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장금(張嶔)
원나라 지정6년(1346), 매년 대도(大都)로 쌀 5백만석을 운송하는 대원왕조의 '주동맥'이라고 부를 수 있는 '회통하(會通河)에서 놀라운 일막이 벌어진다. 겨우 40명으로 조직된 마적(馬賊)이 천리 회통하의 양안을 내달리며, 전후로 선박 3백여척을 약탈한다. 풍성하게 약탈품을 챙긴 것이라 할 만하다. 운하를 수비하는 원나라의 관군은 이때 무엇을 하였는가? 매번 마적이 나타나기만 하면 숨기 바빴다. 양회운사(兩淮運使)인 송문찬(宋文瓚)은 비분강개하여 이렇게 소리친다: "청컨대 능력있는 신하(能臣)를 뽑아서 건장한 병사(壯勇) 천기(騎)를 이끌고 체포해 주십시오." 그러면 원나라 조정은 어떻게 했을까? 사료에는 냉랭한 두 글자가 적혀 있다. "듣지 않았다(不聽)"
이렇게 약탈당하는데도, 원나라는 그냥 놔두었단 말인가? 그것은 송문찬이 간절히 바랬던 그 '능신'과 '장용'이 정말 없었기 때문이다.
이 해는 원나라말기의 농민반란이 일어난지 겨우 5년이 되는 해였다.
기실, 이런 '소규모 도적이 큰 사건을 일으키는' 일은 이 때의 원나라에서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같은 지정6년, 모산(茅山)에서 필사(畢四)등 삽십육명의 도적이 도관(道觀)을 차지하고 원나라 관군과 삼개월동안 버티며 사웠다. 이때 '관군을 무수히 많이 살상한다." 서주(徐州)에서는 곽화니적(郭伙你赤)이 삼백의 염도(鹽徒)를 이끌고 사방을 돌아다니며 서주, 숙주(宿州)등지를 횡행했다. 원나라는 각지의 병사를 끌어모아 소탕하려 했지만, 이들은 모두 싸우는 척만 할 뿐 "비록 적시에 통지를 보내도 모두 늦게 도착할 뿐이었다"
왜 이런 '소규모도적'을 상대하는데 이전에 엄청난 판도를 개척했던 원나라군대가 이런 쓰레기같은 지경에 이르렀을까? 이 일은 먼저 원나라의 군관(軍官)들에게 물어봐야 한다. 원나라의 군대는 원래 "장수가 그 부친의 옛 부대를 물려받는" 것을 전통으로 삼았다. 즉 아무리 전투를 잘해도 잘 태어나는 것만 못했다. 그 결과 '모조리 아직 젖냄새도 마르지 않은 자'들이 장수의 위치에 눌러앉아 있었다. 기본적으로 능력이 전혀 없는 이세들이다. 이런 자들이 군대를 장악하고 있다보니 원나라에는 이런 민요가 떠돌았다: "비상위비포(飛觴爲飛砲), 주령위군령(酒令爲軍令), 육진위군진(肉陣爲軍陣), 구가위개가(謳歌爲改嫁)" 그 군대의 모습이 어떨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런 쓰레기같은 군관들이 지휘하다보니 원나라군대는 부패가 가속화된다. 지정연간에 이르러, 원나라 대도를 수비하는 '팔위(八衛)' 즉 원나라의 최정예부대에 병력수를 제대로 채우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그러다보니 일단 일이 벌어지면 억지로 시민과 농부들을 붙잡아다 인원수를 채웠다. 붙잡아들인 사람으로 진용을 갖추는 것이다. 전투력은? 활을 구부려 화살 한발 쏠 수 없는 자들이었다. 이런 부대가 수십명의 용맹한 도적을 만나면, 그저 도망치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을 것이다.
이런 놀라운 광경이 바로 원나라의 망국을 이끌었다. 놀랍고도 치명적인 사인(死因)은 바로, "관직이 높을수록 더욱 멍청하다"
비록 역대왕조의 말기에 이르면 관리들의 자질이 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원나라의 경우에는 관리들의 멍청함이 그 도를 넘었다. 원나라군관들의 형편없는 모습마저도 소아과 수준으로 보일 정도이다. 관료사회 각급 아문의 관료들은 더더욱 대단한 모습들을 보여주었다.
왜 이렇게 말하는가? 원세조 쿠빌라이가 재위하고 있을 때, 정말 웃지도 울지도 못할 일이 벌어진 바 있다: 당시 원나라의 남방명사인 장백순(張伯淳)은 원세조에게 '수십조의 제안을 담은 글'을 올린다. 그중 하나는 바로 "파용관(罷冗官)" 즉 쓸데없는 관리를 파면하라는 것이다. 이 말이 나오자마자 원나라의 권력귀족들은 난리가 난다. "어디 멀리 있는 물건인데, 감히 내 관직을 뺏으려 해?" 그리하여 이 일은 흐지부지되고 만다. 원나라의 관료기구는 부풀어오르는 풍선과도 같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맹령하게 팽창한다.
팽창하는 것보다 더욱 무서운 일은 관리들의 IQ가 갈수록 떨어진다는 것이다. 원나라는 근 1세기동안 과거제도를 여러번 중단과 폐지를 거듭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관직들을 권력귀족의 자제들이 맡는다. 그리고 과거출신의 관리라고 하더라도, 원나라의 관료체제 속에서 비주류가 될 수밖에 없다. 주류는 모두 권력귀족자제들이다. 이들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가만히 누워 있어도 관직이 떨어진다. 일을 엉망진창으로 처리해도, 관계만 좋으면, 계속 승진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원나라의 이런 특수한 제도하에서 관리들은 정점 더 엉망이 되어 간다. 고위층의 귀족자제들은 대다수가 공부를 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글자를 읽을 줄도 몰랐다. <원사>에서는 이렇게 형용한다. "성신(省臣)중에서 글자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그리고 이 행성(行省)은 바로 원나라의 통치중심인 강회행성(江淮行省)이다. 성급의 관리들이 문맹으로 가득찼다는 것이다. 부, 현급의 관리들은 더더욱 글자를 알지 못해서 왕(王)과 장(張)도 구분할 수 없었다." 몇 글자만 쓸 줄아아도 '문화인'에 속한다. 바꾸어 말하면 원나라말기 관복을 입었다면 십중팔구는 문맹이다.
글자를 다 읽지 못하는데, 일상업무는 어떻게 처리하는가? 절대다수의 원나라관리들은 기본적으로 업무를 보지 않았고, 그저 돈만 챙겼다. 하고싶은대로 했다. 그러다보니 일상적인 행정사무는 모조리 하급관리들이 처리한다. 원래 권력체계에서 원래 끼어들기도 힘든 '하급관리'들은 이를 통해서 '비지니스기회'를 잡는다. 손에 쥐고 있는 권력을 이용하여, 여러가지 방법으로 돈을 긁어모은다. 각급의 행정장관은 기본적으로 돈을 긁어모으는 도구에 불과했다. 원말명초의 학자인 서일기(徐一夔)는 이렇게 형용한다: "원나라말기의 현성(縣城)에서, 현령(縣令)은 기본적으로 모두 허수아비이고, 일상사무는 모조리 하급관리들이 처리했다. 관리들은 도장을 찍는 것을 제외하고 기본적으로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이처럼 '고위관료는 멍청하고, 하급관리는 간사한" 현상이 원나라말기의 기본적인 사회형태가 된다. 고위관료들은 돈만 긁어모으면서 업무에 신경쓰지 않고, 하급관리들은 호가호위(狐假虎威)했다. 가련한 백성들만이 괴로울 뿐이었다. 그리하여 관리들과 도적이 서로 많이 가져가려고 다투었다. 부모관이 아니라 도적이나 다를 바 없었다.
원나라의 민원은 이렇게 '관리들이 너무 멍청했다'는 놀라운 현상 속에서 한해 한해 축적되었다. 결국 원나라말기 황하가에서 누군가 소리치기 시작한 후 전국을 석권하는 원말 농민반란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관리들이 멍청해서' 망국에 이르렀다? 이 점은 깊이 생각해보아야할 이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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