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암(貞巖)
중국의 고위관료가 죽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큰 반응이 나타나는 경우는 드물다. 한편으로, 중국정부는 높은 격으로 장례식을 거행하고, 다른 한편으로 수백의 민중이 북경에 모여서 고별행사를 벌인다. 일부는 손으로 쓴 표어를 들고 리루이에게 경의를 표했고, 혹은 그가 사상이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전체 고별과정에서, 경찰과 관리들은 엄밀하게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을 감시했고, 외국기자가 전체 오전동안 애도하러 온 사람들과 얘기하는 것을 막았다. 리루이가 서거한지 이미 10여일이 지났는데, 그 영향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아마도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胡耀邦)이 서거했을 때 일어난 장면이 중국정부의 고위층에게 너무나 깊은 인상을 남겼기 때문일 것이다.
해외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백세노인 리루이가 병석에 누워 있을 때, 북경의원은 모든 조치를 취하여 리루이를 구하고자 했다. 그것은 바로 북경 고위층이 리루이가 미중협상과 양회전에 사망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혼미상태로라도 6.4사태 30주년은 넘기길 바랬다. 확실히 혼란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리루이는 중국체제내에서 너무나 영향이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리루이는 모택동의 겸직비서를 지낸 바 있다. 그는 직언하는 것으로 유명했고, 그래서 모택동에게 중용되었다. 그리고 직언하는 것때문에 모택동이 버린다. 리루이는 근년들어 체제내의 자유파인물로 칭해졌다.
2006년, 리루이는 당시 중국공산당 총서기인 후진타오에게 서신을 보냈다. 중국정부가 이당대법(以黨代法) 즉 당이 법을 대신하는 것을 정지하여 다시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2007년 중국공산당 17대를 개최하기 전에, 리루이는 <염황춘추>에 글을 발표하여, 중국공산당이 만일 민주를 시행하지 않으면, 위기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말들은 중국공산당체제내에서는 일부 사람들이 동의하기는 하지만, 감히 말하지는 못하는 것들이다.
리루이는 이렇게 회고했다: 당초 모택동이 가장 좋아했던 사람은 고강, 임표와 등소평이었다. 일찌기 고강을 후계자로 생각했었다. 고강은 능력이 있다. '녹립호걸'에 속한다. 그래서 모택동이 높이 평가했다. 리루이는 고강의 정치비서를 지낸 바 있다. 고강은 바둑두는 것을 좋아했는데, 저녁에 나와 바둑을 두면 전화도 받지 않았다고 말한 바 있다. 이를 보면 고강과 리루이는 아주 밀접한 관계였다. 리루이는 이렇게 분석했다. 모택동은 위신이 비교적 높았던 고강이 그에게 위협이 될 것을 우려한 것같다고. 그래서 고강을 타도한 것이라고. 리루이는 이 점을 분명하게 보았다. 리루이의 딸인 리난양(李南央)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부친이 유감스럽고, 나도 슬픔을 느낀다. 그는 나에게 여러번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여러 사람에게 말한 바 있다. AB(안티 볼세비키)단때 공산당은 자기 사람을 10만명이나 죽였다고"
그렇다. 모택동의 이 친밀한 전우도 타도하라고 하자 타도되었고, 그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군단도 죽이라고 말하자 죽였다. 누가 위기를 느끼지 않겠는가?
기실 리루이는 계속하여 직언을 했다. 1958년초, 리루이는 수전부부장조리 겸 수전건설총국 국장으로 있었는데, 일찌기 모택동에게 삼협공정이 불러올 문제를 진술한다. 그리하여 모택동의 인정을 받았다. 당시 모는 이렇게 지시한다: "우리는 이런 수재가 필요하다" 이렇게 하여 리루이는 모택동의 지낭이 된다. 1959년, 여산회의가 개최되고, 팽덕회등 직언하는 사람들(리루이 포함)은 실질이 없이 말만 많은 모택동이 주도하는 '대약진'에 반대한다. 리루이는 이로 인하여 당적을 박탈당한다. 문혁기간동안 진성감옥에 8년간 갇혀 있기도 했다. 1979년에 이르러 리루이는 명예회복된다. 그리고 전력공업부 부부장을 지낸다. 1982년초, 65세의 리루이는 수전부에서 은퇴한다. 원래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후야오방과 천윈(陳雲)이 그를 중시하여 중궁 중앙주족부 부부장을 지낸다.
후야오방 서거 20주년인 2009년, 리루이는 <노예(奴隸)는 되지 않겠다. 노재(奴才)는 더더욱 되지 않겠다>는 글을 발표한다. 그 글에서 그는 중국공산당의 여러 원로들에 대한 견해와 중국고위층간의 정치적 다툼을 털어놓는다. 리루이는 모택동의 독재폭정을 비판했을 뿐아니라, 더더욱 등소평의 눈하나 깜작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데서는 청출어람이라고 비판한다. 리루이는 이렇게 말했다: "나중에 후계자가 된 등소평은 기실 반쯤 모택동이다. 1989년 '6.4'풍파에 군대를 출동시켜 학생운동을 진압했다. 이런 것은 모택동이 살아있을 때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그러나 등소평은 했다." 리루이는 이렇게 회고한다; "등소평은 리펑과 리시밍(李錫銘)의 '학생동란'이라는 거짓보고를 믿었고, 군사계엄을 실행하고자 했다. 쑤커(蕭克), 장아이핑(張愛萍)등 7명의 상장이 연명으로 글을 올려서 무력진압에 반대했지만, 그는 전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귀국하여 추도회에 참가하는 것을 거절한 리루이의 딸 리난양은 21일 자유아시아방송에 이렇게 말한다. 부친은 중국공산당의 건설과정에서의 피비린내나는 역사를 목격했다. 6.4때 리루이는 북경 장안가의 무시디(木樨地)에 살고 있었다. 그들은 베란다에서 탱크와 기관총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거기에서 밤을 새우며 보았다. 이를 보면, 6.4사건은 이 중공의 '노혁명가'의 양심을 뒤흔들었던 것같다.
오늘, 중국정부는 모택동과 등소평에 대한 비판을 금지한다. 이는 중국정부가 직언하는 사람들을 억제하는 일관된 방식이다. 리루이는 살아있을 때 감히 직언했을 뿐아니라, 세상ㅇ르 떠난 후에도 그의 발언권을 발휘하고 있다. 그의 딸 리난양은 이렇게 말한다. 리루이는 자신의 많은 자료(중국공산당에서 일하는 수십년간 쓴 필기와 서신, 그리고 그가 80여년간 기록한 일기를 포함함)를 스탠포드대학의 후버연구소에 기증하였고, 거기의 학자들이 이들 자료를 연구할 것이다. 리난양을 지적한다. 리루이는 중국에서 생활할 때 모든 면에서 제한을 받았다. 이는 펑이다이(馮亦代)같은 친구를 집에 보내어 스파이로 삼은 것뿐아니라, 친척들의 손을 빌어서도 통제했다.
리난양은 이렇게 말한다: "리루이는 우리가 반드시 모택동의 문제를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지 않으면 해악이 무궁무진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현재 과연 그렇게 되었다." 중국정부가 분명히 하지 않으려는 일은 너무나 많다. 통치에 불리한 것은 그들은 모조리 명확하게 하지 않는다.
그렇다. 중국정부의 의도는 바로 사람들이 역사의 진상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흐리멍텅한 가운데 인민들이 순종하여 중국공산당을 따르도록 하는 것이다. 중국정부는 민중이 노예와 노재로 만들려고 할 뿐아니라, 그들이 수시로 잡아먹을 수 있는 양으로 삼고자 한다.
웨이징성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만일 89년때의 백성을 얘기한다면, 아직 자신의 목표를 명확하게 알지 못했다. 민주운동에 그다지 역량을 보태지 못했다. 그러나 현재의 인민은 이미 명확하게 민주자유의 목표를 인식하고 있다."
왕쥔타오는 트위터에 이런 글을 올렸다: "중국공산당폭정을 무너뜨리고, 나의 조국을 해방시키는 것은 나의 사명이다. 나는 그들의 권리를 존중한다. 그러나 어떠한 것도 내가 자신의 천부인권을 행사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1989년의 감금박해로도 못했고, 오늘날의 침튀기며 욕하는 것으로는 더더욱 못할 것이다."
중국의 법관 출신인 리젠펑(李建峰)은 이렇게 말한다. 학생들에게 칼과 총을 들이댄 죄악을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런 불의를 수시로 견책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것은 양심을 배반하는 것이다.
기실, 한 사람이 감히 자신의 양심을 견지하고, 권세에 겁먹지 않고 폐해에 대하여 직언하는 것은 고귀한 일이다. 특히 중국체제내의 인물이라면 더더욱 드물다. 리루이는 더 많은 것을 하지는 않았고, 그저 몇 마디 진심을 얘기했다. 그래서 민중의 지지와 존경을 얻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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