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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삼국)

유비(劉備)가 건립한 정권은 분명 "한(漢)"인데, 왜 "촉(蜀)"이라 부르는 것일까?

by 중은우시 2020. 4. 10.

글: 장생전(張生全)

 

유비가 황제를 칭할 때, 국호로 선정한 것은 "한(漢)"이었다. 다만 후세에 이르러 우리는 기본적으로 유비가 건립한 이 국가를 '촉(蜀)'이라 부르거나, '촉국(蜀國)'이라 부른다. 기껏해야 '촉한(蜀漢)'으로 불러준다. 결국 유비가 당초 건국할 떄 정한 국호로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때문일까?

 

만일, 이렇게 부른다면 목적은 한왕조의 '한'과 구분하기 위해서일 것인데, 그것도 아닌 것같다.

 

역사상 건국때 '한'으로 지은 왕조는 아주 많다. 그러나 후인들은 그들이 취한 국명과 한왕조의 '한'이 중복된다고 여겨서 '한'이라는 국명을 빼버리지는 않았다.

 

양한(兩漢, 서한과 동한)의 사이에 유현(劉玄)이 건립한 '한'이 있는데, 구분을 위하여 우리는 "현한(玄漢)"이라 부른다. 다만 그 나라를 "현(玄)"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동진16국시기에 흉노인 유연(劉淵)이 건립한 "한'이 잇는데, 우리는 이를 "흉노한(匈奴漢)"이라고 부르지, '흉노'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또한 이 시기에 이웅(李雄)은 사천에 '한(漢)'을 건립하는데 우리는 이를 '성한(成漢)'이라고 부르지, '성'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5대10국시기에 유은(劉隱)이 건립한 '한'이 있는데 우리는 이를 '남한(南漢)'이라고 부르지, '남'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유지원(劉知遠)이 건립한 '한'을 우리는 '후한(後漢)'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을 '후'라고 부르지 않는다; 유숭(劉崇)이 건립한 '한'은 우리가 '북한(北漢)'이라고 부르지 '북'이라 부르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현한'의 첫째 글짜는 사람이름이고, '흉노한'의 첫째 이름은 민족명이므로 '한'을 생략하게 되면 불분명해지므로, 적합하지 않다고. '촉'은 지역으로 명명했으므로 그렇게 불러도 괜찮은 것이라고.

 

만일 '촉'이 지명이기 때문에 비교적 그렇게 부르기 적합하고 한다면, 그것도 맞지 않는것같다. 만일 그렇다면, '남한'은 '월(粤)'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나라는 주로 광동일대에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북한'은 마땅히 '진(晋)'이라고 불러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로 태원일대에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왜 이들 국가는 지역으로 명명하지 않았을까? 마찬가지로 '성한'도 그 지역은 주로 촉지방인데, 왜 '성한'은 '촉'이라 부르지 않았을까?

 

확실히 유비가 건립한 국가를 우리가 반드시 '촉'이라 부르는 것은 반드시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인가?

 

첫째, '촉'은 할거정권이고, 전국적인 정권이 아니다.

 

비록 유비가 천하를 취할 때 계속 자신은 한왕조의 후예라고 자처했고, 자신이 건립한 정권은 한왕조의 부흥이라고 얘기했고, 조조가 한왕조을 찬탈한 후 그는 한왕조를 이어가려고 했다고 표방하지만, 실제로 유비의 이 정권은 이전의 한왕조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소재하고 있는 지역이건 관할하는 백성이건 모두 촉이라는 이 지역에 한정되었다. 즉 단지 지방할거정권이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뒤의 '북한', '남한', '후한'같은 것들도 모두 할거정권이 아니냐고. 왜 그들은 '한'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지.

 

이들 왕조는 다르다. 이들 왕조가 출현한 시대는 이전의 양한과 이미 상당히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 이미 특별히 강조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유비가 건립한 '촉'은 바로 한왕조의 뒤이다. 그래서 특별히 구분해야만 사람들이 주목할 수 있다.

 

또 한가지, 당시 유비 스스로 자신이 건립한 왕조가 한왕조의 정종(定宗)이라고 떠들었을 뿐아니라, 후세의 민간에서도 보편적으로 그렇게 여겼다. <삼국연의>라는 소설에서 '존류폄조(尊劉貶曹)'의 관점을 취하기에 이른다. <삼국연의>의 작자가 이런 관점을 가지게 된 것은 유비를 그 시기의 정종으로 선양하고 싶어서이다. 그런데, <삼국연의>라는 이 소설은 기실 나관중이 민간의 삼국이야기를 수집한 기초 위에서 가공하여 완성한 것이다. 이를 보면, '존류폄조'의 현상은 확실히 민간에서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백성들의 이런 역사관을 바로잡기 위하여, 역사연구분야에서는 유비가 건립한 국가를 '촉'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둘째, '촉'은 촉지방의 특징을 지니고 있고, 촉지방의 품격을 체현하고 있다.

 

유비가 건립한 '한'은 원래 외래정권이다. 다만 이 정권이 성도를 수도로 정한 후, 아주 큰 촉지방의 특징을 지니게 된다.

 

예를 들어, 촉지방에 건립한 정권은 기본적으로 이곳을 중심으로 외부로 뻗어나가 전국적인 정권을 건립할 수가 없다. 이것은 '저주'이다. 후세에서도 계속해서 일어난다. 나중의 후한과 성한이 모두 그러했다. 비록 제갈량부터 강유에 이르기까지, 촉국은 계속 북벌을 하고자 했으나, 계속하여 돌파구를 찾지 못한다. 이것은 바로 촉지방의 지역적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촉지방에 건립된 정권은 쉽게 나태해지고, 안락함에 빠져서 죽게 된다. 촉지방은 비옥한 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어 식량이 풍부하다. 동시에 촉지방은 산천의 험준함으로 둘러싸여, 다른 곳에서 쉽게 쳐들어올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생활하는 군왕은 유비무환의 의식이 결핍되기 마련이다. 그러다가 결국은 '온수자청와(溫水煮靑蛙)' 따듯한 물에 삶아진 청개구리처럼 '사어안락(死於安樂)'하게 된다. 고촉국이건, 촉한의 유선이건, 후한의 맹창이건, 마지막에는 모두 이렇게 싸우지도 않고 망했다.

 

이런 특징은 아주 많다. 결론적으로 유비가 건립한 이 '한'은 촉지방 정권의 특징을 많이 구비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역사연구분야에서는 이 정권을 '촉'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고 생각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