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문사춘추(文史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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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남평(藍萍)'이라는 예명으로 상해탄 영화계에서 인기를 끌었던 강청은 일찌기 다재다능하며 다수선감(多愁善感)한 저명한 영화평론가 당납(그의 본명은 馬驥良이다)과 곡절많은 혼인생활을 겪었다. 이들의 이혼사건은 한때 세상을 뒤흔들었고 많은 사람들이 알았다. 그러나 당납이 강청과 이혼한 후에 어떤 인생을 보냈는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937년 7월 노구교사건이 발생한 후, 절망에 빠진 남평은 상해를 떠나 섬북(陝北)으로 간다.
연안에 들어갈 때, 남평은 이름을 강청으로 바꾼다. 그녀는 불안정했고 가만히 있지 못하는 여인이었다. 그리고 심계가 뛰어났다.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이런 명언을 남긴 바 있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것은 산을 사이에 두고 있는 것이고,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것은 층판(層板)을 사이에 두고 있는 것이다(男想女, 隔座山, 女想男, 隔層板)" 그녀의 매번 애정은 거의 모두 그녀의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그녀가 상해에서 요란한 사건을 일으키고, 명성이 형편없이 떨어져 부득이 멀리 연안으로 가야했을 때, 마침 하자진(賀子珍)은 모택동과 오해로 싸우고, 소련으로 병치료하러 떠났다. 그리하여 강청에게는 얻기 힘든 기회가 생겼다. 1년도 되지 않아, 그녀는 모택동과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1938년 11월 결혼한다.
강청이 등홍주록(燈紅酒綠)의 대상해를 떠날 때, 당납은 <대공보(大公報)의 전쟁기자였다. 그는 항일의 전쟁이 벌어질 때, 상해, 항주전선에서 힘들게 취재를 했다. 그리고 필명 "나평(羅平)"으로 여러 전선기사를 발표했다.
1937년 12월, 남경이 일본군에 함락되고, 국민정부는 중경으로 옮겨간다. 당납도 이들을 따라 무한으로 간다. 거기서 당시 상해영화계의 스타들이 무한에 모여있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그는 <대공보> 산하의 <대공극단(大公劇團)>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당납은 영화계에서 여러 해동안 있어서, 사람들을 잘 알았고, 조직능력도 있었다. 그리하여 그의 제안은 금방 사람들의 열렬한 호응을 얻어낸다. "대공극단"이 신속히 성립되고, 감독 정군리(鄭君里), 응운위(應雲衛)와 배우 조단(趙丹), 백양(白楊), 김산(金山), 고이이(顧而已)등이 모두 극단의 성원이 된다.
1938년 여름, 당납은 항일화극 <중국만세>를 쓴다. 응운위가 감독을 맡아, 연출한 후 각계의 호평을 듣는다. 바로 이때 그는 화극 여배우 진로(陳璐)와 사랑에 빠진다. 같은 해 10월, 그들은 홍콩에서 상해로 돌아오고, 얼마 후 아들을 하나 낳는다.
당납은 비록 진로와 결혼했지만, 남평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육로에게 '홍엽(紅葉)'이라는 예명을 지어주는데, 들리는 애기로는 "남평(藍萍)'과 대(對)를 맞추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는 또한 <천리문이인(千里吻伊人)>이라는 가사를 쓰는데 이것도 남평을 위해 쓴 것이라고 한다.
1942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당납은 상해를 떠나 중경으로 간다. 진로와 그들의 아들은 상해에 남았다. 나중에 진로는 소금상인에게 개가한다.
당납은 중경으로 간 후, 응운위의 중화극예사(中華劇藝社)에서 일하며 겨우 먹고살았다. 그러나 얼마 후 극사가 해산되면서, 당납은 한때 일거리를 잃고 곤궁하게 살아간다. 그의 심경은 아주 고통스러웠고, 다시 한번 자살을 기도하나 미수에 그친다.
이때 연안에 있는 강청은 어떤 경로를 통해서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당납이 곤공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매월 연안에서 사람을 통해 10원씩을 그에게 보내준다. 매번 그 돈을 받을 때마다, 당납은 반드시 그 중 1원으로 다른 빈곤한 친구들과 모여서 '타아제(打牙祭)'를 즐겼다. 힘든 와중에 같이 모여서 울고 즐겼던 것이다.
1944년, 당납은 중경에 '중국업여극사(中國業餘劇社)'를 만들고 스스로 사장이 된다. 풍역대(馮亦代)가 부사장을 맡았다. 극사가 성립된 후, 관객수가 많지 않아 금방 해산된다. 당납은 다시 곤경에 빠진다. 항전승리이후에 비로소 당납은 유려한 영어실력으로 그의 마음에 드는 일자리를 찾는다. 그는 영국 주중대사관에 채용되어, 대사관 신문처에서 일한다. 이를 통해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945년 8월 28일, 모택동은 장개석의 요청을 받아, 중경으로 와서 담판을 벌인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강청도 '이빨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중경으로 가서 병치료하겠다고 한다.
모택동은 강청의 중경행에 처음에는 찬성하지 않았지만, 강청이 재삼 요구하자 할 수 없이 동의한다. 그러나 한가지 조건을 내건다. 강청이 중경에서 얼굴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강청이 공개적으로 얼굴을 드러내고, 정치활동을 하지 못하게 한 것은 모택동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그해 7월초, 중국민주동맹과 국민당의 6명의 참정원이 연안으로 참관방문했을 때, 그중 중국청년당의 지도자중 한명인 좌순생(左舜生)은 일찌기 모택동에게 강청을 만나고 싶다는 요구를 해왔었다. 모택동은 그 자리에서 완곡하게 거절한다. 좌순생은 이에 대해 크게 '유감'으로 여겼다. 그는 연안에서 돌아온 후 쓴 <기민주정단동맹연안지유>라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원래 모택동에게 재안했다. 그의 남평을 만나보고 싶다고. 단 모택동은 그녀가 병석에 있어 손님을 만날 수 없다고 했다. 7월 5일 우리가 연안을 떠날 때, 모택동은 7,8세된 여자아이를 데리고 우리를 배웅했다. 활발하고 아름다운 두 눈은 보기에 내가 전쟁전에 한번 보았던 남평과 약간 닮았다. 그러나 남평 본인은 여전히 오지 못했다. '곡종인불견(曲終人不見), 강상수봉청(江山數峰靑)" 우리의 비행기가 이륙한 후, 나는 여전히 이번 방문에서 하나의 유감을 느껴야 했다."
위에서 좌순생이 언급한 '7,8세된 여자아이'는 확실히 모택동과 강청의 소생이다. 기실 당시에는 겨우 5살이다. 모택동이 딸을 데리고 손님을 배웅하면서 강청은 나오지 못하게 했다. 아마 좌순생이 중경으로 돌아간 후 그와 강청의 혼인에 대하여 떠드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강청은 중경에 도착한 후, 모택동과 함께 있지 않았다. 딸 이눌(李訥)과 함께 장치중(張治中)의 계원(桂園)에 머물렀다. 이때의 강청은 아주 흥분해 있었다. 특히 그녀가 장치중 수하 한명이 '그녀가 송미령보다 아름답다'는 찬사를 들은 후, 더더욱 며칠간 흥분해마지 않았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송미령처럼 여러 공개장소에 얼굴을 내밀 수가 없었다. 기자들과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자태를 보여줄 수 없었던 것이다.
강청은 왜 모택동이 그녀에게 공개장소에 나서지 못하게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그녀는 호승심과 과시욕이 강한 여자였다. 공개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상황하에서 그녀는 몰래 모택동의 등뒤에서 비밀리에 당납과 만나기로 약속한다. 그러나 강청은 생각지도 못하게 뜻을 이루지 못한다. 아마도 그녀는 몰랐을 것이다. 이때 당납은 이미 생활의 곤경에서 빠져나왔을 뿐아니라, 감정적으로도 이미 다른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당납은 나중에 사람들에게 말했다. 강청이 비밀리에 만나자고 했을 때, 그는 강청에 대한 옛정은 이미 '끝났다'고 말했다. 그리고 강청의 지위는 옛날과 달라졌다. 그녀를 만나게 되면 괜한 시비에 휘말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당납이 강청을 만나는 것은 거절했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모택동은 만난다. 그리고 모택동이 그에게 한 한 마디는 당납의 일생에서 유일하게 모택동과의 만남이었다. 당시의 정경을 그는 수십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잊지 않았고, 기억 속에 생생했다.
1984년 9월 29일 오후, 파리에 살고 있는 당납은 대만에서 온 옛친구와 얘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모택동이 중경에 온 그 해에 나는 여전히 중경에 있었다. 하루는 내가 장치중(당시 정치부 부장)의 초청장을 받았다. 그의 집에서 술모임을 갖는데 모택동을 환영하는 행사라는 것이다. 당시 나는 아주 기이하게 여겼다. 왜 나를 부르는 것일까? 술자리가 끝난 후 극을 볼 수는 있겠지만, 보는 것은 '평극(平劇)'이지 '화극'이 아니었다. 어떻게 보더라도 나를 부를 것같지는 않다. 다만 나는 호기심으로 갔다. 주인이 나와 모택동을 소개할 때, 이렇게 말했다: "이 분이 옛날의 당납입니다!" 모택동은 놀란 것같았다. 한편으로 나의 손을 꽉 잡으면서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말했다: "화위귀(和爲貴)" 나는 그의 말 뜻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저 우물거리며 지나갔다.
당납을 모택동을 환영하는 술자리에 부른 것은 도대체 누군가 고의로 안배한 것인지 아닌지 알 도리가 없다. 그리고 당사자 당납의 경우에도 왜 자신을 불렀는지 몰랐다. 그가 가서 모택동을 만난 것은 그저 호기심때문이다. 그리고 초청장도 있었으니 당당하게 갈 수 있었다. 모택동의 짧은 한 마디는 그를 황란(慌亂)하고 난감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에데 또 다른 이해하기 힘든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실제로, 모택동이 한 '화위귀'는 집안일, 나랏일에 다 관련되는 것이다. 그와 당납이 우연히 만난 것에 대한 기지와 유머라 볼 수 있다. 또한 강청과 이전에 혼사가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다는 것을 표시했다.
진로와 헤어진 후, 당납은 수년동안 독신으로 지내며, 글쓰는데 바빴다. 1945년 상반기, 그는 남평, 진로의 이후에 또 다른 여배우 강건(康健)과 사랑에 빠진다. 그들은 한때 중경에서 서로에게 깊이 빠졌었지만, 항전승리후 무슨 이유에서인지 다시 헤어지고 만다.
항전승리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당납은 다시 상해로 돌아온다. <문회보> 총편집인이자 친구인 서주성(徐鑄成)의 요청으로, 그는 영국 주중대사관 신문처의 일을 그만두고, <문회보>의 부총편집인이 된다.
1947년 8월, 미국대통령 특사 Albert Coady Wedemeyer가 상해에서 기자회견을 연다. 당납도 초청을 받아 참석한다. 당시 <자유논단보>의 한 여기자가 그의 주목을 끌었고, 그녀는 민국정부 전 주프랑스대사 진록(陳菉)의 셋째딸 진윤경(陳潤瓊)이었다. 그녀는 영어에 유창했고, 프랑스어도 뛰어났다. 말하는 것도 비범하고 행동거지도 단정해서 재색을 겸비했다고 할 수 있다.
당납은 진윤경을 한번 보자 바로 빠진다. 그러나, 진윤경으로부터는 반응이 바로 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당납은 온갖 머리를 짜내며 그녀를 쫓아다닌다. 1949년 진윤경은 홍콩으로 간다. 당납도 홍콩 <문회보>의 부총편집인으로 간다. 1949년 2월, 진윤경이 미국으로 가서 유엔에서 일한다. 당납도 그녀를 따라 미국으로 간다. 그는 먼저 뉴욕타임즈에서 일하다가, 다시 유엔의 한 중문인쇄소에서 일한다. 1951년, 진윤경이 파리로 가고, 당납도 그녀를 따라간다.
당납은 그림자처럼 계속 쫓아다녔고, 매일 진윤경에게 꽃 한송이씩을 바쳤다. 동시에 해서로 반듯하게 쓴 정서를 한통씩 보냈다.
이런 미친 애정에 진윤경은 크게 감동한다. 점점 그녀는 당납이 재능넘칠 뿐아니라, 사람됨도 선량하며 감정을 중시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1951년, 진윤경은 마침내 당납의 구애를 받아들인다. 두 사람은 파리에서 혼례를 거행했다. 이때부터 당납의 애정은 비로소 진정한 귀숙(歸宿)을 찾게 되었다.
파리에서 두 기자는 글을 버리고 사업을 한다. 식당을 연다. 처음의 "명명반점(明明飯店)"에서 이후의 "경화반점(京華飯店)", 다시 "천교반점(天橋飯店)"까지 장사는 아주 잘 되었다.
당납은 진윤경과 결혼한 후 딸을 하나 낳는데, 이름을 "마억화(馬憶華)"라고 짓는다. 그 뜻은 말안해도 분명하다. 고국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감정을 중시했던 당납은 사랑하는 여인을 향한 치정을 가졌을 뿐아니라, 자신의 조국에 대하여도 애정이 깊었다. 그가 나중에 상해를 떠나 해외로 가게 된 것은 한편으로 진윤경 여사에 대한 사랑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말할 수 없는 숨은 사정도 있었다.
그 숨은 사정에 대하여 당납은 1949년 2월 홍콩에서 상해의 정군리에게 쓴 서신에 명확히 적혀 있다: "대륙은 곧 해방될 것같다. 우리의 바램이 실현되는 것이다. <문회보>의 동료들은 모두 '청춘결반호환향(靑春結伴好還鄕)'할 수 있겠다. 오직 나만은 상해로 돌아갈 수 없다. 항전때 아평(남평, 즉 강청)은 비밀리에 중경으로 이빨치료를 하러 왔었고, 전화를 걸어 나와 '개가귀(凱家歸)'주점에서 만나자고 했다. 나는 단연코 거절했다. 나는 이 면에서는 이미 완전히 끝냈다. 얼마전에 점쟁이에게 점을 쳐봤는데, 나에게 '원몽중온(鴛夢重溫), 흉다길소(凶多吉少)'라고 했다. 나는 그를 믿는다. 나는 이제 운명을 따르겠다. 세상에 아무도 나보다 아평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일찌기 그녀를 보내기 위해 거의 자살까지 하려 했다. 아무도 나보다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는 마음이 독하다. 그녀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조국을 떠나고, 상해를 떠나고, 청춘을 떠나고, 친구를 떠난다...'문군능유기다수(問君能有幾多愁), 흡사일강춘수향동류(恰似一江春水向東流)"
이것은 눈물로 쓴 편지이다. 쓴 것은 그의 폐부의 말이다. 사실은 과연 그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강청은 '문화대혁명'의 기수에 오른 후, 당납의 친구들인 정군리, 조단등은 속속 아무런 이유없이 박해를 다한다. 당납은 멀리 해외에 있어서 화를 피할 수 있었다. '기수'의 채찍이 미치지 않는 거리에 있어서, 그녀의 독수를 피한 것이다.
문혁이 끝난 후, 당납은 비로소 몇번 중국대륙으로 돌아간다. 몇번 상해를 다시 가보았고, 옛일을 회고했다. 그러나 그가 매번 돌아왔을 때는 행적이 비밀스러웠다. 공개장소에 얼굴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단지 옛날 친구들과 만날 뿐이었다.
당납으 남평과의 옛날 관계로 인하여, 파리에 살고 있는 당납은 자주 뜻하지 않는 손님들의 방문을 받았다. 심지어 강청이 자신의 '에드가 스노우'라고 말했고, 강청의 뜻에 따라 전기를 쓰던 미국작가 Roxane Witke는 당납이 이름을 숨기고 파리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두번이나 그를 찾아간다. 그리고 20만달러 내지 30만달러의 보수를 제시하며 같이 강청전을 쓰자고 말했다. 그러나 당납은 바로 거절한다.
해외신문에 일찌기 이런 뉴스가 실렸다. 당납이 고객을 끌어모으기 위해, 자기가 개설한 식당의 2층에서 강청사진전을 개최한다고. 당납은 이를 확실하게 부인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라는 사람은 옛날에 나빴던 것을 생각하지 않을 뿐아니라, 일단 절교하면, 나쁜 소리는 하지 않는다."
당납은 말년에 자서전을 쓸 계획도 했었다. 이를 위해 그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그가 제남에서 강청에게 보냈던 장편의 서신과 강청이 당시에 그에게 보냈던 두통의 서신과 당시 각 신문의 뉴스들을 찾으려 한 바도 있었다. 다만, 그는 몇번 붓을 들었다가 결국 그 자서전을 쓰지 못하고 병에 걸린다. 1988년 당납은 폐암으로 파리에서 병사한다. 향년 74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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