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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후)

장경국(蔣經國)은 어떻게 장개석(蔣介石)의 후계자로 확정되었는가?

by 중은우시 2018. 12. 18.

글: 삼창(森彰)


역사의 철칙에 따르면, 어떤 독재정권도 권력자가 병사한 후, 권력승계문제를 놓고 반드시 투쟁이 벌어지게 되어 있다. 이런 상황은 장개석이 병사한 후에도 여전히 존재했다. 대만으로 간 후에 장경국의 장개석의 지지하에 신속히 정보조직을 장악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시작이었다. 장개석은 장경국의 후계문제를 위하여 고심을 거듭했다.


당시에 "장가천하진가당(蔣家天下陳家黨)"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장개석은 먼저 진과부(陳果夫), 진입부(陳立夫)형제의 세력을 일망타진한다. 1950년, 진과부는 이미 병이 심하여 정치적으로 폐인이나 다름이 없었다. 진입부는 특무기구의 진정한 장문인이었다. 장경국이 하루빨리 정보조직을 장악하게 하기 위하여, 그리고 진입부와 진성(陳誠)의 불화로, 장개석은 진입부를 스위스로 보내 세계도덕중조회에 참가하게 함으로써, 진입부와 그의 가족이 잠시 대만을 떠나도록 한다. 회의가 끝난 후, 진입부의 일가는 미국으로 가서 정착한다.


다른 한편으로, 장개석은 아들 장경국을 위하여 권력기초를 닦아주고, 그에게 승계시키기 위한 준비를 했다.


1949년, 국민당이 대만으로 물러난 후, 장경국은 국민당 대만성당부(黨部) 주임위원이 된다. 동시에 총재판공실 자료조장, 총통부 자료실주임이 된다. 1950년 3월, 국방부 총정치부주임을 겸임하고, 같은 해, 국민당 중앙개조위원회 위원, 간부훈련위원회 위원이 된다. 1952년 국민당 제7기중앙위원, 중앙상무위원에 선임된다. 얼마후에는 중국청년반공구국단 주임을 겸임한다. 1954년 국방회의 부비서장이 된다. 1956년 대만행정원 '국군퇴제역관병보도위원회(퇴보회)의 주임위원이 된다. 1957년 10월 국민당 제8기 중앙위원, 중앙상무위원에 당선된다.


비록 장개석이 그를 배양하려는 마음은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장경식의 후계자의 길이 그다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진성(陳誠)등 구신(舊臣)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송미령친척들과도 파벌갈등이 있었다. 그리하여 장경국은 앞뒤로 적을 맞아야 했다. 게다가 장경국은 민족적인 색채의 정치운동을 좋아하는데, 송미령은 미국식 스타일과 맞지 않아서 마찰이 계속되었다.


1957년 5월, 대만주둔미군이 대만군 소교(少校, 소령) 유자연(劉自然)을 총살하는 일로 인하여 대만에는 반미시위가 대규모로 일어난다. 장경국은 미국측에 의해 막후조종자로 지목된다. 장개석은 미국과의 관계를 완화시키기 위하여 장경국을 잠시 정보계통에서 물러나게 한다. 그리하여 퇴보회 주임을 다시 맡는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장경국이 비록 권력중심에서 벗어나지만, 퇴역장병을 이끌고 중횡공로(中橫公路)를 완공함으로써 이들 노병의 지지를 받는다. 그리고 바닥에서 열심히 일하는 이미지를 보여주어 장경국시대의 견실한 기초까지 쌓는다.


비록 잠시 정치권력중심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장개석이 장경국을 배양하는 조치는 중단되지 않는다.


장경국은 1958년 7월 행정원 정무위원이 되고, 1963년 11월 국민당 제9기 주앙위원, 중앙상무위원에 당선된다. 12월에는 국방부 부부장이 된다. 1965년 1월 13일에는 국방부 부장이 된다. 1967년에는 '국가안전회의 국가총동원위원회' 주임위원이 된다. 국가안전회의는 장개석이 이끄는 '태상내각(太上內閣)'이라고 불리웠고, 그 권력은 '내각(內閣)'보다 위에 있었다.


1969년, 장경국은 국민당 제10기 중앙위원, 중앙상무위원에 당선되었을 뿐아니라, 동시에 그를 지지하는 곡정강(谷正綱), 황소곡(黃少谷), 황걸(黃傑), 원수겸(袁守謙)이 모두 국민당의 권력핵심인 중앙상무위원에 들어간다; 장경국의 심복인 이환(李煥), 왕승(王昇)등도 중앙위원회에 들어간다.


1969년 6월, 행정원 국부(局部)를 개조하여, 장경국이 부원장(副院長)을 맡는다. 비록 행정원장직은 여전히 엄가감(嚴家淦)이 맡지만, 장개석의 심복이자 장개석의 뜻을 잘 헤아려셔, 행정원의 사무에 대하여 간여하지 않아, 실권은 장경국이 장악한다. 이제 장경국의 후계구도는 이미 완전히 분명해 졌다.


그후 몇년은 장경국이 권력을 공고히 하는 기간이다. 각종 인사조정을 통하여 장경국의 심복이 각각 당과 정부의 요칙을 차지한다. 1972년 2월 20일, 제1기 국민대회 제5차회의가 소집되고, 1,183명의 국민대회대표가 연명으로 장개석에게 장경국을 행정원장에 임명해달라고 요청한다. 5월 26일, 장경국은 역대이래 최고득표자로 순조롭게 행정원장에 당선된다. 그후 대만은 실질적으로 장경국시대에 접어들었다.


1975년, 장개석이 병사한다. 비록 장개석의 날개가 날로 풍만해졌지만, 국민당 원로중에는 장경국에 불복하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장경국은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를 택한다. 부친이 병으로 서거한 다음 날 새벽 국민당 중앙상무위원회에 '사직서'를 제출한다. 중앙상무위원회는 과연 위류(慰留)를 결정하고, 동시에 상가(喪假) 1개월을 준다.


그후, 장개석은 부친의 명망을 가지고 원로들을 억누른다. 장경국은 먼저 부친의 지위를 이용하여, '지효감인(至孝感人)'의 모습을 보인다. 한편으로, '비애궤곡(悲哀跪哭), 혼미불성(昏迷不省)'하며, 다른 한편으로 병든 몸으로 영당에서 밤을 샌다. 신문과 잡지에서는 '장궤치애(長跪致哀)'의 사진이 실리고, ''구충신어효자지문(求忠臣於孝子之門)'이라는 말을 실으며, 이렇게 추론한다: "장원장이 효도를 다하므로, 그가 이끄는 정부는 분명히 크게 일하는 정부가 될 것이다." 동시에 그는 민심을 쟁취하기 위하여, 매일 아침에 중산기념관으로 가서 부친을 조문하는 백성들에게 감사인사를 했다. 그리고, 군대를 책동하여 그에게 충성맹세를 하게 한다. 국방부장 고괴원(高魁元), 총참모장 송장지(宋長志)는 모두 장경국의 심복이다. 장개석이 병사한 후, 고, 송 두 사람은 명확하게 장경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다. 동시에 정보기구와 협력하여, 엄밀하게 사회동태를 주시한다.


그러나, 장경국이 이런 여러가지 안배를 한 후에도, 총재경선은 여전히 타이페이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당시 국민당에는 또 다른 두 파가 있었다. 한 파는 엄가감을 보좌에 앉혀야 한다는 파이고, 다른 한 파는 송미령을 옹호했다. 그리고 송미령도 국민당 총재에 아주 관심이 많았다. 대계(大溪)에서 상을 치르고 있던 장경국은 형세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28일째 되는 날 심야에 비밀리에 타이페이로 돌아온다. 다음 날 개최된 국민당 중앙상무위원회 회의에서, 송미령은 평의위원이어서 상무위원회의에 출석하지 못했다. 송미령이 모르는 상황하에서, 엄가감이 장경국을 국민당중앙주석으로 지명하고, 기립방식으로 표결한다. 장경국은 순조롭게 국민당주석에 당선된다. 국민당은 '총재일장(總裁一章)은 정관에 남겨두어 장개석 총통을 기념하기로 결정하고 이후 국민당에서 총재제를 폐지하기로 선언한다. 이렇게 타이페이에서의 28일에 걸친 총재쟁탈전은 끝이 난다. 이제 장경국은 당, 정, 군 대권을 장악하여 최고통치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