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경전회모(經典回眸)
여러 민간소설에서 유백온(劉伯溫)은 운주유악(運籌帷幄)의 기문둔갑(奇門遁甲)도 알고, 산무유책(算無遺策)의 '대선(大仙)'으로 그려진다. <삼국연의>에 나오는 제갈량의 영향을 받아, 유백온은 거의 또 다른 버전의 제갈량으로 그려졌다. 실제로 <명사.유기전>과 <명태조실록>을 보면, 유백온은 그다지 신기하지 않다. 그는 주승(朱升), 섭침(葉琛)등과 마찬가지로 그저 주원장의 모사중 한 명이었다. 다만 한 가지 일은 그가 아주 정확하게 계산했다. 그것은 바로 주원장이 등극하는 날인데, 아주 맑은 날이었다.
주원장이 곽자흥(郭子興)을 떠난 후, 첫번째 목표는 저주(滁州)였다. 당시 주원장의 곁에는 회서(淮西)24장이 있었는데 모두 무장이고 문신은 없었다. 저주를 점령한 후, 저주의 서당선생인 이선장(李善長)이 자진해서 투신한다. 이선장은 사람됨이 성실하고 일처리가 온건하여, 주원장은 그를 곁에 둔다. 그는 결국 명나라의 제일문신이 되고, 명나라의 "소하(蕭何)'라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선장은 그저 문신일 뿐, 모사는 아니었다. 주원장이 장강을 건넌 후, 휘주(徽州)에서 주승을 만난다. 주승은 주원장에게 원칙을 제시한다: "고축장(高築墻), 광적량(廣積糧), 완칭왕(緩稱王)" 주승이야말로 주원장의 첫번째 모사였다.
주원장이 휘주, 무주(婺州)를 점령한 후, 원래 계속 서남으로 진군하고자 했다. 주승, 호대해(胡大海)등은 주원장에게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절강을 공격하도록 건의한다. 왜냐하면 절강에 큰 인물이 한 명 있었기 때문이다. 그 큰 인물의 이름은 유기(劉基), 즉 유백온이다. 주원장은 이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절강동부를 점령하고, 유백온을 청한다. 여기서 설명해야할 것은 주원장은 마음 속으로 유백온이라는 이 절강의 문사를 멸시했다. 그는 그저 그의 재주를 쓰고자 했을 뿐, 그를 쓸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주원장은 처음에 직접 그를 청하러 가지 않았고, 수하를 보내어 돈을 가지고 가서 유백온을 불러오게 한다. 유백온은 당연히 가지 않는다.
그 후에 주원장은 다시 저주총제(滁州總制) 손염(孫炎)으로 하여금 주원장의 서신을 가지고 유백온을 만나게 보낸다. 유백온은 그제서야 하산한다. 즉, 처음부터 끝까지, 주원장이 친히 그를 모시러 간 적이 없다는 것이다. 민간의 전설에 따르면, 주원장은 유비의 '삼고초려'를 본받아 유백온을 청했다고 하는게 그것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유백온이 막 주원장의 진영에 왔을 때, 주원장에게 시무십팔책(時務十八策)을 올려 주원장의 마음을 흔든다.
유백온이 주원장의 진영에서 가장 먼저 맡은 직위는 "제주(祭酒)"였다. 이것은 그다지 큰 관직이 아니다. 진우량(陳友諒)이 군대를 이끌고 동진하여 장사성(張士誠)과 손을 잡고 주원장을 협공하려 할 때, 유백온은 비로소 그의 재주를 한껏 발휘한다. 당시 남경 상류의 태평(太平, 當塗縣)은 이미 진우량에게 점령당했고, 태평의 수비장수인 화운(花雲)이 전사한다. 상황이 아주 긴급했다. 사람들은 진우량의 배가 너무 많다고 겁을 먹고, 어떤 사람은 투항하자고 하고, 어떤 사람은 도망치자고 했다. 단지 유백온만이 동쪽의 장사성은 도량이 좁아서, 선물을 보내어 우호관계를 맺고, 서쪽의 진우량은 너무 거칠어, "깊이 유인하여, 복병으로 기습하면" 된다고 한다.
그의 이 제안은 주원장의 성격에 딱 들어맞았다. 이어서 유백온은 다시 막 투항한 강무재(康茂才)를 다시 진우량에게 거짓투항하도록 건의한다. 결국 용만대첩(龍灣大捷)을 거두고, 진우량의 손해는 참혹했다. 주원장은 이때부터 자리를 완전히 잡았다. 용만대첩후, 주원장은 유백온을 무시할 수 없다고 여기고 그를 군사(軍師)로 모신다.
그 후, 유백온은 비록 주원장에게 여러 계책을 제시했지만, 그것은 모두 군사로서의 모략이다. 무슨 기문둔갑지술은 아니다. 단지 한 가지, 확실히 유백온에게 남다른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 있었다.
1367년 십일월, 주원장은 여러 부하장수들의 계속된 권유하에, 황제로 등극하기로 결정한다. 보통 집안에서 결혼을 시키더라도 길일을 잡아서 거행하기 마련이다. 주원장이 황제에 오르는데 분명히 아주 뛰어난 황도길일(黃道吉日)을 잡아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11월부터 눈과 비가 계속되었다. 주원장은 무슨 황도길일은 따지지 않았고, 그저 맑은 날이면 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주원장은 천자(天子)가 되는 것인데, 만일 등극하는 날 돌연 하늘에서 폭우나 폭설을 내리거나, 일진광풍이 불기라도 하면, 영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 된다. 그리하여 그는 날짜를 고르는 임무를 유백온에게 맡긴다.
유백온은 주원장의 뜻을 잘 알았고, 밤에 성상(星象)을 보고 손가락으로 계산을 해본 다음 다음 해 정월 초나흘이 "육진치일(六辰値日)"이어서 가장 적합하다고 말한다. 주원장은 사람들을 시켜서 등극과 관련한 일들을 지시한다. 그러나 십일월부터 납월(십이월)까지 하루도 맑은 날이 없었다. 비와 눈이 계속 내렸고, 바람과 서리가 계속된다. 모두 마음 속으로 불안해 했다. 모든 사람은 알고 있었다. 만일 정월 초나흘에 광풍이 불거나 눈비가 내리면, 유백온은 중벌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그런데, 상각지도 못하게 정월 초이틀이 되자 하늘이 돌연 맑아지고, 정월초나흘에는 눈이 다 녹고, 날씨가 맑았다. 정말 최고의 날씨였다. 주원장은 순조롭고 만족스럽게 등극행사를 진행할 수 있었다.
유백온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날씨를 알아낼 수 있었는지는 지금의 역학 전문가들도 알지 못한다. 다만 그의 이런 예지능력은 스스로에게 은환(隱患)을 남기데 된다. 유백온이 나이가 들어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인 청전(靑田)으로 돌아갔는데, 호유용이 꺼리를 잡아서 유백온을 모함한다. 유백온이 평소에 '청전'은 용(龍)의 기운이 있다고 말했다고 한 것이다. 주원장은 유백온의 그런 능력을 꺼려서, 유백온으로 하여금 남경으로 불러들인 다음, '호유용의 유백온 독살사건'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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