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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원)

원나라때 이슬람과의 천문학 교류와 접촉

by 중은우시 2023. 6. 18.

글: 강효원(江曉原)

 

징기스칸이 남정북전(南征北戰)하면서, 유라시아대륙을 가로지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그의 뒤에는 중국을 차지한 원(元)과 유럽, 아시아의 여러 칸국이 병립하고 있었다. 원나라는 명목상 종주국이고, 각국간의 문화와 교류가 아주 활발했다. 이 시기의 중국천문학과 이슬람천문학간의 접촉에 관하여 국내외의 학자들이 모두 기술한 바 있다. 전체적으로 사람들에게 주는 인상은 이런 접촉이 존재한 것은 확실하지만, 적지 않은 구체적인 이슈는 아직 명확한 단서나 결론이 없다. 본문에서는 대체로 연대순서에 따라, 비교적 중요한 6가지 이슈에 대하여 간략하게 기술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이 시기의 중국과 이슬람천문학간의 교류와 접촉에 대하여 더욱 전면적이고 분명한 인식을 얻고자 한다.

 

1. 야율초재(耶律楚材)와 구처기(丘處機)의 중앙아시아에서의 천문활동

 

야율초재와 구처기라는 두 유명인물이 중앙아시아에서 천문활동에 종사한 기록은 아주 중요한 배경자료이다. 그들이 표명하는 것은 원나라때 중국과 이슬람천문학이 접촉했고, 쿠빌라이시대에 전성기가 도래하기 전에, 일찌감치 활발하게 접촉이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야율초재(1189-1243), 원래 거란인이고, 요나라황실의 직계자손이다. 먼저 금나라에서 관리로 있다가, 나중에 몽골의 부름에 응한다. 그리하여 1219년, 징기스칸의 성점학(星占學)과 의학(醫學) 고문이 되어, 대군을 따라 서역을 원정한다. 서역원정도중에 그는 이슬람천문학자와 월식(月蝕)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벌인다. <원사.야율초재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서역의 역인(曆人)이 아룄다: 오월 보름(五月望), 밤에 월식이 일어난다(夜月當蝕), 야율초재는 아니라고 했다. 결국 월식이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 해 시월, 야율초재가 말하기를 월식이 일어난다고 했다, 서역인은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 그 때가 되자 과연 윌식이 팔푼(八分) 일어난다."

 

이 일은 징기스칸이 서역출정을 시작한 다음 해, 즉 1220년에 발생했다. 이는 <원사.역지일>의 "경진세(庚辰歲), 태조서정(太祖西征), 오월망(五月望), 월식불효(月蝕不效)...."의 기록으로 추단한 것이다. 발생한 장소는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경내의 사마르칸드(Smarkand)이다. 이는 야율초재가 스스로 쓴 서행기록 <서유록(西遊錄)>(향달 교주, 중화서국 1981년판)의 행적으로 추단할 수도 있다. 

 

야율초재는 중국전통천문학방면에 조예가 아주 깊었다. 원나라초기에 금나라의 <대명력(大明曆)>을 계속 사용하였는데, 조금 지나자 오차가 자주 나타났다. 위에 언급한 1220년 오월의 '월식불효'가 그 예이다. 그리하여 야율초재는 <서정경오원력(西征庚午元曆)>(<원사.역지>의 5 내지 6)을 만든다. 그중 처음 처리한 것이 지리경도의 차이로 인하여 나타나는 시간차이다. 이는 아마도 서방천문학방법이 중국전통천문학체계에 끼친 영향중 하나의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리경도차와 시간차의 문제는 고대그리스천문학에서 일찌감치 처리할 수 있었고, 고대그리스천문학의 일맥을 이어받은 이슬람천문학도 마찬가지였다.

 

또 다른 문헌기록에 따르면, 야율초재 본인도 이슬람역법에 능통했다. 원나라 도종의(陶宗儀)의 <남촌철경록(南村輟耕錄)> 권9 <마답파력(麻答把曆)>조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야율문정(耶律文正, 야율초재의 시호가 문정공임)은 성력(星曆), 서복(筮卜), 잡산(雜算), 내산(內算), 음률(音律), 유석(儒釋)에 뛰어났다. 이국(異國)의 책도 모르는 것이 없었다. 일찌기 말하기를 서역의 역법은 중국보다 오성이 밀집되어 있다고 했다. 그리하여 <마답파력>을 만드니 회골역(回鶻曆)의 이름이다."

 

야율초재가 '서역역인'과의 두 차래 논쟁에서 우세를 점한 것을 보면, 그는 중국전통의 천문학과 이슬람천문학을 모두 알고 있었던 것같다. 그리하여 지피지기로 확실하게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야율초재가 징기스칸을 따라 서역정벌에 나선 것과 거의 동시에, 또 다른 저명한 역사인물 구처기(1148-1227)도 중앙아시아로 가는 길에 올랐다. 그는 명을 받아 징기스칸에게 도를 강의하기 위해 가는 중이었다. 구처기는 1221년 연말에 사마르칸드에 도착한다. 야율초재와 앞뒤로 이어서 도착했다고 말할 수 있다. 구처기는 그 도시에서 현지의 천문학자들과 그해 오월에 발생한 일편식(日偏食)에 대하여(양력 5월 23일)에 대하여 얘기를 나누었다. <장춘진인서유기> 권상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사미사간(邪米思干, 즉 사마르칸드)에 도착했다.....당시 산력자(算曆者)가 곁에 있었는데, 스승(구처기를 가리킴)은 오월초하루(五月朔) 일식에 대하여 물었다.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진시(辰時)에 일식이 육푼(六分)정도 일어났다'고 하였다. 스승이 말하기를, "이전에 육국하(陸局河)에 있을 때는 오시에 일식으로 해가 보이지 않았다고 했고, 서남으로 금산(金山)에 이르렀을 때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사시(巳時)에 칠푼이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이 세 곳에서 본 것이 각각 달랐다.....지금 생각해보니, 그 아래에 있으면 모두 가린 것으로보이고, 주변으로 천리 멀어지면 점점 줄어든다. 마치 선예등(扇翳燈)처럼 선영이 미치는 곳에는 빛이 없으나, 그 곁으로 점점 멀어지면 빛이 점점 늘어나는 것과 같다."

 

구처기는 이때 73세의 고령이다. 만리를 가는 동안에도 천문학문제를 고찰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를 보면 그도 이 분야에 대한 흥미가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일식이 지리적 위치가 다름에 따라 서로 다른 식분(食分)을 본다는 것을 해석하고 비유했는데, 완전히 정확했다.

 

야율초재와 구처기는 모두 사마르칸드에서 현지의 천문학자들과 접촉하고 교류했다. 이 사실은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 150년이후, 이 곳은 신흥 테무르왕조의 수도가 되고, 울루그 베그(Ulugh Beg)가 즉위할 때 이곳에는 규모가 거대한 천문대가 건설된다(1420년), 울루그 베그는 직접 이 일을 주재했고, 관측을 통해, 저명한 <울루그베그천체표>를 만든다. 거기에는 서방천문사상 프톨레미이후 천여년간 최초의 독립적인 항성표였다. 그래서 사마르칸드는 장기간 강한 천문학전통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라가천문대의 중국학자는 누구인가?

 

13세기중엽, 징기스칸의 손자 훌레구(Hulagu, 혹은 Hulegu)는 대거 서역정벌에 나선다. 1258년 바그다드를 함락시키고, 압바스왕조의 칼리파정권을 무너뜨리고, 일칸국이 흥기한다. 저명한 이슬람학자 나시르 알딘 알투시(Nasir al-Din al-Tusi)의 도움을 받아 훌레구는 무공을 취한 후 문치를 시작한다. 일칸국의 수도 마라가(Maragha, 지금의 이란서북부 타브리즈의 서남쪽)에 당시 세계최일류의 천문대를 건설한다(1259년). 설비도 우수하고, 규모도 거대했으며 장서가 사십여만권에 이른다고 했다. 마라가천문대는 한때 이슬람세계의 학술중심이 되어, 세계각국의 학자들이 몰려와 연구에 종사했다.

 

조지 사튼(George Sarton)은 그의 <과학사서설(Introduction to the History of Science)>에서 이렇게 말했다. 마라가천문대에 일찌기 한 중국학자가 참여했었다. 그후 이 이슈는 자주 서방학자들에 의해 언급되었다. 다만 그 중국학자의 성명이나 신세내력은 지금까지도 고증되지 못하고 있다.

 

사튼에 따르면, C. M. D'Ohsson의 <몽골사>에 따르면, 중국천문학자가 훌레구를 따라 페르시아로 갔고, 마라가천문대의 중국학자는 그의 성명에 대한 음역인 Fao-moun-dji만 남아 있다고 했다. 이 사람의 신분을 확인할 수가 없으므로, 그의 한자성명이 원래 무슨 글자인지는 역음을 가지고 추단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조지프 니담(李約瑟)은 저작에서 "부맹길(傅孟吉, 현대중국발음은 Fu Meng Ji)"이라는 세 글자로 보았다. 

 

다시 소급해 올라가면 D'Ohsson의 주장은 다시 페르시아어의 편년사 <달인의 화원>에서 왔다. 이 책은 1317년에 만들어졌고, 모두 9권으로 되어 있다. 그중 8권이 <중국사>인데, 책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훌레구시대에 접어들어, 그들(중국)의 학자와 천문가가 그와 함께 이 땅(이란)으로 왔다. 그중 '선생'이라고 불리는 도밀지(屠密遲)가 있다. 학자 나시르 알딘 알투시는 훌레구의 명을 받아 <일칸국천문표>를 만들 때 그에게 중국의 천문학을 배웠다. 또한, 이슬람군주 Ghazan Mahmad Khan의 명령으로 <찬양받는 가잔 마흐마드칸역사>를 집필할 때, 라시드 알딘(Rashid al-Din) 승상은 중국학자 이대지(李大遲) 및 예극손(倪克孫)을 초청하였다. 그들 두 사람은 의학, 천문과 역사에 정통했고, 또한 중국에서 각종 서적을 가져와서 중국기년을 얘기했다. 연도와 갑자는 불확정적이다."

 

마라가천문대의 중국학자에 관하여, 위의 기록은 현재 찾아볼 수 있는 최초의 사료들이다. "도밀지" "이대지" "예극손"은 모두 페르시아어의 음역에 따라 추정한 한문성명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인지는 고증할 수가 없다. "도밀지" 즉 앞의 글에서의 "부맹길"이 <일칸국천문표>를 편찬한 것은 나시르 알딘 알투시가 마라가천문대에서 완성한 가장 중요한 업적이다. 이를 통해 <일칸국천문표>에는 중국천문학자의 공헌도 들어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다른 나라문자를 옮겨서 적다보면 사람의 이름을 발음하는데 크게 차이가 나게 된다. 정확하게 '도밀지' 혹은 '부맹길'이 누구인지 고증하려면 아마도 한문으로 된 사료가 새로 발굴되어야 할 것이다.

 

양종언어의 천문학문헌

 

니담은 일찌기 바그너(Wagner)의 기술을 인용하여, 옛날 러시아 풀코보천문대에는 2부의 필사본 천문학문헌이 있다. 두 부의 필사본은 내용이 같으며 모두 1204년부터 일, 월, 오대행성의 운행표이고, 쓰여진 연대는 약 1261년이다. 주목할 점은 두 부의 필사본이 한부는 아랍어(페르시아어)로 쓰여 있고, 한부는 한문으로 쓰여 있다는 것이다. 1261년은 쿠빌라이가 즉위한 다음 해이다. 니담의 추정으로 이 두 부의 필사본은 아마도 찰마로정(札馬魯丁)과 곽수경(郭守敬)이 합작하여 만든 것이라고 보았다. 다만 폴코보천문대은 제2차세계대전때 불에 타버린다. 니담은 그저 "이 필사본이 재로 화하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이전에 사튼은 또 다른 이 시기의 양종언어의 천문학문헌을 보도한 바 있다. 이는 이슬람천문학자 사마르칸디(Ata ibn Ahmad al-Samarqandi)가 1362년 원나라의 한 왕자를 위하여 쓴 천문학 저작이다. 그중에는 월구운동표가 포함되어 있다. 친필원고 원본은 현재 파리에 보관되어 있고, 사튼은 이 책이 일부 인영을 발표했다. 거기에는 아랍어정문 옆에 몽골어로 주석이 달려 있다. 제목에는 한문이 있다. 이 원나라의 몽골왕자는 전해지기로 징기스칸과 쿠빌라이의 직계후손인 아라테나(阿剌忒納)라고 한다. 이 문헌의 천문학내용은 아직 전문적인 연구결과가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찰마로정(札馬魯丁)과 그가 보내준 7개의 서역천문기구

 

원세조 쿠빌라이가 등극한 후 7년째 되던 해(1267년), 이슬람천문학자 찰마로정이 서역의 천문기구 7개를 바친다. 7개 기구의 원래명칭의 음역, 의역, 형제용도는 모두 <원사.천문지>에 기록되어 있어, 국내외학자들의 연구흥미를 끈 바 있다. 7개의 기구는 이미 존재하지 않으므로, 각 기구의 성질과 용도등에 대하여 학자들의 의견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여기에는 간략하게 7개 기구의 원명음역, W. Hartner가 정한 아랍어원문대음, 의역(<원사.천문지>에 근거하여)을 소개하기로 한다:

 

1. 차독합랄길(咱禿哈剌吉) Dhatu al-halaq-i, 한어 혼천의(混天儀). 니담은 '적도식 혼의'라고 보았고, 중국학자들은 '황도식 혼의'로 본다. 고대그리스천문학의 대표적인 관측기구이다.

 

2. 차독삭팔태(咱禿朔八台) Dhatu'sh-shu'batai, 한어 측험주천성요지기(測驗週天星曜之器). 국내외학자들은 프톨레미가 <Almagest>에서 언급한 장척(長尺, Organon parallacticon)이라고 본다.

 

3. 노합마역묘요지(魯哈麻亦渺凹只) Rukhamah-i-mu'-wajja, 한어 춘추분귀영당(春秋分晷影堂). 춘분, 추분의 정확한 시각을 측정하는 기구, 하나의 밀폐된 집(단지 천정의 정동서방향으로 틈을 낸다)과 합하여 하나가 된다.

 

4. 노합마역목사탑여(魯哈麻亦木思塔余), Rukhamah-i-mustawiya. 한어 동하지귀영당(冬夏至晷影堂). 동지, 하지의 정확한 시각을 측정하는 기구, 위의 기구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밀폐된 집(단지 천정의 정남북방향으로 틈을 낸다)와 합하여 하나가 된다.

 

5. 고래역살마(苦來亦撒麻). Kura-i-sama' 한어 혼천도(渾天圖). 국내외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없다. 즉 중국과 서방의 고대에 모두 있었던 천구의(天球儀)이다.

 

6. 고래역아아자(苦來亦阿兒子) Kura-i-ard. 한어 지리지(地理誌). 즉 지구의(地球儀)라는데 학자들도 이의가 없다.

 

7. 올속도아랄(兀速都兒剌) al-Ustulab. 한어 정주야시각지기(定晝夜時刻之器). 실제로 중세기 아랍세계와 유럽에서 모두 크게 유행한 성반(星盤. astrolabe)이다. 

 

위의 7개 기구중에서 제1,2,5,6은 모두 고대그리스천문학에서 이미 형태를 갖추고 채용된 것들이다. 그후 계속 전승되면서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아랍천문학자들도 이를 계승했다; 제3,4의 두 가지는 아주 분명하게 아랍특색이 드러난다. 제7의 성반은 고대그리스에도 이미 있었지만, 나중에 중세기 아랍천문학의 특색중 하나가 된다. 아랍의 장인들이 만든 정교한 성반은 명성이 아주 높았다. 이처럼 연원이 있는 7가지 기구가 중국에 전래되었다는 것은 의미가 상당히 크다.

 

찰마로정이 천문기구 7개를 바친 후 4년이 지나, 쿠빌라이는 상도(上都, 지금의 몽골 다륜현 동남경내)에 회회사천대(回回司天臺)를 설립하도록 한다(1271년). 그리고 찰마로정으로 하여금 사천대의 업무를 책임지게 한다. 원나라가 멸망하고, 명군이 상도를 점령하고나서 회회사천대의 주요인원을 남경으로 데려가 명나라를 위해 일하게 한다. 그러나 이 사천대의 서역천문기구의 행방은 지금까지도 아무런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원나라 대도의 태사원(太史院)의 천문기구도 모두 남경으로 운송했었기 때문에, 어떤 학자는 회회사천대의 서역천문기구도 아마 유사한 경력을 거쳐 남경으로 갔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로는 두 개의 귀영당이나 장척같은 류는 옮겨갔을 가능성이 아주 적었을 것이다.

 

그럼 이 중국사서의 찰마로정은 어떤 사람인가? 학자들도 지금까지 아는 것이 아주 적다. 중국학자는 기본적으로 니담의 판단을 받아들여, 찰마로정은 원래 마라가천문대의 천문학자인데, 훌레구 혹은 그 후계자의 명을 받아 파견되어, 원세조 쿠빌라이(즉, 훌레구의 형)를 위해 일하도록 보낸 것이라고 본다.

 

나중에 이적(李迪)이 이런 의견을 내놓는다: 찰마로정은 바로 라시드 앗딘의 <사집(Jami al-Tawatikh)>에 나오는 자말알딘(Jamal al-Din, 札馬剌丁)이라는 것이다. 그는 1249년-1252년에 중국으로 가서 몽케칸의 아래에서 일한다. 나중에 쿠빌라이를 위해 일한다. 쿠빌라이가 칸에 오른 후, 다시 자말알딘을 일칸국으로 돌려보내어, 마라가천문대를 참관하고 공부하게 한다. 1267년에 이르러 마라가천문대의 새로운 성과물을 가지고(7개의 천문기구, 그리고 <만년력>), 쿠빌라이궁정으로 돌아온다.

 

회회사천대의 외국천문학서적

 

상도의 회회사천대에는 일칸국의 마라가천문대와 가까운 관계에 있으면서, 이슬람천문학자 찰마로정이 책임자였다. 그리고 전문적으로 이슬람천문학을 업무로 삼았다. 그것은 이슬람천문학사상 상당히 중요한 지위를 점하고 있다. 그것은 마라가천문대 그리고 나중의 테무르왕조의 사마르칸드천문대의 사이에 있는 중간역이다. 그것은 역사상 중국천문학과 이슬람천문학간의 교류에서도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그것은 다음의 몇 가지 일을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지원10년(1273년) 윤유월 십팔일, 태보(太保)가 전하기를 성지를 받들어, "회회, 한아(漢兒) 두 사천대는 비서감의 관리를 받으라."고 한다.

 

두개의 천문학계통을 가진 완전히 다른 천문대가 같은 상급행정기관인 비서감의 지휘감독을 받는다. 이는 세계천문학사에서도 보기 드문 일로 재미있는 현상이다. 아쉽게도, 이런 특수한 지위와 의미를 지닌 천문대에 대하여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것은 아주 적다는 점이다.

 

이들 유한한 정보들 중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원나라때 <비서감지>에 기재된 장서목록이다. 이들 서적은 모두 회회사천대에 소장하고 있던 것이고, 책제목에서 천문수학부분은 모두 13종의 저작이 있다:

 

1. 올홀렬(兀忽列)의 <사벽산법단수(四擘算法段數)> 15부

2. 한리속굴(罕里速窟)의 <윤해산법단목(允解算法段目)> 3부

3. 살유나한답석아(撒唯那罕答昔牙)의 <제반산법단목병의식(諸般算法段目幷儀式) 17부

4. 표자사(表者思)의 <조사천의식(造司天儀式)> 15부

5. 아감(阿堪)의 <결단제반재복(訣斷諸般灾福)> X부

6. 남목립(藍木立)의 <점복법도(占卜法度)> X부

7. 마탑합립(麻塔合立)의 <재복정의(灾福正義)> X부

8. 해아척(海牙剔)의 <궁력법단수(窮曆法段數)> 7부

9. 가사필아(呵些必牙)의 <제반산법(諸般算法)> 8부

10. <적척제가력(積尺諸家曆) 48부

11. 속와리가와걸필(速瓦里可瓦乞必)의 <성찬(星纂)> 4부

12. 살나적아랄특(撒那的阿剌忒)의 <조혼의향루(造渾儀香漏)> 8부

13. 살비나(撒非那)의 <제반법도찬요(諸般法度纂要)> 12부

 

여기의 '부(部)'는 대체로 '권(卷)'이다.제5,6,7 3종류의 부수는 비어 있다. '본 비서대에서 가지고 있는 경서합계는 195부'라고 되어 있으므로 나머지 10종의 부수총합을 빼면 이 3종서적은 모두 58부임을 알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책제목중 음역된 인명과 의역된 서명은 모두 원문으로 환원시키기 어렵다. 그러므로 이 13종의 저작의 판별업무는 지금까지도 그다지 진전이 없다. 방호(方豪)는 제1종이 바로 저명한 유클리드의 <기하학원론>이라고 본다. 15부라는 것도 <기하학원론>의 15권과 부합한다. 이 판단은 아마도 믿을만 한 것같다. 또 어떤 사람은 책중에서 제4종이 아마도 프톨레미의 <알마게스트(천문학집대성)>라고 본다. 그러나 믿기 어려운 듯하다. 왜나하면, <조사천의식>은 확실히 천문기구제조를 얘기하는 것이고, 하물며 <알마게스트>는 전체 13권이므로 '15부'와는 숫자가 맞지 않는다.

 

이슬람천문학자의 곽수경 및 그 천문기구에 영향을 끼쳤는가?

 

찰마로정이 7개의 서역천문기구를 바친지 9년, 상도의 회회사천대가 건립된지 5년, 회회사천대와 한아사천대가 성지를 받들어 모두 비서감의 지휘감독을 받게된지 3년이 지나, 중국역사상 가장 위대한 천문학자중 한명인 곽수경은 명을 받들어, "한아사천대"를 위해 일련의 천문기구를 설계하고 제조한다. 3년후에 완성한다.(1276-1279). 이 천문기구는 여러 혁신적인 점이 있다. 예를 들어, 간의(簡儀), 앙의(仰儀), 정방안(正方案), 문규궤(門規几) 등이다. 곽수경이 천문기구를 제작한 것은 찰마로정이 서역천문기구를 바친 후이므로, 만든 각종 기구는 이전의 중국에서 볼 수 없었던 것들이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곽수경의 천문기구는 이슬람천문학의 영향을 받았는지 여부'가 문제된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중국학자들의 주요의견은 부정적이다. 찰마로정이 바친 천문기구는 "모두 중국전통의 천문학과 결합되지 않았다"고 본다. 원인은 두 가지이다: 첫째, 이들 황도체계의 천문기구는 중국의 적도체계의 천문기구와 부합하지 않는다. 둘째, 서역천문기구를 사용하는데 필요한 숫자지식등이 중국인들에게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외국학자들중에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M Johnson은 명확하게 말한다: "1279년 천문기구의 설계자들은 그들이 잘 알고 있는 무슬림기술을 이용하는 것을 거절했다." 니담의 이 문제에 대한 태도는 불명확하다. 예를 들어, 간의가 아랍의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하여 그는 증거가 부족하다고 말하면서도 '일체의 방증으로 보면, 확실히 그러하다(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다만 이들 방증이 도대체 무엇인지는 그가 말하지 않았다.

 

필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겉으로 보면, 곽수경의 천문기구중 이슬람천문학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반대로 분명하게 그것들은 중국전통의 천문기구와 일맥상전한다. 이에 대하여 상당히 유력한 해석을 내놓을 수 있다: 

 

전술한 한,한 두 사천대를 같이 비서감의 지휘감독을 받게 한 것이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일은 곽수경과 찰마로정 그리고 그들이 이끄는 한, 회 천문학자들이 동일업종의 경쟁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곽수경이 명을 받들어 별도로 천문기구를 제작했다면, 그는 '최대한' 적수의 영향을 거절했을 것이다. 그래야 그와 적수간에 각자 자신의 장점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고, 그를 통해 상대를 뛰어넘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이슬람천문기구의 영향을 받아들이게 되면, 상대방에게 모방했다는 지적을 받고, 기술이 자신들만 못하다고 지적받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아사천대'는 경쟁에서 자립할 수가 없게 된다.

 

다만, 다른 한편으로, 필자는 또한 간접적인 층면에서 말하자면, 곽수경이 아랍천문학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본다. 여기에서는 두 가지 사례를 들어 설명하겠다:

 

첫째는 간의(簡儀)이다. 간의의 혁신은 '간(簡)'에 있다. 더 이상 여러개를 중헙해서 하나의 천문기구로 여러가지 작용을 하던 것을 버리고, 하나의 기구로 한가지 기능을 갖도록 했다. 간의는 실제로 동일한 바닥위에 두 개의 분립측량기구를 놓는 것이다: 적도경위의와 지평경위의. 이런 하나의 기구로 하나의 작용을 하는 스타일은 유럽천문기구의 전통적인 스타일이다. 찰마로정이 바친 7가지 천문기구부터 나중에 예수회 선교사 남회인(南懷仁, F. Verbiest)이 강희제의 명으로 만든 육의(六儀, 지금도 북경 고관상대에 보존되어 있다)는 모두 이런 스타일을 볼 수 있다.

 

둘째는 고표(高表)이다. 찰마로정의 7가지 천문기구중 '동하지귀영당'이 있고, 그 기능은 중국에서 오래된 규표(圭表)와 같다. 다만 정확도가 비교적 높다. 곽수경은 배우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전통적인 규표에 개선을 했다. 그의 방법은 하남 등봉(登封)으로 가서 거대한 고표와 양천척(量天尺)를 만들었다(즉, 규표). 다만 모두 알다시피, 거대화는 아랍천문기구의 특징중 하나이다.

 

위의 두 가지 예에서 하나는 아랍천문학이 전달해준 유럽스타일이고, 하나는 아랍천문학 자체적으로 형성된 스타일이다. 그것들은 모두 이슬람천문학이 곽수경에게 끼친 간접적인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당연히 더 확실한 증거를 찾아내기 전에는 이상의 견해를 정설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몽골정복을 계기로, 유라시아대륙에서 동서방천문학의 교류가 진행된다. 이는 아직 충분히 연구검토되지 않은 주제이다. 이번 교류의 역사적 사실, 유적, 영향, 의미등등은 모두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것은 빙산의 일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