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섭영렬(葉英烈)
최근 필자는 상하이 교외지역으로 요문원의 묘를 찾아갔다.
그것은 보통의 묘들 사이에 있었고, 묘비에는 요문원의 이름이 없었으며, 단지 그의 처인 김영(金英)의 이름만 새겨져 있었다.
김영은 1996년 8월 19일 병사한다. 안장때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한다. 아무도 이 김영이 바로 요문원의 처인줄 몰랐다. 김영이 병사할 때, 요문원은 감옥에 있었다. 비록 형기만료로부터 1달 정도밖에 남지 않았었지만.
요문원은 1976년 10월 6일 체포되었다. 1981년, 그는 최고인민법원 특별법정에서 유기징역20년형을 받는다. 그러므로 형기만료일은 1996년 10월 6일이다.
관련기관의 동의를 받아 필자는 일찌기 상하이의 요문원의 집을 찾아가서 김영을 만난 적이 있다. 요문원이 체포된 후, 그의 처인 김영은 상하이로 돌아간다. 그녀는 더 이상 캉핑로(康平路) 중공상하이시위 기관숙사에서 살지 못하고, 상하이시 동남쪽 구석진 곳에 살고 있었다. 나는 주소를 가지고 아주 평범한 민가를 찾아냈는데, 그녀는 2층의 한칸에 살고 있었다.
여름의 한낮. 두시 반. 나는 방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준 것은 요문원의 셋째딸이었다. 그녀는 고등학생이었고, 등교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가 그녀의 모친을 만나러 왔다고 하자, 나를 데리고 자그마한 주방을 지나 침실로 걸어들어갔다. 주방에는 잘 익힌 게가 한 그릇 놓여 있었다.
김영은 낮참을 자고 막 일어난 참이었다. 뺨에는 침석(枕席) 자국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녀는 둘째딸, 셋째딸과 같이 살고 있었으며, 큰 딸은 이미 출가했었다. 그녀는 단발머리에, 얼굴색을 하얐고, 오른쪽 눈썹에 점이 하나 있었다. 소매가 짧의 커피색의 상의를 입고 있었다.
집은 두칸자리 였는데, 서재에는 책이 가득 쌓여 있었고, 침대위에는 죽석(竹席)이 깔려 있었으며 가구는 아주 간단했다. 나는 김영과 작은 바탁(方卓) 옆에 앉아서 얘기를 나누었다. 방탁위에는 그날자 상해 <문회보>가 놓여 있었다.
김영은 계속하여 탄식을 하면서 몇번 통곡할 뻔한다. 그녀의 손은 계속하여 방탁에 깔려 있는 유리판의 변을 만지고 있었다. 그녀는 일찌감치 원래의 직장에서 일을 하지 않고, 별볼일 없는 직장으로 옮겨야 했다. 그것도 이름만 걸어놓은 것이고, 출근은 하지 않고, 장기간 병가를 내고 집에 있었다.
그녀는 거의 외출하지 않았으며, 요문원의 판결이 내려진 후, 일찌기 허가를 받고 북경 진성감옥(秦城監獄)으로 면회를 가서 요문원을 면회하기도 했다. 김영의 기억으로, 1976년 10월 6일 저녁, 요문원이 북경에서 집을 떠날 때, 모자도 쓰지 못했었다. 김영이 모자를 들고 쫓아갔을 때 요문원은 이미 차를 타고 떠나버렸다.
김영은 1933년 4월 28일생이고 향년 63세였다. 그녀의 묘는 요문원이 감옥에서 나온 후인 1997년 7월에 만들어졌다. 위에는 "자모김영지묘(慈母金英之墓)"라고 쓰여 있고 아래에는 번체자로 "녀금홍여군계홍서호기은위규장손영정목춘빙초금성(女金虹麗群繼紅婿浩岐殷偉圭章孫潁婷沐春氷聰金星)" 말할 필요도 없이 사람의 눈을 가리기 위해, 딸들은 이름만 쓰고 성인 "요(姚)"는 표시하지 않았다.
묘비는 검은색 대리석인데, 정면에는 네개의 금으로 글자를 새겼다: "진리진정(眞理眞情)" 뒤에는 <접련화(蝶戀花)> 사(詞)를 새겨 놓았다. 비록 작자의 이름을 써놓지는 않았지만, 사의 내용으로 보아 요문원이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요송충혼회대지(遙送忠魂回大地)
진리진정(眞理眞情)
파아심도기(把我心濤寄)
비영유유일월리(碑影悠悠日月裏)
차생영계장상억(此生永繫長相憶)
벽초침침수적적(碧草沉沉水寂寂)
만만신산(漫漫辛酸)
수해기중의(誰解其中意)
불개초충상(不改初衷常)
역력년년(歷歷年年)
화작동심제(化作同心祭)
사의 내용을 보면, 요문원이 처의 묘비에 새기기 위해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묘비의 정면에 새긴 '진리진정'은 바로 이 사에 나오는 글이다.
요문원은 과거에 유사한 순구류(順口溜)식의 시를 쓴 적이 있다. 이 <접련화>는 그가 만년에 정성을 들여서 쓴 작품이다. 사에서연 '유유' '침침' '적적' '만만' '역력' '년년"이라는 여섯개의 첩어를 연이어 썼다. 사의 의미는 은회(隱晦)하다. '만만신산, 수해기중의'(끝없는 신산, 누가 그 의미를 알 것인가?) 그리고 화룡점정은 바로 '불개초충' '진리진정'이다. 이것은 그가 생명의 끝까지, 그가 스스로 인정하는 '진리'를 끝까지 지키고 '불개초충' (원래의 뜻을 바꾸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 아닌가?
묘지의 책임자는 필자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그들은 당시 이것이 요문원의 처의 묘라는 것을 몰랐다. 더더구나 요문원이 병사한 후, 이 묘에 합장되었을 줄은 몰랐다. 그들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요문원이 생전에 여러번 이 곳에 와서 처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것을.
1931년, 요문원은 작가의 집안에서 태어난다. 부친 요봉자(姚蓬子)는 시인이다. 소설도 쓴 적이 있다. 그리고 외국문학작품도 번역했다. 요봉자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적이 있다. 1930년, 중국좌익작가연맹이 상하이에서 성립될 때, 요봉자는 잡행위원이었다. 그는 일찌기 정령(丁玲)과 함께 좌련의 정기간행물 <북두(北斗)>를 창간한 바 있다.
1932년, 요봉자는 1살짜리 요문원을 안고 노신(魯迅)의 집을 방문한다. 노신은 <증봉자(贈蓬子)라는 시를 써서 준다. 이는 요문원이 나중에 자우 얘기하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렇게 어린 나이에 노신을 만났던 것이다.
그러나, 요문원을 가슴아프게 하는 일이 발생한다. 부친 요봉자가 1933년 9월 천진에서 체포된 것이다. 그리고, 1934년 5월 14일 국민당중앙기관지 <중앙일보>에 <요봉자의 공산당탈당선언>을 발표한다. "과거의 잘못을 참회한 나머지, 나는 완전히 과거의 정치적 입장을 포기하고, 중국공산당을 탈당한다. 이후 삼민주의의 기치하에 서기로 결심했다...." 이후 요봉자는 작가서옥을 열어 생활한다.
상해 호신중학(滬新中學) 지하당지부서기 손지상(孫志尙), 모금룡(冒金龍)이 필자에게 얘기해준 바에 따르면, 1948년 10월 요문원은 호신중학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당시 요문원은 부친 요봉자가 "진보작가"이며 "노신전우"라고 밝혔다.
해방후, 요문원은 먼저 공청단 상해시 노만구공위 선전부 부부장을 맡고, 나중에 중국 상해시 노만구당위 선전부 이론교육과 과장이 된다.
요문원에 있어서, 1957년 6월 14일은 역사적이 날이다. 이 날, <인민일보>는 제1면에 편집부의 글 <문회보 1시간내의 자산계급방향>에서 시작하자마자 이렇게 언급한다: "아래에 전재한 문장은 6월 10일 분회보에 실렸고, 제목은 '녹이비고(錄以備考)'이다..." <인민일보>는 동시에 <녹이비고-독보우감(讀報偶感)>이라는 글을 전재한다.
<녹이비고-독보우감>을 누가 썼을까? 바로 요문원이다. <인민일보> 편집부의 글 <문회보 1시간내의 자산계급방향>은 모택동의 글이다. 모택동은 요문원이 상해 <문회보>에 발표한 잡분을 주목했을 뿐아니라, 그 글을 바탕으로 문회보의 '자산계급방향'을 맹렬하게 비판한다. 이렇게 되자 청년작가 요문원의 명성은 전국에 떨쳐진다. 일약 상해작가협회 당조구성원이 되고, '반우파'영도소조'의 성원이 된다.
1957년 6월 14일부터 연말까지. 짧은 반년만에, 요문원은 50여편의 '반우파' 문장을 발표하는데 거의 3일에 1편꼴이다. 요문원은 '우파분자' 시칩존(施蟄存), 서무용(徐懋庸), 허걸(許傑), 유사하(流沙河), 왕몽(王蒙), 등우매(鄧友梅), 유소당(劉紹棠), 육문부(陸文夫), 서중옥(徐中玉)...등을 비판한다. 일시에 요문원은 '몽둥이(棍子)'라는 별명을 얻는다.
1958년이 되어 요문워는 '몽둥이'에서 '악곤(惡棍)'으로 변신한다. 이 27살짜리 '문단의 신인'은 비판의 날을 문단의 노장들에게 향한다. 파금(巴金)을 반박하고, 풍설봉(馮雪峰)을 비판하고, 애청(艾靑)과 싸우고, 정령(丁玲)을 욕한다....
요문원의 '몽둥이질'은 중공 상해시위 제1서기 가경시(柯慶施), 시위상위 장춘교(張春橋)의 주목을 받는다.
1963년초, 북경에서 온 '여자손님' 강청(江靑)이 조용히 남하한다. 강청은 상해를 기지로 하여, '현대경극'(나중의 양판희(樣板戱))을 만든다. 그리고 당시 가경시는 '대사십삼년(大寫十三年)'을 제기하여, 강청과 의기투합한다. 강청은 명확하게 가경시, 장춘교에게 '나는 '대사십삼년'을 지지한다. 내가 상해로 오니, 아주 친절하게 느껴진다. 상해의 분위기는 북경보다 훨씬 좋다. 나는 상해를 '기지'로 삼겠다" 장춘교는 가경시에 의해 파견되어 강청을 도와 '기지'를 만들고, <지취위호산(智取威虎山)을 잡고, <해항(海港)>을 잡는다.
요문원은 '대사십삼년'의 열열한 고취수(鼓吹手)가 된다. 1964년 3월, 그는 각각 <수확>과 <홍기>잡지에 두 편의 장문을 발표하여, 가경시, 장춘교의 의도를 관철한다: <최신의 가장 아름다운 생활을 반영하여, 최신의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창조하자 - 현대극의 약간문제에 관한 연구>, <혁명의 청년세대가 성장한다 - 화극 '젊은 세대'를 평하다>
'여자손님'은 상해의 이 '기지'에 아주 만족한다. 1965년 설날이 지나자마자 상해로 다시 온다. 이번에, 요문원은 장춘교를 찾아가서 중요한 '대비판' 문장을 완성한다. 그리고 장춘교는 그녀에게 요문원을 추천한다. 요문원은 자전거를 타고 상해 금강(錦江)호텔로 간다. 그리하여, 강청, 장춘교, 요문원은 이곳에서 여러번 비밀리에 토론하며 그 '중량급'의 <신편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한다>를 쓴다. 강청이 나중에 자랑한 것처럼, "장춘교동지, 요문원동지는 이 큰 리스크를 안고 비밀을 유지하며...."
1965년 11월 10일, <신편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하다>는 상해 문회보에 발표되어, 전국을 깜짝 놀라게 만든다. 이 글은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의 서막을 열게 된다. 이때부터 요문원은 '무산계급의 황금몽둥이(金棍子)'가 된다. 강청이 끌어주어 '중앙문혁소조'에 들어갈 수 있었다.
요문원은 연이어 장문을 발표한다. <'삼가촌'을 평한다 - 연산야화, 삼가촌찰기의 반도본질>에서 북경시위서기 등탁(鄧拓)을 비판한다; <반혁명양면파 주양(周揚)을 평하다>에서 중공중앙 선전부 부부장 주양을 비판한다; <도주(陶鑄)의 두권의 책을 평하다>에서 중공중앙 정치국 상임위원 도주를 비판한다; <신편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하다>와 합쳐서 이 "4평(四評)'은 요문원이 고위층에 진입하는 반석이 되는 작품들이다. 요문원은 상해혁명위원회 부주임이 된다. 주임은 장춘교이다. 1969년 4월, 중국공산당제9기 1중전회에서 요문원은 중공중앙정치국 위원이 된다.
1970년 8월, 진백달(陳伯達)이 여산회의에서 쫓겨난 후, 요문원은 그의 자리를 맡아 전국의 '여론총관'이 된다.
1973년, 왕홍문(王洪文)이 중공중앙 부주석에 당선되면서, 왕홍문, 장춘교, 강청, 요문원은 중공중앙정치국내에서 '사인방'을 결성하게 된다. '사인방'은 '사결합(四結合)'을 실행한다; 강청의 '기자(旗子)', 왕홍문의 '위자(位子)', 장춘교의 '점자(點子)', 요문원의 '필간자(筆杆子)'. 그들은 정치국내에서 주은래에 반대하고, 등소평에 반대하며, 일찌기 대권을 잡으면, 다음과 같이 업무를 나누기로 기획한다; 강청은 중공중앙주석, 장춘교는 국무원총리, 왕홍문은 전인대위원장, 요문원은 전국정협주석.
1976년 10월 6일, '십월혁명'이 발발하여 '사인방'은 감옥에 들어간다.
사인방중 처음 세상을 떠난 사람은 강청이다. 그녀는 1991년 5월 14일 새벽 자살한다. 향년 77세이다. 이어서 왕홍문이 1992년 8월 3일 간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향년 58세이다. 장춘교는 2005년 4월 21일 암으로 병사한다. 향년 88세이다. 그는 사인방중 가장 장수한 인물이다.
요문원은 사인방 중에서 가장 늦게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장춘교가 병사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2005년 12월 23일, 요문원도 당뇨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향년 74세였다.
요문원이 사망하였다는 소식은 그가 병사한 후 반달이 지나서 신화사에 의해 공개된다. 2006년 1월 6일, 신화사는 간단하게 요문원의 죽음을 보도한다.
"임표, 강청반혁명집단사건의 주범 요문원이 당뇨병을 알아서, 2005년 12월 23일 병사해다. 요문원, 남, 74세. 1981년 최고인민법원 특별법정에서 유기징역20년, 정치권리박탈5년형을 선고받음. 1996년 10월 형기만료로 석방됨"
홍콩매체는 이렇게 보도한다:
"신화사의 이 소식은 요문원의 유일한 공식 부고이다. 그러나 홍콩 대만의 신문잡지와 외국매체에서는 여러번 보도했다. 일찌기 '사인방'의 구성원에 관한 전기를 하나하나 쓰고 있던 모 상해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신화사의 소식이 나온 후, 미국의 <로스앤젤레스타임즈>등 7,8개 매체에서 모두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국내매체로부터의 인터뷰전화는 하나도 받지 않았다." 그는 공식 부고의 발표는 특별히 금요일 오후시간을 선택해서 내보냈다. 왜냐하면 그후로 이틀간 휴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국내외매체의 주목을 끌지 않으려 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 글에서 '일찌기 '사인방의 구성원에 관한 전기를 하나하나 쓰고 있던 모 상해작가'는 바로 본인을 가리킨다.
요문원의 죽음은 '사인방'의 흥망에 마침표를 찍었다. 사인방은 모두 죽었다. 그러나 '사인방'이 중국인민에게 초래한 심중한 재난은 영원히 반성해야 한ㄴ다. '문혁'의 심각한 교훈은 영원히 기록되어야 한다.
2009년 2월 25일 상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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