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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누르하치)

하하나자칭(哈哈納扎靑): 누르하치 본부인 신세내력의 수수께끼

by 중은우시 2020. 7. 31.

글: 진이호(陳二虎)

 

1. 누르하치는 소년시절 힘들었을 때 퉁가(佟家)에 의탁하다.

 

누르하치는 동북 건주여진(建州女眞, 지금의 만주족) 사람이다. 명나라 만력(萬曆) 연간에 굴기하여 후금(後金, 이후의 淸나라)을 건립한다. 그는 일생동안 처첩을 여럿 두었지만, 그의 본부인은 퉁씨(佟氏)이다. 그러나 사료에서 그녀는 인위적으로 '잊혀졌다'

 

퉁씨는 후인들이 원비(元妃)라 칭한다. 그러나 이 칭호는 황실히 부여한 것이 아니고, 민간에서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원비 퉁씨는 누르가치가 나라를 세울 때를 전후하여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그녀의 가족이건 그녀 자신이건 모두 누르하치의 굴기에 무시할 수 없는 공을 세웠다.

 

퉁씨는 누르하치와의 사이에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둔다: 장남 츄잉(褚英), 차남 다이샨(代善), 딸 동궈거거(東果格格).

 

퉁씨집안은 당시 무순관(撫順關) 일대의 거족이다. 무순관에서 정북으로 250리되는 곳에 퉁가장원(佟家庄園)을 가지고 있었고, 퉁씨일족은 거기에서 상당한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누르하치의 부친은 타크스(塔克世)이다. 그는 건주여진의 소두목이었고, 이중간첩이었다. 명나라에 건주여진의 정보를 전해주고, 또한 명나라의 동향을 정탐하여 건주여진에 알려주곤 했다.

 

타크스의 본부인은 누르하치형제를 낳고, 나중에 사망한다. 타크스는 다시 재혼했다. 이 계모는 누르하치형제에게 악독하게 굴었다. 그래서 분가라는 명목으로 누르하치형제를 집에서 쫓아내 버린다.

 

졸지에 누르하치는 아주 곤궁한 처지에 놓인다. 생존을 위하여, 부득이 산으로 올라가 버섯을 따고, 인삼을 캐며, 개암을 땄다. 그리고 이것들은 무순관의 시장으로 가서 팔았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누르하치는 산으로 올라가서 인삼을 캐다가 큰 비를 만난다. 할 수 없이 근처의 동굴로 숨어들어 비를 피했는데, 마침 퉁가 타무바앤(塔木巴彦)이 등불을 들고 길을 지나다가, 비에 흠뻑 젖어서 추위에 떨고 있는 누르하치를 본다.

 

타무바얜은 다가가서 물어보고 그의 상황을 알게 된다. 그는 이 젊은이가 마음에 들었고, 그리하여 집으로 데려간다.

 

이 타무바얜은 기실 한족이다. 그는 몽골어, 만주어, 한어에 모두 능통했다. 타무바얜은 사람들의 그에 대한 존칭이었다. 바얜은 부자라는 뜻이다. 그의 한자이름은 퉁원(佟遠)이다.

 

퉁씨집안은 근처에서 유명한 대가족이다. 술을 만들어서 돈을 벌었고, 지금은 여러 산업을 가지고 있다. 양조장, 객잔, 밭이 여럿 있었다.

 

다른 일설에는 당시 누르하치가 계모에게 쫓겨난 후, 무순의 시장으로 흘러들어갔다. 그날 마침 한 어르신이 마차를 타고 지나갔는데, 마침 마차바퀴가 빠졌고, 마차가 뒤집어져 어르신이 그 아래 깔렸다. 발버둥을 쳐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는데, 누르하치가 이를 보고 신속히 달려가서 그의 어깨로 마차를 들어올려 이 어르신을 구해주었다는 것이다.

 

그 어르신은 구해준데 대한 고마움으로 그에 대하여 알아본 후, 이 청년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의 성명과 처지를 물어보고, 어디 갈 곳이 있는지 물어본다. 인삼을 캐서 살고 있다고 하자. 이렇게 말한다: "젊은이, 내가 보기에 자네는 좋은 사람이다. 이렇게 하자. 나를 따라 우리 집으로 가자. 내가 일거리를 주겠다."

 

그리하여 누르하치는 그 어르신을 따라 갔는데, 그가 바로 퉁원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일설에 따르면, 이 퉁원이 멀리 장사를 나갔다가 돌아오는데, 무성한 숲속을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굶주린 호랑이가 튀어나왔다. 이 위기의 순간에, 옆에서 튼튼하게 생긴 젊은이가 나타나서 냉정하게 활을 쏘아 호랑이의 눈을 맞쳤다. 호랑이는 부상을 입고 도망친다....

 

그리고 또 다른 버전에 따르면, 집에서 쫓겨난 누르하치가 산 속에서 인삼을 캐다가 곰을 만나서 물린다. 마침 퉁원이 지나가다가 그를 구해주고, 집으로 데려가서 치료해준다. 그리하여 그는 퉁가에 남게 된다.

 

여러 전설이 있기는 하지만, 누르하치가 실의에 빠져 있을 때, 타부바얜 즉 퉁원이 그를 거두어 준 것이다. 그리고 손녀인 퉁씨(일설에는 딸이라고 한다), 만주족의 이름으로 하하나자칭(필자의 생각에 이 이름은 후세의 사가들이 붙여준 것같다. 원래는 한자이름이 있었을 것이다. 누르하치가족을 위해, 역사의 진실을 덮고, 퉁성을 만주족성인 퉁자씨(佟佳氏)로 바꿔준 것이다)을 누르하치에게 시집보내고 누르하치는 데릴사위가 된다.

 

나중에 건주여진의 투룬성주(圖倫城主) 니칸와이란(尼堪外蘭)이 명군과 결탁하여 누르하치의 조부와 부친을 죽인다. 이는 누르하치에게 핑계가 되었다. 복수를 다짐한다. 퉁원은 그것을 알고 자신의 집안에서 13부반개갑(十三副半鎧甲)을 준다(일설에는 누르하치가문의 13부반개갑이라고 한다). 그리고 상당한 재산도제공하여 누르하치가 거병할 수 있게 해준다. 이렇게 하여 건주여진통일의 첫걸음을 내딛는다.

 

2. 한족인가 만주족인가?

 

그렇다면, 퉁가는 만주족인가 한족인가?

 

일설에는 이렇게 말한다: 동북지방에 퉁가라는 지명이 있다. 지금이 길림성 퉁화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거기의 여진족은 지명인 퉁가를 성씨로 삼았다. 나중에 한 무리이 퉁가씨가 명나라의 무순관으로 이주했고(지금의 요녕성 무순시 신빈만주족자치현 경내), 점점 요동의 거족이 된다.

 

사실상, 명나라후기에서 청나라 강희연간까지 이들 퉁씨는 계속 한족으로 취급되었다. 성씨의 연원은 규성(嬀姓)이다. 하왕조 말기 태사(太史) 종고(終古)의 후손들이다.

 

예를 들어 퉁양정(佟養正)은 정남기한군(正藍旗漢軍)에 속해 있었다. 비록 팔기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한군팔기였다. 강희27년(1688년)에 이르러 퉁양정의 손자인 퉁국강(佟國綱)이 강희제에게 상소를 올린다: "신은 일찌기 태조(누르하치)의 명을 받아 퉁자씨의 바두리멍아투(巴都哩蒙阿圖) 여러 대신과 고증하여 지파씨족보에 올렸습니다. 이제 만주족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강희제의 승락을 받아 퉁성(佟姓)은 "만주족과 한족으로 나뉘어 예속되어 있고, 씨족이 크고 지파가 번잡하다. 국조 팔대성중 가장 크고 복잡하다" 그리하여 퉁국강의 일족은 만주팔기에 들어간다. 만주팔기의 정황기(正黃旗)에 속한다. 그후에 소위 '퉁자씨'가 있게 된다.

 

또 어떤 사람은 퉁성은 원래 몽고족의 부루터씨(布魯特氏)라고 한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퉁자씨는 한족, 만주족, 몽골족의 피가 모두 섞여 있다는 것이다.

 

누르하치가 아직 강대하지 못할 때, 일찌기 퉁(佟)성을 쓴 적이 있다. 퉁자(佟佳)가 아니라.

 

만력24년, 누르하치가 명나라에 보낸 서신에서 자칭 "여진국건주위관속이인지주퉁누르하치"라고 한 바 있다. 만일 정말 만주성 퉁자였다면, 분명히 퉁자누르하치라고 적었을 것이다. 퉁누르하치가 아니라.

 

<동이고략(東夷考略)>에는 이런 말이 있다: "누르하치는 퉁성이다. 건주의 지부(枝部)이다"

 

<명신종실록>에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만력17년(1589년) 구월, "건주이추(夷酋) 퉁누르하치를 도독첨사(都督僉事)로 삼는다"고 하고 있다. 이를 보면 누르하치가 막 강대해지기 시작했을 때는 '퉁'성을 쓰고 있었고 이를 영광으로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하하나자칭은 한족이다.

 

필자의 생각에 하하나자칭은 확실한 한족이다. 성은 퉁이다. 무슨 퉁자씨가 아니다.

 

<퉁시원수종보(佟氏原修宗譜)>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오족세거요해(吾族世居遼海), 자북연유휘만(自北燕有諱萬), 휘수자(諱壽者)"(우리 족속은 대대로 요녕에서 살았고, 북연에 이름이 만, 수라는 사람....). 이를 보면 퉁성의 선조는 퉁만, 퉁수이고 한족이다.

 

<청사>에는 고의로 하하나자칭을 누락시킨다. 중요한 원인은 아마도 퉁가가 한족이기 때문일 것이다. 제업을 이룬 누르하치에게 이는 일대 치욕일 수 있다. 만청황족은 가족의 존엄을 보호하기 위해 고의로 이 일을 회피한다. 그래서 나중에 만주팔기로 들어가고, 퉁자씨로 바뀔 수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퉁자씨가족중에서 퉁양성, 퉁양진형제는 일찌감치 누르하치에 가담했고, 퉁가는 누르하치가 나라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가족대대로 조정에서 관직을 얻었고, 한때는 "퉁반조 (佟半朝)"라는 말까지 있었다. 즉 조정의 절반이 퉁씨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퉁가는 누르하치의 대은인이다. 또한 누르하치가 나라를 세울 수 있는 중요한 조건이 되었다. 다만 누르하치는 일찌기 '퉁'씨성을 썼고, 이는 그가 데릴사위로 들어갔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퉁가는 한족이다. 이는 누르하치의 후손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다.

 

어떤 사람은 누르하치의 본부인 퉁씨가 역사에서 잊혀진 것은 그녀가 누르하치를 위해 낳은 두 아들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도 그저 변명하는 말로 비친다.

 

역사는 항상 심오한 수수께끼를 남긴다. 사람들이 고민해서 답을 찾게 만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