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삼국)

진실한 역사상의 박망파전투(博望坡戰鬪)

by 중은우시 2018. 12. 3.

글: 살사(薩沙)


진실한 박망파전투는 정치적 의미가 군사적 의미보다 훨씬 크다.

"화소박망파"는 <삼국연의>에서 제갈량이 출산한 후 지휘한 첫번째 대표적 전투이다. 그리고 제갈량이 명성을 떨치게 되는 전투이기도 하다.

이 전투에서, 제갈량은 유비 수중의 몇천 정예병사를 가지고, 교묘하게 매복하고, 지형과 화세를 빌려, 하후돈, 이전을 물리친다. 공격해오던 10만의 조조군사는 거의 절반을 잃는다.

원래 남을 인정하지 않던 관우, 장비등도 이 전투를 겪은 후 제갈량을 존경하고, 이로서 장상화해(將相和解)가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유비집단의 새로운 편장이 열린다.


당연히 소설은 소설이고, 위의 내용에 대하여 사실인지 여부를 굳이 따질 필요는 없다. 그러나 약간의 상식이 있는 독자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고대의 작전조건하에서 수천명으로 십만명을 물리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하물며, 제갈량은 뛰어난 정치가, 전략가이지만, 뛰어난 군사가는 아니다. 그가 잘하는 것은 병력을 모으고, 병력을 훈련시키는 것이지, 전쟁터에서 병사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역사시간표에 따르면, 박망파전투는 건안7년 즉 202년에 일어났다. 그대 유비는 막 유표에게 의탁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제갈량이 출산하여 유비를 보좌하기 시작한 것은 건안12년 즉 207년이다. 그 사이에 5년의 시간 격차가 있다.

그래서, 역사상 진정한 박망파전투는 기실 제갈량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설사 당시에 그가 이미 유비와 만났다고 하더라도 기껏해야 친구의 사귐이고, 기본적으로 전투지휘에 참여했을 가능성은 없다.

사실상, 박망파전투는 완전히 유비가 책임지고 기획, 지휘한 것이다. 그리고 전투의 규모도 그다지 크지 않았다. 과정도 그다지 재미있지 않다.


우리는 먼저 <삼국지>의 박망파전투에 대한 기록을 보자:

<삼국지.촉지.선주전>: "형주의 호걸들 중에서 선주(유비)에게 귀의하는 자가 갈수록 많아졌다. 유표는 그의 마음을 의심하여, 몰래 그를 방어한다. 그리하여 유비로 하여금 하후돈, 우금등을 박망에서 막게 한다. 오래 후, 선주는 복병을 설치하고, 하루 아침에 스스로 군영에 불얼 지르고 거짓으로 도망친다. 하후돈등이 추격하다가, 복병에 당해서 패배당한다."

<삼국지.위지.이전전>: "유표는 유비를 시켜 북침한다. 엽(葉)에 이른다. 태조(조조)는 이전을 보내어 하후도을 따라 유비를 막도록 한다. 유비는 하루 아침에 둔영을 불지르고 갔다. 하후돈은 여러 군사를 이끌고 추격한다. 이전이 말하기를 '적이 아무 이유없이 물러나니, 분명히 매복이 있을 것입니다. 남쪽은 길이 좁고, 초목이 깊으니, 추격해서는 안됩니다.' 하후돈은 듣지 않고, 우금과 추격했고, 이전은 남아서 지켰다. 하후돈등이 과연 적의 매복에 빠져서 전투에 불리했다. 이전이 가서 구해준다. 유비는 멀리서 구원군이 오는 것을 보고 흩어져서 물러갔다."


비록 간단한 두 기록이지만, 두 가지 서로 다른 각도에서 이 박망파전투를 기록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연의>의 내용과는 정반대이다. 조조의 대군이 남하한 것이 아니라, 유비가 박망파에서 공격한 것이다. 그리고 유비는 유표의 지시에 따라, 조조가 북정하여 원상(袁尙)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북벌을 했고, 허창에서 아주 가까운 엽성까지 밀고 들어간다.

본거지가 위협을 받는 것을 알게 된 조조는 급히 병력과 장수를 보낸다. 일부 병력ㅇ르 남하시키는데, 대장 하후돈, 우금, 이전등이 이끌고 유비군과 싸운다. 최종적으로, 쌍방은 박망파라는 곳에서 대치하고 서로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이때, 유비는 소수의 노약병과 부상병을 보내어 전투를 벌인 후 고의로 패퇴한다. 그후에 자신의 군영을 불지른다. 이렇게 하여 적을 유인한 것이다.

과연 하후돈은 유비가 더 이상 싸울 힘이 없다고 오판하고, 병력을 이끌고 추격한다. 좁은 산길의 앞에 이르렀을 때, 유비의 매복이 돌연 나타나서, 손실이 심각했다. 바로 이런 위기의 순간에, 이전에 이미 유비의 유적지계(誘敵之計)라는 것을 간파했던 이전이 후군인마를 이끌고 구원하러 온다. 유비는 적의 구원병이 적시에 도착하는 것을 보자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그후 유비는 퇴각하고, 하후돈, 이전은 적진으로 깊이 들어갈 수 없어 추격을 포기한다. 그리하여 이번 북벌전은 이렇게 끝난다. 소위 박망파전투는 그저 이번 북벌의 마지막 전투일 뿐이다.

유비는 왜 이번 북벌을 일으켰을까? 그의 전투목적은 무엇인가? 왜 박망파전투가 끝난 후 급히 퇴각했을까? 여기에는 많은 내막이 숨어 있다. 우리는 하나하나 벗겨서 분석해 보기로 하자.


<삼국지>의 기록은 아주 명확하다. "유표가 유비를 시켜 북침했다" "하후돈, 우금등을 박망에서 막도록 시켰다."  시켰다(使)는 것이 분명히 보여준다. 이번 북벌을 일으킨 것은 기실 형주의 주인인 유표이다. 유비는 그저 그가 임명한 지휘관일 뿐이다.

그렇다면, 유표는 왜 북벌을 하려 했는가?

조조를 없고 한실을 부흥시키기 위함인가?

아마도 유표는 이런 기치를 내걸고 출병했을 것이다. 다만 실제원인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모두 알고 있다시피, 유표는 비록 형주에서 20년간 있었지만, 병권이 없었다. 형주군대를 실제 장악하고 있는 사람은 채모(蔡瑁), 장윤(張允)이다. 그들은 모두 현지 대가족의 대표이다.

당초 유표가 막 형주로 왔을 때, 받든 전략은 먼저 이들 대가족을 회유하는 것이다. 그들의 지지를 가지고 내외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점점 형주의 정무를 정리정돈해나가는 것이다.

당시에 이르러서는 유표의 형주에서의 지위가 반석처럼 단단해진다. 그것은 바로 이들 대가족의 지지 덕분이다.

그래서, 유표는 그들의 수중에서 강제로 병권을 빼앗아 올 수는 없었다. 그들에게 밉보이면 자신의 기반을 허무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유비가 오자, 이것을 유표는 병권을 획득할 좋은 핑계가 생겼다고 여기게 된다. 왜냐하면, 유비는 천자의 황숙이다. 그리고 소위 '의대조(衣帶詔)'를 가져왔다. 황제가 천하의 제후들에게 조조라는 간적을 물리치도록 호소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현재 조조는 멀리 원상을 치러 나가 있다. 허창은 비어 있다. 출병하기 딱 좋은 기회이다. 그래서, 유표는 유비를 선봉으로 임명하여 북벌군을 이끌게 한다. 그의 계획은 이렇다. 유비가 순조롭게 진군하여, 허창을 위협하면, 그렇게 전투상황이 순조로우면, 자신은 형주군의 주력을 이끌고 북상할 좋은 이유를 갖게 된다. 명망을 높이고 지반을 확대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군대지휘권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다. 원래 군대를 장악하고 있던 대가족들도 할 말이 없게 될 것이다.

유표의 이 방법은 나중에 제갈량이 촉국조정을 독점한 후 매년 북벌을 일으킨 이유와 비슷하다. 목적은 그저 전쟁을 통하여 군대를 확실히 장악하는 것이다. 그를 통해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뿐이다.


그 외에, 유표는 유비에 대하여 안심하지 못했다. 이 자가 형주에서 힘이 날로 커지는 것을 우려했다. 나중에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게 될 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사실상, 유비가 형주에 도착하자마자 이전의 서주에서와 마찬가지로, 인의도덕을 내세워 사방으로 사람들을 홀리고 다녔다. 많은 형주본토의 명사들이 점점 그에게 의탁한다.

그래서, 유표는 이번 출정기회에 유비를 형주에서 한동안 떠나있게 할 생각이었다. 그가 전투를 하는데 급급해서 형주에서 자신의 기반을 갉아먹을 수 없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전쟁을 통하여 유비의 군사력도 약화시키고자 했다. 일거양득이다.


유비는 어떠했는가? 그는 유표가 그를 출정시키는 진정한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을까? 기꺼이 유표의 선봉이 되었을까? 자신이 밑천을 모두 들여서 유표를 도와 지반을 확대하고 병권을 쟁탈하려 했을까?

유비는 당연히 그렇게 바보가 아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었다.


첫째, 유비는 이전에 원소와 남북에서 조조를 협공하려는 계획을 세운 바 있다. 현재 원소가 없지만, 그의 아들 원상등이 여전히 계속 조조와 싸우고 있다. 이때 출병하여 남쪽에서 조조를 공격하면, 그것은 원상의 압력을 해소시켜주는 셈이 된다. 이전에 원소에게 한 약속을 이행하는 셈이다. 이렇게 보면 유비는 말한 것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이 되고, 명성을 높이는데 도움이 된다.


둘째, 유비의 수하인마는 원래 일부는 원소가 그에게 보내준 사람들이다. 이들은 그에게 무슨 충성심같은 것이 없다. 그리고 북방 사람이다. 시간이 오래되니 고향생각이 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자기 휘하의 불안정요소가 된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을 해산시켜야 할 것인가? 차라리 이들을 이끌고 전투에 나서서 죽을 때까지 싸우게 하는 것이 병사를 제대로 쓰는 것이 될 것이다. 어쨌든 형주는 사람이 부족한 곳은 아니다. 승리를 거둔 후에 명성만 있으면, 다시 신야로 돌아와서 현지병력을 모집해도 늦지 않다.


셋째, 이런 전투를 벌이는 것은 명성을 얻는데 도움이 된다. 이는 유비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일이다. 특히 새로 형주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유비는 명망이 필요했다. 그리고 조조대군과 한번 싸우는 것이 필요했다. 이를 통해 자신의 용기와 입장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형주백성의 신뢰를 얻는 것이다. 그 김에 이렇게 하는 것은 멀리 강동의 손권을 겁주는 것이 될 수 있다. 그후에 협력하여 공동으로 조조의 남하를 막을 때 협상테이블에서 손권과 네고할 카드가 늘어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유비는 기꺼이 유비의 명을 받아들인다. 군대를 이끌고 북벌을 개시한다. 그러나 그는 유표의 작전계획대로 움직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목적에 근거하여 작전계획을 수정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보는 것은 이런 상황이 된다: 처음에 유비는 순조롭게 진군했다. 허창부근까지 도착한다. 이어서 조조군의 일부 주력이 돌아와서 싸우게 되자, 대치국면이 된다. 이어서 유비는 적극적으로 철수하고, 교묘하게 복병을 두어, 하후돈이 매복에 빠진다....


이에 대하여, 유비의 전략목적은 이미 안전히 달성했다. 첫째는 이전에 원소와 '협공'에 관한 약속을 지킨 것이다. 둘째, 휘하의 원래 원소의 부하사병들을 모조리 써버렸다. 셋째, 이번 승리를 바탕으로 형주인들에게서 명망을 얻을 수 있었다. 넷째, 손권과 협상할 밑천을 얻었다....이미 목적을 달성했으니, 적절할 때 손을 빼는게 좋다. 그렇지 않으면 조조군대의 주력이 몰려올 때 이길 수 있다는 보장이 전혀 없다. 그래서 유비는 작은 슬이를 거둔 후, 병력부족을 핑계로 유표의 다음 명령도 기다리지 않고, 급히 신야로 되돌아 온 것이다.


그 겨로가, 이번 북벌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간교한 유비는 이번 규모가 크지 않은 군사행동을 이용하여, 얼마 되지 않은 댓가를 치르고, 자신이 획득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이익을 획득한다. 정명한 유표도 그에게 완전히 당해 버린다. 유표는 원래 자신이 완벽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 북벌계획으로 유비를 약화시키고, 지반을 확대하며, 병권을 획득하고자 했다. 그러ㅏ 결과적으로 그는 하나도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오히려 유비의 명망만 올려준 꼴이 된다.


이렇게 되자, 유비는 형주인들의 마음 속에 영웅이 된다. 형주의 수호신이 된다. 감히 조조의 호랑지사와 맞붙어 이긴 전신이다. 이 위망은 유표와도 맞설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화가 머리끝까지 난 유표는 감히 그것을 드러낼 수 없었다. 왜냐하면 북벌계획은 그가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유비를 부정하는 건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유비를 벌주는 것은 공신을 해치는 것이 된다. 하물며, 유비는 원래 유표가 형주현지군사집단에 대항할 카드로 준비한 것이다. 이때 함부로 유비를 건드릴 입장은 아닌 것이다.


역사상 진실한 박망파전투는 대체로 이렇게 진행되었다. 이것은 그저 유표와 유비의 중원북벌행동중 하나의 전투이고, 제갈량과는 관련이 없다.

더더구나 이것은 몇천명이 10만명을 대파한 전투의 기적이 아니다. 그저 몇천명과 몇천명이 맞붙은 국부전이다. 그리고 정치적 의미가 군사적 의미보다 훨씬 크다. 유비의 진면목을 확실히 알게 된  유표는 이후로 더욱 그를 경계하게 된다.

이후 조조가 유성(柳城)을 원정할 때, 유비가 아무리 출병하도록 권해도, 유표는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중원을 차지할 최후의 기회를 철저히 잃어버리고 만다. 조조는 이로 인하여 잠시 형주를 공격하려는 생각을 버린다. 그리고 힘을 다하여 북방을 안정시키고, 유비에게 숨을 쉴 시간을 남겨준다.


몇년후 유표가 병사하고, 형주본토가족이 적극적으로 투항해올 때 비로소 병력을 이끌고 남하한다. 그리고 유비를 강하일대로 몰아낸다. 유비는 강동의 손권과 합작하고, 이렇게 하여 유명한 적벽대전이 일어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