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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중국의 명소 (북부)

심하고보군(沁河古堡群): 북방제일문화거족지택(北方第一文化巨族之宅)

by 중은우시 2020. 7. 10.

글: 손량전(孫亮全)

 

일찌기 선진(先秦)시기의 <좌전>에는 산서(山西)라는 이 지역을 "표리산하(表裏山河)"라고 표현했다. 안에는 높은 산이 있고, 밖에는 큰 강이 있다는 것이다. 산과 강의 천험(天險)이 병풍역할을 한다.

 

황토고원의 동족에 있는 산서의 가장 동쪽은 동북방향으로 이어지고 다시 남으로 뻗어나간 태행산맥(太行山脈)이 있고, 서부는 북에서 남으로 이어지는 여량산맥(呂梁山脈)이 있다. '좌수일지시태행(左手一指是太行), 우수일지시여량(右手一指是呂梁)" 두 개의 산맥 사이에 동북에서 서남으로 뻗은 분지에서 분하(汾河)는 북에서 남으로 흘러, '양산협일천(兩山夾一川)" 두 산이 강 하나를 끼고 있는 독특한 지형의 면모를 보인다. 이 '양산일천'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바로 물길이 거센 황하(黃河)이다.

 

산서는 가늘고 긴 지역이고, 북에서 남으로 전혀 다른 문화적 특징을 보여준다. 북으로 안문관(雁門關)을 나서면 매년 전란이 있고, 호족과 한족이 서로 섞여 있는 안북(雁北)으로 변새문화(邊塞文化)를 키웠다. 영무관, 안문관, 편두관의 삼관과 같은 위도의 오대산은 불교문화를 품고 있으며, 장족과 한족의 융합으로 유명하다. 중부의 태원분지는 진상(晋商)의 대원(大院)문화가 유명하다. 남부의 임분분지, 운성분지는 황하중류지역에 속해 기온이 높고, 토지가 비옥하여 황하문명을 키웠고, 중화문명의 '초서지(初曙地)'가 된다.

 

사람들이 익숙하게 잘 알고 있는 이들 문화역사외에 산서 동남부 태행산지역에 새겨져 있는 하나의 보석은 자주 사람들이 못보고 지나간다. '종횡구아구천리(縱橫歐亞九千里), 칭웅상장오백년(稱雄商場五百年)'의 진상이 역사무대에서 활약하기 전에, 산서의 경제중심은 현재의 동남부 심하(沁河)유역이었다. 그곳 상인들은 '택상(澤商)'이라 일컬어졌다. 석탄을 캐서 강철을 제련하고, 뽕나무를 길러 양잠을 한다. 고위관직에 대대로 나가는 명문집안도 있고, 부유한 상인집안도 많았다.

 

명청교체기에 재난이 끊이지 않았는데, 호족과 부호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부득이 보(堡)를 쌓아 스스로를 지킨다. 그들은 방어를 위주로 하는 많은 택원촌락(宅院村落)을 만들었다. 이들 문화유적군을 현재는 "심하고보군"이라 부른다.

 

황성상부(皇城相府), 곽욕고성(郭峪古城), 천관왕부(天官王府), 지계성(砥洎城), 상욕고보(湘峪古堡), 유씨민거(柳氏民居), 두장고성(竇莊古城).....이들 심하에 흩어져 지어진 동팡풍격의 명청고보는 수백년의 비바람을 거치면서 휘황과 쇠락을 겪었고, 다시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며 전환과 재생을 통해 광망을 떨치고 있으면서, 거기에 사는 사람들과 함께 역사변천을 얘기한다.

 

황성상부

 

금년 62세의 우소개(于小介)는 1998년 구촌(舊村)에서 이사나올 때까지 계속 조상들로부터 전해내려오는 구옥(舊屋)에서 살았다. 구옥은 바로 진정경(陳廷敬) 상부(相府)의 남서방(南書房)으로 청나라때 지어졌다.

 

진정경은 바로 청나라때 문연각대학사 겸 이부상서를 지낸 강희제의 스승이고 <강희자전>의 총열관(總閱官)이며, 강희제를 거의 반세기동안 보좌한 일대의 명재상이다.

 

진정경의 옛집은 지금 5A급 관광지인 황성상부이다. 이 산서성 진성시 양성현 북류진 황성촌에 위치한 관광지는 연간 200만의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이곳은 명청 양대의 성보식 관료주택의 건축이 모여 있다. 원래 이름은 "중도장(中道莊)"이다. 청나라때 강희제가 "오정산촌(午亭山村)"이라는 편액을 직접 써서 하사했다. 나중에 강희제가 이 곳에 두번 머문 적이 있다보니, "황성상부"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황성상부의 건축군은 면적이 6만평방미터에 이른다. 내성, 외성의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내성은 진씨들의 거주지이다. 명나라 숭정5년(1632년)부터 짓기 시작한다. 8개의 서로 연결되면서도 독립된 사합원(四合院)으로 구성되어 있다. 외성은 내성의 기초 위에서 확장한 것이다. 청나라 강희 42년(1703년)에 완공된다. 모두 16개의 원락(院落)이 있고, 방은 640칸이다. 산을 따라 지었고, 건물이 층층이 지어져있어 매우 장관이다. 전문가들은 "중국북방제일문화거족지택"이라고 부른다.

 

황성의 정문을 드러가면, 먼저 보이는 것은 석패방이다. 옛날에 패방의 종류는 아주 많았다. 자주 보이는 것은 정절패방, 공덕패방 및 장식패방등이다. 이 패방은 공명녹위(功名祿位)를 기록한 공덕패방이다. 이는 있는 그대로 사람들에게 명, 청 양대에 걸친 진씨가족의 영광과 휘황을 보여준다.

 

정문 위에는 '총재총헌(冢宰總憲)'이라는 네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다. '총재'는 백관의 우두머리인 이부상서를 말한다. '총헌'은 도찰원좌도어사의 별칭이다. 백관의 감찰을 책임지는 지위이다.

 

'총재총헌'의 가장 아래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차례로 이렇게 적혀 있다: "무술과사진사정일품광록대부, 경연강관, 이,호,형,공 사부상서, 도찰원장원사좌도어사 진정경"

 

이는 진정경이 당시 가졌던 관직의 구체적인 명칭이다. 청나라때 이, 호, 예, 병, 형, 공의 육부를 두었고, 진정경은 일찌기 4개부의 최고책임자인 상서를 지냈다. 그리고 예부에서는 좌시랑을 지냈다. 청나라때 한족은 병부는 관장하지 못했으므로, 진정경은 육부중에서 오부에서 요직을 맡았던 것이다. 조정의 대소관직을 거의 모두 거쳤고 마지막에는 재상이 된다. 이를 보면 그는 혁혁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진씨가족은 과거에도 많이 합격했다. 260년간 모두 41명의 공생, 19명의 거인, 9명의 진사, 6명의 한림을 배출한다. "부한림, 자한림, 부자한림, 형한림, 제한림, 형제한림"과 "덕적일문구진사, 은영삼세육한림"의 엄청난 성취를 거둔다.

 

황성내의 상부는 삼진원자(三進院子)이다. 상부의 전원(前院)은 진씨집안의 '영객청(迎客廳)'이다. 강희제가 머물 때 문무백관을 접견한 곳이기도 하다. 상부의 중원(中院)의 동방은 진정경이 기거한 곳이다. 그는 53년에 걸친 북경에서의 관료생활에서 오직 3번 집으로 돌아왔다. 이곳은 바로 그가 거주하던 곳이다. 상부의 후원(後院)은 원래 진정경의 거소였는데, 강희제가 머문 후에는 정방이 황제가 머물렀던 행궁이 된다. 황제가 머물렀으므로, 진씨집안 사람들은 더 이상 머물지 않았다. 민국시대에 무너졌고, 진씨의 후인들이 새로 지었다.

 

여기에 이르면 의문이 하나 솟아난다. 진씨일가는 대대로 관직에 있어서 이렇게 큰 집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일까? 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진씨일가의 집은 명나라 선덕4년(1429년)에서 강희38년(1699년)에 이르기까지 두 개의 왕조, 근 3백년에 걸쳐서 만들어 졌다. 진씨가족은 농업에서 공업으로, 공업에서 상업으로, 상업에서 학자로 점점 발전해 나갔다.

 

진성(晋城)의 옛이름은 택주(澤州)였다. 진씨의 조상은 대대로 산서성 택주 영의도천호에 속해 있으면서 양을 기르고,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다. 2세 진림(陳林)이 양성현 곽욕촌 동북으로 옮겨서 정착한다. 진림은 처음에 요(窯)에서 일꾼으로 일했다. 머리가 총명하여 주인이 장방선생(賬房先生)으로 승진시켜 회계를 맡긴다. 그후 어느 정도 발전단계를 거쳐 진씨는 자신의 '가족기업'을 소유하게 된다.

 

재산을 쌓은 후, 진림은 마침내 아들을 구품관리로 만든다. "섬서한중부서향현위(縣尉) 진수(陳秀)" 계속 교육을 시켜서 5대에 이르러 드디어 고관이 나온다. 명나라 가정연간(1522-1566), 진정경의 고조부는 4품관직에 오른다. 이는 이 집안 최초의 과거합격자로 진사였다. 두번째 진사는 바로 진정경의 백부이다. 이 두명이 과거에 합격한 기간차이는 90년이다.

 

"택상(澤商)"과 고보(古堡)

 

황성촌은 세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다. 앞에는 번계하(樊溪河)가 구비구비 심하로 흘러들어간다.

 

심하는 산서성에서 두번째로 큰 하류이다. 산서성 심원현에서 발원하여, 북에서 남으로 흐르며 태행산을 관통한다. 하남 무척(武陟)에서 황하로 흘러들어간다. 황하유역 중간부분의 수계로서 심하유역도 중화문명의 발원지중 하나이다.

 

심하의 양안에는 고보건축물이 늘어서 있어 기세가 대단하고 장관이다. 황성상부, 곽욕고성, 천관왕부, 중장포정리부(中莊布政李府), 지계성, 상욕고보, 유씨민거, 두장고성등이 심하고보군을 형성한다. 이들은 집중적으로 심하유역 중간부분에 위치하고 있으며, 심수, 양성, 택주의 세 개 현에 걸쳐 있다. 대부분 산을 따라 만들어 졌고, 기세는 웅위하고, 형태는 독특하며, 기능은 모두 갖추어져 있어, 명청시대 고관부호의 집의 건축특색을 엿볼 수 있다. 고증에 따르면, 이 20킬로미터의 심하양안에는 54개의 고보가 있다고 한다. 현재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은 10여개이다.

 

양성현 석성성(析城山)연구회의 석영락(石永樂)이 소개한 바에 따르면, 산서 동남의 태행산, 중조산일대에는 석탄, 철강자원이 풍부하여, 이들 지역은 일찌감치 야철(冶鐵)이 발달했다. 택주는 생철을 제련하는 발상지이다. 택주철기는 지금도 유명하다.

 

양성현 관광서비스개발센터의 주임인 곽수기(郭樹基)는 이렇게 말한다. 명나라 중후기, 명나라정부가 민간에 야철을 개방하면서, 석탄과 철광석을 풍부하게 가진 택주지구의 야철업은 신속히 발달했다. 많은 농민들이 농사를 버리고, 무역과 수공업으로 전환하여, 철기, 비단, 유리등 물품을 중국의 절반 지역에 판매하고, 인도, 부탄등 국가에까지 판매한다. 이곳은 산서성 내지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중 하나가 되었고, '택상'이라는 명성이 원근에 알려지게 된다.

 

현지를 돌아보면 민간건축은 대부분 2층이다. 2층은 전문적으로 양잠을 위한 잠방(蠶房)이다. 진성은 일찌기 비단으로 유명했다. 명청때, 거의 모든 집이 양잠을 했다. 옛날에 양잠으로 명성을 얻었던 양성현은 최근 들어 몰락했던 양잠업이 사두향, 차영진등의 향진에서 점점 회복된다. 사두향에는 고향으로 돌아온 능력있는 인물인 장건군(張建軍)이 제사공장을 만들어 작년에 백톤의 잠사를 생산하고 대부분 이탈리아로 수출했다.

 

독특한 자원과 발달한 상업경제로 택주는 부호들이 많았다. 심하고보군은 이들로 인하여 나타나게 된 것이다." 석영락의 말이다.

 

돈이 있으면 공부를 할 수 있는 기초가 된다. 명청양대에 산서출신 진사의 수량은 이전왕조때 산서출신 진사총수의 2배에 이른다. 그중 10%가 진성에서 나왔다. 어떤 전문가는 이렇게 말한다: "진성의 진사는 모두 쇠를 주조해서 만든 것이다"

 

산서성 양성현 동쪽 7킬로미터에 있는 윤성진(潤城鎭)은 일찌감치 전국시대 한(韓)과 조(趙)가 다투던 중요도시이다. 옛날 명칭은 "소성(少城)", "소성(小城)"인데 야철업이 발달하여 일찌기 '철야진(鐵冶鎭)'으로 불리웠다. 고대 양성의 4대진중 하나인 윤성진은 원,명이래 수공업과 상업이 아주 발달하고, 부호가 많이 나타나서, 문화가 융성했으며 과거에 합격한 사람의 수도 전체 현에서 가장 많았다. 인구가 집중되어 일찌기 양성현에서 첫손 꼽히는 문화와 상업의 도시였다.

 

상장촌(上莊村)의 명나라때 상서인 왕국광(王國光)의 집인 "천관왕부", 중장촌의 포정이부, 지계성등 유명한 고보민거가 바로 윤성진에 있다.

 

명나라 포정사 이시(李豕)의 이가대원은 윤성진 하장촌에 위치하고 있다. 모두 60개의 원락으로 되어 있으며 당시의 물가로 1개의 원락을 짓는데 개략 백은 200냥이 소요되었다. 당시 전체현의 재정수입이 매년 개략 260백은이었다. 윤성진당위부서기인 왕위군(王衛軍)은 이렇게 말한다. 이가는 현지의 부상으로 얼마나 부유했는지는 이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석영락은 이렇게 소개한다. 심하고보는 3번의 전성기를 맞는다. 고보의 유래는 거슬러 올라가면 전국시대이다. 양성은 원래 한나라에 속해 있었는데, 장평지전때는 진(秦)나라의 전진기지가 되었다. 진,과 조가 대립하며 보루를 만든다. 양성은 진나라병사들이 주둔하는 곳이었다. 지금까지도 둔성(屯城)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제2차 전성기는 송,금간의 대치전시기이다. 남송이 금에 항거하던 시기에 '태행충의보사(太行忠義保社)"는 항금의 북방민간의군집단이었다. 근거지는 당시의 남태행산인 택주부, 융덕부, 평양부 일대에 있었다. 나중에 인원이 늘어나면서, 4천여명에 이른다. 이 항금집단은 태행산에 여러 방어공사를 진행한다.

 

제3차전성기는 명나라말기에 나타난다. 동란의 사회환경으로 이곳의 부유함은 약탈목표가 되었다. 명나라말기 이자성등이 이끄는 농민군은 진성의 전통향촌사회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져다 준다. 그리하여 민간에는 방어의식이 형성되고, 대규모로 보를 짓기 시작하게 된다.

 

하산루(河山樓)는 피난루(避難樓)라고도 부른다.

 

심하고보군이 나타난 원인으로 인하여 방어적인 속성이 두드러진다.

 

황성상부는 엄격한 방어체계를 갖추고 있다. 촌장, 성벽, 보루의 3단계 방어선을 가지고 있고, 안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인 하산루는 바로 방어를 위하여 만들었다.

 

명나라말기, 진정경이라는 부유한 가족은 자주 토비, 유구의 피해를 입는다. 심지어 농민군에게도 습격을 당한다. 섬서 왕가윤, 이자성은 모두 이곳을 포위한 바 있다. 방법이 없어서 명나라 숭정5년(1632년) 진씨는 하산루를 짓는다. 이곳은 피난루라고도 부른다.

 

하산루는 길이가 삼장사척, 너비가 이장사척, 높이가 십장이다. 누각은 7층으로 나뉘는데, 층마다 나무계단 혹은 계단통로가 통해 있다. 아래층은 깊이 지하로 들어가고, 우물, 맷돌등의 생활시설을 모두 갖추고 있다. 그리고 암도를 통해 성밖으로 나갈 수 있다. 당시 800여명의 촌민들의 목숨을 지키는 보명루였다.

 

그러나 숨는 것만으로는 안된다. 스스로 방어해야 한다. 하산루를 지은 다음 해, 진씨는 성벽을 추가한다. 그리고 산을 따라 장병동(藏兵洞)을 짓는다. 장병동은 상하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125칸의 방이 있다. 가장 윗층은 대포구멍을 설치하여 바깥을 겨냥하게 되어 있다. 화기를 발사할 수도 있고, 적의 동정을 관찰할 수도 있다. 아래의 3,4층은 주로 일꾼들이 거주한다. 가장 아래의 1,2층은 물자를 비축해 두는 곳이다.

 

심하고보군의 방어에서 가장 전형적인 곳은 지계성이다. 지계성은 원래 소성채(小城寨)로 불리웠다. 현재 현지의 나이 많은 노인은 여전히 소성채라고 부른다. 2002년 현지에서 지계성을 개발하려고 할 때 이 이름으로 불리워지게 된다.

 

지계성이라는 이름도 내력이 있다. 전체 성은 하나의 큰 돌 위에 지어져 있다. '지'는 중류지주(中流砥柱)라는 의미이다. 고대의 강에는 황하를 하로 부르는 외에 나머지 하류는 모두 수(水)로 불렀다. 심하의 엣날 이름은 계수(洎水)이다. 춘추시기때는 소수(少水)라고 부르기도 하고, 심수(沁水)라고 부르기도 했다.

 

통속적으로 말해서 지계성은 심하의 물을 막기 위하여 건축된 성이다. 성벽을 위에서 아래로 보면, 지계성의 삼면은 물로 둘러싸여 있다. 전체적인 윤곽은 자라와 같다. 안은 상중하 삼층으로 나뉘어 있다.

 

지계성의 가장 독특한 점은 바로 감과(坩堝)성벽이라는 점이다. 성벽은 하나하나의 원통을 쌓아서 만들었다. 모습이 벌집과 같다. 이는 전국에서 유일무이한 곳이다. 2007년, 고건축전문가는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성벽이라고 감정해 주었다. 성벽에서 고대인의 총명과 지혜를 느낄 수 있을 뿐아니라, 현지의 명청시기에 경제가 번성했던 모습도 엿볼 수 있다.

 

당시 야철주조업이 아주 발달하여, 양성택주에서 나오는 철이 전국의 70-80%를 차지했다. 성벽의 원통은 모두 감과인데, 감과는 바로 제철때 철물을 융화해서 빼낸 후 버리는 철통을 가리킨다. 폐기된 감과가 가장 좋은 건축재료로 된 것이다. 심하의 물이 밀려드는 하란석위에 쌓아서 만들었다. 중간에는 제련때의 폐기물, 석회와 함께 섞어넣어서 견고하게 만들었다.

 

정교한 화학작용하에, 시간이 갈수록 성벽은 더욱 견고해진다. 지계성 아래의 비교적 거친 부분은 이미 400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여전히 명실상부하게 동장철벽(銅墻鐵壁)이다.

 

지계성은 누가 만들었는가? 전해지는 바로는 숭정연간, 비적의 습격이 아주 많았고, 자주 현지백성을 괴롭혔다. 북경 대흥현의 지현을 지낸 바 있는 양박(楊朴)이 돈을 내고, 현지의 부호, 백성들이 성보를 지었다고 한다. 다만 불행하게도, 성보가 완성된 다음 해에 양박은 사망했다고 한다.

 

지계성의 내부도로도 다른 곳과 다르다. 가장 넓은 곳도 3미터를 넘지 않는다. 좁아서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이다. 그리고 종횡으로 교차되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어느 골목으로 들어가던, 앞에 길이 없다고 느끼게 되어 있다. 마치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것같다. 끝까지 가야 비로소 원래 방향을 바꾸어 걸어갈 수 있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물론 방어목적으로 만든 것이다.

 

심하고보에서 사람들은 아주 기이한 곳을 발견하게 된다. 도로가 굽는 곳에 곧게 솟은 방각(房角), 즉 집의 모서리가 깍여 있는 것이다. 현지인들은 "괴만말각(拐彎抹角)"이라고 부르는데, 고보는 인구가 많고 도로는 좁기 때문에, 마차와 가마가 통행하면서 좌우회전을 할 때 편리하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의 집의 모서리를 희생한 것이다. 그렇게 하여 공공의 공간을 더 내어 주었다.

 

상부신생(相府新生)

 

역사의 변천으로 현지의 공상업은 쇠락하기 시작한다. 산골짜기의 교통이 좋지 않으므로 점점 열세로 바뀌고, 심하고보도 몰락한다. 그중 가장 전형적인 곳이 바로 황성상부이다.

 

명나라때부터 청나라때까지, 황성상부는 점점 몰락한다. 거기에 살면서 거의 7할을 점하던 진씨일가의 후인들은 한때 곤궁하게 생활하게 된다.

 

어려서부터 황성촌에서 자라면서 현재 72살인 곽태강은 이렇게 말한다. 1950년대, 고성벽은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런데, 위는 잡초가 무성했고, 이미 황폐해져 버렸다. "대약진때" 마을에서 식당을 만들면서 성벽의 일부분을 철거했다. 다행히 기반은 건드리지 않았다.

 

당시 "산은 높고 돌은 많고, 집을 나서면 언덕을 기어올라야 했던" 황성촌의 사람들은 1인당 겨우 1무정도의 산지만 가지고 있어 생산하는 양식이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웄다. 농업학대채(農業學大寨)때는 산 위의 나무를 모조리 잘라버리고 토지를 개간했으나 그래도 안되었다. 황성촌은 원근에 유명한 가난뱅이마을이 된다. 심지어 한때, '여자들이 황성촌의 남자들에게는 시집가지 않는다'는 말까지 있었다.

 

산서는 석탄이 많이 생산된다. 특히 진성지역은 무연탄이 많이 나온다. 1980년떄, 황성촌은 삼마촌과 기업을 만들어 점차 두 개마을이 합하여 석탄광산을 개발하여 석탄을 캔다. 이를 통해 자금을 모은다. 석탄은 농민들의 목숨줄이 된다.

 

돈을 번 후에, 황성존은 두 가지 일을 한다. 촌민의 먹고 입는 문제를 해결하는 외에, 촌의 부근에 십여년간 나무를 심는다. 1997년이 되어, 황성촌은 이미 부유한 소강촌이 된다. 먹고 입는데 걱정이 없고, 외출할 때는 자가용을 몬다.

 

다만 황성촌의 사람들은 점점 더 깨닫게 된다. 석탄이라는 재생불가능한 자원은 언젠가 다 파낼 것이다. 그때가 되면 황성촌의 자손들은 월 먹고 살 것인가. 그리고, 당시의 채광기술은 비교적 낙후하여, 폭약ㅇ르 썼다. 사람들이 집에 앉아 있으면 항상 아래에서 폭파소리가 들리곤 했다. 마을의 도처에는 석탄가루가 날렸다. 이는 환경을 크게 파괴한다.

 

황성촌이 새로운 출로를 찾기 시작했다. 의류공장, 철기공장, 양식장을 만들어보았다. 그러나 모두 성공하지 못한다. 지난세기말, 국내의 관광업이 막 시작되었고, 토론과 검토를 거쳐, 황성촌의 사람들은 마을의 400년된 진정경고거를 주목한다.

 

1개월여간 사람들은 토론을 한다. 할 것이냐, 말 것이냐. 이것은 어쨌든 마을 몇대의 사람들에 관련되는 백년대계인 것이다. 조금만 잘못하면, 석탄으로 모은 재산이 물거품이 되는 것이다.

 

촌에서 지도자들은 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곤란이 놓여 있었다. 황성촌에 거주하는 촌민들은 외부사람들이 이런 촌구석으로 와서 낡은 집을 보려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이사나가려 하지 않았다.

 

그외에 진정경고거의 많은 옛날 건축물은 수리, 개조, 확장을 해서 이미 옛 모습이 아니었다. 적지 않ㅇ느 가치있는 문화재들도 함부로 버려지거나, 파괴되었다. 어떤 촌민은 강희제가 친히 써준 어서의 영련(楹聯)인 '춘귀교목농음무(春歸喬木濃陰茂), 추도황화만절향(秋到黃花晩節香)"을 석탄을 쌓아두는 더미속에 던져넣기도 했다. 전 중국시학회 부비서장 왕주는 이를 보고 이런 시를 남기기도 했다.

 

강희중도부존사(康熙重道復尊師)

만절황화예찬지(晩節黃花禮讚之)

아위산촌비불초(我爲山村悲不肖)

춘귀교목절매지(春歸喬木折煤池)

 

"내성과 외성 거기에 성밖의 각 관광지까지 수리하는 면적이 20만평방미터이고, 절대다수의 우너락, 근 천칸의 방, 60%이상의 성벽을 새로 수리해야 한다. 자금은 억위안이상이다" 황성촌당위부서기 번진조(樊進朝)의 말이다.

 

마을주민들의 생각을 일치시키기 위해, 촌위원회는 촌민들을 데리고 북경, 절강, 심천으로 가서 참관학습을 하며, 생각을 바꾸게 만들었다. 이주난제는 당원간부들이 앞장섰다. 자금부족부분은 "차계하단(借鷄下蛋), 차수행주(借水行舟)"의 방식으로 공정대가 먼저 자체자금으로 공사를 진행하도록 했다. 가장 많을 때는 황성상부에 5,60개의 공정대가 일을 했다.

 

국가고건축전문가 나철문(羅哲文), 산서성고건축전문가 시택준(柴澤俊)의 지도를 받아 1억위안이상의 돈을 들여, '수구여구(修舊如舊), 원상유지"의 원칙하에 진정경 고거를 중수하였다.

 

1998년 황성상부를 개방한다. 그러나 지방이 구석진 곳에 있고, 선전활동도 부족하여 첫해의 관광객은 3천명도 되지 못했다. 1인당 1위안의 입장료로 연수입이 3천위안도 안되었던 것이다. 2000년에 이르러, 누군가 돈을 내서 <강희왕조> 역사드라마를 찍는다는 말을 듣자, 바로 북경으로 가서 감독과 합작해서 당시에 벌었던 280만위안의 수입 전부를 제공하며 합작한다. 찬조단위로 이름을 올리는 외에, 드라마를 황성상부에서 찍도록 요구했다. 그리고 진정경이 나오는 장면도 늘이게 한다. 2002년 드라마가 방영된 후, 황성상부는 바로 인기를 끈다. 그 해의 입장료수입은 700만위안에 달한다.

 

소강촌(小康村)에 부를 가져오다.

 

황성촌의 사람들은 다시 부유해졌다. 지금은 집집마다 작은 빌라에 산다. 곽태강의 48세된 아들 곽흥승(郭興勝)은 마을 안의 주창(酒廠, 양조공장)에서 일을 한다. 26살된 손자는 대학을 졸업한 후 마을로 돌아와서, 지금은 마을의 약창(藥廠, 제약공장)에서 일한다. "지금은 잘 살고 있다. 수도, 전기, 난방등 모든 비용을 촌이 부담한다. 촌민은 1인당 매년 수만위안의 이익배분도 받는다."

 

지금, 황성촌은 이미 중국 10대 소강촌에 들어갔다. "석탄공업, 문화관광, 하이테크기술"의 3단계를 거쳐 바이오제약, 신에너지자동차, 벌꿀양조등 기업을 만들었다. 황성상부집단은 20개기업, 80억위안의 총자산, 6천명이 직원을 보유한 기업집단이 되었다.

 

황성상부를 시작으로, 현지에서는 관광사업을 벌였다. 중국역사문화명촌, 중국전통촌락등의 명칭을 얻은 심하고보군은 현지의 '명함'이 되고, '돈버는나무'가 되었다. 양성현의 전체 관광도 살아났다. 매년 관광객이 천만명을 넘었다. 관광총수입은 140여억위안에 이른다.

 

황성촌이 부유해졌지만, 주위의 마을은 아직 부유해지지 못했다. 곽욕고보등의 '보배'가 있지만. "현재의 생각은 먼저 부유해진 마을이 다른 마을도 부유하게 끌어주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포단취난(抱團取暖). 같이 끌어안고 온기를 얻는 것이다." 번진조의 말이다.

 

산서성 진성시위부서기, 양성현위서기 요손(姚遜)은 이렇게 소개한다. 산서서은 최근 들어 '장성, 태행, 황하"의 3대관광지역을 추진하고 있다. 진성시와 양성현은 '대형관광구, 대형산업, 대형브랜드, 대형관광"을 추진한다. 2018년부터, 황성촌은 주변의 곽욕촌, 대교촌, 사산촌, 구저촌과 연합하여, 환경, 문화, 배치, 운영, 기초시설에서 오촌일체를 이루어 황성상부대관광지구를 형성하려 한다.

 

"다른 촌은 기본적으로 집체수입이 없다. 그들은 관광자원이 있지만, 발전자금이 부족하다. 황성촌의 발전도 일정한 병목현상을 맞이했다. 더 크고 더 강하게 하려면 더 넓은 공간과 자원이 필요하다. 모두가 자원을 공유하고, 포단취난하는 것이 좋다." 번진조의 말이다.

 

그들은 진당위서기를 조장으로 하고, 관련촌의 주요책임자들을 구성원으로 하는 의사기구를 설립했다. 4개촌의 당지부서기는 황성촌당위부서기를 맡아, 공동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5개촌의 백성들은 지금 같은 공공시설, 같은 집체복리를 누리고 있다. 5개촌은 현재 황성상부, 곽욕고성, 망하, 해회서원등 6개 관광지를 통합하고 있다.

 

현재 개발중인 곽욕고성은 당나라초기에 건설된 성보식의 촌락이다. 또한 전형적인 방어성 성보이다. 명나라 숭정연간에 건설되었다. 진정경의 조상이 양성촌으로 이주했을 때 처음에 이곳에 거주했었고, 점점 부근의 중도장을 건설해서 발전했다.

 

황성상부집단의 동사장인 왕천량은 이렇게 말한다. 수당에서 명청까지, 이 지방은 곽욕리라고 불렀다. 향진(鄕鎭)이다. 민국시기에 마을로 혀성된다. 현재 촌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살고 있고, 잘 보존된 '진부" "관가원" "연승삼급"의 진실한 인물인 진호고(陳好古)의 고거가 있다. 지금 관가원은 이미 민박객잔으로 개조되었다.

 

윤성진의 관광산업도 활발해지고 있다. 상장촌의 명나라 형부상서 왕국광의 천관왕부로 들어가거나, 중장촌의 이가대원으로 가면 역사 속에서 걷는 것같이, 고대인들의 생활의 지혜를 느낄 수 있다. 만력년간부터 전해져 내려온다는 "팔팔연석(八八宴席)"을 먹거나 원래의 모양으로 개조한 침실에서 하룻밤을 지내면, 옛날로 타임슬립하는 황홀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정말 남다른 즐거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