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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중국의 명소 (북부)

망해루성당(望海樓敎堂): 프랑스가 천진(天津)에 세운 성당

by 중은우시 2023. 2. 13.

글: 인의인(引義人)

 

망해루성당이 그곳에 지어지기전에는 숭희관(崇禧觀)이었고, 이 숭희관은 처음에 건륭제가 천진으로 올 때의 행궁(行宮)이었다. 당시 건륭제는 좋은 곳을 찾아갔는데, 천진에서 그 당시에 가장 좋은 위치는 바로 삼차하구(三岔河口)였다.

 

망해루성당의 왼쪽에는 망해사(望海寺)가 있었고, 오른쪽에는 해하루(海河樓)가 있었는데, 향림원(香林苑)이라고도 불렀다.

 

이 망해루성당은 1870년에 완공되었다. 그렇다면 당시에 애 이곳에 성당을 짓게 된 것일까? 그것은 당시 프랑스 조차지(租借地)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한다.

1. 천진에 처음 온 프랑스인

 

천진의 조계는 1860년의 영국조계부터 시작한다. 그때는 제2차아편전쟁으로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의 4개국가가 연합군으로 대청을 공격했다. 그래서 영국이 1860년 12월 조계지를 획정한 후, 프랑스도 천진에 조계지를 가지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다음해 1월, 프랑스는 영국조계지에 붙어 있는 옆에 조계지를 획정한다. 프랑스인은 영국인들과 같은 생각이었다. 영국인들이 천진에 조계지를 확보한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그들은 장사를 해서 돈을 벌기 위함이었다. 양모를 팔고, 피아노를 팔고, 칼을 팔고, 각종 물건을 판다. 그건, 프랑스인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프랑스는 천주교의 보교국(保敎國)이다. 그리하여 프랑스인들은 중국의 어느 도시든 들어가면 선교를 했다.

 

이런 상황하에서 프랑스인은 중국인들의 한가지 사상을 신경쓰지 못했다. 그것이 무엇일까? 바로 중국의 불교사상이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중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신봉한다는 것을. 그래서 그때 프랑스인들이 선교는 비교적 곤란했고 느렸다. 프랑스인들은 당시 중국내에서 선교를 했지만, 많은 선교사들이 순교해야 했다.

 

예를 들어, 1900년 경자국변때, 당시의 산서순무 육현은 직접 산서대성당의 주교 그레고리오 그라시(艾士傑)를 죽인다.

 

제2차아편전쟁기간 광서 서림지구의 Auguste Chapdelaine신부는 당시의 현령 장명봉(張鳴鳳)에 의해 참롱(站籠)이라는 형구를 써서 죽임을 당한다. 그래서 프랑스인들이 천진에서 종교를 보급하는 것은 아주 느렸다. 다만 프랑스인들은 아주 총명했다. 당시 그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는 천진이라는 도시의 가장 번화한 곳에서 선교를 해야겠다.

 

가장 먼저 천진으로 들어온 종교는 개신교이고 천주교가 아니었다.

 

1860년 제2차아편전쟁때 영국의 전함에 13명의 군인이 아닌 외국인이 타고 있었다. 그중 한 미국인 Henry Blodget은 미국 회중교회의 선교사였다. 그리고 영국 성공회에서 온 John Innocent도 있었다. 회중교회이건 성공회이건 그들은 모두 개신교에 속했다.

 

그래서, 프랑스인이 천진에 도착한 후, 그들은 천주교를 천진에 보급하고자 한다. 그래서 조계지를 건설하면서 프랑스인들은 조계지내에서 그들의 신앙을 보급한 것이 아니라, 조계지밖의 천진 구성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자신의 성당을 건립하여 천주교를 선교하고자 생각했다.

 

2. 좋은 위치

 

가장 먼저 천진에서 선교를 한 프랑스인은 Jean-Joseph-Léon Talmie이다. 그때는 아직 천진에 성당이 없었다. 그리고 Jean-Joseph-Léon Talmie는 온화하고 겸손하게 백성들에게 말한다. 여러분 나의 종교를 믿으세요. 여러분은 우리 성당에 오십시오, 예수가 여러분을 지켜줄 것입니다.

 

그러나, Jean-Joseph-Léon Talmie의 선교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나중에 이렇게 깨닫게 된다: 우리는 마땅히 성당을 하나 건립해야겠다. 그리하여 Jean-Joseph-Léon Talmie는 현재의 망해루에 성당을 건설할 준비를 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그가 장소를 선정한 후, 아직 착공하기도 전에, 이 부지를 확정하고 아직 관련계약도 체결하지 않고 토지대금도 지급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가 죽어버린 것이다. 그가 죽은 후에 새로운 선교사가 파견되어 그의 자리를 대신해야 했다.

 

그때 한 사람이 온다. 그의 이름은 사복음(謝福音, C.Chevrrier)이다. 그는 경건한 천주교 선교사였다. 사복음이 천진으로 오고난 후 그는 금방 발견한다. 마땅히 천진의 삼차하구에 성당을 지어야겠다는 것을.

 

왜 그랬을까? 먼저 삼차하구는 남쪽의 양곡을 북으로 운송하는 중간기착지였다. 그때는 모든 선박이 북경으로 가거나 남방으로 돌아가려면 반드시 천진의 삼차하구에서 물건을 싣고 내려야 했다. 심지어 유럽의 여하한 국가에서라도 북경으로 가려면 모두 천진의 삼차하구를 거쳐야 했다.

 

사복음은 이렇게 생각한다: 만일 천진의 삼차하구에 성당을 지을 수 있다면, 이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프랑스의 공헌이 아주 크다는 것을 목격할 수 있지 않겠는가.

 

대지약우(大智若愚)의 선교사

 

그래서 당시의 사복음은 분명 이 장소를 좋게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황상도 좋게 보았던 땅은 분명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당시 그는 현지의 현령에게 말한다: 며칠의 시간을 줄테니 이곳의 주민을 정리해달라. 만일 철거하지 않으면 내가 강제로 철거해서 성당을 짓겠다.

 

그때 서태후는 이런 말을 한 바 있다. 서양인들의 그런 일은 서양인들 방식대로 해주어라. 절대로 서양인들의 일로 나를 골치아프게 하지 말라. 그래서 당시 거의 모든 도시에는 일종의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백성들은 관리를 무서워하고, 관리는 서양인을 무서워하며, 서양인은 백성들을 무서워한다.

 

왜 그랬을까? 서양인들은 이치를 따진다. 당시 청나라의 관리들은 이치를 따지지 않았다. 그러나 청나라의 관리들은 서양인들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서양인들은 방법을 배운다. 서양인들 특히 사복음은 천진에서 신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한가지 방법을 쓴다. 그게 무슨 방법이었을까?

 

먼저 건달들을 모아서, 건달들에게 천주교를 믿게 한다. 그렇다면, 건달들을 어떻게 천주교신자가 되도록 만들 것인가? 그는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낸다. 그는 이들 건달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이후 너희가 하고싶은대로 그냥 계속해라. 만일 조정이나 관청에 붙잡히면, 너희는 나에게 사람을 보내어 알려달라. 그러면 내가 관청에 가서 너희를 꺼내주겠다. 내가 너희는 천주교신자들이라고 얘기하면, 내가 너희를 보호해줄 수 있고, 너희는 평안무사할 것이다.

 

이렇게 하여 천진에서는 이들 건달들이 프랑스 천주교 신자가 된다. 이런 상황하에서 건달들은 매일 나쁜 짓을 하고 다니고, 온갖 짓을 다했다. 오늘은 다른 집의 닭을 훔치고, 내일은 다른 집을 달걀을 훔치고, 그 다음 날은 백성집의 창문을 개버린다...백성들은 시간이 흐르다보니 천주교에 대하여 원한을 갖게 된다.

 

천주교 성당은 그 당시에 중국이 사묘들과 달랐다. 사묘는 불교를 믿지 않더라고 들어갈 수 있고, 향을 사를 수 있고, 불상을 볼 수 있다. 다만 천주교 성당은 달랐다. 신자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었다.

 

중국인에게는 이런 사상전통이 있었다. 남녀수수불친(男女授受不親). 그 당시 남자가 여자의 맨살을 보았다면, 그를 처로 삼아야 했다. 그리고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는 함께 자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전의 학교들은 남자학교와 여자학교로 나뉘어 있었다.

 

그러나 성당은 다르다. 성당에는 참회실이 있다. 예를 들어, 네가 나쁜 짓을 하면 너는 참회해야 한다. 신부가 참회실의 안에 앉아 있고, 너는 신부와 두 사람이 마주앉는다. 그래서 이런 상황하에서 중국인들은 천주교에 대하여 일종의 오해가 생기게 된다. 그러나 그런 오해는 그저 마음 속에 두었을 뿐, 그것때문에 백성들이 천주교를 더욱 미워하게 되지는 않았다.

4. 망해루성당이 불타다

 

1870년이 되어, 천진교안(天津敎案)이 발생한다. 이 교안으로 사복음은 맞아죽고, 영사 Henri Victor Fontanier도 맞아죽으며, 망해루성당은 불에 탄다.

 

그래서 1870년의 천진교안으로 망해루성당이 가장 먼저 불에 탔다. 이때 프랑스인들은 1872년 자죽림(紫竹林)성당도 지어놓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죽림성당으로 옮겨서 선교를 한다. 1897년 망해루성당을 재건하고나서 다시 그들의 선교활동의 중심은 망해루성당으로 옮겨오게 된다.

 

현재 우리가 보는 망해루성당의 모습은 1897년 재건된 후의 모습이다. 왜냐하면 1870년때의 망해루성당에는 좌우양측의 쌍탑(雙塔)이 없었다. 그것은 단지 고딕식의 건축이었다. 양측의 쌍탑은 1897년 재건할 때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