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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누르하치)

청태조 누르하치 죽음의 수수께끼

by 중은우시 2018. 7. 28.

글: 학역사(學歷史)


누르하치는 중국역사상 최후의 봉건왕조를 세운 인물이다. 김용(金庸)은 그를 "징기스칸 이래 400여년동안 전세계에서 나타난 적이 없는 군사천재"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의 사인에 관하여는 사학계에서 논쟁이 끊이지 않았고, 시종 정설이 없다. 논쟁의 촛점은 주로 그가 원숭환(袁崇煥)의 포화에 상처를 입은 후 그 상처가 도져서 죽었는지, 아니면 그가 독저(毒疽)를 앓았고, 그로 인해 죽었는지에 관한 것이다.


조선(朝鮮) 사람이 쓴 저작는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누르하치는 영원(寧遠)전투에서 '중상(重傷)'을 입었고, 명나라의 장수 원숭환의 조롱을 받았다.


사료에 따르면, 1626년, 68세의 누르하치는 친히 6만대군(14만대군이라고 말했다)을 이끌고 남정에 나선다. 파죽지세로 내려가며 싸우지도 않고 8개성을 점령한다. 금방 병력을 이끌고 영원성 아래에 도착한다. 명나라의 영원성을 지키는 수비장수는 원숭환이다. 그는 누르하치의 투항요구를 결연히 거절한다. 그리고 친히 병사들과 백성 만명을 이끌고 완강하게 수성한다. 그들은 영원성에 11문의 홍의대포(紅衣大砲, 원래는 紅夷大砲라 불렀는데, 청나라는 동이가 중원을 차지한 것이므로 '이(夷)'자를 피휘하여 홍의대포라고 부른다)를 설치하여 쳐들어오는 적을 맞을 준비를 했다.


이 홍의대포는 위력이 상당히 크다. 북경사회과학원 만학연구소 염숭년(閻崇年) 연구원은 이런 홍의대포는 영국에서 만든 캐논포라고 한다. 포신이 길고, 관벽이 두껍고, 사정거리가 멀며, 위력이 크다. 특히 밀집기병을 격살하는데 강혁한 화력을 지녔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화포였다.


홍의대포는 영원전투에서 확실히 큰 위력을 발휘한다. 사료기재에 따르면, 후금군대의 공성행동은 명군의 맹렬한 화포공격에 좌절되곤 했다. 영원성의 아리ㅐ에 팔기관병의 혈육이 난비했고, 시신이 산처럼 쌓였다. 공성을 하던 삼일째 되는 날, 후금군대는 철군하여 돌아간다.


위력이 큰 서양화포의 맹렬한 공격을 받으면서, 후금대군의 총사령관이면서 친히 성아래로 가서 독전하던 누르하치는 당시 중상을 입었을까? 이에 대하여, 명나라와 후금의 책에는 모두 명확한 기록이 없다. 마카오역사연구자인 김국평(金國平)과 오지량(吳志良)이 공저한 <마카오와 입관전의 만청>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명군이 사용한 신식화기에 아무런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영원전투에서 누르하치가 부상을 입었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


세심하게 연구한 끝에, 김국평과 오지량은 마침내 조선인 이성령(李星齡)이 저술한 <춘파당일월록(春坡堂日月錄)>에서 명확히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누르하치는 영원전투에서 '중상'을 입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책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의 역관인 한원(韓瑗)은 사신단을 따라 명나라로 갔는데, 마침 원숭환을 만나게 된다. 원숭환은 그를 아주 좋아했다. 영원전투때 그를 곁에 두기도 했다. 그래서 한원은 친히 이번 전투의 전과정을 목격한다. 영원전투가 끝난 후, 원숭환은 일찌기 사신을 보내어 예물을 가지고 후금군영으로 가서 누르하치에게 '치겸(致歉, 사죄)한다(실제로는 조롱이다): "노장(老將, 누르하치를 가리킴)께서 천하를 횡행한지 오래 되었다. 이제 좋은 선물과 명마를 준비하여 선물로 보내니, 다시 싸울 날짜를 정하자". 결국 마침내 "문애이폐(懑恚而斃)"했다. 이 사료에서는 명확히 누르하치가 영원전투에서 '중상'을 입었다고 기록한다. 그리고 영원의 패배로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받아, 하루종일 우울해 했다. 육체와 정신의 이중 고통으로 이 노장은 마침내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명나라사료를 보면, 명나라군대는 일찌기 한 "대두목(大頭目)"을 포를 쏘아 죽였다고 되어 있다. 전문가는 이 '대두목'이 바로 누르하치라고 본다.


이제 다시 명나라의 사료를 보도록 하자. 그중에 영원전투에 관한 일부 기록에서 합리적인 해석을 찾을 수 있을 것같다. <명희종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명나라의 병부상서 왕영광(王永光)은 이렇게 주청을 올린다. "영원전투에서 명나라군대는 전후로 수천의 적을 부상입게 했는데, 그 안에는 두목 수인과 '추자1인(酋子一人)도 포함되어 있다."


계료경략 고제(高第)는 이렇게 보고를 올린다. 후금군대가 공성할 때, 명나라군대는 포격으로 '대두목'을 죽였다. 적은 홍포(紅布)로 이 사람을 감아서 들고 갔다. 한편으로 달려가면서 한편으로 대성통곡했다. 명나라사람 장대(張岱)는 그가 저술한 <석궤서후집. 원숭환열전>에서 이렇게 기록한다. 홍이대포(紅夷大砲)로 죽인 적은 부지기수이다. 그리고 '황룡막(黃龍幕)"을 명중시키고, '비왕(裨王)' 1명을 부상입힌다. 적군은 전투가 불리하다고 여겨서 피혁으로 시신을 싸매고 계속 통곡하며 철수했다. 김국평과 오지량은 이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상술한 사료에 언급된 '추자', '대두목', '비왕'이 바로 누르하치 본인이라고 본다.


그런데, 이해되지 않는 일은, 청나라때의 관서(官書)에서 누르하치의 죽음을 언급할 때면 모두 그가 병사했다고 적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슨 병에 걸렸는지는 왕왕 모호하게 처리했다. 이에 대하여 김국평과 오지량의 분석은 누르하치가 영원전투에서 대포에 부상을 입고, 나중에 원숭환이라는 '어린친구'에게 조롱을 받으니, 심양으로 돌아간 후에도 계속 마음에 담아두었고, 노화가 치밀었다. 그리하여 상처가 악화되어 나중에 청하(淸河)로 온천욕을 하러 가니, 상처가 더욱 악화된다..결국은 병이 발작하여 죽은 것이다. 대포에 의한 부상은 누르하치가 죽은 중요한 원인이다. 대청의 개국군주가 서양대포에 죽은 것이다. 군심이 흐트러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총사령관의 죽음을 감추거나 늦게 보고하는 일은 다반사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대담하게 추측할 수 있다. 누르하치는 영원전투에서 부상을 입어 죽은 것이다.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기 전에는 이것이 아마도 정설이 될 것이다.


전문가들이 이 일에 대하여 결론을 거의 내리고 있을 때, 청사(淸史) 전문가인 이홍빈(李鴻彬)이 조선인의 저작에서의 관건증거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사라들이 누르하치의 죽음에 대하여 더 이상 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을 때, 이홍빈은 <만족굴기와 청제국건립>이라는 책에서 누르하치가 대포에 상처를 입어 죽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핵심증거인 <춘파당일월록>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한다.


의문점 하나: 조선역관인 한원까지도 누르하치가 '먼저 이미 중상을 입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왜 영원을 수비하는 최고장수인 원숭환이 더 잘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가? 하물며 원숭환은 사신을 후금 군영으로 보내어 상황을 살펴보기까지 했는데. 만일 누르하치가 정말 몸에 부상을 입었다면, 당연히 이는 원숭환의 큰 공로이다. 명군의 중대한 승리이다. 원숭환 본인뿐아니라, 조정상하, 문무백관들이 모두 이 일을 크게 써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군대의 사기를 북돋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원숭환 본인의 영원대첩에 대한 주절에서는 물론이고, 조정의 원숭환을 표창하는 성지 혹은 조정신하들이 원숭환의 영원대첩을 축하하는 주절에서도 누르하치가 부상당한 건은 한 마디도 언급되지 않고 있다.


의문점 둘: 누르하치가 영원전투에서 패전한 것은 1626년 정월인데, 팔월 이십일에 죽었다. 그동안 팔개월여의 시간이 있다. 많은 사료기재를 보면, 이 8개월여도안 누르하치는 병치료를 하지 않고, "정수주거(整修舟車), 시연화기(試演火器)"했다. 그리고, "원변사렵(遠邊射獵), 도선피갑(挑選披甲)"했다. 그는 적극적으로 영원에 대한 재공격으로 복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월에는 친히 대군을 이끌고 몽골 카르카(喀爾喀)를 정벌한다. "시라무룬으로 진군하여 공략하여 그들의 가축을 얻었다." 오월에는 모문룡이 안산으로 진격한다. 후방이 급해지자 군대를 심양으로 되돌린다. 육월, 몽골 커얼친(科爾沁)의 악파홍태길(鄂巴洪台吉)이 내방하고, 그는 친히 성곽 십리를 나가서 맞이한다. 이는 모두 '중상'을 입은 사람의 모습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홍빈은 누르하치가 영원전투에서 '중상'을 입지는 않았다고 보았다. "문애이폐(懑恚而斃)"했다는 것에는 의문이 든다고 했다.


그렇다면, 누르하치는 도대체 어떻게 죽음에 이르렀을까?


이홍빈은 이렇게 본다. 누르하치가 심양에 돌아온 후, 첫째는 영원의 패번으로 전쟁터에서 유명하던 노장이 처음 전투에 나선 청년장수의 손에 패배했으니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고, 매일 우울한 심정이었다. 둘째는 나이가 많이 들어 체력이 쇠퇴했는데, 오랫동안 전쟁터를 누비면서 피로에 지쳤고, 그러다보니 병이 들었다. 같은 해 칠월에 누르하치는 독저(毒疽, 종기)를 앓는다. 대포로 인한 부상이 아니다. 이십삼일 청하의 탕천(湯泉)에서 요양을 한다. 팔월 칠일, 그의 병세는 돌연 악화된다. 십일일, 배를 타고 태자하(太子河)를 내려가다가 혼하(渾河)로 접어들었을 때 앞에서 맞이하러 온 태비(太妃) 나라씨(納喇氏)와 만나서, 심양에서 40리 떨어진 계보(鷄堡)에 도착했을 때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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