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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원)

킬리(Kili)전투: 몽골의 인도침략시 최대전투

by 중은우시 2019. 5. 13.

글: 냉포역사(冷砲歷史)


몽골기병이 세계를 종횡하던 황금시대에, 인도대륙은 손쉽게 주목하지 않는 구석이었다. 그러나, 인도북부는 중앙아시아와 천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몽골철기의 공격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다만 오늘날에는 인도의 무력에 대하여 무시하는 편이지만, 당시의 델리술탄국은 침입자들에게 침중한 타격을 가했었다.


몽골의 북인도에 대한 공격은 14세기까지 지속되었고, 그중 1299년에 발생한 킬리전투는 규모가 가장 컸다.


사방에 적을 둔 차카타이한국




몽골계의 몇개 칸국중에서 차카타이한국은 지연과 처지가 가장 좋지 않았다. 하중(河中), 서역과 아프간북부등 유라시아대륙의 중심지역을 지배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영지는 거의 원나라, 킵차크한국과 일한국의 세 곳에 포위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차카타이한국의 후예들이 영토를 확장하려면 반드시 몽골의 동족들과 격렬하게 충돌히야 했다. 게다가 한국의 대권이 한때는 쿠빌라이에 반대하던 하이두에 의해 장악되어 있어서, 칸발릭(Kahnbaliq, 汗八里) 대도(大都)에 위치한 원나라와 갈등이 컸다.


그러므로, 전체 13세기후반기에 차카타이한국은 자주 동서 양쪽에서 전쟁을 치러야 했다. 동쪽의 서역지구에서 차카타이한국은 원나라와 계속 대치전을 벌였다. 차카타이한국은 알타이산지역을 지배함으로써, 동족으로 몽골본토를 지배하고자 했다. 서쪽에는 원나라와 관계가 밀접한 일한국이 있다. 칸국이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에 걸쳐 있으므로, 그 자체로 차카타이한국과 영토분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일한국이 일찌감치 쇠퇴한 틈을 타서, 차카타이한국은 비로소 아프간남부의 가즈니 등지를 빼앗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인더스강유역으로 가는 통로가 마련된다.




장기간의 전란으로, 하중등지의 무역은 순조롭지 못했다. 그래서 차카타이한국도 그 재정손실을 보완할 조치가 시급했다. 다만, 하중와 호르즘등지는 일찌기 몽골의 서정(西征)과정에서 철저히 파괴된다. 그래서 회복하는데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이는 차카타이인들로 하여금 인도를 공격할 방법을 강구하게 만든다. 새로운 영토와 부를 개척하려는 것이다. 인도북부는 비록 일찌기 몽골확장전쟁에 말려든 바 있었지만, 이전에 항상 사람들이 중시하지 않았다. 그래서 상당한 정도의 약탈가치가 있었다.


비교적 아이러니한 점이라면, 몽골인들에게 인도를 약탈할 거대한 동기가 있었을 뿐아니라, 그들에게 부속된 아프간지방의 세력도 인도에 대하여 큰 흥미를 갖고 있었다. 멀리 몽골인들이 굴기하기 전에, 여러 북방세력이 아프간에서 남하했다. 적지 않은 아프간 산지부락도 거기에 참여한다. 심지어 인더스강유역을 차지하기도 했다. 하물며 차카타이의 장군들이나 귀족들에게 있어서, 인도는 원나라나 일한국보다는 약한 상대였다.


식민자의 전장


일찌기 13세기초, 즉 몽골세력이 굴기하기 전에, 북방에서 온 돌궐노예군단이 인도에서 새로운 국가를 건립한다. 위험한 인더스강유역에서 멀어지고, 인도반도의 중심지역을 더욱 잘 지배하기 위하여, 돌궐의 군사우두머리는 도성을 데칸고원에 있는 델리(Deli)로 정한다. 델리술탄국이라는 명칭은 이렇게 하여 얻게 된다.


한세대의 시간도 지나기 전에, 델리술탄은 몽골의 중앙아시아정복전쟁의 영향을 입는다. 특히 호라즘이 왕자 잘랄 앗딘이 잔여세력을 이끌고 남하하여, 델리를 자신의 중요한 외부지원세력으로 삼으려 한다. 비록 이 요청은 거절되었지만, 호라즘의 잔여부대는 금방 발견한다. 인더스강유역의 펀잡과 케시미르등지에는 델리의 명을 직접 듣지 않는 지방총독이 많이 있다는 것을. 그들이 제공한 부대는 한때 잘랄앗딘이 자신을 추격하는 몽골군대를 물리치게 해준다. 다만  그들의 반대로 잘랄앗딘은 다시 서쪽으로 도망쳐 신드(Sind)로 간다. 남방의 델리궁정에 박력있는 강력한 통치자가 없어서 이들 지방총독들을 단속하지 못한다. 실력이 잘랄앗딘을 훨씬 넘어서는 차카타이군대가 남하를 시작하자 이들 지방세력은 할 수 없이 꾹참고 복종을 선택한다. 특히 전투력이 비교적 약했던 케시미르지역은 한때 몽골의 최남방 성이 된다. 전투력이 비교적 강한 펀잡은 한번 싸우게 된다. 만일 특별한 일이 없었더라면, 몽골인들은 전선을 계속 남하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델리술탄은 군사면에서 절대로 만만치 않았다. 그 자체가 돌궐노예군단 출신이고, 그래서 모집, 훈련과 전투력유지 측면에서 노하우가 있었다. 하물며 몽골인의 확장전쟁에서 많은 중앙아시아의 돌궐화된 부족이 어쩔 수 없이 남하하여 이주한다. 그중 일부는 델리술탄국에 의탁한다. 길만(Ghilman)군단의 주요 구성원이 된다. 그들은 몽골인에게 적대감이 있을 뿐아니라, 북방전장에서의 유행하던 각종 전술에 능통했다. 게다가 고인도는 야금, 순마(馴馬)의 분야에서 뛰어났다. 기병부대에 가장 뛰어난 무기를 제공해줄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델리군대는 서로 다른 성의 총독의 지휘를 받았다. 그래서 협동전투에는 약점이 있었다. 중앙에서 강력한 군주가 나타나면, 지방의 세력가들은 이를 저지한다. 서로 적대시하는 파벌들이 억지로 한 진영에 서서 몽골군과 싸울 수밖에 없었다. 이 점은 몽골군에게 큰 기회였다.


1299년, 이미 여러번 인도를 침략하다가 실패한 차카타이한국은 유사이래 최대규모의 군대를 집결시켜 남하한다.


당시의 칸은 두와(Duwa)인데, 거의 모든 정예부대를 파견한다. 고대 작가가 쓴 글에 따르면, 이번 몽골침입자는 10-20만명에 이르렀다. 총지휘관은 두와칸의 아들인 쿠틀룩이다. 두와칸은 그에게 약탈에 만족하지 말고, 철저히 델리를 점령하도록 명한다.


비록 병력숫자가 크게 과장되기는 했지만, 이번 원정이 다른 경우와 달랐던 점을 감안하면, 차카타이의 총병력은 10만에 근접했을 것이다. 전략적으로, 그들은 펀잡지역의 물탄을 우회한다. 그리고 도중의 인도 보루를 강공하지도 않는다. 쿠틀룩은 그저 일부 군대를 남겨서 포위하거나 감시하기만 하면서 현지수비군이 외부와 연락하는 것을 차단했다. 그리고 주력부대를 이끌고 신속히 남하한다. 델리를 쳐들어갈 수만 있다면 북방의 총독들은 자연스럽게 자신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신하가 될 터였다.


당시의 델리술탄국에서 비교적 강한 인물은 알라우딘이었다. 그는 개인의 권세를 강화해 왔다. 몽골인이 계속 침입하자, 이를 이용해 자신의 권한을 강화한다. 비록 나중에 무굴시대의 역사학자에 따르면, 델리는 30만의 기병과 2700마리의 코끼리를 모았다고 하였지만, 진정한 전투병력은 5-10만명이에 불과했다. 돌궐화된 기병군단과 전투코끼리를 제외하고, 대량의 무슬림도시의 민병과 힌두교도로 구성된 보병이 있었다. 몽골인의 침입을 받자, 이들은 내부의 갈등과 모순은 일단 제쳐두기로 한다.


알라우딘은 적군과 아군의 우열에 대하여 아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델리기병은 개인전투력에서는 차카타이의 기병에 뒤지지 않았다. 다만 전체적인 협력조직방면에서는 열세였다. 그러나 본토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므로 방여자는 기실 장기간의 대치를 통해서 상대를 무너뜨릴 수도 있었다. 몽골인들이 이번에 빠르게 남하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실제로 안정적인 보급선을 확보하지 못했다. 일단 인도에서 머무는 기간이 길어지면, 시가가 떨어지는 불리한 상황에 처할 것이다. 그러면 이어서 싸우지 않고도 스스로 궤멸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알라우딘은 모든 군대를 델리 부근의 킬리에 주둔시킨다. 안정적인 군영과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상대방의 경거망동을 저지한다. 그는 또한 휘하의 5개부대에 모두 22마리의 전투코끼리를 배치하여, 몽골기병의 대형에 충격을 가한다. 다만 그의 명령이 없이는 여하한 총독도 함부로 병력을 이끌고 나가지 못하게 했고, 이를 어기면 참수하고 효수했다.


그리하여, 총인원이 10만을 넘는 두 군대가 야무나강과 인도밀림 사이에서 서로 마주보게 된다. 몽골인들은 기병작전을 제대로 벌이기 어렵다는 것을 발견한다. 상대방은 계속하여 후방에서의 지원을 받을 수가 있었다. 자신이 휴대한 보급이 끊어지기 전에 하루빨리 전투를 벌여 해결해야만 했다. 차카타이군대는 계속 델리인들의 방어선의 곳곳에서 공격을 하고 도발을 했다. 상대방의 군대를 진지에서 끌어내려는 것이다.


몽골기병이 계속하여 도발하자, 마침내 델리군대의 지휘관도 더 이상 참고 있지는 않았다. 알라우딘과 평소에 갈등이 있던 자파르칸의 부대가 정거리추격과정에서 대오를 벗어나는 일이 발생한다. 그 본인과 천명의 중기병이 앞장서서 대량의 보병과 전투코끼리를 훨씬 앞서간다. 심지어 많은 지방의 기병들도 그들을 따라갈 수 없었다. 몽골인은 그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자주 뒤를 돌아보며 화살을 쏘았다. 부지불식간에, 쌍방은 이미 싸우다 쉬기를 반복하면서 55킬로미터 거리를 달렸다. 그후 차카타이군대의 양날개를 벌여 자파르칸의 3킬로미터 거리에서 포위를 완성한다. 대부분의 델리군데는 서로간의 연락이 끊겨서, 대규모병산으로 봉쇄선을 돌파할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자파르칸은 자신의 처지가 어렵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신과 소수의 부대가 겹겹의 포위망에 들어가 버린 것이다. 아마도 전멸할 수 있는 상황일 것이다. 자신의 공격은 이미 술탄의 명령을 어긴 것이므로, 자파르칸과 주변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성공적으로 포위망을 돌파하더라도 군법에 따라 처형될 것이라는 점을 잘 알았다. 그리하여 짧은 시간동안 협의한 후, 모든 사람이 새로 말을 타고, 그들을 포위하고 있는 몽골인들을 향해 자살성의 돌격을 감행한다.


기실 최후의 생사격전을 벌이기 전에, 몽골인은 자파르칸에게 항복할 기회를 주었다. 이 지방실력파를 이용해서 델리술탄국의 내부귀족을 분열시킬 필요가 있었고, 또한 용사에 대한 존경심도 있어서, 차카타이왕자는 그에게 좋은 귀족대우를 해주겠다고 제안한다. 그러나 자파르칸은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여전히 자신의 최후전투를 준비한다. 기병전투에서 무섭기로 유명한 몽골철기를 맞이하여, 이들 돌궐기병은 근접전투에서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다. 더 좋은 갑옷과 엄격한 훈련으로 그들의 화살은 상대방에 밀리지 않았다. 몽골인들은 유목민족이지만, 전문적인 군사훈련방면에서는 전문적인 전쟁노예와 비교할 수 없었다. 게다가 주위에서는 델리군대가 증원을 오고 있어서, 싸우는데 아주 힘들었다. 더더구나 몽골군대가 걱정한 것은 알라우딘의 부대가 이때 출격한다면, 장래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격이나 행동이 냉혹했던 알라우딘은 어떤 부대도 증원을 보내지 않았다. 비록 전선의 상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그는 정적을 위하여 전체 군대를 보내는 모험을 하려고 하지 않은 것이다. 특히 자파르칸은 군령을 어겼고, 그의 권위에 타격을 입었다. 이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행위이다. 그리하여, 델리의 주력군대는 진영내에서 굳게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몽골인들이 계속하여 부대를 투입하여 천명의 고군(孤軍)을 포위하도록 놔둔다. 자파르칸의 기병은 이미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여 200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들의 말도 중상을 입어 계속 싸울 수가 없었다. 이 완강한 군사우두머리는 남은 인원을 이끌고 보행으로 싸운다. 돌격해 들어오는 차카타이의 기병들과 목숨을 내걸고 끝까지 싸운다. 결국 날카로운 화살이 그의 갑옷 사이의 빈틈을 뚫고 그의 심장에 꽂힌다. 델리술탄국의 이 부대는 이렇게 모조리 목숨을 잃는다. 다만 몽골인들은 그들을 소멸시키기 위하여 몇 배의 댓가를 치러야 했다.


그후, 몽골인은 머리를 돌려 기병에서 떨어져 나간 전투코끼리와 보병을 공격한다. 마찬가지로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상대방을 원래의 위치로 밀어낸다. 그들은 심지어 델리주력군대의 진영으로 공격을 감행한다. 그러나 기병은 도랑과 장애물을 넘을 수가 없었다. 일부 델리의 장군들은 자파르칸의 죽음에 슬퍼했고, 알라우딘에게 델리성으로 물러나서 지키자고 건의한다. 다만 술탄은 자신이 한걸음도 물러날 수 없다고 말하며 누구든 성을 나가서 전투를 벌이는 것을 엄금한다고 명한다. 반대로 몽골인들은 조급하게 강공을 벌이다가 많은 병력을 잃는다. 결국은 병사들을 거두어 들이고, 자신의 진지로 물러나서 명을 기다릴 수밖에 없게 된다. 이 과정에서, 총지휘를 맡은 쿠틀룩 왕자는 중상을 입고, 금방 본진의 진영내에서 죽어버린다.


3일동안 대치하고 있다가 차카타이군대는 밤에 조용히 철수한다. 그들은 남하하면서 싸웠지만 아무런 수확도 거두지 못한다. 다만 손실은 아주 컸다. 자파르칸의 부대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것을 보고, 몽골인들은 자신들이 최강의 기병부대가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자신의 보급선이 위기에 처하고, 델리의 주력군은 아무런 손상도 입지 않은 것을 보자, 차카타이군대는 위험한 전선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게 된다.


키리전투의 승리를 거둔 알라우딘은 자파르칸의 전사에 표창을 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행위가 충동적이고 어리석었다며 반면교사를 삼아야 한다고 한다.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몽골인들이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기회를 잡아서 권토중래할 것이다. 결국 6년후인 1305년 차카타이한국은 과연 새로이 5만의 군대를 파견한다.


그때, 몽골인은 펀잡 도시에 대한 강공을 포기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방어준비가 되어 있지 않던 델리도 공격한다. 그들 군대는 인도의 방어선을 넘어서 동쪽의 히말라야산록까지 가서 갠지스유역을 향하여 진격한다. 그 결과, 3만명의 델리술탄 휘하여 길만노예기병이 달려와서 막는다. 몽골인은 암로하전투에서 참패를 당한다. 2만명이 그 자리에서 전사하고, 9천명이상이 포로로 잡힌다. 알라우딘은 특별히 성대한 행진을 준비하여, 전쟁포로들을 묶어서 사람들 중앙을 지나가게 한다. 일부 귀족들은 인도에 투항하며, 많은 사람들은 길만노예기병부대에 편입된다. 그러나 적지 않은 사람들은 강제로 보루건설등 방어공사에 투입된다. 그리고 항복하지 않는 자들은 코끼리에게 밟혀서 머리가 부서져 죽는다.


몽골인의 패색은 기실 1299년에 명확했다. 델리술탄국내부는 비록 자주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지만, 차카타이한국이 공격할 때마다 성공적으로 막아낸다. 북방에서 온 침입자들은 14세기말 티무르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북인도를 피로 씻을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