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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전)

이예(李銳): 3차례나 숙정당한 모택동의 비서

by 중은우시 2020. 11. 2.

글; 왕우군(王友群)

 

일찌기 모택동의 비서를 지냈던 이예는 일생동안 3번에 걸쳐 숙정을 당하고, 고생을 많이 했다. 그러나 수명은 길어서, 102살까지 살았다.

 

이예, 1917년 4월 13일생, 베이징 출생. 조적은 호남(湖南) 평강(平江)이며, 무한대학을 졸업했다. 일찌기 중공중앙위원, 중앙조직부 상무부부장, 수전부 부부장, 모택옹의 겸임비서를 지낸다. 이예는 삼협공정을 반대한 대표적 인물중 하나이다. 그러나 그의 의견은 당시 중공지도자 장쩌민에 의해 묵살된다.

 

이예의 제1차 숙정

 

1943년 4월에서 1944년 9월까지, 중공의 연안정풍(延安整風) 후기의 '창구운동(搶救運動)'중 이예는 1년2개월간 구금된다.

 

당시는 항일전쟁이 가장 힘든 시기였는데, 중화민국 임시수도 중경은 자주 일본군 비행기의 공습을 받았다. 중공의 본거지인 연안에는 한번도 일본군 비행기가 공습하지 않았다. 중공지도자 모택동은 이를 내부반대세력을 숙정할 기회로 삼아, 자신의 절대권위를 수립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연안정풍운돈을 시작한다.

 

모택동은 중공관리의 특수화를 비판한 북경대학의 재자(才子) 왕실미(王實味)를 체포한 후, 즉시 정풍의 창끝을 지식인이 집중된 단위로 돌린다. 모택동은 이렇게 말한다: "의대(醫大), 중연원(中硏院), 민족학원, 연대(延大), 과학원, 노예(魯藝), 서북국(西北局), 변구정부(邊區政府)에도 나쁜 사람이 숨어 있을 수 있다." 1943년 8월 8일, 모택동은 중앙당교 제2부 개학식때 이렇게 말한다: 중앙당교에서 간첩 250명을 잡아냈다(이대 전체 당교에 2,500명이 있었다). 아마도 이 숫자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행정학원은 "1명을 제외하고, 교사, 직원이 모조리 간첩이다", "학생중 많은 경우가 간첩인데, 아마도 과반수에 이를 것이다." 중앙군위3국 전신학교는 200여명이 있었는데, 거기서 170명의 '간첩'을 솎아낸다. 서북공학에는 500여명이 있었는데, 겨우 20만만 '간첩'으로 몰리지 않았다.

 

이예는 이전에 오랫동안 국민당 통치지역에서 청년과 선전업무를 해왔다. 그가 체포된 원인은 2,3명이 고문을 받다가, 자신이 간첩이라고 자백하고, 그후에 이렇게 마구 말했다. 이예가 자신들의 상급이라고. 모택동이 연안정풍운동을 일으킬 때 주요 실무책임자는 소련에서 막 귀국한 강생(康生)이었다. 강생은 소련에서 30년대 스탈린의 '대숙청'을 겪었다. 사람을 숙정하는데는 전문가였다. 강생은 자신만만하게 말한다. 이예의 부친은 홍군이 죽였다. 이예는 중공과 부친을 죽인 원한이 있다. 사실은 이예의 부친이 1922년에 죽었으며, 그때는 아직 홍군이 없었다. 이예는 이렇게 회고한다: "조원(棗園)에 보안처등지에서 수백수천명을 가두어 놓았다...당시 고문이 아주 심했다. 나는 5일밤낮동안 잠도 자지 못하게 하고, 눈도 깜박이지 못하게 했다. 그렇게 하면 통제력을 잃고 사실을 털어놓을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나는 당시 버텨냈고, 마구잡이로 말하지 않았다. 이런 방법은 반달이나 계속되었다." "재판을 받을 때, 통상 장시간 차렷자세로 서 있게 하거나(다리가 붓는다), 낮은 판등(板凳, 등받이없는 의자)에 앉게 한다. 어떤 때는 수갑을 채우고, 시간은 길고 짧고 그때그때 달랐다. 내가 손에 입은 상처는 몇년이 지나서야 없어졌다. 그리고 귀싸대기도 맞았다."

 

이예의 회고에 따르면, 창구운동중에 "연안의 80% 지식인은 '자백'하고 '구함을 받아' 특무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들 중에 특무는 한명도 없었다."

 

이예의 제2차 정숙

 

1958년 1월, 모택동은 당시 수전부 부부장이던 이예를 찍어 자신의 겸직비서로 삼는다.

 

1959년 4월, 중공은 상해에서 제8기 7중전회를 개최한다. 이예는 이렇게 회고한다; 모택동이 제15번째 문제 즉 사상해방을 얘기할 때, 다시 나의 이름을 거명하며, "이예는 귀신을 겁낸다. 고쳐야 한다. 귀신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항상 넌제 내 머리에 비판이 떨어질지 모른다고 여긴다. 그래서, 소심하고 조심한다.....그저 죽지만 않으면 되고, 나머지는 모두 괜찮다. 기회주의의 모자를 쓰고, 과실처분을 받고, 직위를 해제당하고, 당적을 박탈당하고, 처와 이혼하는 등.....명나라에는 정장제(廷杖制)가 있었다. 황제에 대들면 맞았다. 정장으로 수백명, 천명이 죽었다. 오문으로 끌려나가 참수당한 자는 더욱 많았다. 다만 그들은 감히 말했다. 죽음을 무릅쓰고 간언했다."고 말한다. 

 

"이어서 제16번째 문제 즉 당내비판을 얘기할 때, 모택동은 다시 해서(海瑞)가 감히 황제에게 직언을 했던 역사이야기를 꺼집어낸다. 모택동은 이렇게 말했다: 현재 이런 형세가 이루어지고 있다. 나의 결점을 잘 비판하지 않는다. 네가 우회적인 방법으로 비판하는 것도 괜찮다. 나는 <명사.해서전>을 팽덕회에게 보내 주어 읽으라고 했다. 봐라. 해서가 얼마나 날카로웠는지. 그가 황제에게 쓴 그 서신은 전혀 봐주지 않았다. 아주 봐주지 않았다. 황제가 그 서신을 보고는 땅바닥에 집어던진다. 그리고 다시 집어서 읽었다. 생각해보니 이 자는 좋은 사람이다. 다만 결국 그를 잡아서 감옥에 넣었다."

 

그날 저녁, 이예는 모택동의 비서 전가영(田家英)을 만난다. 두 사람은 너무나 돌연하여 이해할 수 없었다. 모택동이 이렇게 해서를 얘기한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해서를 본받으라는 말이고, 사실을 얘기하라는 것이다. 지금은 명나라보다 조정에서 간언하는 기풍이 못하다는 것이다. 전가영은 이예에게 모택동의 오래된 비서 호교목(胡喬木)의 견해를 얘기한다. 호교목은 모택동이 해서를 언급한 것은 이번 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는 해서같은 인물이 나오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라는 것이다.

 

1959년 7월 2일, 모택동이 여산회의를 주재한다. 원래는 1958년의 '대약진'에서 '좌경' 착오를 시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7월 14일, 팽덕회는 모택동에게 서신을 쓴다. '대약진' 때 존재했던 약간의 문제를 언급하며, 과감하게 직언을 한다. 이는 모택동의 진노를 불러온다.

 

7월 16일, 모택동은 팽덕회의 서신을 전체대표에게 돌려서 토론하게 한다. 분조토론에서, 당시 중공군대총참모장이던 황극성(黃克誠), 호남성위서기 주소주(周小舟), 수전부 부부장 이예(李銳)등이 모두 팽진의 견해에 동의한다. 당시 외교부 부부장이던 장문천(張聞天)은 장편의 발언을 통해서 더욱 명확하게 팽덕회의 의견에 동의했다.

 

3개월전 중공당원들에게 해서를 본받아 직언을 하라고 대거 격려했던 모택동은 즉시 다른 사람이 된 듯했다. 8월 2일부터 16일까지 여산에서 중공8기 8중전회를 개최하여, 팽덕회, 황극성, 장문천, 주소주, 이예에 대한 비판을 진행한다. 앞의 4명은 '반당집단'으로 몰린다. 이예는 당시에 중앙위원이 아니어서, '추종자'로 분류된다. 팽덕회, 황극성, 장문천, 주소주, 이예는 모두 관직을 파면당한다. 그후, 전국에서 380여만명의 우경기회주의분자들이 타도당한다. 1959년에서 1962년까지 중국에서 굶어죽은 살마이 3,860여만명에 이른다.

 

이예는 북경으로 돌아온 후, 수전부에서 계속 비판을 받는다. 반년간이나 계속되었다. 수전부는 '이예반당집단'이라고 규정짓고, 200여명이 연루된다. 이런 비투는 이예로 하여금 당에 대해 완전히 절망하게 만든다. 중공중앙 직속기관당위의 책임자는 그를 만나 얘기한다. 이미 당적을 박탈하는 것은 결정되었다. 의견이 있으면 말해라.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제명에 찬성합니다. 의견없습니다." 이예는 나중에 이렇게 말한다: "당시는 완전히 절망했다. 내 생각에 이 당은 이미 희망이 없었다. 자신은 나라에 보답할 길이 없으니, 너무나 비통했다."

 

이예는 당적과 관직을 박탈당한 후, 1960년 5월, 북대황으로 쫓겨간다. 우파분자들과 함게 노동개조생활을 한다. 기아와 리로로 그는 목숨을 잃을 뻔한다. 나중에 다행히 전가영이 도와주어, 목숨을 구할 수 있었고, 북경으로 돌아온다. 이 인간지옥같은 생활을 그는 570일간 지냈다.

 

이예의 제3차 숙정

 

1963년, 이예는 안휘 마자담 수력발전소로 배치된다. 말로는 하방단련이고, 문화교원이지만, 실제로는 게속 노동개조였다. 모택동의 비서 전가영이 문혁때 자살한 후, 북경의 전안조는 사람을 이예의 유배지인 마자담으로 보낸다. 그에게 호교목, 오냉서(吳冷西) 및 전가영과의 관계를 털어놓으라고 요구한다.

 

이예는 말했다: "모택동 주석 주변에 가장 위험한 것은 이 몇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진백달(陳伯達)이다." 당시 진백달은 한창 잘나가고 있었다. 이예가 진백달의 일부 상황을 고발하면서, 그들에게 주은래총리에게 전해달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주은래가 전가영 전안조의 조장이었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서, 북경에서 또 사람이 온다. 그리고 그가 주은래에게 보낸 서신을 돌려준다. 그러면서 전달해줄 수 없다고 말한다. 1967년 11월, 합비에서 군대의 지프차 2대가 온다. 안휘성 혁명위원회주임 이덕생(李德生)이 그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이예는 바로 알았다. 자신은 체포되는 것임을.

 

이예의 예상은 맞았다. 전용기로 그는 북경에 보내어진다. 그리고 진성감옥에 갇힌다. 그는 독방에 8년간이나 갇혀 있었다. 감옥에는 키작은 목판상 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 이불과 요는 아주 얇았고, 베개도 없었다.

 

이예는 어렵사리 종이를 모아 베개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마저 몰수당한다. 그는 할 수 없이 신발로 베개를 삼았다. 옥중의 규정에는 잠을 잘 때 반드시 얼굴을 문쪽에 초병이 관찰하기 위해 뚷어놓은 구멍을 향하고 자야 한다. 그래서 밤새 몸을 뒤척일 수도 없고, 똑바로 누워서 잘 수도 없다. 간수가 괴롭히려고 마음먹으면 여러가지 방법이 있다. 예를 들어 겨울에 팔을 이불밖으로 내놓게 하는 것등이다.

 

더욱 괴로운 것은 감옥측이 간수들로 하여금 각종 방법으로 죄수들을 모욕하고 괴롭히게 하는 것이다. 이예가 겪은 것으로는, 자주 아무런 이유없이 반나절간 서있게 한다든지, 걸핏하면 교육하고 욕을 한다든지, 그리고 창구앞으로 오라고 하고서 침을 뱉는다든지, 혹은 팔을 창구밖으로 뻗으라고 하고는 때린다든지. 하루는 아침에 이예가 손을 창구앞으로 내서 식사를 받으려 하는데, 간수가 고의로 뜨거운 죽을 그의 손에 부었다. 그리하여 화상을 입는다.

 

갇혀있는지 1년이 되기 전에, 벽의 좁은 창을 통하여 이예는 밖에서 기중기가 시공하는 것을 보겓 ㅚㄴ다. 그는 또 건물을 짓는 것이라고 여겨서 장기적인 고려를 하게 된다. 살아남기 위하여, 그는 매일 감옥에서 기공을 하고, 달리기를 하며, 손가락으로 공중에 글쓰는 것을 연습했다. 1975년 5월, 58세의 이예는 결국 살아서 감옥을 나온다.

 

이예는 나중에 중공조직사 자료를 살펴보았는데, 문혁기간동안 진성감옥에는 모두 502명이 갇혀 있었고, 사장,국장급이상의 관리가 절반가량이었다. 안에서 죽은 사람이 근 30명이고, 부상을 입고 불구자가 된 사람이 20여명이며, 정신병을 얻은 사람이 근 60명이었다.

 

이예의 모택동을 평한 3수의 시

 

이예는 말년에 많은 시간을 들여 모택동을 연구했다. 저명한 작가인 철류(鐵流)는 일찌기 3번 그를 방문한다. 이예는 모택동이라는 사람은 너무나 나쁘다고 말한다. 이중깡패라는 것이다. 정치깡패이면서 생활깡패. 이예는 말했다. 이 정의는 그가 내린 것이 아니고, 모택동의 첫째부인 양개혜(楊開慧)가 남긴 친필에 나오는 말이라는 것이다.

 

1982년, 모택동의 첫째부인 양개혜의 엣집을 수리할 때, 생각밖으로 벽사이에서 양개혜가 모택동에게 남긴 7통의 정서(情書)가 발견된다. 1990년 다시 수선할 때, 그녀의 침실 처마에서 서신을 1통 더 발견한다. 이들 글은 모두 그녀가 모택동과 헤어지고난 후에 쓴 것이다. 밀랍종이로 싸서 옛집에 나누어 숨겨놓았다. 그중에는 모택동이 "생활꺙패, 정치깡패"라고 쓴 문구가 있다.

 

철류는 이렇게 회고한다. 이예노인은 여기까지 얘기하고서, 화제를 바꾸어, 자신이 최근 3수의 모택동을 평가하는 타유시(打油詩)를 지었다면서 한번 읽어보라고 주었다:

 

제1수

 

생활유맹정치맹(生活流氓政治氓)   생활도 깡패이고, 정치도 깡패이다

현처조식태심상(賢妻早識太心傷)   현명한 부인은 일찌감치 알아서 마음이 상했다

막여독예살성성(莫予毒也殺成性)   내가 독하다고 하지 말라 살인이 습관이 되었다

배양노재대흑방(培養奴才大黑幇)   노재들을 배양해서 악의 집단을 크게 만들었다.

 

제2수

 

소삼일어삼자혜(蕭三一語三字兮)   소삼의 한 마디 세글자로 그를 평가했었지

도파기인품태차(道破其人品太差)   그의 인품이 너무 형편없다는 것을 꿰뚫어 본 것이다.

기락무궁변명투(其樂無窮拚命鬪)   죽어라 투쟁하는데서 끊없는 재미를 느끼니

가망국파경유타(家亡國破竟由他)   집안이 망하고 나라가 무너지는게 모두 그때문이다.

(참고: 소삼은 북경에 살던 인물인데, 일찌기 모택동이 부녀자를 간음하고 다니는 철계파(鐵鷄巴)라고 말한 바 있다고 한다. 게파는 남자의 물건을 가리킴)

 

제3수

 

운동빈빈무한애(運動頻頻無限哀)   온갖 운동이 계속되니 슬픔이 끝이 없다.

인재불요요노재(人才不要要奴才)   인재는 필요없고 노재만 원한다

앙민화국하시료(殃民禍國何時了)   국민과 나라에 해를 끼치는게 언제나 멈출까

문혁오호효색개(文革嗚呼曉色開)   문혁이 끝나니 새벽이 열리는구나

 

결어

 

이예는 평생 고난을 겪었다. 문혁후 1979년, 1989년, 1992년, 이예는 3번에 걸쳐 미국을 방문한다. 그리고, 프랑스, 일본, 스위스, 네덜란드, 오스트레일리아등의 나라도 방문한다. 그는 관찰과 사고에 능했다. 말년이 되어, 중공, 모택동, 국제공산주의운동에 대해 많은 반성과 비판을 펼친다.

 

이예는 "소련모델은 보편적 가치를 벗어났다", "소련이 추진한 무산계급혁명과 무산계급독재의 길은 근본적으로 잘못이었다." "사유제를 소멸시키는 것을 최후로 하는 혁명은 일종의 선진생산력을 배제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사회제도이고, 아무리 그럴 듯한 명분을 붙이더라도, 모두 전망이 없는 것이다." 인류사회의 진보는 "과학과 민주에 의존해야 한다", "그리고 법치에 의존해야 한다. 무슨 계급투쟁, 무산계급독재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서는 인심을 얻지 못한다." 이예는 말년에 계속하여 민주와 헌정을 창도했다.

 

이예는 일기를 쓰는 습관이 있었다. 그중 많은 것은 중공에 아주 진귀한 사료이다. 다만 그는 중공에 넘기지 않았고, <이예일기>를 미국 스탠포드대학에 기부했다. 그의 생전의 바램은 사후에 '추도회를 열지 말고, 팔보산에 묻지 말고, 당기를 덮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예가 말년에 반성한 것은 아주 고귀한 일이다. 그는 이미 중공의 사상질곡에서 벗어났다. 이예의 남다른 경력과 그의 말년의 반성은 양식있는 중국인에게 중공의 본질을 깨닫게 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