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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삼국)

삼국시대 조위(曹魏)는 왜 5개의 도성(都城)을 두었을까?

by 중은우시 2021. 12. 12.

글: 역사D학당

 

역사상 많은 왕조는 정치, 군사, 경제적인 여러가지 고려하에 수도 이외에 일부 중요도시에 도성을 설치했고, 그 지역중심 및 전략요충지로서의 작용을 발휘하게 했다.

 

예를 들어, 진나라때는 구도(舊都) 옹성(雍城)과 신도(新都) 함양(咸陽)을 두었고, 동한(東漢)왕조는 서경(西京) 장안(長安)과 동경(東京) 낙양(洛陽)을 두었으며, 명나라는 북도(北都) 북경(北京), 중도(中都) 봉양(鳳陽), 남도(南都) 남경(南京)의 세개의 도성을 두었다.

 

그런데, 삼국시대 조위는 그중 특별한 경우이다. 나라의 강역은 북방의 절반인데, 다섯개의 도성을 설치한다. <삼국지>는 이렇게 적고 있다: "위나라는 장안(長安), 초(譙), 허창(許昌), 업(鄴), 낙양(洛陽)을 오도(五都)로 하였다" 도성의 수량은 심지어 강역이 훨씬 넓고 인구가 훨씬 많았던 통일왕조보다 많았던 것이다.

 

수도 낙양: 동한왕조의 '정통계승자'로 자처함.

 

낙양은 중국역사상 유명한 고도이다. 도성역사는 동주 주평왕의 동천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시에 동한왕조의 수도였다. 비록 한말 군벌혼전으로 심각하게 훼손되어 나중에 한헌제가 허창으로 수도를 옮기지만(물론 조조가 강제로 데려갔다), 동한왕조의 수도로서 정통성과 권위성은 무시할 수 없었다.

 

조조는 낙양성을 중건하고 재건하려 했다. 그의 집정후반에는 오랫동안 낙양에 거주하기도 했다. 그의 마음씀씀이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조비가 승계한 후, 낙양에서 한헌제에게 '선양'을 받는다. 이를 통해 낙양은 조위왕조의 수도가 된다. 기실 이는 천하에 자신이 동한왕조의 정통계승자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물론, 오촉 양국은 그렇게 인정하지 않았다)

 

정치적인 이유 이외에, 낙양은 지리적으로도 중요하다. 낙양의 주변은 황하의 천험이 있고, 태행산, 복우산, 숭산등 여러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산천도회(山川都會)'라 할 수 있다. 더더구나 낙양은 중원의 중앙에 있다. 이곳을 수도로 삼는 것은 '천하의 중앙에 세운다'는 기세를 보일 수 있다.

 

서도 장안: 촉한을 위협하는 교두보이다.

 

장안은 동한시기에 계속하여 배도(陪都)로 존재했다. 한나라말기에는 전쟁으로 파괴된다. 그리고 제대로 재건되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의 지위가 낙양만 같지 못했다. 그러나 장안은 어쨌든 고도이다. 말라죽은 낙타도 말보다 큰 법이다.

 

그외에 군사요지로서의 작용이 있었다. 장안의 남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진령의 천험을 사이에 두고 촉한정권이 장악하고 있는 한중지구가 있다(촉한이 여러번 북벌을 시도한 것은 장안을 차지하기 위함이었다). 장안의 서쪽은 강족등 유목민족이 모여사는 지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위는 장안지구에 병력을 많이 주둔시켰다. 그리고 이곳의 총사령관은 조진, 사마의, 곽준등 조위의 종실이거나 중신원로들이었다.

 

이를 보면 장안이라는 서도는 조위에 있어서 군사적인 의미가 더욱 중요하다. 조위서부국방전선의 교두보라고 말할 수 있다.

 

남도 허창: 상징적인 의미가 실질적인 의미보다 크다.

 

같은 하남성에 있는 허창은 낙양과의 거리가 200킬로미터가 되지 않는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또 하나의 배도를 설치한다는 것은 역사상 보기 드문 경우이다. 조조는 한헌제를 예전에 이곳으로 옮기게 하고 그때부터 '천자를 끼고 제후들에게 명령하는' 생애가 시작된다. 패업을 개창한 기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조위에 의미가 적지 않다.

 

다만 실제로 허창은 한헌제의 존재로 인하여 점차 '옹한반조(擁漢反曹)'측의 근거지가 된다(당연히 조조측의 엄밀한 감시하에 그다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조조는 나중에 업성과 낙양에 더 많이 머물게 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허창은 배도로서, 낙양의 방어를 공고히 하는 외에 더 많은 것은 정치와 역사적인 상징적 의미가 크다는 것이다.

 

북도 업성(지금의 하북성 한단시 임장현): 조위정권의 '대본영'

 

업성은 비록 명성으로 장안이나 낙양만 못하지면, 역시 역사가 유구한 고도이다. 조위, 후조, 염위, 전연, 동위, 북제등이 모두 이곳을 수도로 삼았다. 그러나 통일왕조는 없다.

 

조위는 원소를 격패시킨 후부터 업성을 경영하기 시작한다. 나중에 조조는 한헌제에 의해 '위공'에 봉해지고 '위왕'이 된다. 그때부터 업성은 조조의 왕성이 된다. 조조는 여기에서 대거 토목공사를 벌여 저명한 동작대등을 건축한다. 조위의 종묘도 이곳에 지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업성은 조위에 있어서 진정한 자신의 '대본영'이다. 이곳을 도성으로 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외에 업성은 황하 북안에 있어 이곳에 도성을 두는 것은 북방의 흉노, 선비, 오환등 유목민족을 겁주어 북방변경을 공고히 할 수 있다.

 

동도 초성(지금의 안휘성 박주시): 조씨종실의 '용흥지지'

 

고향을 도성으로 삼는 것은 적지 않은 영웅호걸의 일관된 방식이다. 역발산기개세의 서초패왕 항우는 진을 멸망시킨 후 고향인 팽성(지금의 강소성 서주시)을 수도로 정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부귀해지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비단옷을 입고 밤에 다니는 것과 같다. 누가 알아주겠는가." 명태조 주원장은 고향인 봉양을 제국의 중도로 삼는다. 그리고 수십만명을 동원하여 대거 토목공사를 벌인다(대부분의 공사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중도에 중단하게 되었지만). 조씨종실(하후씨 포함)의 '용흥지지'로서 이곳을 도성으로 삼는 것은 그다지 의외도 아니다. 조조가 사망한 후에 초성에 안장된다. 낙엽귀근이라 할 수 있다.

 

그외에 회하유역에 위치한 초성의 남쪽은 동오정권이 지배하는 지역이다. 조위가 남하하여 오와 전쟁을 벌일 때, 초성은 중요한 군사기지이다. 이곳을 도성으로 삼는 것은 남부변방전선을 공고히 하는 작용을 한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조위는 분열시대에 '반통일'의 정권이다. 그래서 5개의 도성을 둔 것이다.

 

먼저, 정치적인 고려이다. 천하를 향해 고향에서 거병하여 북방을 통일한 힘들었던 과정과 풍성한 성과를 천하에 보여주고, 자신이 '한을 대신하여 세워졌다'는 정통성과 합법성도 수립하고자 했다.

 

다음으로, 군사방면의 원인이다. 조위는 비록 삼국시대에 영토가 가장 넓고, 실력이 가장 강대하였지만, 왕왕 모두의 표적이 되었다. 오, 촉 양국이 결성한 동맹전선뿐아니라, 서쪽과 북쪽에는 용맹하고 거친 유목민족이 있다. 모두 상대하기 쉬운 적수는 아니다. 오랫동안 여러 전선에서 전투를 벌여, 피로가 누적된 상태이다. 이런 상황하에서 조위정권이 여러개의 도성을 둔 것은 동시에 여러개의 군사기지와 전략요새를 만든 것이나 다름없다. 전쟁을 치르고 병력을 운용하기 편리하다.

 

나중의 실제효과를 보면 조위의 "오도제(五都制)"는 어느 정도 조위가 군사정치상 우월적 지위를 유지하는데 강력한 뒷받침이 되었다. 그리고 서진이 최종적으로 오, 촉을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하는데 적극적인 작용을 했다.

 

여기서 언급하고 지나가야할 것은 조위가 실행한 "오도제"는 나중에 역사상 여러번 후세왕조에서 따라했다는 것이다.(일설에는 춘추시대 제나라에서 가장 먼저 오도제를 실시했다고 한다)

 

당나라는 당숙종때 '오도제'를 시행한 바 있다. 주로 당시는 안사의 난때여서 전란의 특수한 시기에 설치한 것이다. 요나라, 금나라도 '오도제'를 시행했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요, 금이나 조위는 모두 통일왕조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발해, 신라등의 나라에서도 오도제를 실행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