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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전)

주소주(周小舟)와 왕조국(王兆國)

by 중은우시 2020. 10. 10.

글: 장효웅(張效雄)

 

관료사회의 승진과 좌천, 환해침부(宦海沉浮)는 어떤 때는 중대한 역사의 전환점에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그저 작은 일때문이기도 하다. 어떤 때는 부득이해서이다. 왜냐하면 '형세는 사람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스스로 자초한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성격이 그의 운명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주소주와 왕조국의 이야기는 바로 이런 점을 잘 설명해준다.

 

1959년 여산회의에서, 팽덕회는 모택동에게 "의견서"를 써서 제출한다. 그러다가 '반당집단'의 수령으로 타도당한다. 그 전에, 팽덕회는 호남으로 가서 조사연구할 때, 당시 호남성위 제1서기이던 주소주가 배동했다. 여러 문제에 대해 두 사람은 많은 부분을 공감한다.

 

모택동은 '팽대장군'과 결렬한 후, 주소주를 자기 편으로 회유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에게 <구지(丘遲)가 진백(陳伯)에게 보낸 서신>을 읽어보게 한다. 그에게 '미도지반(迷途知返)'(길을 잘못들었다는 것을 알고 되돌아오다)을 기대한 것이다. 그래서 반성문만 써내면 다시 호남으로 돌아가서 원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주소주는 눈물을 흘리며 모택동에게 말한다: "주석, 저는 그런 반성문을 쓸 수 없습니다. 팽총(팽덕회)의 의견서중 많은 자료는 제가 그에게 말해준 것입니다. 우리가 그에게 주석을 찾아서 말씀드리라고 했던 것입니다. 제 생각에 그의 신분이면 주석과 얘기했을 때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가 서신을 쓴 것입니다. 제가 어떻게 팽총을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모택동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 "너는 가보아라!"

 

그 전에, 주소주는 호남성위 비서장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나의 스승을 사랑한다. 나는 진리도 사랑한다. 모주석은 경애하는 나의 스승이다. 만일 모든 것을 스승의 말대로 하나도 바꾸지 않고 한다면, 잘못된 것까지 시정하지 않는다면, 인식은 발전할 수 없다. 그것은 진리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도 없고, 스승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번 여산회의에서, 모택동은 당의 이견을 계급투쟁의 고도로 끌어올려 다시 한번 숙청을 진행한다.

 

주소주는 "팽덕회반당집단분자", "팽황장주(彭黃張周, 팽덕회, 황극성, 장문천, 주소주)반당집단"의 주장이 된다. 회의후, 유양현 대요인민공사로 가서 개조를 받는다. '문혁'이 시작된 후, 조반파의 모욕을 받고, 1966년 12월 25일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 때 나이 54세였다.

 

왕조국은 등소평이 1980년에 발견한 인재이다. 당시 등소평이 호북제2자동차로 시찰을 갔는데, 당시 제2자동차 당위서기를 맡고 있던 황진아(黃振亞)가 등소평에게 보고할 때, 차상분공장의 왕조국이 1976년 "비등(批鄧),반격우경번안풍"때 끝까지 등소평을 비판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등소평의 관심을 끌고, 등소평은 그를 불러서 만난 후, 중앙정부에 그를 추천한다.

 

호요방이 호북에 시찰을 갔을 때, 왕조국을 만나보고, 그를 중앙당교로 보내 훈련받게 한다.

 

이때부터 왕조국의 관운은 형통한다. 1982년, 그가 공청단중앙의 일인자가 되었을 때, 후진타오는 단중앙서기처 상무서기였다. 그의 조수였다. 1984년, 중공중앙판공청주임이 되었을 때, 원자바오가 부주임이다. 역시 왕조국의 조수였다.

 

왕조국이 중공중앙판공청주임으로 있을 때 그는 호요방, 교석등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는다. 1985년 44세때, 왕조국은 중앙서기서 서기로 승진한다. 정식으로 중공의 고위영도자가 된 것이다. 이때부터 왕조국은 미래 중공총서기의 유력한 후보로 점쳐진다.

 

그러나,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왕조국은 호요방문제에 대한 태도에서 그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때부터 내리막길을 걷는다.

 

1987년, 호요방은 자산계급자유화에 대한 반대를 강력히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직당한다. 원로들이 호요방을 공격한다. 이때, 왕조국은 그의 위기를 노려, 호요방의 여러가지 '문제'를 고발하고, 심하게 비판한다. 이 일에 대하여 호요방은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는 어떻게 해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발탁하고 자신의 명을 들었으며, 자신이 '후계자'로 기대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호요방이 용서할 수 없는 인물이 2명 있다고 한다. 1명은 원로생활회를 주재하며 그가 하야하도록 압박한 중앙고문위원회 부주임 보이보(薄一波)이다. 보이보는 '문혁'때 '61인반당집단'의 구성원으로 지목되었으나, 호요방이 직접 그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고, 업무를 안배해 주었었다.

 

호요방이 용서할 수 없는 또 한명은 바로 왕조국이다. 왕조국이 호요방을 비판한 것은 정치도덕도 없고, 정치지혜도 없는 행위였다. 심지어 호요방의 하야를 압박한 원로들조차도 의외라고 여겼다.

 

진운(陳雲)은 정치국확대회의에서 호요방을 비판하는 발언을 들은 후, '고개를 흔들며' 붓을 들어 "소평동지 및 중앙상위: 이 사람은 고위층 정치생활에 부적합하니, 하층에 보내어 단련하기를 건의합니다"

 

'3기3락(三起三落)'을 경험한 등소평은 그렇게 남의 위기를 틈타서 이용하고, 낙정하석(落井下石)하는 인물에 대하여 당연히 좋게 보지 않았다. 그리하여 진운의 비시에 이렇게 추가한다; "진운동지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좋은 지방을 찾아서 보내십시오."

 

같은 해 9월, 왕조국은 중앙서기처 서기에서 면직되고, 복건성위 부서기, 성장으로 하방된다. 그는 북경의 정계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처음에 등소평은 왕조국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그가 지정하려는 격대후계자는 아마도 후진타오가 아니라 왕조국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견풍사타(見風使舵)'하다가 결국은 스스로를 망쳤다. 정치에 권모술수는 필요하다. 이우아사(爾虞我詐)도 필요하고, 구심투각(勾心鬪角)도 필요하다. 다만 더 많은 경우에 맹우가 필요하고, 성품이 필요하고, 도덕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