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원빈(袁斌)
2020년 3월 25일 아침일찍, 한커우(漢口) 빈의관(殯儀館, 화장장)의 문앞에는 길게 차량의 줄이 늘어섰다. 그들은 모두 전화를 받고 친족의 유골을 수령하러 온 것이다.
한 네티즌은 웨이보에 이런 글을 올렸다: "나는 오늘 오전 10시경 한커우빈의관으로 갔다. 문앞에는 자가용과 자원봉사자의 차량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문을 들어가면 보안이 엄격했고, 곳곳에 사복경찰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핸드폰을 누군가 들기만(사진을 찍으려) 하면 바로 다가와서 제지했다."
그는 말했다: "나는 안에서 2시간을 기다렸다. 어떤 가족은 영정사진을 끌어안고 기다리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유골함을 안고 나의 곁을 지나갔다. 사람은 아주 많았고, 아주 조용했다. 우는 사람도 없었고, 슬픈 음악도 없었다. 그들은 이렇게 묵묵히 유골함을 안고 떠난다. 내가 떠날 때쯤이 되어서야 한 아주머니가 방성대곡을 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녀가 곡을 하자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모두 아무 표정없이 그녀를 쳐다보기만 했고, 심지어 난감해 하는 표정도 보였다."
어떤 네티즌이 토로한 바에 따르면, 사망자의 가족들은 정부에서 주는 3,000위안의 보조금을 받았으며, "곡을 하지 않고, 떠들지 않으며, 조용히 안장한다"는 각서를 썼다고 한다.
어떤 네티즌은 "나는 전체 수령과정을 겪었다. 사전에 예약을 했는데, 아침 8시에 빈의관에 와서 4시간 줄을 섰다. 얼마나 많은 가족들이 슬프고 분개할까. 그러나 그저 운명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얼마나 많은 확진받지 못한 사람들이 마지막에는 그저 차가운 유골함이 되었는가. 숫자 외에는 그들이 모두 잊어버리는가. 아무런 가치가 없단 말인가?"
이들 소식은 다시 한번 여론의 이번 중국바이러스(신종코로나바이러스, 코로나19)에 목숨을 빼앗긴 우한사람들에 대한 주목과 관심을 환기시켰다.
오늘 웨이신에서 한 우한의 생존자가 쓴 자술을 보았다. 그는 지옥도 묘사할 수 없을 광경을 얘기한다:
"2월초의 어느 날, 5일부터 8일까지, 나는 매일 제4의원 서원구의 응급실을 찾아가서 모친을 위해 줄을 서서 주사를 맞았다.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아는 사람들이다. 마스크를 쓰고서도 모두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그래도 괜찮았다. 아무런 증상이 없었다. 그래도 형과 누나를 오게 할 수는 없었고, 두 아이는 그 집으로 보냈다.
주사를 맞을 수 있다면 그래도 다행이다. 주사를 한대 맞으면 바로 한대 더 맞으려고 줄을 섰다. 매번 10여시간을 줄서 있었다. 매번 3시면 깨어나서 물 한잔도 제대로 마시지 못하고, 마스크도 떼지도 못한다. 오후 3,4시까지줄을 섰고, 5,6시에 귀가해서, 물을 마시고 식사를 했으며, 그냥 쭈그리고 잠들었다.
매일 누군가 죽어나가는 것을 보았다. 조그만치의 존엄도 없다. 가장 많을 때는 2시간내에 4명이 죽어나갔다. 그날 나는 2층에서 주사를 맞았는데, 6시부터 8시가 되기도 전에 먼저 이층의 병실에서 2구가 실려내려왔다. 이들은 확진받은 사람들이다. 내 곁에서 다시 2명이 쓰러졌다. 오후에 다시 1층에서 2명이 죽었다. 이들은 병원 안에서 아직 검사를 받지 못하고 죽어간 사람들이고, 신종코로나의 사망명단에 이름이 올라가지 않았다. 의심병사로도 계산되지 않았다.
아침 8시경에 사망한 그 할머니는 칠십여세정도 되었는데, 한밤중부터 줄을 서서 주사를 맞고, 두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고 쓰러졌으며, 그대로 죽었다. 나로부터 2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두 아들의 나이는 나와 비슷했는데, 침대보로 싸서는 저녁 9시에서야 들고 나갔다.
사람이나 차량이나 다 부족했다. 치안유지를 책임지는 사람은 현장에 1명만 있었다. 빈의관의 차량은 원래 1대에 시신 1구를 싣는 것인데, 이때는 차량 1대에 8구를 실었다. 그날 내가 밖으로 나가서 담배를 피울 때, 콘테이너같은 화물차에 7,8구의 시신이 실려있는 것을 보았다. 그 광경은 지옥보다 심했다."
또 다른 사망자의 가족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23일 오전 11시부터 줄을 섰다. 오후 4시가 되어서 마침내 모든 절차를 끝냈다. 모든 비용을 한꺼번에 지불했는데, 합계 9만여위안이다. 부친은 2월 29일에 사망했다. 나는 아직 부친의 유골을 받지는 못했다. 다음 달초에 매장할 생각이다.
2월 8일, 부친에게 기운이 빠지는 현상이 나타났고 격리호텔로 옮긴 후부터 열이 나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부친을 모시고 동제병원으로 가서 진찰을 받았다. CT를 찍고는 감염으로 확진되었다. 그러나 병원에 병상이 없었다. 할 수 없이 호텔로 돌아와서 계속 기다려야 했다. 2월 28일 동제병원 광곡의원에 병상이 나왔다. 그러나 입원한지 이틀후에 전화를 받았는데, ICU병실로 옮겼다고 말했다.
2월 29일 새벽, 나는 병원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는데,부친이 돌아가셨다고 했다. 마지막 모습도 보지를 못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시신은 이미 빈의관에서 화장되었다. 유물도 없었다. 나는 수간호사에게 전화를 했는데 아무도 받지 않았다. 병원사람이 가서 찾아보겠다고 하더니, 나중에 핸드폰, 신분증과 카드지갑등 물품을 찾아주었다. 그러나 집열쇠는 찾을 수 없었다. 병원은 우리에게 중환자실 건물아래에서 기다리라고 했고, 올라오지 못하게 했다. 그들은 물건을 가져다 주었다.
사람이 죽었는데, 아무도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사망시간도 모른다. 원인도 얘기해주지 않는다. 도대체 폐가 좋지 않아서인지 다른 원인인지도 불분명하다. 작견 연말에 심장수술을 했었는데, 나는 심장기능부전문제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녀의 말을 듣고 빈의관의 문앞에 줄을 서서 유골을 기다리는 줄을 보면서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2020년의 봄날에 영원히 머물러 있을까를 생각하며 탄식이 절로 나왔다. 2020년의 이 봄날에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나갔단 말인가?
대륙의 공식발표에 따르면, 3월 26일까지, 우한시에서 우한폐렴으로 사망한 인원수는 2,531명이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이 숫자가 엄청나게 줄인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자들은 자가격리중에 사망했는데, 그들은 확진자도 아니고, 의심자로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당연히 우한폐렴의 사망자명단에 들어가지도 못한다. 병원에서 사망해도, 상당한 부분의 사람들은 검사를 거치지 못했다. 당연히 우한폐렴의 사망자명단에 들어가지 않는다. 이전에 공개된 각종 정보에 따르면, 이 두 부분의 사람들 숫자가 절대로 적지 않다. 그러나 중국정부는 폐렴확산의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하여 시종 진실한 사망자숫자를 감추어 왔다. 이뿐아니라, 심지어 빈의관에서 유골함을 수령하는 긴 줄의 사진도 찍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진상은 감추어질 수 없다. 얼마나 많은 우한인들이 영원히 2020년의 봄에 머물러 있게 되었을까? 중국정부는 반드시 국민들에게 진상을 알려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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