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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누르하치)

허허리(何和禮): 누르하치는 왜 큰 딸을 유부남에게 시집보냈는가?

by 중은우시 2012. 9. 19.

글: 유계흥(劉繼興) 

 

누르하치는 평생동안 16명의 아들과 8명의 딸을 낳았다. 동궈거거(東果格格)(나중에 고륜공주(固倫公主)에 봉해짐)는 만력6년(1578년) 이월 이십이일에 태어났다. 장녀일 뿐아니라,누르하치의 자녀들 중에서 첫째 자식이다.

 

그런데, 동궈거거가 만10살이 되었을 때, 부친 누르하치는 그녀를 27살된 유부남에게 시집보내어 측실이 되게 한다.

 

일대의 개세영웅인 누르하치가 왜 딸을 아직 다 자라기도 전에 성급하게 시집보내고, 그것도 측실로 보냈을까?

 

원래 이는 정략결혼이다. 동궈거거를 취한 스물일곱의 유부남인 허허리는 보통내기가 아니다. 당시 건주여진의 5부락중 하나인 동악부(棟鄂部)의 수령이며, 누르하치보다는 2살이 어렸다. 그가 누르하치에 귀순한 것은 누르하치가 여진을 통일하는 대업을 이룩하는데 아주 유리했다.

 

그때, 누르하치는 이미 무력으로 건주여진족의 대부분지역을 통일했다. 그는 여진의 5부락중 하나인 동악부와 비록 서로 전투가 있었지만, 나중에 쌍방의 관계는 크게 완화된다. 누르하치는 무예가 뛰어나고, 내성적이며 모략이 풍부한 허허리가 이끄는 동악부는 전투력이 아주 강하고, 병마가 튼튼하다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동악부를 자신의 세력범위내로 끌어들이고 싶었다. 만력16년(1588년) 사월, 누르하치는 해서여진(海西女眞)의 하다(哈達)패륵 왕타이(王台)의 손녀 나라씨(納喇氏)를 비로 맞이하기로 하고, 하다로 가서 나라씨를 맞이하러 가면서 특별히 허허리에게 병력을 이끌고 호송해달라고 부탁한다. 허허리는 친히 30명의 기병시위를 이끌고 수행한다. 두 사람은 장시간 근거리에서 접촉하게 된다.

 

허허리는 일찌감치 누르하치는 존경했다. 그를 여진의 일대호걸로 여겼다. 이번 접촉과 대화에서 그는 누르하치가 웅재대략을 지녔을 뿐아니라, 아랫사람을 예의로 대하는 것을 보고 장래에 반드시 영명한 군주가 될 것이라고 느낀다. 누르하치는 여진각부의 통일을 위하여, 그리고 나아가 중원을 차지하고 천하의 패자가 되기 위하여, 특히 동악부의 지지와 허허리와 같은 뛰어난 인재가 필요했다. 그리고 허허리는 "성격이 관대하고 온화하며, 식견이 풍부했다." 누르하치는 아주 깊은 인상을 받는다. 그를 자신의 부하로 끌어들인다면 대업을 이루는데 걱정할 일이 없어보였다.

 

수행업무가 끝난 후, 누르하치는 그를 불아랍(佛阿拉, 지금의 요녕성 신빈현 영릉진)으로 초청하여 귀빈의 예로 대한다. 두 사람은 고금의 일을 논하고 속에 든 말을 꺼낸다. 모두 여진각부의 분쟁국면에 대하여 우려를 지니고 있었다. 누르하치는 그 기회를 틈타 그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한다. 허허리가 자신과병력을 합치면 대업을 같이 이룰 수 있겠다는 것이다. 허허리도 흔쾌히 응락한다. 흐허리는 동악부로 돌아간 후 아랫사람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의연히 본부의 군민 만여명을 데리고 누르하치의 주둔지인 불아랍성으로 가서, 정식으로 누르하치에 귀순한다. 허허리와 동악부의 귀순은 누르하치의 실력을 크게 늘였다. 마치 호랑이에 날개를 달아준 격이었다. 그리고 여진각부를 통일하고 명나라조정과 대항하는데 견실한 기초가 되었다.

 

허허리의 귀순에 대하여 누르하치는 아주 기뻤다. 그는 허허리를 일등대신으로 임명하여 은총을 보이고, 화친의 회유정책을 취한다. 특별히 자신의 장녀 동궈거거를 '고륜공주'로 책봉하고, 허허리에게 시집보내기로 한다.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융중한 혼례를 치러준다. 동궈거거는 누르하치와 원비 퉁자씨 사이에 태어났고, 당시 열살이었다. 누르하치의 장상명주였는데, 그녀를 이미 결혼한 허허리에게 시집보낸 것이다. 이를 보면 누르하치가 허허리를 얼마나 좋아하고 아꼈는지 알 수 있다.

 

허허리는 원래 부인이 있었다. 원부인 사이칸(賽堪)은 용모가 예뻤을 뿐아니라, 말타고 활쏘는데도 뛰어났으며, 병력을 이끌고 전투를 하는데도 일류였다. 일찌기 그녀는 시집가기 전에 우모채(牛毛寨)의 추장을 지내기도 했다. 허허리와 결혼한 후, 즉시 동악성의 여두령이 되어, 본성이 부녀를 관장했다. 그녀는 동악부에서 명망이 허허리보다 낮지 않았다. 남편이 다시 다른 여자를 취한다는 말을 듣자, 사이칸은 크게 분노한다. 그래서 동악부에 남은 인마를 이끌고 볼아랍성으로 쇄도해 가서, 허히리와 결전을 치르고자 한다. 허허리는 처가 온다는 말을 듣자, 인마를 이끌고 맞이해 나갔다. 그리고 처에게 연유를 설명했다. 그러나 처는 남편의 설명을 아예 들으려 하지 않고, 싸움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누르하치는 이때 사이칸에게 성의있게 말한다. "내가 딸을 허허리에게 준 것은 자식의 사사로운 정때문이 아니다. 이 결혼을 통하여 우리의 부락이 연합하려는 것이다. 나는 너의 남편을 빼앗지 않겠다. 네가 여전히 큰부인이다. 동궈는 측실로 삼아라. 네가 동생으로 생각해주면 되겠다."

 

누르하치가 나서서 달래자, 허허리의 처인 사이칸도 병력을 물린다. 그리고 누르하치에 귀순한다.허허리와 누르하치는 장인사위관계가 된 후, 자연히 누르하치의 심복이 된다. 사람들은 모두 그를 "동악액부(棟鄂額附, 액부는 부마라는 의미임)", "고륜액부(固倫額附)"라고 불렀다.

 

그후, 누르하치는 허허리를 더욱 신뢰하고 매번 군정대사를 처리할 때마다 반드시 허허리와 미리 상의했다. 그후에야 실시한다. 허허리는 무게가 있었고, 지모가 뛰어났다. 실수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리하여 누르하치는 그를 곁에 두고 군기를 논의했다. 업무상 편의를 위하여, 누르하치는 특별히 허투아라(赫圖阿拉)성밖의 언덕에 허허리를 위하여 '액부부"를 만들어 주고, 액부부에서 내성으로 통하는 작은 문도 만들어 직접 성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액부부의 자리는 누르하치의 칸궁대가문과 후궁에 가까웠다. 이렇게 하여 허허리는 언제든지 누르하치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만력33년(1605년), 누르하치는 기제(旗制)를 처음으로 확립한다. 허허리는 부족을 이끌고 홍기(紅旗)에 예속되고, 본기총관대신이 된다. 만력36년(1608년), 누르하치는 장남 추잉, 조카 아민으로 하여금 오천의 병마로 우라(烏拉)를 정벌하게 한다. 허허리가 병력을 이끌고 다르며 적을 무너뜨리는데 공을 세운다. 특히 이한아린(현재의 길림시) 전투에서, 건주의 병마가 우라의 병마를 대파하고 천명을 참살하고, 갑옷 300개를 획득한다. 만력39년(1611년) 십이월, 허허리는 누르하치의 명을 받들어, 어이두(額爾都), 후르한(扈爾漢)등과 함게 이천 병마를 이끌고, 멀리 동해여진 악집부의 후라하루를 정벌한다. 자쿠타성을 포위한 후, 결국 이 성을 함락시키고 1천여명을 참살하고, 2천여명을 포로로 잡는다. 자쿠타성이 함락된 후, 주위의 각 부족은 건주병마의 위세에 겁을 먹어 속속 투항한다. 허허리는 그들의 수량 투러선, 어러선으로 하여금 민중 오백호를 이끌고, 부대를 따라 허투아라로 오도록 한다. 이번 원정은 전승을 거두고 귀환하여 건주여진의 통치세력범위를 흑룡강, 우수리강일대까지 확장한다.

 

허허리는 누르하치를 따라 남정북전에 공헌이 탁월했다. 그러나 누르하치의 장남 추잉의 견제를 받는다. 추잉은 마음이 좁고 특히 몇몇 동생과 오대신을 미워했다. 그래서 이런 말까지 한다. 만일 동생과 오대신이 그의 말을 듣지 않으면, 나중에 죽여버리겠다고. 허허리는 각 대신과 추잉의 비위상황을 적어서 누르하치에 보고한다. 그 결과 추잉은 누르하치의 질책을 받고 멀어지고 결국은 죽임을 당한다. 이를 보면 누르하치가 허허리를 얼마나 신임하는지 알 수 있다.

 

우라부의 두목인 부잔타이(布占泰)는 맹세를 위반하여 예허부(葉赫部)와 연맹을 맺으려 했다. 허허리는 우라부에 출병할 것을 주장하고, 누르하치에게 친히 건주의 병마를 이끌고 친정할 것을 청한다. 허러리의 건의하에, 누르하치는 허허리등 여러 장수와 3만대군을 이끌고 친히 우라부를 정벌한다. 건주대군이 밀고 들어가면서, 누르하치는 여전히 부잔타이가 귀순할 것에 대항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귀순하기를 기다렸고, 그의 잘못을 인정하고 시정하면, 철군할 생각이었다.

 

부잔타이는 한편으로 사신을 보내어 누르하치에 죄를 청하고, 다른 한편으로 친히 3만의 우라병마를 이끌고 맞이하였다. 모두 보행으로 진을 갖추었다. 이때 허허리와 여러 장수들은 출전을 청한다. "우리 군은 먼 길을 와서 정벌하는 것이니 속전속결이 유리합니다. 우리군이 걱정하는 것은 우라군이 출병하지 않는 것인데, 현재 그들은 진을 갖추어 기다리고 있습니다.우리 군은 이 평야를 이용하여 기세를 올려 그들을 붙잡아 죽일 수 있습니다. 만일 이 섬멸의 기회를 놓치면, 우리 군은 피로에 지치게 될 것이니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허허리등 여러 장수의 요구로, 누르하치는 장병들에게 기병을 포기하고 보병전을 벌이게 한다. 허허리는 누르하치를 따라 선두에서 솔선수범하여 적진을 뚫고 들어간다. 일시에, 화살이 비오듯이 내렸다. 건주의 병사들도 용감하게 분전했고, 우라의 병사들도 죽어라 싸웠다. 격렬한 전투를 거쳐 우라의 병사들은 크게 피해를 입어 10에 6.7이 사상당한다. 남은 사람은 모조리 도망친다. 건주병마는 승세를 틈타 우라성을 함락시킨다. 부잔타이는 겨우 몸을 빼어 예허로 간다. 우라는 이로써 멸망한다.

 

만력43년(1615년) 누르하치는 정식으로 만주팔기제도를 건립한다. 허허리와 그의 부는 정홍기(正紅旗)에 편입된다. 누르하치의 차남이자 정홍기 기주인 패륵 다이산(代善)에 예속된다. 다음 해 정월,누르하치는 후금국을 건립하고, 연호를 천명으로 한다. 의정오대신을 임명하여 국정을 논의하는데, 허허리, 어이두, 페이잉동(費英東), 안페이양구(安費揚古)와 호르한이다. 군국대사는 먼저 오대신이 처리의견을 낸 후에 4대패륵이 심의한다.

 

허러리와 어이두, 페이잉동, 안페이양구, 호르한은 함께 누르하치의 "개국오대신"이다. 충성스럽게 누르하치를 따라 거병한 후 죽을 때까지 함께 단결했고, 분열되지 않았다. 그들은 대청제국의 건국에 큰 공로를 세운다.

 

천명4년(1619년) 허허리는 부대를 이끌고 후금정권의 굴기를 상징하고, 대청의 기업을 세운 사르후대전에 참전한다. 이 전투에서, 허러리와 그의 부대 병마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료에 따르면, "사르후전투에서, 명나라군사를 패퇴시킨 것은 모두 공(허허리)의 힘이다." 천명6년(1621년), 후금의 병마는 연이어 심양, 요양을 점령한다. "허러리는 모두 거기에 참여한다." <만문노당>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의 허허리는 혼하음격 5개 우록, 보르휘 5개 우록, 아르후, 쑤완 8개 우록을 관장했다. 개략 계산해 보더라도 5,400명이 군사를 관장했다. 후금이 심양, 요양 두 개의 성을 함락시킨 후, 허허리는 전공으로 세습3등총병관의 직을 하사받는다."

 

허허리는 누르하치를 따라 36년간 전투와 정사에 참여했으며 후금의 굴기에 공이 아주 크다. 그래서 누르하치의 총애를 받는다. 천명9년(1624년), 허허리는 쌓인 피로로 병을 얻고, 관청에서 병사한다. 향년 64세이다. 허허리가 사망했을 때, 오대신중 다른 4명도 이미 다 병사했다. 허러리만이 후금의 군기대사에 참여하고 있었다. 누르하치는 허허리와 같이 충성스럽고 용맹한 대신을 잃은 것에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허허리는 죽은 후에 명예를 많이 얻는다; 청태종때, 허러리는 삼등자(三等子)에 봉해진다. 순치11년(1654년)에는 허허리를 "온순(溫順)"에 봉하고, 돌에 공로를 새긴다. 옹정8년(1729년) 봉호 "용근(勇勤)"을 추가한다. 그의 처인 동궈거거는 순치9년(1652년) 칠월에 사망하니 향년 75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