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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초기)

아오바이(鰲拜)(5): 강희제와의 갈등이 격화된 이유는...?

by 중은우시 2018. 2. 28.

글: 기련해(紀連海)


무수한 전투와 궁중투쟁을 거쳐서 이미 50세가 된 아오바이는 마침내 대청왕조에서 첫째가는 권력을 쥔 신하가 된다. 다른 3명의 보정대신이 그의 말에 따랐을 뿐아니라, 나이어린 강희제도 그에게 조그만치도 불경하지 못했다. 다만 권력을 틀어쥔 아오바이는 나이어린 강희제가 하루하루 자란다는 것을 주의하지 못했다. 엣날의 어린아이가 이제는 소년천자로 장성한 것이다. 두 강세인물간의 싸움이 조용히 서막을 연다. 그렇다면 역사상 아오바이와 강희제간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가? 도대체 무슨 은원이 있었길래 그렇게 깊은 원한을 품게 되었을까?


강희제가 자라면서 보정대신 아오바이와는 갈등이 생긴다. 갈등의 원인은 먼저 한 가지 문제에 기인한다. 즉, 서방의 선진문화가 필요하냐는 문제에 대하여이다. 강희제가 즉위한 후 그의 수하는 3부류의 대신이 있었다, 첫째는 서방에서 온 선교사이다. 탕약망과 그의 제자 남회인(南懷仁), 백진(白晋)등을 우두머리로 한다. 둘째는 한관(漢官)이다. 셋째는 바로 동북 만주에서 온 상층귀족세력이다. 이 세 세력간의 다툼에서 한가지 사건이 벌어진다. 그것은 바로 탕약망사건이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볼 수 있다. 다투는 세 당사자중 일방은 실제로 아오바이이다. 그렇다면 아오바이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는 세계의 모든 문명중 오로지 만주문명이 가장 선진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싸우는 상대방은 바로 탕약망이다. 탕약망은 이렇게 생각한다. 세계의 모든 문명은 서방문명에서 나왔고 모든 사람은 하느님이 창조했다. 그래서 아오바이와 탕약망의 두 사람은 물과 기름과 같이 서로 화합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오바이는 알고 있었다. 아직 그가 나타날 때가 아니라는 것을. 그는 한관(漢官)을 부추겨서 서방세력의 대표인 탕약망과 싸우게 만든다. 그리고는 중간에서 어부지리를 얻으려 한다. 그래서 그는 한관 양광선(楊光先)을 내세운다. 이 양광선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안휘성 흡현 사람이다. 자신을 천산학가(天算學家)라고 했다. 1660년, 그는 이 탕약망이 극력 서방문화를 선전하는 것을 보고 그에 대한 불만을 가진다. 아오바이의 부추김으로 그는 탕약망을 탄핵하기 시작한다. 그가 당시 탄핵한 죄명은 무엇일까? 탕약망의 이 <시헌력(時憲曆)>에는 겉면에 다섯 글자가 추가되어 있었다. "의서양신법(依西洋新法)" 이것은 국가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때 탕약망은 막 순치제의 처의 병을 치료해준 때였다. 그래서 이때 순치제는 양광선의 말을 신경쓰지 않고 무시한다. 양광선은 이렇게 아무런 성과도 못얻고 끝난다. 이렇게 첫번째 싸움에서 탕약망이 승리를 거둔다.


4년후, 이 양광선이 권토중래한다. 1664년, 그는 다시 탕약망을 탄핵한다. 이번에 그가 탕약망을 탄핵한 것은 탕약망 및 <시헌력>에 4가지 죄명을 부과한 것이다. 제1조죄명은 여전히 신법에 그 다섯글자, '의서양신법'을 써놓았다는 것으로 이는 국체에 대한 모욕이라고 주장했다. 제2조죄명은 서양신법은 단지 미래 200년을 예견하는데 그러면 200년이후에는 나라가 끝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 역법은 문제가 있고, 국가에 대한 저주라고 말하였다. 제3조는 그가 새 역법의 속에 곳곳에서 일부러 하나를 선전하고 있다고 했다. 바로 기독교 교리.제4조는 영친왕(榮親王)이라는 사람을 얘기한다. 이 영친왕은 소개할 필요가 있다. 영친왕이 누구인가. 바로 순치제와 그가 좋아했던 동악비 사이에 낳은 아이이다. 이 아이가 태어나서 1달이 되자마자 바로 그를 친왕에 봉한다. 이것은 청나라의 법도에 완전히 어긋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친왕이 어떻게 되었는가. 백일도 살지 못하고 죽었다. 그는 누구를 탄핵했는가? 이 양광선은 영친왕의 죽음이 탕약망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탄핵했을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영친왕의 장례때, 탕양망은 전통의 정오행(正五行)에 의하지 않고 홍범오행(洪範五行)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이 영친왕은 죽은 후에 금방 영친왕의 모친인 순치제가 가장 좋아하는 후궁 동악비도 반년의 시간내에 죽었다고 말한다. 이어서 이 동악비가 죽은지 반년도 되지 않아, 다시 순치제가 죽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탕약망이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나온 용어를 살펴봐야 겠다. 정오행과 홍범오행. 우리는 오행은 알고 있다. 기실 바로 금목수화토이다. 다만 이 금목수화토에 대한 해석은 다르다. 이 최초의 오행이라는 단어가 언제 나왔을까? 더 이르다고 말하는 것도 있지만, 고증에 따르면, 그것은 모두 부정확하다. 진정 오행이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서경.홍범편>이다.  <서경.홍범편>에는 이런 말이 있다: "수왈윤하(水曰潤下), 화왈염토(火曰炎土), 목왈곡직(木曰曲直), 금왈종혁(金曰從革), 토애가색(土愛稼穡)" 그것은 이 금목수화토가 이런 관계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물은 토지를 윤택하게 하고, 불은 공기를 뜨겁게 하며, 목재는 세계의 곡직을 관리하고, 금은 피혁의 일부 무기이며, 토지는 농사짓는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알 수 있다. 이 홍범오행은 우리가 알고 잇는 오행보다 원시적이라는 것을. 다만 이 사건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철두철미한 무고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초 이 일이 일어날 때, 탕약망은 알지도 못했다. 그럼 누가 이 일을 관리했는가? 바로 언거리(恩格里)라는 예부상서이다. 그는 소위 영친왕 장례의 모든 일을 관리한 사람이다. 나중에 확실히 탕약망도 발견했다. 네가 쓴 것이 홍범오행이고, 정오행이 아니라는 것을. 즉시 탕약망은 이 사람을 탄핵한다. 그리고 이 언거리라는 사람은 그 후에 유배를 간다. 이 사건 자체는 당연히 탕약망과 관련이 없다. 다만, 사건이 이미 여러 해가 지났는데 예전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가 정확히 기억하고 있을 것인가. 그래서 우리는 알 수 있다. 이 네 가지 탄핵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제4조라는 것을. 왜냐하면 제4조에서 그는 세 사람의 죽음을 언급한다. 영친왕의 죽음. 동악비의 죽음. 순치제의 죽음. 그리고 이때 탕약망은 이미 병석에 누워 있었고, 완전히 사지가 마비되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예전 일을 제대로 해명할 수도 없었다.


탕약망이 그래도 버틸 수 있었다. 왜 그랬을까? 바로 그가 만든 역법이 정확한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세 개의 역법 <회회력>, <한력> 즉 <대통력>, 그리고 탕약망이 서양신법에 의거해서 만든 <시헌력>이 있었다. 이들은 동시에 1665년 1월 16일 오후에 일식이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날은 음력으로는 한 해 전이다. 즉 납월(12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다고 했다. 이 일식을 오늘날 추산해보면, 이 일식이 발생한 정확한 시간은 오후 3시 26분이다. 다만, 당초 <회회력> <대통력>. <시헌력>의 세 역법이 추산한 시간은 모두 달랐다. <회회력>에서는 이날 일식이 발생하는 시간을 3시가량이라고 했고, <대통력>은 3시 일각가량 즉 3시 15분이라고 했고, <시헌력>은 세시반가량이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알 수 있다. 세 역법이 추산한 것은 모두 아주 정확하지는 않다. 모두 문제가 있다. 이때 세 측은 이 일식을 빌어 누가 정확한지를 겨루자고 한 것이다. 그래서 문무백관을 모조리 불러모은다. 천문대에서 도대체 일식이 어느 시간에 발생하는지 보자고 한 것이다.


<회회력> 천산학자들이 계산한 것은 3시였는데, 3시가 지났다. 태양에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태양은 여전히 하늘 높이 그대로 떠 있었다. 일식이 발생하지 않은 것이다. 이제는 양광선이 <대통력>에 근거하여 계산한 3시 1각이 다가온다. 그 결과 일식은 여전히 발생하지 않았다. 바로 이때 탕약망, 남회인은 모두 자신들이 이기는게 확실하다고 여겼다. 그들이 생각지도 못하게 양광선은 아주 악독한 수법을 쓴다. 무엇인가 하면 시각을 예보하는 자에게 5분을 앞당겨서 시간이 되었다고 말하라고 시킨 것이다. 그 결과로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 벌어진다. 3시 25분이 되었을 때, 3시 반이라고 시각을 알인다. 그런데, 그가 그 시간이 되었다고 알리자마자 바로 3시 26분으로 넘어가면서 하늘에서 과연 일식이 나타난다. 태양이 정말 가려진 것이다. 정말 일식이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그 자리에 있던 군신들은 모두 깜짝 놀라고, 금방 박수를 친다.


그래도 문제는 있다. 아직 영친왕의 죽음, 동악비의 죽음, 순치제의 죽음에 대하여 아직 설명하지 못했다. 그래서 1665년 5월 15일, 음력으로 이 날은 사월 초하루이다. 탕약망은 사형을 선고받는다. 당시 아오바이는 신하 200여명을 불러모아서 모두 결의한다. 탕약망을 사형에 처하고 능지처참한다고. 바로 이때 구명도초가 나타난다. 바로 지진이다. 북경에 지진이 발생한 것이다. 교묘하게도 그가 막 능지처참을 얘기할 때 지진이 일어난 것이다. 이 지진은 황제의 정책과 관련이 있다. 이는 서한의 동중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바로 천인감응(天人感應)이다. 이때 아오바이는 자신의 정책에 무슨 문제가 있어서 지진이 일어난 것인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즉시 스스로 견디지 못하고, 이것을 자신에 대한 징벌이라고 여긴다. 즉시 황태후에게 보고한다.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막 이 사건의 결과를 판정했을 때 지진이 났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황태후는 그 말을 듣자마자 나의 그 신부를 너희가 죽이려고 한다고. 안된다. 죽일 수 없다. 고쳐라. 그래서 결국 참감후(斬監侯)로 바꾼다.


바로 이때 북경성의 여진이 계속되었다. 그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다시 효장태황태후에게 달려간다. 태황태후는 그를 석방하라고 명한다. 이렇게 하여 탕약망, 남회인, 백진 세 사람은 목숨을 건진다. 탕약망 본인은 1666년 8월 비통과 실망중에 사망한다. 그가 만든 <시헌력>도 폐지된다. 그것을 대체한 것은 여전히 잘못된 곳이 많은 <대통력>이다.


탕약망 사건은 소년강희와 효장태황태후의 마음에 큰 상처를 준다. 강희제가 다른 것은 몰라도 최소한 한 가지는 안다. 자기가 황제에 오른 것은 이 네명의 보정대신 덕분이 아니라는 것을. 내가 황제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탕약망이 이미 천연두를 앓아더 얼굴이 얽었으니 더 이상 천연두를 앓지 않을 것이라고 해주었기 때문이다. 너는 어찌 내가 황제가 되는데 가장 중요한 사람을 죽여버릴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불쾌했다. 그리고 효장태황태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의 병을 많이 치료해주었다. 그리고 우리 집안에 은혜가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죽이려고 하다니.


그래서 이런 상황하에서 탕약망사건이 끝나면서 소년강희는 점점 자라서 어른이 된다. 그들 사이의 모순도 갈수록 격화된다.


이제 수커사하사건을 얘기하기로 하자. 우리는 처음부터 얘기해야 한다. 1626년 누르하치가 죽으면서 홍타이시가 칸에 오른다. 홍타이시는 칸에 오른 후, 자신이 가진 양백기의 지위를 높이기 위하여, 원래 좌우익의 끝에 있던 양백기를 양황기와 깃발을 바꾸게 한다. 원래 아지거, 도르곤, 도도의 세 형제가 가지고 있던 양황기는 양백기로 바뀐다. 그래서 갈등이 일어난다. 황백 양기의 갈등이 생긴 것이다. 결과는 교묘하다. 1643년 홍타이시가 죽고, 도르곤이 섭정왕이 되어 1644년 청군이 입관한다. 곧이어 1645년, 권지운동때 도르곤은 자신의 권세를 이용하여, 원래 상황기에 돌아가야할 땅, 어디인가 지금의 북경과 요녕 중간의 땅이다. 즉 승덕, 전화, 천안, 계현등이다. 이 땅을 어떻게 했는가. 원래 상황기에 주어야 하는데 도르곤이 섭정왕의 권한을 이용하여 이 땅을 자신의 정백기에 귀속시킨다. 그러면 상황기는 어디로 갔는가. 오늘날의 하북성 동남으로 보낸다. 하간, 창주, 보정, 탁주등지이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팔기중 끝자리가 된 것이다. 가장 남쪽에 있는 기가 된다.


당시는 도르곤시기이다. 순식간에 아오바이의 보정시기가 된다. 1665년이 되어, 아오바이는 정백기 수커사하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다시 황백양기간의 갈들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수하를 종용하여 황제에게 글을 올린다. 당초 그 땅은 우리 상황기의 것이니 이제 우리에게 토지를 돌려달라고 한다. 정백기와 상황기가 땅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자 아오바이는 바로 명령을 내려 집행하도록 한다. 그러자 정백기는 죽어라 땅을 내놓지 않으려 한다. 지계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찾을 수 없다. 갖은 명목을 붙여서 끈다. 상황기의 사람들은 아오바이의 명령이 내려지자 마자 모두 이쪽으로 달려온다. 아오바이는 3개현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긴다. 그래서 다시 땅을 잘라서 상황기에 준다. 그러나 정백기가 땅을 내놓지 않는 바람에 상황기의 수만명은 지낼 곳이 없어진다. 그래서 아오바이는 다시 한가지 잘못을 저지른다. 4개현에 사는 한인을 모조리 쫓아버린다. 이렇게 하여 또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죄를 짓는다.


그 4개현이 어디인가. 회유, 밀운, 평곡, 순의이다. 이 네 개 현은 모두 북경이다. 이 네개 현의 어디가 양식이 충분하겠는가. 순의는 평지가 좀 있는 것을 제외하고, 회유, 밀운, 평곡은 모두 산지이다. 평곡은 반산지라고 볼 수 있다. 회유, 밀운은 순전히 산간지역이다. 이 네 개를 잘라서 주었는데, 상황기 사람들이 와서 보니 예전에 있던 곳만 못했다. 그래서 그들도 불만이었다. 아오바이의 명령하에 정백기 수하의 호부상서인 쑤나하이(蘇納海)가 사람을 데리고 토지를 측량하는데, 정백기가 죽어라 내놓지 않았다. 상황기도 죽어라 바구려 하지 않았다. 한인들까지 소란을 피운다. 이곳은 우리가 농사짓는 곳이다. 우리에게도 땅을 달라고 아우성이다. 수나하이는 이를 보고 자신은 방법이 없겠다고 생각하여 조정에 보고한다. 이 일은 못하겠으니 너희는 돌아오라고 한다. 이 일은 전체 직예, 북직예를 뒤흔든다.


직예통독은 소창조(蘇昌祚)라는 사람인데, 그의 수하 순무로 왕등련(王登聯)이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자신의 관할지역의 땅을 둘러싸고 엉망진창이 되고 수십만명이 농사도 짓지 못하게 된 것을 보자 연명으로 황제에 상소를 올린다. 이 일은 할 수 없다고, 환지를 해서는 안되니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라고. 그 결과 이 상소가 아오바이에게 들어간다. 아오바이는 이를 보고는 황제에게 넘긴다. 그는 한편으로 상소를 황제에게 넘기면서 다른 한편으로 쑤나하이, 왕등련, 소창조를 체포하여 감옥에 넣고 심문한다.


이대는 1667년초이다. 강희황제는 13살이다. 그는 당시에 이를 보고는 4대보정대신을 불러서 물어본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아오바이는 세명을 처형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당시 다른 세 명은 어떤 의견이었을까? 소니는 이때 이미 죽기 6개월전이다. 소니는 환지가 양황기에 유리하다고 보고 찬성한다. 어비롱도 양황기 사람이다.역시 찬성한다. 앞에서 말한 바 있지만, 4대신은 반드시 의견이 일치되어야 했다. 그런데, 수커사하는 정백기 사람이다. 그는 환지가 자신들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황제는 이를 보고는 됐다. 이 일은 다음에 다시 논의하자고 끝내버린다. 그런데, 다시 논의할 기회도 없이, 아오바이는 도장을 찍어서 셋을 처형해 버린다. 이때는 아직 강희제가 친정을 하는 때가 아니니, 내가 결정하면 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세명을 마음대로 죽여버린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소니와 어비롱은 그를 지지했지만, 수커사하는 반대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후 수커사하의 죽음에 복선이 깔린다. 


소니는 죽기 전에 효장태황태후와 강희제에게 글을 올린다. 그리고 전의 사례에 따라 순치제의 옛일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순치제는 바로 14살에 친정을 했다. 현재 강희제는 이미 14살이 되었으니 그는 강희제와 효장태황태후에게 상소를 올려 이제 강희제가 친정할 때가 왔다고 한 것이다. 이 상소를 올리고 그는 죽는다. 아오바이는 소니가 이런 상소를 올린 것을 몰랐다. 아오바이는 아직도 꿈을 꾸고 있었다. 이번에 소니가 죽었으니, 자기의 발언권이 더 커질 것이라고. 이제는 내가 결정하면 된다고. 그러나 일이 그렇게 쉬울 것인가.


당시의 강희제도 형세가 좋지 않다고 느끼고 있었다. 소니가 죽은 후 아오바이는 수커사하를 잡아먹으려 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때 강희제는 친정을 결정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 몰래 글을 써서 할머니인 효장태황태후에게 보내어 친정을 요구한다. 효장태황태후도 동의한다. 그리고 그는 날짜를 잡는데, 음력 칠월칠일 양력으로는 1667년 8월 25일에 정식으로 친정을 선포한다. 그후에 융정한 친정대전을 거행한다. 여러 신하들이 멍하니 있을 대 그는 세 사람의 보정대신들에게 원래 하던대로 하라고 한다. 다만 이제는 보정대신이 아니라, 좌증대신(佐證大臣)이라는 것이다. 보정과 좌증은 다르다. 권력이 다시 더 적어지는 것이다.


바로 이때, 수커사하는 자신은 아오바이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거을 느낀다. 그외에 아오바이는 문무를 겸비해서 문으로도 무로도 자신은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됐다. 나는 물러나겠다. 마침 황상이 친정을 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그는 음력 칠월 십이일, 즉 양력 8월 30일에 강희제에게 절자(折子)를 올려서, 사직을 청한다. 그 후에 무엇을 할 것인가? 선제의 능침을 지키게 해달라는 것이다. 나를 아직 제대로 능이 만들어지지 않은 청동릉으로 보내주던지, 아니면 심양으로 보내달라는 것이다. 어쨌든 북경에는 남아있지 않겠다는 말이다.


그가 본래 말한 것은 은퇴하겠다는 것인데, 아오바이에게 공격을 당한다. 아오바이는 즉시 수커사하를 탄핵한다. 황상이 막 친정을 시작했는데, 감히 황상을 멀리 떠나려고 하느냐 이것은 황제에 대한 불충이고 불효이다 등등. 즉시 수커사하에게 24가지 죄명을 얹는다. 이 24개의 죄명중 다른 것은 다 헛소리이고, 왜 황제가 친정을 한다고 말하자마자 친정이라고 하여 수하대신이 필요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관직을 버리고 떠나겠다고 하느냐는 것이다. 확실히 얘기하라는 것이다.


그는 구족을 멸해야 한다고 말한다. 수커사하의 일자족을 몰살해야한다고 한다. 그것까지도 아오바이는 생각해 두었다. 수커사하의 장남 내대신 차안(査安)은 능지처참을 하고 나머지는 참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수커사하의 여섯 아들과 한 손자이다. 그리고 수커사하의 형제의 두 아들이다. 그리고 가신도 있다. 합치면 14명이다. 강희제는 허가하지 않는다. 이때 아오바이는 어떻게 했는가? 팔을 걷어부치며 황제를 몰아부쳤다. 당시의 황제는 겨우 14살이었다. 그래서 겁을 먹고 동의한다. 다만 수커사하을 능지처참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참수로 고친다. 장남을 능지처참하는 것은 허용한다. 순식간에 14명의 목숨이 사라진다. 강희제가 친정을 시작한지 5일만에 수커사하의 가족은 지구상에서 사라진 것이다. 이것이 강희제 친정에 대한 최고의 선물이었다. 


이때 아오바이는 생각했을 것이다. 너 강희가 친정을 한다고. 그럼 친정이 맛을 보여주겠다. 그래서 병이 들었다고 하면서 조회에 나가지 않는다. 강희제는 생각을 해보고는 그래도 문병을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아오바이의 집으로 간다. 아오바이 집으로 갔을 대, 아오바이가 몸을 숙이자, 강희제의 수하가 갱을 쓸어보다가 아오바이의 몸아래 검이 하나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한다. 당시 신하들은 모두 깜짝 놀란다. 어떡할 것인가.강희제가 왔는데 그가 몰랐을 리는 없다. 그런데 어찌 몸에 검을 숨기고 있단 말인가. 이때 모든 사람이 놀라서 멍해 있을 때, 강희제는 그래도 총명했다. 그는 말한다. 만주의 습속은 사람들이 칼을 지니고 다니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정상적인 일이다라면서 그냥 웃어 넘긴다.


그러나 이때의 아오바이는 이미 약간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비상시에 대한 준비이다. 이때 모든 조정의 신하들 중에서 그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던가. 육부 중에서 4개의 부는 그가 장악했다. 형부와 예부의 사람들만 그의 사람이 아니었다. 나머지 4개부의 상서는 모두 그의 집안 사람이고 심복이다. 이 4부외에 내비서원등등도 모두 그가 관장했다. 황상이 이미 친정을 시작했는데도, 그는 여전히 집에서 사무를 보고 있었다. 누구든지 황제에게 글을 올리려면 먼저 그를 거쳐야 했다. 만일 그를 거치지 않고 바로 올렸다가는 바로 그 다음날 경을 친다. 황제가 그에게 내린 명령도 집행을 거절한다. 이런 일이 많았다. 그래서 이런 상황하에서 강희제와 아오바이의 모순은 이미 첨예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모순은 강희제와 아오바이간의 권력을 놓고 다투는 것일가? 아니면 다른 것이 있을까? 집정방침이 서로 달랐다. 아오바이의 머리는 어디에 국한되어 있었는가? 나는 괸외 사람이다. 나는 만주 사람이고, 선진적이다. 강희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전체 중국을 통치해야 한다. 우리는 옛날에 동북에 살때의 눈으로 일을 처리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아오바이의 하야는 그저 시간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