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전)

"밀고자001호"의 최후

by 중은우시 2018. 6. 9.

글: 유효(劉曉)


중국공산당이 1949년 정권을 차지한 후, 중국전통문화교육과 서방민주사상의 영향을 받은 지식인들에 대하여 가장 마음을 놓지 못했다. 그리하여 1950년대에 지식인에 대한 개조운동을 시작한다. 전종서(錢鍾書)의 처인 양강(楊絳)이 말한 바에 따르면, "세조(洗澡)"이다.


이 운동때 저명한 국학대가 호적(胡適)의 차남으로 대륙에 남는 것을 선택했던 호사두(胡思杜)도 마음에 없이 자신의 부친을 비판해야 했다. 그리고 반미화극을 친히 써서 무대에 올렸다. 그리고 그는 홍콩의 <대공보>에 <나의 부친 호적에 대한 비판>이라는 글을 싣는다. 이를 통해 부친과 선을 긋고 왕래를 끊었다. 그러나, 호사두는 운명을 피하지 못하고, 1957년 '반우'때 그는 역시 '우파'로 공격받고 자살한다.


호사두가 부친을 비판한 글이 발표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 미국에 있던 호적도 보게 된다. 아들과 다른 친구들이 중공치하에서 자신을 비판하는 행위에 대하여 호적은 이해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그의 고증벽은 그로 하여금 "자녀가 부친을 비판하는 행위"의 근원을 찾아보게 만든다. 왜냐하면, 중국전통문화에서는 모든 선 중에서효를 최우선으로 삼고, 자녀는 부모를 존경하고 효도를 다해야 함, 여하한 부모를 거역하는 행위는 비난받는 것이다. 하물며 공개적으로 자신의 친부모를 비판할 수 있겠는가?


고증을 해본 결과, 호적은 이런 결론을 내린다. 그것은 바로 이런 행위의 근원은 소련이라는 것이다. 1952년 12월 11일, 호적은 타이중(臺中)의 신구장에서 <금일세계>라는 제목의 강연을 하면서, 자신의 고증결과를 얘기한다. 그는 이것이 소련시기 소년단 단원이었던 파블리크 모로조프에게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호적은 이렇게 소개했다: 모로조프는 어린애이고, 소련 공산주의소년단의 단원이다. 그의 부친은 농민이다. 소련정부는 집단농장계획을 실시해서 인민의 양식을 몰수했다. 일가족이 굶어죽지 않기 위해, 수백금의 보리를 몰래 땅속에 묻어 놓았다. 이웃들도 다 이렇게 했다. 이일을 모로조프가 본다. 그리고 달려가서 보고했다. 그래서 숨겨놓은 양식은 모조리 경찰에 몰수된다. 양식을 숨겼던 모든 사람들이 붙잡혀 처벌받게 된다.


몇달 후 모로조프는 실종된다. 경찰이 사방으로 수색했는데, 숲 속에서 그의 시신을 발견한다. 그는 원한을 품은 사람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경찰은 모로조프의 부친과 이웃들에게 화풀일를 해서 그의 부모와 이웃이 모조리 죽이고, 대규모 장례식을 거행한다. 그리고 철의 장막내의 모든 도시에 거리중 하나의 이름을 모로조프가로 명명하도록 지시한다. 이를 통해 모로조프를 기념했다.


호적은 말했다: 이것이 바로 모로조프주의의 근원이다. 그 작용은 순수히 모로조프를 청년모범으로 삼아서, 모든 자녀들에게 자신의 부모와 이웃을 감시하도록 하는 것이며, 그들을 고발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호적은 당시 대륙의 친척 친구들이 고발하는 현상에 대하여 "자녀가 부친을 고발하는 것"은 철의 장막 정권의 특색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아들이 대륙에서 나를 제국주의의 친구이고, 인민의 공적이므로, 그(나의 아들)의 적이다라고 공격한다. 여러분들도 들었을 것이다. 여러분의 친척친구중에서 자녀가 부모를 고발하고, 동생이 형을 고발하고, 처가 남편을 고발하는 일을 이것은 대륙의 인심이 나빠진 것이 아니라, 철의 장막안의 특색이다. 집안의 사람들이 하나하나 모두 국가의 간첩이고, 언행사상, 일거일동은 항상 감시받는다. 모든 것은 정부의 통제하에 있다."


중국공산당에 대하여 명확히 인식하고 있던 호적은 재차 민감한 통찰력으로 "자녀가 부모를 고발하고, 동생이 형을 고발하고, 처가 남편을 고발하는 행위"는 철의장막의 특색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런 철의 장막안에서 생활하는 수천수만의 호사두는 결국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이 전혀 이상할 게 없다는 것이다.


모로조프의 이야기에 관하여, 그때의 호적은 당시 소련의 관련보도를 읽었을 것이다. 모로조프는 소련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어린 영웅이었다. 그가 영웅으로 칭송된 후, 소련정부는 그의 동상을 세우고, 많은 학교와 소년단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다. 그의 이야기에 기하여 소련은 가극과 가곡도 만든다. 우표와 엽서에도 그의 모습이 실린다. 모로조프가 생전에 다녔던 학교는 성지로 된다. 소련 각지에서 온 아이들이 학교에서 조직한 여행에서 이곳을 참관했다.


그러나, 1980년대중반, 소련작가연맹에서 축출된 유리 드루즈니코프는 여전히 세상에 살아있던 목격증인들을 인터뷰한 후에 <밀고자 001호: 프블리크 모로조프의 신화(Informer 001: The Myth of Pavlik Morozov)>를 쓴다.


책에서, 드로즈니코프는 소련이 선전한 모로조프의 생애에 대하여 전면적으로 반박한다. 예를 들어, 모로조프가 죽었을 때의 나이에 대하여 소련의 선전은 여러 버전이 있고, 다른 사내아이의 사진을 사용한 바 있다. 심지어, 모로조프는 피살될 때 소년단원도 아니었다. 소련의 선전부서에서는 모로조프의 조부가 그를 죽였다고 했다. 그러나 드루즈니코프는 그의 조부는 모로조프의 죽음으로 애통해 했고, 사람을 모아서 수색작업을 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재판때 자신은 무고하다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비록 분명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드루즈니코프는 모로조프가 실제로는 국가정치보위국의 사람에게 살해되었다고 암시한다. 그리고 드루즈니코프는 연구과정에서 이 흉수를 본 적이 있다고 한다.


조사를 거쳐, 드루즈니코프는 또한 이런 사실도 발견한다: 모로조프의 부친은 그의 모친을 떠나서, 다른 여자를 만났다. 질투심과 분노로 모친은 계속 모로조프에게 부친에 대하여 나쁜 말을 했고, 그를 보내서 고발하도록 해서, 보복을 하였다. 모로조프를 실제로 머리가 아둔한 아이였을 뿐이다.


그래도 이것이 소련당국으로 하여금 모로조프를 모범으로 만드는데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이때부터 밀고는 정권이 제창하는 영광이 되었고, 그리고 상당히 넓은 범윈내에서의 대숙청으로 이어졌다. 밀고문화는 공산주의국가에 전파되어, 중국, 동독, 북한등의 기타 공산국가로 수출된다. 그리고 하나 또 하나의 비극이 연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