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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주원장)

주중팔(朱重八)은 왜 주원장(朱元璋)으로 개명하였을까?

by 중은우시 2020. 2. 27.

글: 만풍모우(晩風暮雨)


명나라의 개국황제 주원장은 맨밑바닥에서 시작하여 황제에 오른다. 그는 중국역사상 가장 전설적인 색채를 지닌 제왕중 하나이다.

주원장의 원래 이름은 주중팔이다.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당시의 많은 보통사람들과 같이 숫자로 이름을 지었다.

숫자로 이름을 지은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조정에서 규제했기 때문이다. 청나라때의 인물인 유월(兪樾)이 쓴 <춘재당수필중(春在堂隨筆中)>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원나라제도에 서인무직자(庶人無職者)는 이름을 짓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항제(行第, 항열의 순서) 및 부모의 연치(年齒, 나이)를 합하여 이름을 삼았다."

둘째로 문화수준이 낮았기 때문이다. 원나라때 통치자는 몽골인이다. 그들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고, 말 위에서 천하를 통치했다. 문화교육을 보급시키는 것은 중시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일반백성들 중에서 글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고, 할 수 없이 숫자로 이름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주중팔의 오대조는 주중팔(朱仲八)인데 처는 진씨(陳氏)로 세 아들을 낳는다: 주육이(朱六二), 주십일(朱十一), 주백육(朱百六)

사대조 주백육은 처가 호씨(胡氏)인데 두 아들을 낳는다: 주사오(朱四五), 주사구(朱四九)

증조부 주사구는 처가 후씨(侯氏)인데, 네 아들을 낳는다: 주초일(朱初一), 주초이(朱初二), 주초오(朱初五), 주초십(朱初十)

조부 주초일은 처가 왕씨(王氏)인데, 두 아들을 낳는다: 주오일(朱五一), 주오사(朱五四)

부친 주오사는 처가 진씨(陳氏)인데, 네 아들을 낳는다: 주중사(朱重四), 주중육(朱重六), 주중칠(朱重七), 주중팔(朱重八)

백부 주오일은 네 아들을 낳았다: 주중일(朱重一), 주중이(朱重二), 주중삼(朱重三), 주중오(朱重五)


원나라가 건립된 후 중원을 통치한 것은 백년이 되지 않는다. 연대로 계산하면, 주중팔의 오대조, 사대조는 당연히 송나라때 태어났다. 송나라의 멸망과 원나라건립과정을 지나면서 그들은 문화가 뛰어났던 송나라때도 역시 숫자로 이름을 지었다. 이를 보면 이들 집안의 문화수준은 확실히 낮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명나라의 개국공신 '개평왕(開平王)' 상우춘(常遇春)의 증조부는 상사이(常四二), 조부는 상중오(常重五), 부친은 상육육(常六六)으로 모두 숫자로 이름을 지었다.


주중팔이 반원의군에 참가한 후, 심사숙고를 거쳐 이름을 주원장으로 고친다.

"주(朱)"라는 성은 고치지 않았는데, "주(誅)" 즉 베어죽인다는 것과 음이 같다; "원(元)"은 원나라를 가리킨다. '장(璋)'은 고대의 옥기인데, 극히 날카롭다. <설문>에서는 "반규위장(半圭爲璋)" 즉 홀(圭)을 절반으로 나눈 것이 바로 장이다.

주원장이라는 세 글자의 의미는 원나라를 주살하는 날카로운 무기라는 뜻이 된다. 이는 원나라와 세불양립하겠다는 결심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 대다수의 의군 구성원과 마찬가지로, 주중팔은 원나라와 각골명심의 원한이 있었다.


원나라 지정4년(1344년), 회북(淮北)의 일대에 가뭄이 든다. 그리고 전염병이 유행한다. 조정은 양식과 돈을 풀어 이재민을 구휼했다. 그러나 각급관리들이 층층이 유용하면서, 재난을 당한 백성들의 손에 들어오는 것은 형편없는 양이었고 도저히 입에 풀칠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1달내에 주중팔의 부친, 모친, 큰형, 조카, 네명의 가족이 굶어죽는다. 큰형의 미망인은 딸을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갔다. 둘째형 주중육부부는 외지로 도망쳤다. 셋째 주중칠은 장인의 집에 데릴사위로 들어간다.

원래 대가족이었으나 혼자남게 된 17살의 주주팔은 의지할 곳이 없는 외로운 신세가 된다.

몇달후, 이웃 왕대낭(汪大娘)이 어레인지하여 주중팔은 황각사(黃覺寺)에서 출가하여 증려가 된다. 절에 들어간지 두달도 지나지 않아 가뭄은 더 심해지고, 절의 주지는 주중팔에게 탁발동냥을 시킨다.

주중팔은 봉양(鳳陽)을 출발하여, 남으로 합비(合肥)로 갔다가, 다시 서쪽으로 꺽어서 고시(固始), 신양(信陽)으로 가고 다시 북으로 꺽어서 여주(汝州), 진주(陳州)로 간다. 다시 동으로 녹읍(鹿邑), 박주(亳州)를 거쳐 영주에 이른다. 다시 영주(潁州)에서 호주(濠州)로 돌아왔다.

꼬박 4년동안 주중팔은 회서(淮西)일대를 유리걸식한다. 이때 주중팔은 동시에 승려와 걸인이라는 두 가지 신분의 생활을 경험한다.


주중팔이 성공을 거둔 후 <황릉비(皇陵碑)>에 이때의 비참한 생활을 구구절절하게 언급하고 있다. 유리걸식하는 새활에서 주원장은 안목을 넓히고, 견식을 기른다. 특히 반원의군의 수령인 팽영옥(彭瑩玉)의 제자들을 알게 되고, 이미 뼈까지 썩어들어간 원나라의 진면목을 확실하게 인식하게 된다.

주중팔은 황각사로 돌아온 후, 계속하여 승려생활을 지낸다. 하루는 어렸을 때의 놀이친구 탕화(湯和)가 서신을 보내왔다. 그에게 함께 반원의군에 참가하자는 것이다. 주중팔은 즉시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인다.

지정12년 삼월의 어느 날, 주중팔은 일이 있어 외출했다가, 돌아오면서 절이 이미 불에 타서 폐허로 변해버린 것을 발견한다. 원래 이 길을 지나던 호주의 반란군을 진압하는 원군이 절을 불태워버린 것이다.

기거할 곳을 잃은 주중팔은 막다른 골목에 몰렸고, 호주로 가서 친구인 탕화를 만나 반원의군에 참가한다. 얼마후 이름을 주원장으로 바꾸었다.

여러 해동안 노력을 거쳐 주원장은 마침내 1368년 대명왕조를 건립한다.


주원장은 황제에 오른 후, 다시 자신에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준다: 주흥종(朱興宗). 그뿐아니라, 이미 죽은지 여러해가 지난 조상, 부친과 형님들에게도 이름을 지어준다.


부친 주오사는 주세진(朱世珍)으로, 큰형 주중사는 주흥륭(朱興隆)으로, 둘째형 주중육은 주흥성(朱興盛)으로, 셋째형 주중칠은 주흥조(朱興祖)로. 여기에 자신의 이름인 주흥종까지 합쳐 형제 사인의 이름을 연이어부르게 되면 "흥성조종(興盛祖宗)"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