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왕우군(王友群)
1949년 신중국이 성립된 후, 상하이시공안국장은 5명이 연이어 모두 죄수가 된다: 제1대 공안국장 리스잉(李士英)은 7년간 감금되었고, 제2대 공안국장 양판은 25년간 감금되었고, 제3대 공안국장 쉬젠궈(許建國)은 7년간 감금되었고, 제4대 공안국장 황츠보(黃赤波)는 8년간 감금되었다.제5대공안국장 왕웨이궈(王維國)은 14년형을 받는다. 그중 가장 재수없는 것은 제2대 공안국장 양판이다.
1953년말, 양판은 돌연 모든 당정의 직무에서 면직된다. 1954년은 1년내내 집에서 쉬고 있었다. 1954년 12월 31일 양판은 당시 상하이시 공안국장으로 있던 쉬젠궈의 전화를 받고 나간다. 그 후 그는 돌아오지 못했고, 25년간 귀가하지 못한다.
1955년 원단(元旦), 쉬젠궈는 양판의 처인 리츙(李瓊)에게 이렇게 말한다. "양판은 베이징에 회의를 하러 갔다. 이 건에 대해서 당신은 누구에게도 모두 회의하러 갔다고 말해야 한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한다. "당신집에 아이들이 비교적 많은데, 아이들을 잘 단속해야 한다." 1955년 4월, 양판은 "판한녠(潘漢年), 양판반혁명집단사건"의 주범이 되어, 정식 체포되고, 1956년 16년형을 받는다.
얼마 후, 리츙은 당교(黨校)에서 학습을 받으라고 통지받는다. 실제로는 '조사를 받는 것'이다. 그녀에게 양판의 죄상을 실토하라는 말이다. 1955년 5월, 양판의 부친이 돌연 뇌일렬로 사망한다. 1955년 9월, 양판의 누나가 간경화로 복수가 차서 사망한다. 1956년, 양판의 모친은 남편, 딸이 연이어 죽고, 아들은 실종되자 우울증에 빠져 죽는다. 1957년, 양판의 3살된 아들이 병사한다.
리츙은 당교 '학습반'에서 나온 후, '반혁명가족'이기 때문에, 계속 공안계통에서 일할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상하이시 루완구중심의원으로 직장을 옮긴다. 중국정부는 양판의 아이들에 대하여 이렇게 규정한다: 첫째, 군대에 갈 수 없다. 둘째, 노동자가 될 수 없다. 셋째, 중학교 졸업후 계속 공부할 수 없다. 그후 여러 정치운동을 겪으면서, 리츙과 몇몇 아이들은 모두 농촌으로 가서 정착한다. 오직 둘째딸 양샤오슌(揚小舜)만이 천식병으로 농촌으로 가지 못하고, 중학교 졸업후 혼자서 집안에 머물로 8년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지냈다.
양판의 딸 양샤오차오(揚小朝)는 일찌감치 농촌으로 갔다. 그녀는 자신의 집안상황을 잘 알았다. 그리하여 열심히 일을 해서, 자신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려 했다. 그러나, 여러번 도시로 돌아가서 일할 기회나 계속 공부할 기회는 그녀와 관계가 없었다. 한 해는 그녀의 친구가 상하이로 친척을 만나러 갔다가 돌아온 친구가 돌연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현재 상해에는 한 가지 이야기가 떠돌고 있는데, 아주 재미있다. 들어볼래?" 모두 귀를 쫑긋 세우고 그녀가 하는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것은 잠복한 특무에 관한 이야기였고, 스토리는 우여곡절이 많고 재미있었다. 명칭은 <녹색의 시수(屍首)>였다. 그러나, 이야기가 끝나고, 진상이 다 밝혀지나, 그 친구는 돌연 양샤오차오에게 말한다. "너는 이 잠복한 특무가 누구인지 아느냐? 다른 사람이 아니고, 바로 너의 부친이다. 상하이시공안국장 양판." 양샤오차오는 놀라서 멍해진다.
양판이 잡혀간 후, 그의 처인 리츙이 일하는 직장의 상사는 여러번 전화를 걸어 그녀와 얘기한다. 그녀에게 양판과 이혼하라고 종용했다. 리츙의 답변은: "내가 가진 책임은 바로 두 가지이다, 하나는 본직업무를 잘 해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이들을 기르는 것이다. 양판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는 나는 생각지 않기로 했다. 다만, 내가 이혼라혀면 법원에 제소하고, 법정에 출석해야 하는데, 그런 건 내가 할 수 없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상부에서는 다시 전화를 걸어와서, 역시 이혼절차를 밟으라고 말한다.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한다. '조직'에서 나서서 법원의 사람이 찾아와서 당신의 이혼절차를 처리하게 해주겠다. 아이들의 앞날과 가정이 받는 압력을 고려해서, 이츙은 결국 이혼에 동의했다. 며칠 지난 후, 법원은 과연 법관을 그녀의 집으로 보내주어 그녀의 이혼절차를 처리해 주었다.
이혼절차를 끝낸 후, 리츙은 마음 속으로 생각한다. 이 일은 반드시 양판에게 설명해야 겠다. 그녀는 양판과 연락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승인을 받은 후, 그녀는 쪽지를 썼다. "우리의 현재 처지에 비추어, 나는 우리의 관계를 계속 유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5명의 아이는 모두 나 혼자 기르겠다." 얼마 후, 그녀는 양판이 쓴 쪽지를 받는다. 그 위에는 이 한마디만 쓰여 있었다: "아이가 6명인데, 왜 5명이라고 하느냐?"
양판이 끌려간 후, 리츙은 매년 새해를 맞을 때면 서신을 한통 써서 공안부에 주었고, 양판의 소식을 알아보았다. 서신에서 그녀는 항상 3가지 문제를 물어보았다: 첫째, 양판이 도대체 무슨 죄를 지은 것인지? 둘째, 그는 현재 어디에 있는지? 아직 살아있는지? 셋째, 만일 살아있다면, 가서 만나볼 수 있는지? 다만, 매년 썼지만, 매년 대답은 없었다. 1974년이 되어, 양판이 끌려간지 20년에 가까워졌을 때, 돌연 확인되지 않은 양판에 관한 소식이 들려온다. 하루는 양샤오차오의 친구가 그녀에게 말해준 것이다. 그녀의 부친은 아마도 후베이 샤양(沙洋)노동개조농장의 과수원대대에 있을 것이라고. 왜냐하면 거기에 미친 노인이 한 명 있는데 매일 장칭(江靑)을 욕하고, 자신이 상하이시 공안국장 양판이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후, 양판의 둘째딸 양샤오슌은 즉시 중앙영도에 서신을 서서 부친의 행방을 문의한다. 며칠 후, 상하이시공안국이 두 경찰이 그녀를 찾아왔다. 만난 후 첫 마디는 바로 "네가 중앙에 편지를 썼느냐?" 양샤오슌이 대답한다: "그렇습니다." 두 경찰은 즉시 그녀에게 험악하게 훈계한다: '편지는 이미 우리쪽으로 내려왔다. 너의 편지는 정말 이상하다. 먼저 네가 말하기를 이렇게 여러 해동안, 너는 부친이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모르고, 무슨 형을 받았는지 모르고, 현재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우리는 정말 이상하게 생각된다. '반양반혁명사건'이라는 이렇게 큰 사건은 전국인민이 모두 알고 있고, 그의 결론은 바로 '반혁명', '대내간(大內奸)'이 아니냐. 어떻게 너는 너희가 모른다고 말하느냐?"
양샤오슌은 이렇게 말한다: "그가 '반혁명', '대내간'이라 하더라도, 그가 도대체 무슨 죄목인지? 우리에게 말해줄 수 없느냐.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어떻게 그와 선을 긋고 관계를 단절하겠는가?" 두 경찰은 이렇게 대답한다: "양판이 범한 죄는 그 본인이 책임지는 것이고, 느는 그저 그와 선만 확실히 그으면 된다. 그가 도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까지 알 필요는 없다." 양샤오슌은 계속 묻는다: "그렇다면 그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 자녀들이 그와 연락하도록 해달라. 그가 하루빨리 인민의 대오로 돌아올 수 있게 해달라." 두 경찰은 한다디로 거절한다. "필요없다. 양판은 현재 개조를 받고 있다. 정서가 불안정하다. 네가 만일 그와 연락하게 되면, 그의 정서를 교란시키게 될 것이다."
1978년이 되어, 리츙은 당시 중공중앙조직부장 후야오방(胡耀邦)에게 편지를 쓴다. 편지를 보낸 20여일후, 상하이시위 조직부의 한 부부장이 그녀를 찾아와서 이렇게 말한다. "중앙조직부에서 전보를 보내왔다. 네가 후베이 샤양노동개조농장으로 가서 양판을 만나도 된다."
1978년 봄, 헤어진지 25년후, 리츙과 아들 양중핑(揚忠平)은 울퉁불퉁한 길에서 흔들리면서, 후베이성의 샤양노동개조농장을 찾아간다. 리츙은 이렇게 말한다. 그녀가 만난 양판은 그녀 기억 속의 양판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머리카락은 하얗고, 많이 수척했다. 가장 무서운 일은 눈이 이미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양판의 그런 모습을 보고, 그녀는 마음이 아팠다. 눈물을 참으면서, 양판의 이름을 부픈다. 아들도 아빠라고 불렀다. 다만 양판은 대답이 없었다. 지도원이 그에게 너의 가족이 너를 보러왔다고 말해주는데도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말했다: "아니다. 너희는 모두 가짜다. 너희는 오지 말라. 돌아가라." 리츙은 양판에게 소리쳤다: "우리는 모두 진짜다. 우리는 상하이에서 왔다." 다만 그녀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양판은 믿지 않았다. 리츙은 상심이 극에 달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양판을 보러 가는 길에, 나는 여러가지 나쁜 상황들을 생각해봤었다. 그러나, 나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양판이 정신분열증에 걸리고, 가장 가까운 사람조차도 알아보지 못할 줄은."
1979년초, 리츙은 여러가지 방법을 강구해서 양판을 상하이로 데려와서 병을 치료하게 한다. 양판은 그녀가 그를 상하이로 데려간다는 말을 듣고 즉시 말한다: "내가 가려면 베이징으로 가야 한다. 나의 문제는 베이장만이 해결할 수 있다." 리츙은 할 수 없이 그를 속인다. 그럼 베이징으로 가자고. 그렇게 속여서 비행기를 태운다. 상하이에 막 도착했을 때, 정신적인 문제를 제외하고 양판은 신체적으로도 허약해 있었다. 1년도안 여러번 위급한 상황을 넘긴다. 1979년, 양판은 꼬박 1년간 병원에 머물렀고, 여전히 '반혁명'과 '대내간'의 모자는 씌워져 있었다.
1980년이 어느 날, 공안부에서 두 사람이 양판의 집으로 온다. 양판의 평반서(平反書, 명예회복서)를 읽는다. 평반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반혁명분자는 양판과 무관하다. 마땅히 평반되어야 한다." "'대내간'문제에 대하여는 아예 그런 일이 없으니 평반되어야 한다" 그러나, 꼬리는 하나 남아 있었다. 1983년에 이르러 양판사건은 철저히 평반된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25년간이나 감금하게 되었을까? 원래, 그는 예전에 모택동의 처인 강청에게 잘못 보인 적이 있다. 1938년 가을, 연안 와동에 있던 모택동은 상하이에서 온 여자배우인 강청과 결혼한다. 소식이 환남(皖南) 신사군(新四軍) 총사령부로 전해졌을 때, 당시 중국동남국서기 겸 신사군정치위원인 항영(項英)은 비서 겸 군법처 조사과 과장인 은양(殷揚)에게 강청이 상하이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알아보라고 지시한다. 은야은 상하이에서 지하공작을 할 때 강청의 상황ㅇㄹ 잘 알고 있어서, 항영에게 보고서를 써서 올리고, 항양은 당중앙에 전보를 보내서 이렇게 말한다: "그녀는 주석과 결혼하기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은양이 쓴 보고서를 첨부했다. 이들 자료는 당시 상해의 신문과 잡지에 발표된 강청이 남녀관계에서 난잡했다는 뉴스를 종합한 것이며, 그녀가 이전에 체포되었던 상황도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공산당의 지도자가 이런 여자와 결혼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한 것이다. 이 전보가 연안에 도착했을 때는 모택동이 이미 강청과 결혼한 이후였다. 전보내용은 당시 중앙사회부부장 강생(康生)이 강청에게 말해준다. 이때부터 강청은 이 은양에 대하여 원한을 품게 된다.
1941년 환남사변후 항영이 피살된다. 이제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 1명은 사라졌다. 그러나, 그 '은양'이라는 자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강청은 계속하여 반드시 이 은양이라는 자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는 법이다. 1953년 봄, 강청은 병으로 소련으로 가서 치료한다. 그후 이부춘(李富春) 부총리의 부인 채창(蔡暢)과 함께 소련의 한 요양원에서 요양했다. 이때의 양판은 뇌종양을 앓아서, 1953년 2월 소련으로 가서 수술을 받고, 그 요양원으로 가서 요양한다. 4월의 어느 날, 채창은 양판을 데리고 강청을 만나러 간다. 이야기하던 중에, 강처은 눈앞의 이 상해시 공안국장 양판이 원래 바로 신사군시기에 항영에게 그녀의 추문을 보고했던 그 은양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20일후, 양판의 돌발상황이 나타난다. 그의 뇌종양이 아직 완치되기도 전에, 공안부의 전보를 받는다. 즉시 귀국하라. 1953년 5월 11일, 양판은 상하이로 돌아온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왜 즉시 귀국하라고 했는지 원인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리고 공안부에서 공문을 받는데, 그로 하여금 집에서 쉬면서 휴양하라는 것이다. 이어서, 공안부는 비밀리에 2명의 국장급 관리를 상하이로 파견하여 그의 문제를 조사한다. 1953년 12월 21일, 양판의 모든 당정직무는 면직된다. 1954년 12월 31일 양판은 공안부에 비밀리에 체포되어 북경으로 압송된다.
강청에게 밉보였다는 내용은 겉으로 드러낼 수 없었다. 다만, 죄를 추궁하려면, 뭐든지 덧붙일 수 있지 않겠는가. 순식간에 양판은 소위 '반혁명' '대내간'이 되어 있었고, 25년간이나 갇혀 있게 된다.
상하이시의 5명의 공안국장이 연이어 처벌받은 것은 모두 강청과 관련이 있다. 앞의 4명은 모두 강청의 상해에서의 풍류사를 알고 있기 때문에 처벌받았다.제5대 공안국장은 임표, 강청반혁명집단의 일원으로 처벌받는다.
강청은 원래 상해에서 3류배우였다. 여러 남자들과 애인관계를 맺었다. 연안에 도착한 후, 신속히 중국공산당지도자 모택동과 가까워진다. 모택도은 그의 둘째부인 하자진(賀子眞)이 있었지만, 강청에게 완전히 빠져버린다. 그리하여 반드시 강청과 결혼하겠다고 우긴다. 누가 반대해도 고집을 부렸다. 모택동은 첫째부인 양개혜(楊開慧)가 죽기도 전에 둘째부인 하자진과 결혼했다. 하자진과 이혼하기도 전에 다시 강청과 어울린 것이다. 모택동의 전비서 이예(李銳)는 일찌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모택동의 첫째부인 양개혜의 유서에는 모택동에 대하여, "생활건달, 정치건달'이라고 썼다고 한다. 원인은 양개혜는 모택동이 그녀의 당매(堂妹)를 강간한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강청이 죽기 전에, 모택동은 다시 여러 여자들과 어울렸다.
중국공산당 창시자중 하나인 모택동은 '이중건달'인데, 역시 '이중건달'인 강청을 처로 삼았다. 그러니, 양판등이 편안히 지낼 수 있겠는가? 중국에 큰 재난이 닥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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