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철마빙하(鐵馬氷河)
청왕조의 건립을 얘기하자면, 사람들은 먼저 그 "13벌의 갑옷(十三副甲胄)"으로 거병한 무적의 전신 - 청태조 누르하치(努爾哈齊)를 떠올린다. 바로 그의 한 손으로 대청300년의 강산은 기업을 닦는다. 기실,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거나 자세히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 누르하치의 배후에는 만청의 굴기에 크나큰 공로를 세운 심지어 그 공이 더 할 수 없이 크다고 할 수 있는 비범한 인물이 있다. 그는 바로 누르하치의 친동생 슈르하치(舒爾哈齊)이다. 여진족의 저명한 "빠투루(巴圖魯, 용사)"인 슈르하치는 지(智), 용(勇), 력(力)의 모든 면에서 그의 형에 못지 않았다. 다만 모종의 특수한 원인으로 그의 평생업적은 청왕조의 공식적인 정사에는 별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 어떤 경우에는 모호하게 적거나, 간단하게 얘기하고 지나간다. 이해가 잘 되지 않는 점은 슈르하치는 사고로 젊은 나이에 요절했는데, 청나라조정에서는 그의 죽음에 대하여 휘막여심(諱莫如深)한다는 것이다. 다만, 그의 자손후대는 청왕조에서 존중을 받았고, 대부분 요직을 지낸다. 황은을 깊이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보면 그가 보통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누르하치에게는 형제가 5명이 있었다. 그러나 같은 모친에게서 난 동복형제는 단제 셋째동생 슈르하치와 넷째동생 야르하치(雅爾哈齊)뿐이다. 1583년, 누르하치의 조부와 부친은 명나라군대에 '모살'당한다. 젊은 누르하치는 부친과 조부의 작위를 승계받아 건주좌위도지휘가 된다. 누르하치는 지모가 있고, 용기와 힘이 있으며 웅심이 있었고,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다. 그는 겉으로는 명나라조정의 칙봉을 받으면서, 뒤로는 몰래 실력을 키웠다. 형제 몇몇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군마를 훈련시키며 시기가 도래하면 부친과 조부의 원수를 갚겠다고 생각했다.
누르하치의 사람됨은 일처리가 아주 기민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적절하게 상황에 맞게 응대하는 것도 잘 했다. 요동에 주둔하는 명군의 장수는 그에 대하여 의심을 품지 않았고, 그가 겉으로는 받들지만 속으로는 딴 생각을 하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당시 25살이던 누르하치와 막 20살이 된 셋째동생 슈르하치는 모두 대지대용(大智大勇)의 인재였다. 누르하치는 더더구나 얻기 어려운 영수의 재목이었다. 만주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는 전쟁과정에서, 형제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웠다. 그리고 파죽지세였다. 주변의 여진부족의 추장들이 존경하면서도 무서워했다. 명나라의 요동에 주둔하던 봉강대리와 조선국의 군신들도 점차 형제 두 사람이 지용을 겸비하고 가슴에 큰 뜻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중에 두 형제는 모두 명나라조정에 의하여 도독에 임명된다. 건주여진의 내부에는 일시에 두 명의 도독이 생긴 것이다. 만주인들은 순서에 따라 슈르하치를 "이도독(二都督)"이라고 불렀다.
만주어 원시기록을 보면, 건주여진 내부의 모든 군기대사는 누르하치 슈르하치 두 형제가 상의하여 결정했고, 나머지 장수들과 따르는 자들은 모두 물러나서 두 사람이 하는 말을 듣지 않았다. 일단 결정이 되면, 명령이 내려오고 형제 2사람을 제외하고는 의사결정의 내막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머지는 모두 명대로 집행할 뿐이었다. 만력39년(1611년) 형제 2명은 군대를 이끌고 건주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한다. 그리고 승기를 틈타 해서여진 하다(哈達), 휘파(輝發) 두 부족도 병합한다. 원래 별로 대단하지 않았던 누르하치의 부족은 튼튼한 날개가 얻어, 일거에 강성해진다. 원래 분산되어 있던 여진의 부족들은 누르하치에 의하여 통합된다. 일시에 그의 휘하에는 맹장들이 운집하여, 정예병력 수만을 보유하게 된다. 그는 이를 팔기로 편제를 하여, 일시에 팔기정병이 요동에 웅거하며, 조선을 억누르고, 중원을 노렸다. 누르하치가 백산흑수의 사이에서 기세를 형성할 때, 그리고 왕자의 기를 드러내지 않을 때, 백전의 공로를 세운 도독 슈르하치는 돌연 괴이하게 사망한다. 문헌의 기록에 따르면, "대명만력39년(기원1611년)8월19일슈르하치가 사망하다. 나이 48세였다."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은 <청실록>에서 이 일을 간략하게 기록한 것을 제외하고, 나중의 청나라 공식 정사기록이나 만주어기록에 슈르하치라는 이 맹장, 그리고 누르하치의 친동생으로 황족요인인 귀한 그의 죽음에 대하여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모종의 신비한 역량이 그가 세상에 살았었다는 것을 사람들의 뇌리에서 지우려는 것같았다. 그렇게나 신경을 써다니 실로 의미가 심장하지 않을 수 없다.
슈르하치가 한창 나이에 죽었는데, 사인은 의심이 들게 한다. 당시에도 이미 말들이 많았었다. 그는 병사한 것인가, 전사한 것인가? 장례의 규격, 장례일시는 또 어떠한가? 청사에는 아무런 언급도 없다. 명나라사람들은 이 일에 아주 흥미가 있었다. 명나라의 문헌기록에 따르면, "노추(奴酋, 누르하치를 가리침)는 그의 동생 슈르하치(명나라사람들은 速爾哈赤이라고 썼다)의 병력이 강해지는 것을 꺼려서, 계책을 세워 그를 죽여버렸다."(왕재진 <삼조요사실록>) 명말의 항청명장이자 여진족의 풍토인정 및 고위층의 비밀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주칙(周則)은 상세하게 이 수족상잔의 비극을 묘사했다: "추(酋, 누르하치를 가리킴)는 동생이 딴 마음을 품고 있다고 의심하여, 거짓으로 군영을 짓고 낙성식에 술자리를 마련한다고 동생을 초대했다. 침실에 들어가자 잠그고 쇳물을 부어 그 문을 막아버린다. 단지 구멍 2개만 남겨서 음식이 들어오고 나가고 대소변을 내보낼 수 있었다. 동생에게는 두 명의 비장이 있었는데 용감하기로 유명했다. 누르하치는 그들이 동생을 도와주는 것을 미워하여 거짓으로 동생의 명령이라고 속이고 집으로 불러서, 허리를 참하여 죽였다." 황도주(黃道周)가 사가필기에 기록한 이 글을 보면 의문투성이인 슈르하치의 죽음의 진상이 거의 드러난다. 1609년(명만력37년), 누르하치는 슈르하치가 자립을 도모한다는 이유로, 슈르하치의 아들 한 명과 부하 1명을 삭탈관직시켜 군민으로 만든다. 두 사람은 모두 용맹하기로 이름을 떨쳤고 충성심이 강한 자들이었다. 2년동안 감금된 후, 슈르하치도 무슨 일인지 모르게 죽는다. 슈르하치는 공이 형보다 높았다. 그래서 꺼러해서 그를 죽이게 된 것이다. 전쟁에서는 용맹한 천생의 장수인 그는 그에게 충성하는 군대도 있었고, 명망도 형에 못지 않았다. 자연히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일 그가 목숨을 걸고 싸웠다면 누가 이길 지는 알기 힘들었을 것이다. 누르하치는 동생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암중으로 계책을 써서 먼저 그의 심복을 죽여 그의 날개를 꺽은 다음, 다시 그의 무리를 분화시켜 그의 세력을 약화시킨다. 양웅이 서로 싸울 때 이렇게 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다만 명나라사람들이 그가 동생을 죽였다고 적은 것은 대부분 적의 각도에서 상대방을 추악하게 보이게 하려는 일반적인 수법이다. 아마도 전혀 근거없는 모함일 수도 있다.
설사 누르하치가 동생을 죽였다는 소문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도대체 무슨 원인으로 지금까지 친밀했고, 잘 협력하던 형제 두 명이 돌연 반목하게 되었을까? 그리고 골육상잔까지 벌이게 된 것일까. 형과 마찬가지로, 슈르하치도 명나라정부가 정식으로 임명한 건주여진을 통할하는 관리였다. 두 도독이 하나는 좌도옥 하나는 우도독이어서, 서로 직급이 대등하다고 할 수 있다. 슈르하치의 휘하에는 병력이 강한 군대가 있었고, 오랫동안 전투를 겪어 실력이 형에 못하지 않았다. 만일 그가 조심스럽게 처신하고, 형의 칼날을 맞고 싶어하지 않아서, 형의 말을 다 따르고 그의 지휘에 복종했다면 형제 두 사람은 자연히 아무런 일없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명나라문헌을 보면, 슈르하치는 성격이 호쾌하고 일처리에 거칠 것이 없었다. 그는 길들이기 어려운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공로가 높은 것을 내세워 자주 형과 대항했고 심지어 뒤로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 기회만 있으면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자신의 휘하병마를 빼내어 독립하고자 했다.
한 산에 두 호랑이가 있을 수는 없다. 그러다보니 갈등이 겹치고 조화가 될 수 없었다. 누르하치는 여진인들이 공인한 걸출한 영수이다. 지모로 보나, 명망으로 보나 슈르하치와 비교할 수는 없었다. 군대실력으로 보아도 슈르하치보다는 약간 더 셌다. 그래서 슈르하치는 형을 떠나서 자신의 강산을 개척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큰 뜻을 품고 있던 누르하치에 있어서, 슈르하치가 부하를 이끌고 자신을 떠나는 것은 분열행동이다. 이는 자신의 침대 위에 또 다른 사람이 누워자는 것을 허용하는 꼴이다. 만일 마음대로 하게 놔둔다면 그것은 호랑이가 산으로 돌아가게 놔두는 것이 된다. 자신에 적대하는 세력이 하나 더 늘어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의 수하들에게도 나쁜 선례를 남기게되는 것이다.
앞뒤로 깊이 생각해본 후, 결정을 머뭇거리던 누르하치는 결국 죽이기로 결심한다. 그는 한번 하면 한다는 쾌도난마식으로 해결한다. 권력과 형제의 정의 사이에서 그는 전자를 선택한다. 그래서 형제간의 싸움이라는 음모극이 서막을 열었다. 역사를 돌아보면, 흉노선우 모돈, 여진수령 누르하치같은 '오랑캐'들이 잔인하게 부친을 죽이고 동생을 죽였을 뿐아니라, 영명한 한족의 군왕인 양광, 이세민, 조광의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 이번 형제간의 내분은 간단한 권력투쟁이 아니라고. 명나라의 상하에서 이간질을 한 결과라고. 이것은 일종의 '명나라옹호세력'과 '명나라반대세력'간의 명쟁암투라고. 명정부는 누르하치의 실력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암중으로 슈르하치를 도와주어 누르하치의 신속히 팽창하는 야심을 견제하고 억눌렀다. 이렇게 하여 그가 너무 크게 되지 못하도록 하고, 말을 잘 따르게 하려는 계책을 쓴 것이다. 명정부는 건주좌위가 이미 설립되어 있는데, 건주우위를 설립한다. 좌위의 수령은 부친과 조부의 작위를 승계한 누르하치이므로, 우위의 설립은 화사첨족의 의미가 있다. 이를 보면 명나라의 속셈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우위의 수령은 자연히 슈르하치이다. 일시에 두 영웅이 병립하고 두 호랑이가 서로 싸우는 기세가 형성된다. 보기에, 누르하치가 잔인한 수단으로 수족을 자른 것은 여러 방면의 원인이 있다. 내인외인이 복잡하다. 절대로 그 개인의 성격이 악독하고 살인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거나 대권을 독점하기 위하여 가족도 몰라본다는 식으로 간단한 것이 아니다. 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지, 어느 것이 맞고, 어느 것이 틀린지 일시에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슈르차치가 그의 형의 손에 죽었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이는 역사학자들이 공인하는 것이다. 권력투쟁도 좋고, 정견이 다른 것도 좋다. 어쨌든 누르하치는 친동생 슈르하치를 죽였다. 가장 기뻐할 사람은 명나라의 황제와 명나라의 여러 사람들이다. 명나라의 권모술수는 번운복우하고 부추겼으며, 이간계를 아주 잘 운용했으며 최종적으로 확실히 효과를 발휘했다. 슈르하치는 청나라의 여진족통일에 큰 공로를 세웠고 요동을 점령하는데도 공이 크다. 그는 병사를 훈련시키고, 동서로 정벌하며, 투항을 받아들이여 공로에 있어서 그의 형에 바로 다음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에는 이름이 별로 없고, 사람들이 모두 언급하기를 꺼리는 대상이 된다. 만청의 고문헌과 공식역사에 그의 사인을 명확히 적지도 않았다.
만청이 중원에 들어온 초기, 이전의 여러 왕, 패륵에 대한 억울한 사건은 적지 않게 청나라조정에서 명예회복된다. 오로지 슈르하치의 신비한 사망사건만은 명예회복되지 않았다. 심지어 이 화제는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것이 되었다. 아마도 누르하치의 자손들은 그의 조상이 동생을 죽였다는 악명을 뒤집어 쓰기를 인정하는 것을 부끄러워 하거나 꺼렸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 태조의 후예들이 보기에, 누르하치가 동생을 죽인 것은 형세로 인하여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여진내부의 안정과 단결을 유지하고, 부족내의 분열을 막기 위하여 그리고 역량을 결집하여 제업을 이루겠다는 생각에서, 태조가 정한 결론을 뒤집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청나라황실의 불문의 묵계와 행사방법을 보면, 이 일과 관련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슈르하치의 자손을 잘 대해주었다는 것이다. 슈르하치의 장남인 지르하랑(濟爾哈朗)은 정친왕(鄭親王)에 봉해진다. 이 슈르하치계의 귀족은 그 뒤에도 청나라조정에서 청왕조가 끝날 때까지 중용된다. 이 친왕의 작위도 세습망체가 된다. 즉 그 어느 것에도 끄덕없는 철모자왕이 된다. 슈르하치의 자손은 청왕조에서 지위가 혁혁했고, 총애를 받았다. 마치 마음 속에 미안한 감이 있는 누르하치계의 황실후예들이 그 조상의 잘못을 극력 보상하기라도 하듯이. 청나라말기의 함풍연간에 이르러, 함풍제 혁녕은 임종전에 유조로 이친왕 재원, 정친왕 단화, 상서 숙순등 8명에게 보정을 맡긴다. 세상에서 부르는 "찬양정무왕대신"이다. 즉 역사상 유명한 '고명팔대신'이다. 주목할 점은 정친왕 단화와 상서 숙순은 친형제인다. 두 사람은 모두 슈르하치의 팔대손이다.
태조 누르하치의 직계가 임종때 어린 아이를 맡기는데, 바로 첫손으로 뽑힌 사람이 바로 슈르하치의 직계자손이다. 이것은 하늘의 뜻인가? 아니면 함풍제가 조상의 훈도를 지켜서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인가. 이미 고증할 방법은 없다. 그 인연을 따져보면 슈르하치의 죽음의 진상은 도대체 어떠한지 깊이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그의 자손들마저도 따져볼 생각이 없었는데, 우리가 다시 그 뿌리를 캐려 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일 수 있다. 기실 그 진실한 결과가 어떠한지는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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