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지방/중국의 명소 (북부)

석천고성(石泉古城): 한때 휘황찬란했던 고용국(古庸國)

by 중은우시 2020. 7. 3.

글: 상릉(霜凌)

 

고성(古城)관광은 자연스럽게 '고(古)'자에 끌려서 가는 것이다. 유구한 역사문화는 '고'의 함축과 운치가 있다. 오랫동안 전승되어 내려온 음식을 맛보고, 이 향토에 독특한 풍속문화를 찾아보고,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는 사관이 되어 본다. 평면개념의 사진과 실제 풍경을 비교해 보면서, 다시 한번 억고석금(憶古昔今)의 감개를 느낀다. 그래야 고성을 제대로 느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석천현(石泉縣)은 섬서성 안강시(安康市)의 서쪽에 있다. 북으로 진령(秦嶺)이 있고 남으로 파산(巴山)이 있다 위치는 진파복지(秦巴腹地), 한수(漢水)의 가에 자리잡고 있다. 섬서남부의 유명한 고성이다. 석천고성을 한 바퀴 돌아보니, 코로나바이러스의 영향으로 고성은 현재 상당히 고즈녁하다. 석천은 민속문화가 찬란한 곳이고, 화막지향(花饃之鄕)이라는 아름다운 명칭을 얻고 있다. 전지(剪紙)도 독특한 기교이다. 섬서의 전지기예는 전국에서 첫손 꼽히며 거족경중(擧足輕重)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희곡 이황조(二黃調)도 가장 정종(正宗)이다. 석천은 다정(茶精)을 공품(貢品)으로 만든 최초의 지방이기도 하다. 이렇게 자랑할 수 있다. 이곳은 중국차문화의 발상지라고. 그러나 내가 석천이 원래 고용국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문화에 대한 흥취가 역사에 대한 추적으로 넘어갔다.

 

<미월전(羋月傳)>을 볼 때, 극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던 지모가 뛰어난 인물인 용예(庸芮)가 바로 용국의 망국공자(亡國公子)였다. 용예라는 이 인물을 좋아하는 것은 첫째, 그가 멋진 미남자라는 것이다. 필자는 얼굴을 따지는 여자이기 때문에. 다음으로 지혜가 뛰어나다. 진나라 삼대의 대단한 군왕들이 있는 조당에서 풍운이 여러번 바뀌는데도 그는 선종했다. 풍운을 질타했던 인물들 공손연(公孫衍), 감무(甘茂), 장의(張儀)등의 최후가 어떠했는지를 보라. 모두 좋지 않았다. 진나라를 위하여 반벽강산을 싸워서 얻어냈던 전신 백기(白起)도 자결하는 최후를 맞았다. 위염(魏冉), 미융(羋戎)은 선태후의 친동생인데, 역시 진장양왕에 의하여 높은 누각에 갇힌다. 오직 이 용예만이 선시선종(善始善終)한다. 관자(管子)의 염철법(鹽鐵法)의 한 마디로 의거왕을 깜짝 놀라게 했으며, 하늘의 현오(玄烏)가 상(商)을 낳았다는 이야기를 빌어 선태후가 의거왕의 아이를 임신한 풍파를 넘기게 해주었고, 계군의 난때는 연으로 가서 영직(嬴稷)을 데려온다. 그는 미월의 가장 충실한 수호자이고, 비록 여신을 앙모했지만 행동은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반군여반호(伴君如伴虎)의 조정에서 삼대군왕을 보좌하면서도 물만난 고기같았다. 그의 용기와 지혜가 어떠한지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역사기록을 찾아보니, 용예라는 사람이 확실히 존재했다. <전국책>의 선태후가 아끼는 남총(男寵) 위추부(魏醜夫)를 순장시켜달라고 했을 때, 위추부는 무서워서 용예를 찾아가서 방법을 묻는다. 용예는 선태후를 만나 이렇게 묻는다: 사람이 죽은 후에도 지각이 있을까요? 만일 있다면 선왕 혜문왕이 어찌 태후를 뼛속까지 미워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없다면 왜 하필이면 사랑하는 사람을 죽게 만들려 하십니까? 선태후는 그제서야 위추부를 순장시키려던 생각을 버린다. 역사에 용예의 사적이 많지는 않지만, 이 한 가지 사건만으로도 그의 지위와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용예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의 용국에 대하여도 흥미가 생겼다. 용국은 원래 화하에서 가장 오래된 나라중 하나였다. 진(秦)과 초(楚)의 사이에 있으면서 한때는 아주 강대했다. 나중에는 "날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한번 날면 하늘을 뚫고 올라가고, 울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한번 울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겠다"던 초장왕이 파(巴), 진(秦) 양국과 연합하여 멸망시킨다. 용국의 국토는 이 세나라가 나누어가진다. 당연히 대부분은 초나라에 귀속되었다. 나중에 진나라는 상앙변법후 점차 강대해지며, 점점 잠식해 들어가서 용국의 영토는 다시 진으로 귀속된다. <미월전>에서 계군의 난을 기억하는가? 선태후는 영직을 등극시키고, 그후에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오국연합군에 의한 함국관위기를 해결한다. 그리고 초나라사신 근상(靳尙)을 접견한다. 근상은 이렇게 말한다: "상용(上庸)을 얻지 못하면 퇴각할 수 없습니다!" 선태후는 손을 흩들면서 공주를 초나라에 시집보내면서 상용을 배가(陪嫁)로 초나라에 주겠다고 한다. 이 상용이 바로 용국고성이고, 지금은 진악(秦鄂, 섬서성과 호북성)의 사이에 있다. 그후 용국은 사서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단지 "용인자요(庸人自擾, 긁어부스럼이라는 의미), 용용록록(庸庸碌碌), 평용무능(平庸無能) 등 그다지 좋지 않은 의미의 단어로 남았다.

 

용국은 오제 중 전욱(顓頊)에게서 나왔다. 기록에 따르면 주무왕을 도와서 상을 멸할 때, 목서팔국(牧誓八國)중에서 으뜸이어싸고 한다. 그래서 백복지장(百濮之長)'이라는 칭호를 얻는다. 춘추시기에, 파, 진, 초의 삼국간에 비교적 실력이 큰 국가였다. 상용이 수도였고 한때 아주 흥성했다. 주나라에서 제후들에게 분봉할 때, 용의 작위는 아주 높았다. <예기.왕제>에 이런 말이 있다. "작위는 공후백자남의 오등급이 있다" <의례>에는 이런 말이 있다: "동성대국(同姓大國)은 백부라고 부르고, 이성은 백구(伯舅)라 불렀고, 동성소방(同姓小邦)은 숙부라고 부르고, 이성소방은 숙구라고 불렀다." 용국의 국군은 대대로 후백(侯伯)이었고, 다른 제후국은 "비록 크지만 작위는 자(子)에 불과했다. 그래서, 오, 초, 및 파는 모두 자(子)였다" 용은 백작이라는 것인데, 그의 지위가 아주 높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만으로도 용국의 강성함을 알 수가 있다.

 

용국은 춘추이전에 기나긴 역사세월을 겪는다. 건국역사는 연속성, 안정성이 있다. 용국은 하나라때 혹은 늦어도 상나라때 이미 비교적 통일되고, 상대적으로 안정되고 중간에 존속이 끊기지 않은 국가가 된다. 만일 하나라때부터 계산한다면, 1700여년의 역사가 있는 셈이다. 만일 상나라때부터 기산하면 1100여년의 역사가 있다.

 

역사에 묻힌 옛날 나라를 수천년후에 다시 흔적을 찾으려 하니 쉬운 일은 아니다. 중국의 고건축물은 모두 토목건축구조이기 때문에,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어도 수백년의 풍우를 견딜 수가 없다. 그저 문화의 전승으로 남을 뿐이다. 지금 고고학자들의 머리를 아프게 만드는 난제인 현관(懸棺)도 용국사람들의 걸작이다. 용국은 또한 중국의 신비한 무속문화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소금문화, 차문화도 근본을 거슬러 올라가면 용국이 나온다.

 

용국처럼 오래전에 존재하고, 역사에 휘황한 시기를 남기고, 후세에 사라지지 않은 흔적을 남긴 나라는 중국역사상 그다지 많지 않다. 중국 5천년역사가 축적되어 지금의 화하민족을 이루었다. 무수한 용국과 같은 나라의 지혜가 남아서, 조금조금씩의 문화전승이 축정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시시때때로 옛사람들의 오래된 문명에 감탄하고, 시시때때로 그 놀라운 옛사람들의 지혜에 감탄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고성으로 가서 보는 것을 비교적 좋아한다. 천년만년의 역사를 거쳐서 지금 내가 이런 문명세계에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옛날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고 종이무더기에서 이 찬란한 문명의 고성까지 오면 어찌 인생에 대하여 감탄, 감동, 감격, 감오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