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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주원장)

주원장(朱元璋)은 황제에 오른 후 형제자매와 그 자녀들을 어떻게 대했을까?

by 중은우시 2024. 11. 24.

글: 소도지풍(小島知風)

주원장은 중국역사상 유일하게 거지출신으로 황제에 오른 인물이다. 주원장을 얘기하게 되면 그가 공신들에게 아주 잔혹하게 대했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친척들에게는 아주 잘 대해주었다. 특히 그의 형제자매와 그 후손들에 대해서는 아주 잘 대해주었다.

기실 주원장의 원래 이름은 주중팔(朱重八)이다. 가족은 안휘 호주(濠州, 지금의 봉양)의 빈민가정에서 태어난다. 그의 부친은 원래 이름이 주오사(朱五四)이다. 나중에 주원장이 명나라황제에 오른 후, 주오사를 인조순황제(仁祖淳皇帝)로 추존한다. 그리고 부친의 이름 주오사가 문아하지 못하다고 여겨 주세진(朱世珍)으로 개명한다.

주원장의 가족은 경제적 여건이 열악했다. 그러나 주원장의 부모는 자식을 많이 낳았다.다자다복의 이념하에 주오사는 주원장을 포함하여 4남2녀를 낳아 기른다.

주원장은 그중 막내이다. 그의 위로 세 명의 형과 두 명의 누나가 있었다. 세 명의 형은 각각 큰형 주중사(朱重四), 둘째형 주중육(朱重六), 셋째형 주중칠(朱重七)이다. 아래에서는 주원장이 칭제하여 명나라를 건립한 후, 세 명의 형과 그 후손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큰형 주중사는 주흥륭(朱興隆)으로 개명하다.

원나라 지정4년(1344년), 회북(淮北)지역에는 대규모로 가뭄과 메뚜기떼의 피해를 본다. 이어서 전염병이 돈다. 이런 상황하에서, 대규모의 반원농민반란이 일어난다. 이번 재난에서 주원장의 큰형 주중사는 부친 주오사 및 모친 진씨와 함께 연이어 기근과 전염병으로 사망하고 만다.

그리하여,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립하기 전에, 주중사는 이미 사망했다. 다만 주중사는 사망하기 전에 이미 결혼하여 자식을 두었다. 인근 마을의 왕씨(王氏)와 결혼하여 모두 2남1녀를 낳는다. 그러나, 주중사의 장남은 이미 요절했고, 주중사가 죽을 때는 1남1녀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당시 주씨집안은 너무 가난하여 먹을 것도 없었기 때문에, 주중사와 부모가 사망한 후, 주씨집안에는 나이어린 주원장과 둘째 주중육의 일가 3명이 남아 있었다. 주중육과 주원장도 이미 먹을 것이 없어서 형제 두 명은 모두 외지로 나가 있어서, 주중사의 처 왕씨는 할 수 없이 자녀를 데리고 인근마을의 친정으로 간다.

그러나, 금방 왕씨의 친정집도 재난으로 가파인망(家破人亡)하게 되고, 왕씨는 할 수 없이 자녀를 데리고 구걸하며 살아간다. 나중에 왕씨는 자녀들을 데리고 회북지역을 유랑한다. 마침 주원장이 곽자흥(郭子興)의 홍건군(紅巾軍)에 가담했고, 곽자흥의 의녀(義女) 마씨(馬氏)를 처로 삼아서, 곽자흥 휘하의 대장이 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지역과 군대가 있었고, 이름도 주원장으로 개명했다.

왕씨는 마침 홍건군대장 주원장이 자신의 남편과 동향이라는 것을 듣고,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나서 주원장이 원래 주중팔이라는 것을 알아낸다. 그것을 듣고 왕씨는 기뻐한다. 주중팔은 자신의 시동생이 아닌가. 그리하여 왕씨는 자녀를 데리고 주원장에게 간다.

주원장은 형수와 조카, 조카딸을 보고 너무나 기뻤다. 그는 다시 가족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왕씨는 모친을 모시듯이 보살펴준다. 그리고 조카와 조카딸을 거두어 기른다. 그리고 조카의 이름을 주문정(朱文正)으로 고쳐주고 좋은 스승을 모셔서 공부시킨다.

다만, 왕씨는 명이 좋지는 못했다. 주원장에게 가서 복을 얼마 누리지도 못하고 병이 걸려 죽고 만다. 죽기전에 그녀는 주원장에게 주중사가 남긴 자녀를 잘 보살펴달라고 눈물로 호소한다. 주원장도 눈물로 형수의 임종요구를 받아들인다.

그후 주원장은 조카 주문정의 교육에 특히 신경썼다. 그리하여 주문정은 어른이 된 후 문무를 겸비한 인재가 된다. 주문정의 우수한 성장에 주원장은 매우 기뻐했고, 주원장의 장남 주표(朱標)가 태어나기 전에는 주원장이 한때 자신의 후계자는 주문정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주문정은 나중에 주원장을 따라다니며 전쟁터에서 전공을 여러번 세운다. 당시 주원장은 주문정에게 어떤 상을 원하는지 물어봤는데, 주문정은 이렇게 대답한다: "숙부께서 대업을 이루시면, 조카가 부귀를 걱정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아직 대업을 다 이루지 못했는데, 숙부께서 조카에게 관직과 상을 내릴 것을 생각하니, 어찌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의 대답에 주원장은 아주 기뻐하며 주문정을 더욱 중시한다. 그래서 한때는 주문정을 후계자로까지 생각한 것이다. 주문정은 당시 주원장집단에서 점차 성장하여 주원장 다음가는 제2의 핵심인물이 되었다.

1361년, 주원장이 최고군사지휘기구인 대도독부(大都督府)를 설립하고, 주문정을 대도독(大都督)에 앉힌다. 그리고 주문정에게 내외일체의 군대를 지휘할 권력을 부여한다. 이는 주문정이 주원장집단내에서 2인자에 올랐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후 주문정은 주원장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4만의 잔군을 이끌고 홍도(洪都, 지금의 남창)를 85일간 지켜낸다. 이는 주원장의 강적 진우량(陳友諒)의 60만대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것이고, 중국군사사에서 소수로 다수를 이긴 '홍도보위전'을 창조한 것이다.

주문정은 홍도에서 진우량의 군대를 물러가게 하여 진우량이 황급히 주원장과 파양호에서 결전을 진행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파양호전투에서 다시 주문정은 군대를 이끌고 홍도에서 출격하여 주원장의 주력부대와 협력하여 진우량의 퇴로와 보급로를 끊는다. 그리하여 주원장이 최종적으로 파양호전투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게 된다. 진우량도 파양호전투에서 전사한다. 주원장은 이렇게 강적 하나를 없앨 수 있었다.

비록 "홍도보위전"과 "파양호전투"의 휘황한 전적으로 주문정이 명장의 반열에 들었지만, 이는 주문정의 야심을 팽창하게 만든다.

전쟁후 주원장은 주문장에게 적시에 상을 내려주지 않았고, 게다가 당시 주원장의 장남 주표가 이미 점점 성장하고 있어서, 주원장은 주표를 후계자로 확정했다. 이는 주문정의 심리상태를 뒤흔들었다. 그는 주원장이 자신에 대해 봉상을 내리는데 불공정하다고 여겨서 주원장에 불만을 품는다. 그리하여 점점 주원장의 적수인 장사성(張士誠)에게 투항할 생각을 품게 된다.

다행히 주원장은 민감하게 주문정의 심리변화를 눈치챘다. 그리하여 주원장은 직접 주문정을 붙잡아, 주문정에게 왜 팔이 안으로 굽지 않고 장사성에게 투항하려 하는지 물어본다. 그 자리에서 주문정은 주원장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다. 주원장이 봉상에 불공정하여 불만이 있다는 말을 하는데 어투가 아주 불손했다.

주원장은 매우 화를 내며, 심지어 주문정을 죽여버릴 생각까지 하게 된다. 다행히 처인 마씨가 곁에서 한 마디 거들었다: "이 아이는 그저 성격이 강한 것일 뿐이고, 하물며 조카는 이 아이 하나 뿐인데, 설마 그를 죽일 생각입니까?"

마씨가 말리고, 주원장이 형수 왕씨의 임종부탁을 떠올리자 마음이 약해진다. 그리하여 주원장은 주문정을 연금시키게 된다. 주문정은 연금당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1365년 우울증에 빠져 사망한다. 나이 겨우 30살이었다.

주문정이 사망할 때는 아직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립하기 전이다. 주문정은 죽은 후에 아들 하나를 남기는데 주철주(朱鐵柱)이다. 주원장은 명나라를 건립한 후, 자신이 주문정에게 너무 심하게 대했다고 여겨서, 조카손자 주철주를 황궁으로 불러 직접 가르치며, 좋은 스승의 가르침을 받게 한다. 그리고 주철주라는 이름을 주수겸(朱守謙)으로 고친다.

명나라를 건립한 후, 주원장은 즉시 주중사에 대해 추봉해준다. 그는 주중사의 이름을 주흥륭(朱興隆)으로 고치고, 남창왕(南昌王)에 추봉한다. 주문정은 제2대 남창왕으로 추봉된다. 주중사의 요절한 장남은 원래 이름이 없었는데, 주원장이 주성보(朱聖保)라는 이름을 지어주면서 산양왕(山陽王)이라는 작위를 추봉한다.

홍무3년(1370년), 나이 10살의 주수겸이 주원장에 의해 정강왕(靖江王)에 봉해지고, 그에게 종묘를 지어 주중사 부자 3명을 제사지내게 한다.

주수겸은 성년이 된 후 광서 계림의 봉지로 간다. 다만 주수겸은 주원장에게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고, 봉지내에서 백성들을 괴롭히고, 백성들의 논밭을 빼앗는다. 이 일을 주원장이 알게된 후에 화를 내며 주수겸의 작위를 박탈해버리고, 그를 고향 봉양으로 보내 농사를 짓게 만든다.

한동안의 시간이 지난 후, 주원장은 주수겸이 회개하였을 것이라고 여기고 다시 그를 정강왕에 책봉한다. 그리고 봉지를 운남 대리로 고친다. 그러나 주수겸은 여전히 횡포하게 백족을 탄압했고 결국 백족의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이번에는 주원장도 주수겸에게 철저히 실망한다. 그는 다시 주수겸의 봉작을 박탈하고, 주수겸의 종적을 삭제하며 봉양궁에 연금한다. 홍무25년(1392년) 주수겸은 연금당한 상태에서 우울증에 빠져 사망한다. 나이 겨우 32살이었다.

주수겸이 죽자, 다시 주원장은 마음이 약해진다. 그는 큰형 주중사 일맥의 후손이 황족신분을 잃지 않기를 바랬다. 그리하여 그는 주수겸의 아들 주찬의(朱贊儀)의 황족신분을 회복시켜주고, 다시 주찬의를 정강왕에 봉하고, 그로 하여금 종묘를 지어 주중사를 제사지내게 한다.

주찬의도 주원장이 황궁으로 데려와서 직접 가르친다. 성년이 된 후에 주찬의는 주원장을 실망시키지 않았고, 사람됨이 겸손하고 예의가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온화관후했다. 그리하여 주원장은 그를 다시 광서 계림으로 보낸다. 그는 계림에 도착한 후, 농민들을 잘 보살피고 가난한 백성들을 구휼해 주었다. 그렇게 하여 부친 주수겸의 명성을 만회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정강왕 일맥은 명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이어진다. 청나라 순치7년(1650년), 청군이 계림을 함락시미고, 마지막 정강왕 주형인(朱亨歅)은 청군에 의해 액살(縊殺)당한다. 이렇게 하여 정강왕 일맥은 단절된다. 정강왕일맥은 280여년간 이어졌으며, 중국역사상 전승기간이 가장 긴 왕작이다.

주중사의 딸도 주원장이 특별히 보살펴주었다. 명나라를 건립한 후, 주중사의 딸은 주원장이 황제의 조카딸은 군주(郡主)에 봉해지는 관례를 깨고 특별히 복성공주(福成公主)로 봉한 후, 주원장은 그녀를 자신의 딸과 동등한 대우를 받게 했다. 출가할 때도 딸을 시집보내는 것과 똑같이 한다. 주원장은 그녀를 복주위지휘사(福州衛指揮使) 왕극공(王克恭)에게 시집보내고 그녀는 죽을 때까지 공주의 대우를 받는다.

둘째형 주중육은 주흥성(朱興盛)으로 개명하다

당초 주오사부부와 주중사 세 식구가 연이어 사망한 후, 주중육과 주원장은 얼굴두껍게 돈을 빌려 부모와 형을 안장한다. 그후 주씨집안은 살아갈 수가 없어서, 주중육은 주원장과 논의한 후, 형제 둘이 계속 고향에 남아 있으면 모두 굶어죽을 수밖에 없으니, 각자 도망쳐서 기근을 피하자고 결정한다.

당시 주중육은 이미 결혼했고, 처인 당씨(唐氏)와의 사이에 아들 하나가 있었다. 이름은 주왕(朱旺)이다. 주중육은 처자식만 데리고 외지로 도망갔고, 주원장은 황각사(皇覺寺)로 가서 중이 된다.

주원장이 성공을 거둔 후에 그는 사람을 시켜 둘째형 주중육을 찾았다. 그러나 시종 찾을 수가 없었다. 명나라를 건립하고 난 후에 그는 여러번 사람을 보내 주중육을 찾았고, 결국 둘째형수 당씨를 찿아낼 수 있었다.

주원장은 그제서야 둘째형 주중육이 고향을 떠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염병으로 사망했고, 조카 주왕도 얼마 지나지 않아 굶어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저 당씨만 구차하게 삶을 이어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원장은 명을 내려 주중육을 주흥성으로 개명하고, 우이왕(盱眙王)에 추봉하고, 주왕은 소신왕(昭信王)에 봉한다.당씨는 우이왕비로 봉하여 보살펴주게 된다.

셋째형 주중칠은 주흥조(朱興祖)로 개명하다.

주씨집안은 일찌기 너무 가난하여, 끼니를 잇지 못하는 것도 다반사였다. 주원장의 셋째형 주중칠은 이런 상황하에서 이웃마을의 유씨(劉氏)집안에 데릴사위로 들어간다.

재난이 닥치가 당시 주중칠과 처 유씨는 결혼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고, 아직 자녀도 낳지 못했는데, 연이어 사망하고 만다. 이건 주원장도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주원장은 명나라를 건립한 후, 명을 내려 주중칠을 주흥조로 개명하고, 임회왕(臨淮王)에 추봉한다. 동시에 셋째형수 유씨는 임회왕비로 추봉한다.

세명의 친형을 제외하고 주원장에게는 4명의 당형이 있었다.

주원장의 가족으로는 친형을 제외하고, 백부(伯父) 주오일(朱五一)에게 4명의 아들이 있었다. 즉 그에게는 4명의 당형이 있는 것이다. 각각 주중일(朱重一), 주중이(朱重二), 주중삼(朱重三)과 주중오(朱重五)이다.

일찌기 명나라를 건립하기 전에, 주원장의 백부와 당형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다만 명나라를 건립한 후, 주원장은 백부와 네 명의 당형에 대해서도 추봉한다.

백부 주오일은 수춘왕(壽春王)에 봉하고, 백모 유씨를 수춘왕부인에 봉한다; 당형 주중일은 곽구왕(霍丘王)에 봉하고, 당형수 적씨(翟氏)를 곽구왕부인에 봉한다. 당질 주철가(朱鐵哥)는 보응왕(寶應王)에 봉한다; 당형 주중이는 하찰왕(下察王)에 봉한다; 당현 주중삼은 안풍왕(安豊王)에 봉하고, 당형수 조씨(趙氏)는 안풍왕부인에 봉한다. 당질 주전(朱轉)은 육안왕(六安王)에 봉하고, 당질 주기(朱記)는 내안왕(來安王)에 봉하며, 당질 주조(朱臊)는 도량왕(都梁王)에 봉하고, 당질 주윤(朱潤)은 영산왕(英山王)에 봉한다; 당형 주중오는 몽성왕(蒙城王)에 추봉한다.

주원장의 백부 일맥은 주중오의 처인 전씨(田氏)와 딸만이 건재했다. 전씨는 주원장이 성공했다는 소문을 듣자, 딸을 데리고 주원장을 찾아온다.

전씨는 사람됨이 선량하고 성격고 강하며 부도를 지켰기 때문에, 주원장은 이 당형수를 매우 존중한다. 그리고 주중오의 딸에 대하여도 자기 딸처럼 잘 대해준다.

주중오의 딸은 나중에 주원장이 경양공주(慶陽公主)로 봉하여 주원장의 친딸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게 한다. 당시 주원장은 그녀와 복성공주를 함께 공주에 책봉했는데, 예부관리가 황제의 조카딸은 공주에 봉해질 수 없고, 군주에 봉해야한다고 말하자 주원장은 그 예부관리를 질책했다. 자신의 가족은 사람이 얼마 없고, 두 조카딸은 어려서 부친을 잃었는데 숙부로서 마땅히 부친의 사랑을 그녀들에게 주어야 한다. 그래서 그는 특별히 복성공주와 경양공주에게 황녀와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나중에 경양공주는 천호(千戶) 황침(黃琛)에게 시집간다. 그리고 경양공주는 주원장의 자녀들과도 아주 친밀했다. 정난지역(靖難之役)때, 경양공주는 건문제 주윤문의 요청을 받아 주체의 군영으로 가서 담판한다. 그때 경양공주는 사람들 앞에서 당제 주체가 주원장의 뜻을 어기고 황위를 찬탈하려 한다고 욕하였고, 주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장면은 아주 난감해졌다.

나중에 주체가 등극한 후에도 그는 당저 경양공주에 원한을 품지 않고 오히려 그녀에게 예를 다했다. 영락2년(1402년), 경양공주가 사망하자, 주체는 아주 슬퍼하며, 그녀를 위해 하루 조회를 하지 않고 극히 융중하게 장례를 치러준다.

두명의 누나들에 대하여

주원장은 형들이나 당형에 대하여 잘 대해주면서 작위를 추봉해주었을 뿐아니라, 두 명의 누나들에 대하여도 잘 대해주었다. 그의 큰누나와 자형 왕칠일(王七一)은 모두 명나라가 건립되기 전에 사망했다. 주원장은 큰누나를 태원장공주(太原長公主)로 추봉하고, 왕칠일을 부마도위로 추봉한다. 두 사람에게는 자녀가 없었으므로 더 이상의 봉상은 없었다.

주원장의 둘째누나 주불녀(朱佛女)와 남편 이정(李貞)은 주원장과 가장 사이가 친밀했다. 주원장은 주불녀를 조국장공주(曹國長公主)로 봉한다. 명나라를 건립한 후에도 둘째자형 이정을 그는 부친을 대하듯이 모셨다. 이정을 조국공(曹國公)으로 봉하고, 이정의 앞에서 주원장은 한번도 스스로 황제를 칭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정에게 자신의 아명인 '중팔'로 불러달라고 한다. 이정에게 용포를 입게 하고, 이정이 죽은 후에는 이정을 농서왕(隴西王)에 봉한다.

주불녀와 이정의 아들 이문충(李文忠)은 주원장이 일대명장으로 기른다. 명나라개국떄, 이문충은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이정일맥의 작위는 명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지속된다.

이를 보면 주원장에게도 온정적인 일면이 있었다. 명나라를 건립한 후, 그는 형들과 누나들 및 그 후손들에 대해 아주 융중하게 봉상을 내린다. 아쉽게도 주원장의 형들과 누나들은 한명도 그가 건국할 때까지 살아있지 못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에 대한 봉상은 더욱 융중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