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삼국)

위,촉,오 삼국의 승상제도는 어떻게 달랐을까?

중은우시 2021. 10. 19. 22:51

글: 장공성조(長空星照)

 

삼국이 정립된 후, 가장 먼저 건국하여 황제를 칭한 위(魏)는 승상을 두지 않는다. 그후에 건립된 촉(蜀)과 오(吳)는 처음부터 승상을 둔다. 더욱 재미있는 점은 오나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승상을 두었지만, 촉한은 제갈량이후에 더 이상 승상을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위나라. 건안13년 조조가 승상에 오른다. 건안18년에 이르러 조조는 위공(魏公)이 되고, 기주(冀州)내의 10군은 그의 봉지가 된다. 두달 후, 조조는 위나라의 종묘사직을 건립하고, 십일월에 이르러, 상서(尙書), 시중(侍中)과 육경(六卿)을 설치한다. 원래 건안연간에, 조정백관은 모두 조조의 말을 들었고, 승상이 되었으며, 승상부를 두며, 모든 정령은 승상부에서 나왔다. 조조가 관할하는 지역내에서 위나라의 명령은 한왕조의 조서보다 더욱 쓸모있게 된다. 그렇다면 한나라조정은 무슨 쓸모가 있을까? 그래도 있다고 봐야 한다. 특히 유비, 손권이 관할하지 못하는 지역에 더욱 쓸모가 있었다. 예를 들어, 조조가 이들 제후를 정벌할 때, 그때는 한나라조정의 명의로 친다. 위나라가 병합하려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가 데리고 가는 병사들과 병사들을 이끄는 장수들은 모두 위나라 사람들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왜 가족을 모두 업성으로 보냈겠는가. 조조말년에 이르러, 그가 한나라를 대체하는 것은 이미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로지 한가지 정치적인 도의만이 이를 구속할 뿐이었다. 조비는 그러한 일말의 구속마저 없어진 후에 한헌제 유협으로부터 선양받게 된다. 만일 한헌제가 선양해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게 죽어버리게 될 것이다.

 

조비가 한나라를 대체한 후에 승상의 직은 두지 않는다. 승상은 원래 행정을 위해 두는 것이다. 평상시의 행정권이다. 그 존재는 어느 정도 황제의 권한과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조비는 스스로에게 그런 제한을 두길 원치 않았다. 하물며, 조조는 이 승상이라는 직위를 가지고 황제를 철저하게 '봉쇄'하지 않았던가? 조비가 공연히 스스로에게 골치거리를 만들려 할 이유가 없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의 부친 조조의 명망과 존중에서도 조비는 승상이라는 직위를 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연히, 이런 상황은 사마소의 시기에 변화한다. 사마소는 대장군에서 상국(相國)이 된다. 위나라의 멸망이 임박한 것이다. 감로3년, 위나라황제는 사마소를 상국에 앉힌다. 사마소는 합쳐서 9번이나 사양하며 받지 않는다. 경원원년 육월, 사마소는 마침내 상국의 지위를 수락한다. 5년후, 위나라는 진나라로 대체된다. 조조가 승상에 오른 후 조비가 한나라를 대체하는데 13년이 걸렸다; 사마소가 상국이 된 후에 위나라를 대체하는데는 6년이 걸렸다. 서로 다른 점이라면, 조조는 먼저 승상이 되고, 다시 위왕이 되었으며, 그후에 다음 대에 한나라를 대체했지만, 사마소는 먼저 진왕이 되고, 그후에 상국이 되고, 다음 대에 위나라로부터 천하를 넘겨받는다.

 

촉한은 건국때 바로 승상을 둔다. 전후 2명의 황제를 거치는 동안 오직 1명의 승상만이 있었다. 그는 바로 제갈량이다. 승상은 유비가 설치했다. 유비는 왜 승상 직을 설치한 것일까? 승상은 황제와 권력을 다투게 될 수밖에 없는데, 유비는 그걸 몰랐을까? 상황은 정반대이다. 유비는 제갈량의 권력과 지위를 확리시켜주려 한 것이다. 조태후의 이런 말이 있다. 부모는 자녀에 대하여 심모원려를 하게 된다. 유비는 아들 유선을 위한 심모원려였던 것이다. 유비가 황제에 오를 때 이미 나이가 61세이다. 이 나이라면 이미 고령이다. 특히 황제로서는 그 정도 나이에 이른 사람이 드물다. 유비는 자신이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유비집단의 관리는 대체로 세 부류로 나뉜다. 서주시기 이전부터 함께한 오래된 신하들, 형주시기에 거둔 신하들 그리고 익주시기의 새로운 신하들. 그중 익주시기의 이들 새로운 신하들은 나이가 아니라 동주인(東州人)과 본토인으로 나뉜다. 오래된 신하는 이미 몇 남지 않았다. 그리고 나이도 유비와 비슷하다. 그들이 유선을 오랫동안 모실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익주의 새로운 신하들 중 본토인들은 신뢰하기 어려웠고, 동주인들은 대부분 투기심리여서 이들은 중용하기 어려웠다. 기용하더라도 그다지 안심하기 어려웠다. 정치자질에서 그가 안심할 수 있고, 이익도 유비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은 형주사람들이다. 의문의 여지없이 제갈량은 이들중 가장 뛰어난 인물이다. 이엄과 제갈량을 동등하게 대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권한이 같은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제갈량 이후에 왜 승상을 두지 않았을까? 아마도 유비는 바로 한번만 임명하려고 생각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무도 제갈량과 같은 위신과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기실 이건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한나라초기에도 소하, 조참이후에 상국(相國)을 두지 않는다. 더 이상 소하와 같은 능력이나 조참과 같은 공로를 세운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그래서 뒤를 이은 사람은 그저 승상(丞相)일 뿐, 더 이상 상국이 아니게 된다. 그리고 승상이라고 하더라도, 좌승상, 우승상을 두었다. 

 

동오는 손권이 칭왕할 때 바로 승상을 둔다. 손권말년에 이르기까지 승상직은 끊기다가 이어지다 한다. 마지막항제 손호에 이르러 더 이상 승상을 두지 않았다. 동오최초의 승상은 그저 사무처리하는 사람으로 대장군만큼 명망이 있지 못했다. 손소(孫邵)라는 초대승상은 전기조차 남기지 못했다. 고옹(顧雍)은 근 20년간 승상에 있었지만 그다지 유명하지 못하다. 이 두 사람 이후의 승상은 그저 이름만 걸어놓은 사람들이다. 예를 들어, 육손(陸遜)이 고옹의 뒤를 이어 승상이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병력을 이끌고 외지에 주둔하고 있었다. 손권이후에 승상은 어떤 때는 설치하고 어떤 때는 두지 않았다. 모두 약한 황제와 권신의 관계때문이다. 군신관계가 비정상이니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없었던 것이다.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이러하다. 삼국이 승상을 설치하느냐 마느냐는 모두 각자의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결정되었다. 설치한 승상도 권한이 같지 않았다. 그래서 통일적으로 이야기하기 힘들다. 실제로는 지역에 따라 달랐고, 시기에 따라 달랐다는 것이 가장 좋은 설명일 것이다. 원래 한 가지 모델은 아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