州刺史)가 되고, 평이현에 머문다.
(유비가 촉으로 들어온 후, 익주 남부에 내항도독을 설치한다. 이는 촉한정부가 남중지구에 설치한 가장 직급이 높은 군정기관이다. 그 최고장관을 내항도독이라 한다. 이회는 영교주자사인데, 이는 유비에게 교주(지금의 베트남일대)를 노리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회는 익주군으로 진격한다. 몇 개현의 반란군이 연합하여, 곤명(장가에 속하며 아마도 오늘날 귀주성 안순시 일대인 것으로 보인다)에서 이회의 군대를 겹겹이 포위한다. 이회는 병력도 적고, 제갈량과의 연락도 끊겨서 반란군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식량을 다 먹어치웠고, 이제 철군할 생각이다. 나는 고향을 떠난지 오래되었는데, 이제서야 비로소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어쨌든 내가 북방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으니, 아예 여러분들과 큰 일을 하고자 한다. 어쨌은 우리는 모두 같은 고향사람들 아닌가. 그래서 내가 여러분들에게 마음 속에 있는 말을 하는 것이다.
반군은 이회의 태도가 성의있는 것을 보고, 확실히 그는 같은 고향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서, 공격이 그다지 날카롭지 못했다. 이회는 그 틈을 타서, 대군을 출동시켜, 반군을 격파하고 남으로 반강(槃江) 동으로 장가에 이르는 영역을 모두 차지하고, 제갈량의 기세와 서로 호응한다.
제갈량이 오랑캐왕 고정을 참살하기 전에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고정의 부하가 익주군에서 먼저 반란을 일으킨 옹개를 죽여버린다. 그리하여 맹획은 옹개의 뒤를 이어 우두머리의 자리에 오른다.
(이 부분은 사서의 기록이 분명하지 않다. 필자의 생각에, 아마도 맹획이 옹개의 밑에서 일하는 것보다 자신이 두목이 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여 고정과 함께 옹개를 유인살해한 것같다)
오월, 제갈량은 노수(瀘水)를 건너, 익주군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특별히 명령을 내려 맹획은 반드시 생포하라고 한다. 그 결과 맹획은 상대가 되지 않아 한번 싸우자마자 생포되어 버린다. 제갈량은 맹획을 불러서, 잘 먹이고 잘 마시도록 해주면서 잘 대접한다. 그리고 군영을 구경시켜준다. 그 후에 묻는다. "맹획. 우리 대군을 보니 무슨 생각이 드는가?"
맹획은 이렇게 대답한다. 제갈승상. 솔직히 말하면 당신의 군대는 그저 이 정도이다. 나는 당신들의 상황을 잘 몰랐기 때문에 부주의해서 붙잡힌 것이다.
제갈량은 그가 불복하는 것을 보고, 풀어준다. 그리고 그에게 다시 군대를 정비하도록 해서 계속 싸운다. 우리는 맹획이 어떤 인물들을 끌어모아 제갈량과 싸웠는지는 모른다. 어쨌든 가을(칠월에서 구월)이 되어, 맹확은 모두 7번 생포당한다. 제갈량은 맹획을 보고 말한다. "맹획. 또 잡혀왔는가. 먼저 식사나 하자. 식사를 마치면 다시 돌아가라. 그리고 다시 싸우자." 맹획은 더 이상 싸우기는 미안하여, 이렇게 말한다. "명공, 당신은 하늘이 내린 분입니다. 이후 우리 변방의 인민들은 더 이상 반란을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우리의 인상 속에 맹획은 마땅히 머리에 새깃털을 꽂고, 머리카락은 풀어체쳤으며 몸에 문신이 있는 것으로 여긴다. 심지어 검은 얼굴에 이빨이 사나운 오랑캐의 두목으로 생각한다. 그렇지 않은가?
그럼 정말 그러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맹획은 이민족이 아니라 한족의 명문집안 출신이다)
그렇다면 증거를 한번 나열해보자.
첫째, 사서에 기록이 없다. 모든 맹획에 관한 사료를 보면, 하나도 맹획이 소수민족인물이라고 적은 것이 없다. 진수의 <삼국지>에는 아예 맹획이라는 인물이 나오지 않는다. 맹획의 사적은 <화양국지>와 <한진춘추>에 나올 뿐이다.
<화양국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옹개는 건녕사람 맹획을 사신으로 보냈다" 여기서 맹획은 건녕사람이라고 적었을 뿐, 맹획에 어느 민족인지는 적지 않았다.
<삼국지.제갈량전>의 배송지의 주석에는 <한진춘추>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고 했다: "듣기로 맹획이라는 사람은 한족 이족이 모두 복속하여 따른다고 한다" 단지 현지에서 소수민족과 한족이 모두 그를 따른다고만 하였다. 양한이래 소수민족과 한족이 모두 존경하는 인물이라면 모조리 한족이다. 혹은 마등, 마초부자와 같이 한인과 소수민족의 혼혈인이다. 잠깐만 생각해보면 분명하다. 한족 사대부들이 어찌 머리에 깃털을 꽂고 문신을 한 오랑캐두목에게 복속하여 따를 수 있단 말인가. 사대부들이 불복했다면 어찌 '한족 이족이 모두 복속하여 따랐다'고 적었겠는가. 그래서 나는 정말 모르겠다 도대체 누가 맹획을 소수민족의 인물이라고 하였는지.
둘째, 맹은 현지의 대성이다. <화양국지>에 따르면, 남중지구에는 8대성이 있다. 각각 초(焦), 옹(雍), 루(婁), 찬(爨), 맹(孟), 량(量), 모(毛), 이(李)이다. 옹개는 당연히 옹씨집안이고, 위에 언급한 찬습은 당연히 찬씨집안이다. 맹획은 필자의 생각에 맹씨집안의 사람이다.
셋째, 반란군의 두목은 절대다수가 한족이었다. 우리는 반란을 일으킨 두목들을 한번 살펴보자. 맹획을 제외하고, 옹개, 주포, 고정중에서 고정만이 확실한 소수민족이고, 나머지는 모두 한족사대부이다. 익주군에서 반란에 참여한 이족부락은 모두 맹획의 설득에 넘어간다. 즉, 사료로 분석판단하자면, 남중지구에서 반란을 일으킨 조직구성은 한족사대부를 위주로 하고, 이족부락이 보조이다. 이 점은 아주 중요하다. 제갈량의 남중지구에 대한 통치정책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넷째, 사료의 문구로 판단하자면, <화양국지.남중지>에 이런 기록이 있다. "익주의 오랑캐들이 더 이상 옹개를 따르지 않았다. 옹개는 맹획을 사신으로 보내어 오랑캐두목에게 말한다: "관청에서 오구 삼백두를 원하는데, 가슴앞이 모두 검은색이어야 한다. 만뇌 삼두, 작목은 3장짜리로 3천개를 원하는데 너희가 구할 수 있는가? 오랑캐들은 그의 말이 맞다고 여겨 다시 옹개를 따른다. 그렇게 맹획이 오랑캐들을 속였다" 이를 보면 확실히 '맹획이 오랑캐를 속였다"라는 문구를 보면 맹확이 이족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마땅히 '맹획은 동족들을 속였다"고 하든지, "오랑캐인 맹획이 오랑캐들을 속였다"라고 하였을 것이다.
다섯째, 맹확은 조정에 들어가 관직을 맡는다. <화양국지>에는 남중을 평정한 후, 제갈량은 지방의 큰 집안들을 기용하여 관직을 내린다. 거기에는 건녕사람 찬습, 주제사람 맹염, 그리고 우리의 주인공 맹획이 포함되어 있다. 찬습은 나중에 영군이 되고, 맹염은 나중에 보한장군이 되며, 맹확은 나중에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된다.
어사중승이다.
어사중승은 개나 소나 다 할 수 있는 관직이 아니다. 동한시기, 어사중승은 아주 중요한 관직이다. 감찰기관의 우두머리이다. 상서령, 사례교위와 함께 "삼독좌(三獨坐)"로 불리는 중요관직이다. 직위도 높고 권한도 크다. 반드시 황제의 심복이 맡았다. 이 자리는 학문이 깊지 않거나, 유학경전을 읽지 않았거나, 관료사회에서 구르지 않았다면 아예 앉을 수가 없다. 맹확이 정말 오랑캐의 우두머리라면, 한자조차 알기 어려울텐데, 어찌 한인들의 예법제도에 대하여 깊이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한족의 관료사회에서 기본적으로 어린아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백보 양보하여 말하더라도, 만일 맹획이 정말 소수민족의 우두머리라면, 제갈량이 그를 조정에 불러 관직을 내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인질로 잡아놓는 것이라면 말이 된다. 다만 그런 경우라면 잡호장군같은 직을 내리고, 경호원을 붙여서 감시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제갈량은 그를 어사중승에 앉혔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맹확은 절대로 이족의 우두머리가 아니다. 그는 분명한 한족사대부이다. 그리고 학문도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맹확이 오랑캐의 두목이 아니라면, "칠종칠금"의 일이 있었을까? 그것도 의문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맹획을 사로잡는 일이라면 제갈량이 해낼 수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칠종칠금은 말도 되지 않는다.
첫째, <삼국지>에 기록이 없다. 진수는 공인된 양리(良吏)이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이야기를 잘 기술해서 양사(良史, 좋은 사관)의 자질을 갖추고 있다"고 했다. 배송지는 그를 "근시지가사(近世之嘉史, 근세의 좋은 사관)"라 했다; <문심조룡>의 작자인 유협(劉勰)은 이렇게 말한다. 진수와 사마천, 반고는 같은 수준의 사관이라고 말하더라도, 사마천, 반고가 체면상한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필자의 생각에 진수 본인은 제갈량을 아주 존경했다. 그가 진나라에서 관직에 있을 때 <촉상제갈량집>을 편찬하여 조정에 바치기도 했다. 그러므로, 만일 정말 "칠종칠금"의 사적이 있었다면, 진수가 그것을 쓰지 않았을 리가 없다.
둘째, 후세정치상 필요가 있었다. "칠종칠금"의 이야기는 너무 재미있다. 대중들이 좋아할 뿐아니라, 정치가들도 좋아한다. 역대통치자들은 소수민족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로 골머리를 썩였다. 그런데 '칠종칠금'은 바로 민족융합의 좋은 사례이다. 그래서 이를 교재로 삼아 선전하기 좋았다. 그리하여 <삼국지>에 기록이 없었지만, <자치통감>에는 수록하게 된다.
셋째, 시간적으로 맞지 않는다. 제갈량이 오월이 노수를 건넜다. 가을에 맹획은 7번 생포한다. 가을은 칠, 팔, 구의 삼개월이다. 구월로 계산하더라도 합쳐서 5개월 150일이다. 제갈량이 평균 21.4일에 한번씩 맹획을 체포했다는 것이다. 칠월로 계산하면 90일이고, 평균 12.9일에 한번씩 체포했다는 것이다.
넷째, 반대사례가 있다. <제갈량집. 남정표>를 보면 맹획을 치기 전에, 공명은 먼저 오랑캐왕 고정을 격패시킨다. 고정의 처와 자식을 잡은 후 공명은 고정이 스스로 투항해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랑캐들은 생각이 달랐다. 제갈량이 생각지도 못하게, 고정은 사람을 죽여서 제사지내며, 더욱 사람들을 끌어모아서 이천여명에 이르며 제갈량와 죽기살기로 싸우려 한다. 그리하여 제갈량도 직접 고정을 잡은 후 참하고 만다. 고정이야말로 말그대로 소수민족의 우두머리이다. 공명이 어찌 고정에 대하여는 '칠종칠금'하지 않았을까? 오히려 한칼에 죽여버렸을까?
그러므로, 비록 우리는 맹획의 '칠종칠금' 이야기가 처음에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모르지만, 소설가의 본질을 벗어나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 문제에 지나치게 매달릴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결론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제갈량의 남정에서 평정한 것은 남중사대부집단의 반란이다. 소위 "마음을 공략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 뜻은 남중사대부집단의 마음을 얻는 것이다. 오랑캐의 반란에 대하여는 근본적으로 우려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제갈량은 남중의 반란을 평정한 후, 반드시 성과를 공고히하는 일련의 조치를 취한 것이다.
첫째, 현지선비를 관직에 기용한다. 앞에서 우리는 얘기했다. 제갈량은 건녕사람 찬습, 주제사람 맹염, 맹획등을 조정으로 불러 관직을 내린다. 이들은 모두 현지의 명문거족이고, 조정에 들어와서 관직을 얻는 것은 그 가족에게 영광인 동시에, 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는 인질 역할도 한다.
그외에 남중의 월전, 장가, 익주(건녕), 영창, 주제의 오개군을 다시 구획하여 월전, 장가, 건녕, 영창, 주제, 운남, 흥고의 7개군으로 정비한다. 그리고 현지인들을 태수로 발탁한다.
예를 들어, 건녕사람 이회는 반란평정에 공이 있어 한흥정후에 봉해지고, 안한장군의 직도 추가한다. 229년, 교주는 오나라에 속하기 대문에, 이회의 교주자사직은 면직시키고 견녕군태수로 임명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일하게 한다. 그리고 영창사람 여개(呂凱)를 운남군태수로 임명하고 양천정후로 봉한다.
이늠 마치 "남인치남(南人治南)"의 통치방식같다. 남중지구의 안정에 적극적인 작용을 하게 된다.
둘째, 소수민족무장을 와해시킨다. 주로 3가지 방식을 취한다. 하나는 건장한 자들을 옮기는 것이다. 남중의 건장한 병졸 만여가를 촉군으로 이주시켜서 5개의 부대를 구성한다. 전투력이 아주 강해서 무적이었고, 비군(飛軍)이라 불렸다. 둘은 연약한 자들은 통제한다. 전투력은 약하면 사건을 일으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들은 모조리 현지 팔대대성(초,옹,루,찬,맹,량,모,이)에게 나누어주어 부곡(部曲)으로 삼는다. 셋은 용맹한 자들은 매수한다. 적지 않은 오랑캐들은 말을 잘 듣지 않고 흉맹하다. 호족들에게 빌붙어 사는 것을 원치 않는다. 공명은 이들 대성들로 하여금 돈을 내서 이런 자들을 병사로 고용하게 했다. 어느 가족이든 이런 이족을 많이 고용할수록 더 좋은 관직을 내렸다. 사서에 따르면, 이족들은 재물을 탐하여, 점점 한인에 귀속되고, 이,한 혼합부곡이 되었다고 한다. 다만 실제로 이들 대성이 어떻게 이족을 복속시킬 수 있는지는 글로 쓴 것보다 훨씬 참혹하고 훨씬 복잡했다.
셋째, 남중에서 대량의 자원을 획득한다. 제갈량은 남중지구에서 대량의 금은, 단칠, 경우, 전마등을 획득하여, 군대와 국가에 쓴다. <삼국지.유선전>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가을 남중을 평정한다. 군사비가 나오고, 국가가 부유하게 된다. 남중을 한번 치고나서, 더 이상 군사비를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된다. 국가의 지출에도 여유가 생기게 된다.
이를 보면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남중지구의 상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민족대단결의 과정에서 번성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제갈량의 대군이 떠난 후 바로 반란이 일어난다.
<삼국지.이회전>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제갈량이 회군한 후, 남이가 즉시 반란을 일으켜, 수비장수를 죽였다. 이회는 군대를 이끌고 평정한다. 흉악한 자들은 모조리 죽여버리고, 크고 작은 우두머리들은 성도로 이주시킨다. 그리고 소수민족부락에서 경우, 전마, 금은, 서각, 피혁을 징수하여 군사용으로 썼다. 당시 이로 인해 얻은 수익은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공명의 부대인가? 완저닣 조조의 부대이다. 어디를 가든 거기서 물자를 빼앗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마음을 공략하는 것이 상책이다"라는 것인가. 이는 잔혹한 진압이고 무정한 약탈이다.
또 다른 <삼국지.장외전(張巍傳)>에 따르면, 월전군은 제갈량이 고정을 참살한 후, 여러번 반란을 일으킨다. 태수 공록, 초횡을 죽여서, 이후의 태수들이 아무도 부임하지 않으려 했다. 그저 치소를 안상현에 설치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곳은 원래의 치소에서 팔백여리 떨어진 곳이었다.
그리고, <삼국지.마충전>에는 건흥11년(233년) 소수민족의 우두머리 유주(劉胄)가 반란을 일으켜 여러 군을 어지럽혔다. 마충은 내항도독 장익(張翼)을 대신하여 유주를 참하고 반란을 평정한다.
아니, 이건 잘못된 것아닌가? 맹획이 제갈량에게 앞으로 남방에 반란은 없을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맹획의 말이 아직 귓가에 생생한데 어찌 다시 반란을 일으킨단 말인가. 그것도 연속하여. 이건 모순이 아닌가?
기실 모순은 아니다.
"마음을 공략하는 것이 상책이다"는 마속이 제갈량에게 한 건의이다. 우리는 마속이 한 말을 살펴보자.
"남중은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으로 인하여 오랫동안 복속되지 않았습니다. 비록 오늘 격패시키더라도 내일 다시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지금 공께서 온 나라의 힘을 들여 북벌을 통해 강적을 무찌르려 하는데, 그들이 국내가 비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다시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만일 그 자들을 모조리 죽여서 후환을 없애려 한다면 그것은 인자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렇게 서둘러 급하게 할 수도 없습니다. 무릇 용병의 도는 마음을 공략하는 것이 상책이고, 성을 공략하는 것이 하책입니다. 마음으로 싸우는 것이 상책이고, 병력으로 싸우는 것이 하책입니다. 원컨대 공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복속시키십시오."
자세히 살펴보자. 마속이 '오랑캐'를 언급했는가?
아니다.
마속이 말한 마음을 공략하는 대상은 촉한정권에 복속하지 않는 명문거족들이다.
소위 '마음을 공략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은 소수민족의 마음을 공략하라는 것이 아니다. 사대부의 마음을 공략하라는 것이다. 사대부들만 확실히 잡으면 남쪽은 안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소수민족이 반란을 일으키든 말든 그건 근본적으로 문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족들은 수시로 반란을 일으켰지만, 제갈량의 일생동안 남중지구의 사대부들은 확실히 다시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래서 맹획이 허풍을 떤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모순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특별히 사마광을 비판해야겠다.
사료를 함부로 골라서, 헛소리를 지껄였다. 이는 나라와 백성을 오도시키는 짓이다.
자치통감에는 공명이 익주, 영창, 장가, 월전의 4개군을 평정한 후, 현지의 거솔(渠率)을 관리로 채용한다. 어떤 사람이 말렸는데, 공명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외인들을 남겨두려면 반드시 병력을 남겨두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식량이 부족하다 이건 곤란한 점이다. 오랑캐는 지금 막 우리에게 격패당했는데, 어떤 자는 부친이 죽고, 어떤 자는 형제가 죽었다. 만일 외인들을 남겨두면서 병력을 남겨두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생길 것이다. 이것이 두번째 곤란한 점이다. 그리고 오랑캐는 반란을 일으켜 주살당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 자신도 관청이 진압할까봐 우려하고 있다. 만일 외인을 남겨두면서 서로 신뢰하기가 아주 어렵다 이것이 세번째 곤란한 점이다. 지금 내 생각은 병사도 남기지 않고, 식량도 운송하지 않고, 대체로 기강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그러면 오랑캐와 한족이 대체로 서로 평안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제갈량은 그리하여 그들의 뛰어난 인재인 맹획등을 관리로 삼고, 거기에서 나오는 금은, 단칠, 경우, 전마등은 모조리 군사용도로 쓴다. 이때부터 제갈량이 죽을 때까지 이족들은 반란을 다시 일으키지 않았다.
<자치통감>의 이 기록은 사마광이 기본적으로 <한진춘추>에서 옮겨온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문구인 "이때부터 제갈량이 죽을 때까지 이족들은 반란을 다시 일으키지 않았다"는 것은 완전히 사마광 자신의 억측이다. <한진춘추>에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제갈량이 떠나자마자 이족들은 반란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것도 한두번이 아니다. 사마광이 이처럼 무책임하게 이런 말을 한 것은 당세와 후세의 집권자들에게 거대한 오인을 불러왔다.
"거솔"은 "거수(渠帥)" 즉 소수민족의 우두머리를 가리킬 수도 있고, 지방의 무장반란 우두머리를 가리킬 수도 있다. 이는 아마도 사마공이 맹획을 오랑캐의 우두머리로 본 원인일 것이다. 그래서 맹획이 말한 '남인들이 더 이상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이라거나 '변방인들이 더 이상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이후 제갈량이 죽을 때까지 오랑캐들은 반란을 다시 일으키지 않았다'로 고쳐쓴 것이다.
여기에서 제갈량의 남명을 다스리는 정책을 정리해보기로 하자.
남중지구의 사대부에 대하여는 다독이는 정책을 취한다. 그들은 지역을 안정시키는 중견역량이다. 반란을 일으킨 이족에 대하여는 철완의 수법으로 진압한다. 반란을 일으키지 않은 자들은 매수하고, 분화시키고, 이주시킨다. 그리고 이족의 재산을 약탈하여, 한편으로 국가의 자금으로 쓰고, 군대의 용도로 썼으며, 다른 한편으로 그들이 반란을 일으킬 경제기초를 무너뜨렸다.
이것이야말로 진실한 역사이다.
이것이야말로 아마 제갈량이 남중을 직접 나서서 정벌한 주요원인일 것이다.
민족정책은 복잡하며 민감하다. 조금만 실수하면 큰 화를 불러온다. 필자의 생각에 사마광은 집안에서 독서를 하지 않으면, 조정에서 왕안석과 머리싸움을 벌였다. 직접 민족사무를 처리한 적은 없다. 그래서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제갈량의 칠종칠금이 남중지구의 수십년 안정을 가져왔다고 믿어버린 것이다.
이건 부유(腐儒)의 견해이다.
'중국과 역사사건 > 역사사건 (삼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국시대 12필의 명마(名馬) (0) | 2022.06.16 |
---|---|
삼국시대 조위(曹魏)는 왜 5개의 도성(都城)을 두었을까? (0) | 2021.12.12 |
칠종칠금(七縱七擒)(I): 제갈량은 왜 직접 남정에 나서야 했을까? (0) | 2021.10.23 |
위,촉,오 삼국의 승상제도는 어떻게 달랐을까? (0) | 2021.10.19 |
이릉지전(夷陵之戰)의 피해는 어느 정도였을까? (0) | 2021.0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