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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홍콩; 마카오

중공홍콩공작위원회: 중련판(中聯辦)의 진신(眞身)

by 중은우시 2020. 4. 20.

글: 석산(石山)

 

얼마전, 홍콩입법회 민주파의원의 절차필리버스터에 대하여, 중국의 양대부서(중련판과 홍콩마카오판공실)은 전후로 비난의 목소리를 냈다. 이로 인하여 베이징이 홍콩의 내부사무에 개입한다는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홍콩의 법조계는 '일국양제'하에서 베이징이 설립한 기구는 홍콩의 내부사무에 관여할 수 없다. 비판자에 따르면, <홍콩기본법> 제22조는 중국의 기구가 홍콩사무에 간여할 수 없다고 상세히 규정해 두었다.

 

<홍콩기본법>제22조의 규정에 따르면, "중앙인민정부 소속의 각 부문, 각 성, 자치구, 직할시는 모두 홍콩특별행정구가 본법(기본법)에 근거하여 스스로 관리하는 사무에 관여할 수 없다. 중앙의 각 부문, 각 성,자치구, 직할시가 만일 홍콩특별행정구에 기수를 설립할 필요가 있으면, 반드시 홍콩특별행정구정부의 동의와 중앙인민정부의 비준을 받아야 한다. 중앙의 각 부문, 각 성, 자치구, 직할시가 홍콩특별행정구에 설립한 일체의 기구 및 인원은 반드시 홍콩특별행정구의 법률을 준수하여야 한다."

 

중련판은 전날 성명을 발표하여, "홍콩마카오판공실, 중련판은 <기본법> 제22조에서 말하는 일반적인 의미의 '중앙인민정부소속 각 부문'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홍콩특구정부는 그후 3번에 걸쳐 문건을 냈는데, 제1고에서는 중련판이 중앙정부가 <기본법> 제22조 제2항에 근거하여 설립한 3대기구중 하나라고 하였다. 제2고에서는 "제22조 제2항"이라는 문구를 삭제했다. 제3고에서는 다시 보충설명하여 말하기를 "중련판은 <기본법> 제22조 제2항이 가리키는 중앙각부문이 홍콩특별행정구에 설립한 기구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과거 여러 해동안 베이징 및 홍콩은 모두 중련판을 베이징이 홍콩에 설립한 기구로 보아왔다. 2007년, 홍콩의 정제사무국이 입법회에 제출한 "<기본법>제22조하의 중앙인민정부가 홍콩에 설립한 기구"라는 문건에서는 중련판이 포함되어 있었다.

 

중련판이 '일반적인 의미에서 중앙정부 소속부문이 아니다'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어느 부문에 소속되어 있는지, 중앙정부에 속하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일반적인 의미의 부문이 아니라는 것인지, 아주 불분명하다.

 

그 의미는 중공 내부의 뜻은 내부의 의미를 갖는 것이고, 외부에서는 알 수 없다는 말일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중공내부의 홍콩문제전문가가 한 말에 따르면, 중련판 및 그 전신인 홍콩신화사(新華社)는 기실 모두 중국공산당 홍콩공작위원회이다. 이는 중국대륙의 성,시와 동급의 지방당조직이다. 설립시기는 이미 오래 되었지만, 지금까지 명칭을 바로잡지 않고 있다.

 

중공홍콩공작위원회는 1920년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후, 중공은 홍콩에서의 활동을 멈춘 적이 없다. 그리고 세력을 점점 확대하여 갔다. 1967년 폭동이후 약간 약해졌지만, 1980년대 주권회수이후 점점 활발해졌다.

 

그 전문가에 따르면, 홍콩과 중공간의 관계는 밀접하여 일반인들의 상상을 훨씬 초월한다고 한다. 중공의 건국초기 5명의 정치국상위중 2명(주은래, 등소평)이 홍콩에 온 적이 있고, 10명의 원수중 6명이 홍콩에 온 적이 있다. 중공건국을 도운 8대민주당파중 4개는 홍콩에 설립되었고, 중공이 도와서 설립한 월남공산당도 역시 호치민(胡志明)이 1930년대 홍콩에서 설립하였다.

 

1940년대말, 중공의 홍콩내 조직은 이미 거대했다. 조직은 해로로 대량의 약품과 물자를 화북의 중공점령지구로 보냈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기 전에, 근 천명의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홍콩에서 북상하여 신중국건립을 도왔다. 여기에는 소위 중앙인민정부 부주석 이제심(李濟深)이 포함된다. 모두 중국공산당의 공작으로 밀항하여 귀국한 것이다. 그때, 홍콩영국총독부, 미국과 국민당은 모두 이들을 밀접하게 감시했지만, 중공의 공작으로 모조리 안전하게 화북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명도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이를 보면 당시 중국공산당이 홍콩에서 얼마나 큰 실력을 가졌는지 알 수가 있다.

 

1950년대, 교육을 받은 많은 홍콩의 좌파청년들이 귀국하여 '건설에 참가한다' 여기에는 중국최초의 탁구세계챔피언 롱궈퇀(容國團)이 포함된다.

 

그러나, 대륙으로 귀국하거나 공산당에 가담한 이들의 최후는 모두 좋지 못했다. 롱궈퇀도 마지막에는 자살하게 된다. 신중국이 건립된 후, 중국공산당 홍콩마카오공작은 기본적으로 요승지(廖承志)가 맡아왔다. 요승지는 통전부 부부장이며, 중앙연락부 부장으로 홍콩마카오사무를 주관했다. 요승지는 오랫동안 홍콩에서 활동했으며, 중국 남방국의 위원이다. 어떤 때는 광동성위서기를 겸임하기도 했다.

 

홍콩공작위원회가 이전에 내건 간판은 홍콩신화사였다. 97년이후에는 중련판이다. 중국공산당의 관례대로라면, 정권을 철저히 탈취한 이후에 당이 정부보다 힘이 강하게 되면, 당위(黨委)라 부른다. 아직 정권을 탈취하기 전이라면 당계통은 통상적으로 '공작위원회'라고 부른다.

 

97년이후, 홍콩의 지위는 특수하다. 아직 권력을 장악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성공하지 못한 것도 아니다. 중국공산당의 홍콩공작위원회는 명칭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이미 이당대정(以黨代政)으로 각종 활동을 하고 있다. 그래서, 중련판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중앙정부의 소속부문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외부인들은 그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중국공산당 자체가 공개적으로 설멀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1997년이후, 중국공산당의 홍콩에서의 세력은 중앙에 제압당한다. 등소평의 소위 '일국양제'계획을 완성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중공의 홍콩마카오계통('홍콩공산당' 즉 홍콩인들이 말하는 토공(土共)'포함)는 마음 속으로 불만을 품고 있다. 홍콩공산당의 동지들이 과거 근 백년간 피를 흘리면서 희생하였는데, 승리한 후에는 논공행상도 없고, 성공의 과실은 한 무리의 자본가와 '항영여얼(港英餘孼)들이 빼앗아가 버렸다. 그래서 매번 때만 되면 반드시 홍콩정부에 낙정하석(落穽下石)하는 것이다.

 

이전의 둥젠화(董建華), 도날드창(曾蔭權), 렁춘잉(梁振英)에서 현재의 캐리람(林鄭月娥)까지. 모두가 그러하다.

 

그 전문가에 의하면, 최근 들어 중공의 홍콩마카오계통은 신속히 확장했고, 이미 세력을 무시하기 힘들 정도이다. 그 계통 자체는 자신의 이익을 고려한다. 완전히 베이징의 뜻에 따라 일처리하지는 않는다. 일찌기 렁춘잉이 소위 홍콩독립을 가지고 일을 벌인 적이 있는데, 소위 '양적자중(養賊自重)'의 의미가 있다. 기실 이는 중국공산당 홍콩마카오계통의 필연적인 대응이다. 렁춘잉 본인은 중국공산당 내부에 교토삼굴(狡兎三窟)하여 추염부세(趨炎附勢)하지만, 계속 홍콩공산당(소위 '토공')세력에 밉보일 짓은 하지 못했다.  

 

앞으로, 중련판은 반드시 계속 모순을 격화시키고 투쟁을 선도할 것이다. 그러면서 점점 홍콩정부로부터 실질적 권리를 빼앗는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에는 반드시 대륙과 마찬가지로 당이 정부에 우선하고, 심지어 당이 정부를 대신하게 될 것이다.

 

다만 그중에 베이징, 홍콩정부와 홍콩공산당(중련판)은 각자 자신의 생각이 있다. 대륙의 경제상황과 국제환경의 변화와도 관련이 될 것이다. 마지막에 어떤 상황이 될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말하기 어렵다. 다만, 홍콩정부와 홍콩공산당간의 승패는 이미 기본적으로 결론이 났다. 만일 중국공산당이 단기간내에 무너지지 않는다면, 차기 홍콩행정장관은 민건련(民建聯)의 인물이 맡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