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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삼국)

동오(東吳)는 왜 당당하게 형주(荊州)를 내놓으라고 요구했을까?

by 중은우시 2019. 1. 20.

글: 무릉산인(茂陵散人)


민간에 이런 헐후어(歇後語)가 있다: "유비차형주(劉備借荊州)"(유비의 형주 빌리기) - "유차무환(有借無還)"(빌리기는 해도 돌려주지는 않는다). 그리고 <삼국연의>의 영향으로, 사람들이 받은 인상은 전체 형주를 유비는 공짜로 얻었고, 손권에게 '빌려온' 것이라는 것이다. <삼국연의> 제51회에 "조인대전동오병(曹仁大戰東吳兵), 공명일기주공근(孔明一氣周公瑾)"에는 이런 묘사가 있다. 주유가 천신만고끝에 조조의 군대를 쫓아냈는데, 결과적으로 남좋은 일만 시켜서, 성은 모조리 제갈량이 기습하여 점령해 버린다. 나머지 강남사군(江南四郡)은 병력이 비어 있어, 역시 손에 넣었다. 주유는 화가 나서 피를 토한다. 소설에서 주유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계책을 쓰고 병마를 잃고 전량을 쏟아부었는데, 그는 만들어놓은 것을 가져갔다. 어찌 한탄스럽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받은 인상은 유비가 나쁘다는 것이다. 빌린 것을 돌려주지 않았으니까. 사람들은 유비가 빌린 것은 형주 전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동한말기, 유표(劉表)가 형주를 점거하고 있었다. 형주는 장강중류에 위치하고 있으며, 자원이 풍부하고, 인구가 많다. 경제문화도 비교적 발달되어 있다. 그리고 지리적 위치가 아주 중요하다. 서로는 익주를 취할 수 있고, 동으로는 강동을 공격할 수 있다.


형주는 주로 7개군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양군(南陽郡), 남군(南郡), 강하군(江夏郡), 장사군(長沙郡), 영릉군(靈陵郡), 무릉군(武陵郡), 계양군(桂陽郡). 적벽대전후, 위, 촉, 오의 삼가가 나누어 가지게 된다. 조조는 패전을 했지만, 북쪽의 남양군을 차지하고(조조는 남양군에서 양양군을 분리시켜 남양군과 양양군의 두 군을 가진다), 손권은 힘을 가장 많이 쏟았으나 남군, 강하군을 두 군을 차지한다; 유비가 가장 많이 얻었다. 장사, 영릉, 계양, 무릉군의 사군을 얻는다.





주유가 죽은 후, 동오의 노숙(魯肅)은 전략적인 고려에 의하여 극력 손권에게 권하여 동오가 점거하고 있던 일부 형주를 유비에게 '빌려주게' 한다. 그리하여 유비가 기반을 확실히 잡을 수 있도록 하여, 동오와 함께 조조에 항거하도록 하는 것이다. 손권도 생각해보니 맞다고 여겨서, 형주의 남군을 유비에게 빌려준다. 그 이유는 유비로 하여금 조조르 ㄹ막는 전략적인 전초기지로 삼으려는 것이고, 둘째는 이로써 유비에게 호의를 베푼 것이다.


그래서, "차형주(借荊州)"는 기실 형주의 남군을 빌려주고, 무릉, 계양의 두 군에 대한 유비의 점거를 인정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손권은 장사의 일부 지방을 회수하여 한창군(漢昌郡)을 설치한다.


손권이 형주를 유비에게 빌려준 것은 그 전제조건이 형주는 원래 동오의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형주를 빌려주는 것을 실행할 수가 없다. 손권이 원래 형주의 대부분을 점거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형주를 유비에게 빌려주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것이다.


형주를 빌려주었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데, 왜 이런 말이 나오게 되었을까? 이와 관련한 모든 얘기는 동오 사람들의 기록에만 나온다.


<강표전(江表傳)>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조조를 격파한 후, 주유는 남군태수가 된다. 그리고 남안의 땅을 떼어 유비에게 주었다. 유표의 옛 관로 북군에서 도망쳐 돌아온 사람들이 모두 유비에 투신한다. 유비는 받은 땅이 부족하여, 손권에게 형주 수군을 빌렸다."


<노숙전(魯肅傳)>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나중에 유비가 손권을 만나 형주도독을 달라고 한다. 노숙이 손권에게 권하여 빌려주어 함께 조조를 막도록 한다."


<한진춘추(漢晋春秋)>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여범(呂範)이 유비를 붙잡아 놓자고 권한다. 그러자 노숙이 말하기를, "안된다. 장군이 비록 신무명세하나 조조의 위력이 실로 강하다. 처음에 형주로 가서 아직 은혜를 베풀지 못했으니, 마땅히 유비에게 빌려주어, 안정시키는 것이 낳다. 그러면 조조의 적이 많아지는 것이고, 스스로 세력을 만들게 하는 것이 상책이다." 손권이 그의 말을 따른다.


적벽대전이 끝난 후, 명목상으로 형주는 조정이 책봉하는 형주목(荊州牧)에 귀속된다. 그러나 유기(劉琦)가 죽은 후 형주목은 유비였다. 동오는 후세에 동맹을 깨고 형주를 기습했다는 오명을 남기지 않기 위하여, 형주를 빌려주었다는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후 유비는 다시 장사, 강하, 계양의 3군을 손권에게 준다. 만일 동오가 정말 동맹의 대의를 중시하였다면 여기서 끝내야 했다. 순망치한으로 더 이상 형주로 진격하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사실상 동오는 기회를 틈타 형주를 기습한다. 이를 보면 동오는 일찌감치 형주 전체를 탐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차형주'의 이야기를 만들어내어, 동오가 형주를 빼앗아 온 것은 이치에 합당하다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219년, 위나라의 주력이 한중에서 유비와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형주를 수비하던 관우는 적극적으로 유비의 행동에 호응하여, 친히 형주의 주력을 이끌고 위군이 점거하고 있던 양양과 번성을 공격한다. 조위의 대장 조인을 격패시키고 기회를 틈타 양양, 번성을 포위한다. 조조는 사방에서 병력을 끌어모아 양양 선성의 포위를 풀어주도록 보낸다. 거기에는 우금이 이끄는 칠군(七軍), 서황(徐晃)군단, 장료(張遼)군단등이 있다. 관우는 교묘하게 한주(漢水)가 범람하는 시기를 이용하여 '수엄칠군(水淹七軍)'하고 우금을 생포하며, 방덕을 참한다. 중원지역에서도 멀리서 관우의 북벌에 호응하다. 관우의 명성은 화하에 떨쳐지고, 조조는 관우의 날카로운 공격을 피해 거의 천도까지 생각해야 했다.


사마의 등의 건의하에, 조조는 동오의 손권과 연합한다. 손권은 관우의 후방을 기습한다. 관우의 후방은 비어 있었고, 동오의 여몽에게 기회를 주었다. 결국 관우는 219년말 맥성으로 패주하고, 형주라는 전략적 요충지를 잃게 된다. 관우의 잘못은 경솔하게 번성을 공격한 것이다. 그리고, 손권이 맹약을 어길 것에 대비하지 못했고, 자신의 후방을 공고히 해놓지 못해서, 형주라는 전략요충지를 잃어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