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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누르하치)

누르하치에 관한 두 가지 전설

by 중은우시 2012. 4. 30.

글: 한우연강2005(寒雨連江2005)

 

필자의 고향인 신빈(新賓)은 청왕조의 '용흥지지(龍興之地)'이다. 그래서 아주 어렸을 때, 노인들이 '노한왕(老罕王)' 누르하치에 관한 전설을 이야기하는 것을 자주 들었고, 지금도 그 중의 두 가지는 잊혀지지 않는다.

 

하나는 "의견구주(義犬救主)", 즉 의로운 개가 주인을 구했다는 전설이다. 대체적인 내용은 누르하치가 하루는 산에 올라가서 토끼를 잡고 있을 때, 의외로 중상을 당해서 정신을 잃었다. 그때 마침 산불이 났다. 그와 함께 사냥을 나섰던 개 한마리가 아주 총명하여, 혼미한 주인이 산불에 해를 입지 않게 하려고, 계속하여 부근의 차가운 강물에 자신을 적신 후, 다시 주인의 곁으로 돌아와서 자신의 몸에 묻은 물로 주인의 주위의 불을 껐다. 주인이 깨어날 때까지. 그리하여, 누르하치는 위기를 넘긴다. 여진부락을 통일시킨 후에는 '의견을 배우자'는 통지를 낸다. 그리고 전체 여진족에게 개고기를 먹지 못하게 명을 내린다. 그리하여, 그 개는 그 이후 '의견'으로 불리운다.

 

사실 만주족들이 개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조상이 농경어로수렵생활을 한 것과 관련있다. 그때 동북지방은 땅은 넓고 사람은 적어서, 초원에 숲이 깊었다. 맹호나 늑대, 꿩, 토끼가 곳곳에 있었다. 개는 일생상활에서 집안을 돌보고 사냥을 도와주는 등 주요한 역할을 한다. 만주족은 개에 대한 감사한 뜻에서 점차 개고기를 먹지 않는 습관이 길러지게 된 것이다. 이는 조선과는 정반대이다. 역사상 '의견구주'의 사건이 있었는지는 이미 고증할 방법이 없다.

 

다른 하나는 "고유신수(古楡神樹)" 전설이다. 그 내용은 누르하치의 할아버지 줴창안(覺昌安), 부친 타커스(塔克世)가 명나라군대에 살해당한 후, 누르하치는 두 사람의 시신을 유해를 등에 매고 지금의 신빈현 영릉진까지 도망쳤다. 저녁에 여관에 들어가려 했는데, 가게주인이 유해를 가지고 들어오는 것을 꺼려서, 유골을 가지고 여관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누르하치는 별다른 도리가 없어, 마을 서쪽의 느릅나무를 찾아서, 유골을 담은 보자기를 나뭇가지에 걸어놓는다. 그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진다. 다음 날 아침에 잠에서 깨어 유골이 든 보자기를 가져가려고 하는데, 나뭇가지가 하룻밤만에 자라서 붙어버려 그 보자기를 아무리 꺼내려고 해도 꺼낼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 나뭇가지를 땅바닥까지 눌러서 그 자리에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유해를 묻는다.

 

이 곳에 바로 제왕의 기운이 있는 풍수명당이었다. 누르하치가 할아버지와 부친을 그 곳에 묻었기 때문에, 나중에 300년간 대청제국이 중국을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청나라가 건립된 후, 황제는 이 곳에 능침을 만들고, "영릉(永陵)"이라고 이름붙인다. 그 신수는 새로 싹이 나서, 뿌리가 깊고 잎이 무성한 큰 나무로 자란다. 역대황제는 이곳에 와서 조상에 제사지낼 때, 이 신수도 참배했다. 건륭황제는 여기에서 글도 하나 짓는다 <신수부>. 그 내용은 영릉원내에 있는 비석에 새겨져 남아있다. 더욱 신기한 점은, 선통제(부의)때 이르러, 이 신수가 돌연 죽어버린다는 것이다. 황실은 이 일을 아주 불길하게 여기고, 급히 나무 한 그루를 새로 심었다. 그렇게 했지만, 대청멸망의 운명은 막을 수가 없었다.

 

이 두 가지 전설중 최소한 두번째 것은 완전한 헛소리이다.

 

청나라뿐아니라, 역대왕조는 모두 이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를 즐겼다. 어떤 경우는 감히 정사에 기록되기까지 하였다. 역사는 길고 문자기록이 없다보니, 삼황오제에 관해서 터무니없는 내용을 적은 것은 이해가 된다. 그러나 은나라 시조를 새알을 먹고 회임했다든지, 주나라 시조는 모친이 거인의 발자국을 밟고 회임했다든지, 한고조의 모친은 용과 교배하여 그를 낳았다든지....남송의 고종은 금나라병사의 추격을 받을 때, 진흙으로 만든 말을 타고 강을 건너 도망칠 수 있었다든지...너무나 터무니없는 이야기들이 많다.

 

왜 그랬을까? 원인은 아주 간단하다. 이 모든 것은 인민대중을 속이기 위한 것이다. 모두가 그들을 '진룡태자'라고 믿게 하기 위한 것이다. '군권신수'를 심어주기 위한 것이다. 그래야 통지가 순조롭다. 노동인민을 착취하고 억압하기 쉽다. 당시의 인민대중은 문화수준이 낮고, 모두 천진하기 그지없었다. 뭐라고 얘기하든 그대로 믿었다. 이런 수법은 계속 사용되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무런 창의성도 없이 계속 반복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에 이르러, 이 기량은 기본적으로 힘을 쓰지 못한다. 그러나 일부 권력추종자들은 방법을 찾아낸다. 예를 들어, 지도자를 태양에 비유하거나, 지도자의 출생과 관련하여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등이다. 이 방식은 대륙에서건 타이완에서건 모두 사용되었다. 압록강 건너편의 형제국가(북한)에서는 지금도 쓰고 있다.

 

바다를 항해하려면 조타수가 필요하다. 만물의 생장에는 태양이 필요하다. 태양과 함께 일컬어지는 것은 필자가 알기로 일본천황을 제외하고는 마오주석과 김씨뚱뚱이 두 사람 뿐이다.

 

출생지를 가지고 이야기를 만드는 것도 상대적으로 많다. 옛날에 소학교에 들어갔을 때, 1학년 미술교과서의 첫페이지는 빛이 널리 퍼져나가는 소산충(韶山沖, 소산은 마오쩌둥의 고향)이었다. 지금도 소산은 일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성지와 같다.

 

이런 일은 또 일어났다. 이년전에 랴오신중 선생의 블로그를 보았는데, 원래 타이완에서도 이런 일을 벌인 적이 있었다고 한다. 펑화 시커우는 타이완 중학, 소학교 교과서에 신성한 안개로 둘러싸이고, 상서로운 기운이 솟아오르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이런 인들은 비록 어용문인의 손에서 나왔지만, 당사자들이 묵인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중의 덩샤오핑은 이런 짓을 하지 않았다.

 

이를 보면, 마오주석이건 장제스이건 내심 깊은 곳에는 제왕정서가 있었던 것같다. 두 사람은 군사적으로 호적수였을 뿐아니라, 다른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로 호적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