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원재예(袁載譽)
<삼국연의>에서 주유(周瑜)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유비는 효웅의 모습이고, 관우, 장비와 같은 곰,호랑이같은 장수를 가지고 있어, 절대로 오랫동안 남의 밑에 있지 않을 것이다." 관우와 장비는 유비의 결의형제이다. 형님인 유비를 도와 강산을 취할 때, 관우는 적인 오나라군에 의해 살해당한다. 유비가 죽은 후, 관우의 처와 자식은 모조리 원수의 아들인 방회(龐會)에게 살해당하고, 멸문당한다.
그러나 장비는 건안24년에 죽었고, 둘째형인 관우가 죽은후 그리 오래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그의 후손은 관우처럼 참혹하게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 같은 지위, 같은 처지인데 왜 그의 가족들은 무사할 수 있었을까?
관우는 용맹하고 싸움을 잘했던 인물이다. 큰형 유비도 그를 중용했다. 촉의 대업을 위해 관우를 사방에 보내어 전투를 하게 했으며, 관우도 역시 기대에 부응하였다. 그는 키도 크고 용맹했다. 청룡언월도를 들고 한번 또 한번 승리를 거둔다.
이런 그에게 하나의 약점이 있었다. 그는 사대부를 멸시했다. 손권은 일찌기 자신의 아들을 관우의 딸과 결혼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관우는 그 자리에서 거절하여, 손권의 기분을 나쁘게 한다. 이는 그가 죽은 후에 당한 처지의 배경이 된다. 당시의 수문대장은 일찌기 관우가 그를 경멸하는 태도에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그래서 마음 속으로 원한을 품고 있었다.
모든 우연이 한데 겹쳐버렸다. 손권은 여몽을 보내 형주를 기습한다. 수비장수들은 관우에게 멸실르 당했었고, 그래서 별로 저항하지 않고 바로 투항한다. 관우가 사람을 보내어 소식을 정탐했는데, 형주의 장병들 가족이 가혹한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전보다 잘 대우받고 있었다. 그렇게 되니 병사들의 전투의지가 점점 약화된다. 세단역박(勢單力薄)의 상황하에 관우는 충성하는 부하들과 같이 맥성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도망칠 때, 일행은 오나라군대의 매복에 당해 살해된다.
"두침낙양(頭枕洛陽), 신와당양(身臥當陽), 혼귀고리(魂歸故里)"(머리는 낙양에 묻히고, 몸뚱아리는 당양에 묻히고, 혼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는 민간백성들이 묘사하는 관우의 죽음이다. 관우가 죽은 후, 손권은 그의 수급을 조조에게 보낸다. 조조는 낙양에 그의 수급을 후장했다. 손권 자신도 관우는 사나이라고 존경했고, 그의 몸뚱아리는 당양에 후하게 장사지내준다. 촉에서도 이 대장군을 잊지 않았다. 성도에 그를 위해 화려한 의관총(衣冠塚)을 만든다. 일대영웅은 이렇게 잠이 든다.
그가 죽은 것은 죽은 것이다. 그러나 이미 망혼이 된 그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용맹함이 자신의 가족들을 해치게 될 줄은. 경요3년, 유아두는 부친이 살아있을 때의 공신들을 추모하여, 관우를 장무후(壯繆侯)에 봉한다. 그리고 그의 아들 관흥(關興)이 작위를 승계한다. 좋은 날은 오래가지 않았다. 촉은 더욱 혼란에 빠지고 일찌기 관우가 방덕(龐德)을 죽였는데, 그의 아들 방회도 어른이 되었다.
위의 세력은 날로 커지고, 방회도 부친의 뒤를 이어 장수가 된다. 그는 위나라의 통일대업을 위하여, 그리고 부친을 죽인 원수를 갚기 위하여, 관씨일가를 모조리 죽여버린다. 한명도 살려두지 않는다.
관우의 죽음, 그리고 관우의 일가가 당한 멸문의 참화, 그 원인과 결과를 보면 모두 연결되어 있다. 역사의 피비린내와 비애를 느낄 수 있는 점이다.
아마도 고대에 직업군인이 되면, 사상률이 아주 높았던 것같다. 유비의 둘째동생 관우는 전쟁터에서 죽었다. 셋째동생 장비도 그런 액운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다행인 점이라면, 장비의 후손들은 관우의 후손들처럼 참혹하지 않았다. 난세에서도 그들은 잘 살아남았던 것이다.
장비는 성격이 시원시원하다. 마찬가지로 몸도 건장하고 무예도 뛰어났다. 세명중 막내로서 가장 많은 보살핌도 받는다. 성격은 약간 교만했다. 그러나 그는 운이 좋았다. 하루는 그가 성을 나서서 일을 보는데, 아름다운 농가의 소녀가 마침 땔감을 줍고 있었다. 그는 마음이 동하여 그 소녀를 강제로 데리고 성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처로 삼는다. 그런데 바로 이 보통의 소녀가 장씨일가를 구해주게 된다.
그 소녀 장부인은 위나라의 대장인 하후연(夏侯淵)의 조카딸인 하후씨였다. 그래서 장비의 자손들은 하후씨의 피도 잇고 있었다. 하후씨는 위나라에서 지위가 아주 높았다. 그래서 위나라는 장비의 자손들의 터럭 하나도 쉽게 건드릴 수가 없었다.
만일 내가 위나라의 군주라 하더라도, 하후씨를 건드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후씨의 자손을 위험한 지경에 처하게 놔두지도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후씨의 마음을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에게 충성하며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다. 그런데 그들의 자손을 보호해주지 못한다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혹시 장비의 자손을 죽이려는 생각이 들 수는 있다. 하후씨를 개가하게 하면 되니까. 그리고 그녀로 하여금 아이들을 잘 기르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능력이 되었을 때, 장비는 이미 죽었다. 군주로서 이런 상황이 된다면 굳이 건드릴 필요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장비는 비록 죽었지만, 장비의 운은 그저 노래가사에 나오는 것처럼 '단지 사람들 틈에서 너에게 눈길을 한번 더 주었을 뿐"인 것이다. 그가 하후씨를 마음에 들어했고, 강제로 처로 삼았기 때문에 자손들의 목숨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인과는 윤회한다. 모든 것은 정해져 있다.
관우의 죽음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보통의 전사이고, 장군으로서는 보통의 불행일 뿐이지만, 그의 죽음 배후에는 여러가지가 연결되어 있다. 만일 손권아들의 구혼을 받아들였더라면, 아마 손권이 그의 사돈의 목숨을 거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일 그가 부하장수들에게 잘 대해주었다면 장병들도 그렇게 싸우지도 않고 흩어져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장비도 그렇다. 그가 만일 우연히 마음에 들어 하후씨를 취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가족은 그렇게 잘 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촉나라가 멸망하는 상황에서 촉국의 노신인 장씨집안은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기실 장비와 관우의 경력은 그저 단순한 인과관계라 볼 수는 없다. 당시 천하삼분의 국가동탕시기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왕조교체는 원래 인과순환으로 필연적이다. 관우, 장비 두 사람과 그들의 자손은 이런 혼란중의 소인물이다. 일찌기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결말이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계속 굴러간다. 인과는 일찌감치 정해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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