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왕우군(王友群)
1968년 12월 19일 심야, 북풍은 사납게 불고, 차가움은 뼈를 찔렀다. 일찌기 중공에서 "저명한 마르크스주의역사학자"라고 불렸던 전백찬은 처 대숙완(戴淑婉)과 옷을 정갈하게 갈아입고 나란히 자신들의 침대에 누워 수면제를 다량 복용하여 자살했다.
다음 날, 사람들은 전백찬이 윗옷 오른쪽 주머니에서 종이조각을 발견한다. 그 위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 "나는 실로 말할 수 없다. 이런 막다른 길로 가게 되었다. 내가 이 막다른 길로 간 것을 두사부(杜師傅)는 전혀 모른다." 두사부는 전백찬 부부의 감시감독을 책임지고 있던 은퇴노동자이다. 그리고 전백찬의 윗옷 왼쪽 주머니에서는 또 다른 종이조각이 발견되는데, 거기에는 "모주석만세. 모주석만세. 모주석만세"라고 쓰여져 있었다.
전백찬이 말할 수 없다고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문혁'때 모택동이 타도하려던 최중량급인물인 전 중국국가주석 유소기(劉少奇)를ㄹ '반도(叛徒)'로 만들 수 있는 자료였다.
1968년 10월 하순부터, 주은래(周恩來)가 조장을 맡은 "유소기,왕광미(王光美)전안조(專案組)"의 부조장 무중(巫中)은 전백찬집안의 단골손님이 된다.
처음 만났을 때, 무중은 전백찬에게 위세를 보인다: "전백찬, 잘 들어라. 유소기의 죄행은 이미 조사가 끝났다. 중앙은 이미 결정을 내렸다. 그는 반도, 내간(內奸), 공적(工賊, 노동자의 적)이다. 즉시 '9대'에서 선포될 것이다. 너는 모주석 혁명노선에 서 있느냐, 아니면 유소기의 측에 서 있느냐. 지금은 네가 행동으로 보여줄 때이다."
무중은 1935년 유소기가 '반도'로 되었을 때의 관련내용을 얘기한다. 그리고 전백찬이 그 내막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너는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만 하면 된다. 서명만 하면 너에게는 아무 일이 없을 것이다." 전백찬은 서서 멍해지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무중은 말한다: "좋다. 잘 생각해봐라. 이것은 너에게 하나의 기회이다. 기다리고 있겠다."
3일이 지난 후, 무중은 다시 찾아온다. 전백찬이 역시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자. 벌컥 화를 낸다. 전백찬의 코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지른다: "네가 확실히 말하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 두 세시간을 소리치다가 분을 참지 못하고 떠난다. 그리고 이런 말을 남긴다: "나는 또 올 것이다. 네가 확실히 말하지 않으면 나는 절대로 너를 그냥 놔두지 않을 것이다."
그후, 무중은 이삼일에 한번씩 찾아온다. 매번 3,4시간을 심문한다. 점점 더 심하게 대하고, 심지어 직접적으로 협박하기까지 했다: "전백찬, 우리는 일찌감치 너와 그의 관계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이 문제를 네가 털어놓지 않으면, 우리는 너를 바로 체포해서 감옥에 넣을 수 있다. 차량도 바깥에 대기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문혁을 회고하는 글에서, 무중이 이 말을 하면서 권총을 전백찬이 머리에 겨누고 있었다고 말한다.
이런 심문이 2개월간 지속되었다. 전백찬은 심신이 지쳤고, 부부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밤에 잠도 이루지 못한다. 제2차 '사학혁명(史學革命)'을 연상했다. 특히 문혁이래 받았던 무수한 비투(批鬪), 육체적인 고통, 인격적인 능욕을 떠올렸다. 평생 마르크스주의를 독실하게 믿었던 전백찬은 실로 아무런 출로나 희망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죽음으로 끝내는 것 외에는
전백찬도 다른 사람을 숙청한 바 있다.
전백찬은 1898년 호남(湖南) 도원현(桃源縣)의 한 위구르족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6년, 북경법정전문학교(北京法政專門學校)에 입학하여 공부한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국립 무창상업전문학교(武昌商業專門學校)로 전학간다. 1924년, 미국 캘리포니아대학으로 가서 경제를 전공한다. 귀국후에는 사학(史學)과 역사철학(歷史哲學)을 연구했다.
전백찬은 곽말약(郭沫若), 여진우(呂振羽), 후외려(侯外廬), 범문란(范文瀾)과 함께 1919년 '5.4운동'이래 중국사학계에서 "마르크스레닌오로(馬列五老)"라 불린다.
1952년 중국대륙의 대학교조정때 전백찬은 북경대학으로 가서, 1급교수가 되고, 역사학과 주임이 된다. 16년동안 재직하면서, 북경대학 부교장으로 6년간 있었다. 또한 중국과학원 철학사회과학부 학부위원도 맡았다.
1963년전까지, 모택동이 일으킨 몇 번의 정치운동때, 전백찬은 항상 모택동을 따랐다. 장동손(張東蓀)을 비판하고, 호풍(胡風)을 비판하고, 뇌해종(雷海宗), 향달(向達), 영맹원(榮孟源)등을 비판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을 숙청하는데 가담한 것이다.
예를 들어, 1952년, 전백찬은 연경대학 철학과 주임 장동손을 비판하는데 참가한다. 당시, 장동손은 중공이 소련에 '일변도'한 것으 반대했다. 미국과의 관계를 발전시켜야한다고 생각한다. 전백찬은 이렇게 비판했다: 장동손의 사상은 '일관된 반소, 반공, 반인민, 반마르크스주의이다" 전백찬은 또한 예를 들어 말했다. 장동손은 일찌기, "자본주의는 멸망하지 않는다. 공산주의는 실현될 수 없다. 만일 실현되면 노동자들은 모두 굶어죽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를 학설로 하는 것은 인류의 엄청난 수치이다. 사상사의 대오점이다." "프롤레타리아독재는 비민주적이다. 결과는 반드시 소수인의 독재가 될 것이고, 절대로 프롤레타이라독재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외에 전백찬은 또한 장동손이 사적으로 "해방 3년동안 자유가 없다고 여긴다"고 말했다는 것도 꺼낸다.
또한 1957년 반우운동때, 전백찬은 <우파의 역사학 방면에서 반사회주의적 활동>이라는 장편의 글을 쓴 바 있다. 저명한 역사학자 뇌해종, 향달, 영맹원등을 비판한다. "지금까지 서로 다른 정도로 마르크스주의를 거부하고, 공산당의 영도에 반대했고, 사회주의에 반대했다." "구사학이 소속된 계급이익과 가장 악독한 적의를 가지고, 마르크스주의사학에 미친 듯한 공개적인 공격을 했다." 목적은 "자본주의복벽을 위해 길을 닦기 위함이다."
전백찬은 문혁때 비투를 받는다.
다만, 어쨌든 전백찬은 중국전통문화의 훈도를 받았고, 미국에 유학한 바 있다. 역사연구과정에서, 어느 정도 중국전통문인의 것이 남아 있었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한다. 전체인류사회의 역사는 바로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전백찬은 역사상의 모든 것을 계급투쟁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이 점은 '정상인'의 사고로 겨우 남아있는 점이었는데, 결국 그에게는 멸정지재(滅頂之災)가 된다.
1959년, 모택동이 대약진운동을 일으켜, 영국을 따라잡고, 미국을 추월하려고 했다. 그 결과 3600만명이 굶어죽는다. 1962년, 중국은 아직 대약진의 악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모택동은 다시 '계급투쟁은 반드시 매년 해야 하고, 매달 해야 하고, 매일 해야한다"고 말한다. 1963년, '절대로 계급투쟁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광기속에서 모택동은 젊은 '붓쟁이' 관봉(關鋒), 척본우(戚本禹)를 높이 평가한다. 각각 <역사연구에서 계급관념과 역사주의를 운용하는 문제>와 <이수성자술을 평한다>를 쓴다. 그리고 이름을 직접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전백찬의 사학관을 비판하고, 소위 제2차 '사학혁명'을 일으킨다.
이때부터 '계급투쟁'이 모든 것을 뒤덮고, 모든 것을 해석하는 경향이 날로 심해진다. 중국 수천년의 정통역사는 모조리 부정되고, 농민반란은 추앙받고, 사회의 공론이 된다. 고대의 정치가, 사상가, 군사가, 심지어 과학자, 문학가들까지도 모조리 '통치계급의 대변인'으로 취급된다. 즉 '봉건왕조의 어용도구'로 규정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남는 것은 반란의 기치를 내걸고, 산으로 올라가서 비적이 되었던 사람들만이 영웅호한으로 불린다. 그후 전국적으로 '조상의 묘파내기'운동을 진행한다. 5천년의 전통문화는 전면 부정되고, 문화재는 모조리 파괴된다.
많은 대학에서 역사전공이 없어지고, 일부 사범대학의 역사학과는 다른 과에 편입된다. 종합대학에서 다행히 살아남은 역사학과의 학생들이 배우는 것은 겨우 남은 두 개의 "사사(四史)"였다: 즉, 중동당사, 국제공산주의운동사, 농민전쟁사, 제국주의중국침략사; (빈하중농)의 가사(家史), (인민공사)의 사사(社史), 촌사(村史)와 창사(廠史).
이에 대하여 전백찬은 아주 상심했고, 힘들어했고, 분노했다. 한번은 친구들과의 대화때 이런 말을 한다: "무슨 역사를 배우고, 무슨 역사학과에 시험치는가. 현재의 역사학과 학생은 문장을 끊을 줄도 모른다. 교육이 엉망진창이 되었고, 사학은 엉망진창이 되었고, 사회는 더욱 엉망진창이 되었다."
1965년 12월, 중공중앙은 <홍기> 잡지에 척본우가 쓴 <혁명을 위해 역사를 연구한다>는 글을 발표한다. 다시 한번 전백찬의 역사관에 대해 비판한 것이다. 12월 21일, 모택동은 이런 말을 한다: "척본우의 글은 아주 좋다. 나는 세번을 읽었다. 결점은 이름을 직접 거론하지 않은 것이다." 같은 달, <홍기> 잡지는 다시 척본우등의 글을 발표하는데, 전백찬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며 비판한다.
1966년 5월 16일 문혁이 발발한 후, 북경대학 역사학과에서 가장 먼저 비투를 받은 사람이 바로 전백찬이다. 죄명은 '흑방분자'에 '반동권위'라는 것이다. 나이가 거의 일흔에 이른 여러 질병을 앓고 있던 전백찬은 6,7,8 석달동안 100여번의 비투를 당한다. 자주 주먹으로 맞고 발길질을 당했다. 한번은 화장실에서 끌려 나왔고, 누군가 쓰레기통을 그의 머리에 씌웠다. 1967년이 만인비투전백찬대회에서 침대에서 일어나기 힘들었던 전백찬은 수레에 실려 현장으로 끌려간다.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세워놓은 벤치를 두 손으로 붙잡고 있어야 했다. 그것도 몇시간동안이나.
1966년 8월 26일, 북경대학 보위조의 <상황보고>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8월 23일) 일부 홍위병이 전백찬을 끌고와서 4번 비투했다. 어떤 사람은 머리카락을 뽑았고, 어떤 사람은 목을 졸랐다." "전백찬의 처에 따르면, 전백찬의 심장병이 다시 심해졌다. 현재는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한다. 이틀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학생들이 자주 바끙로 그를 끌고가서 아마 오래 살기 힘들 것같다고 말했다."
1968년 10월 13일, 중공 8기 12중전회에서 모택동은 이렇게 말한다: "전백찬, 풍우란(馮友蘭)은 독을 뿌렸다. 우리는 그들을 비판해야 한다.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또한 첫째는 비판하고 둘째는 보장해야 한다. 그들에게 먹을 것을 보장하고, 그들이 공농병에게 재교육을 받도록 해야 한다." 모택동은 전백찬, 풍우란을 전국 지식분자의 '반면교사'로 삼으려 했다. 그후 전백찬 부부는 갇혀 있던 소흑옥(小黑屋)에서 북대 연남원(燕南園) 64호로 되돌아온다. 2달 후 전백찬 부부는 자살했다.
전백찬 사망의 수수께끼
전백찬은 유소기 '반도'사건과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을까? 전백찬은 확실히 몰랐다. 중앙전안조의 부조장 무중이 얘기한 것은 1935년 국민당 고위층과 중공 고위층이 비밀리에 연락한 것을 가리킨다. 당시 전백찬은 공산당원이 아니었다. 국민당정부 사법원의 부원장 담진(覃振)의 비서였다. 이 일에서 그는 확실히 연락인중 한 명이다. 다만, 국공쌍방의 고위층이 누구인지, 무엇을 얘기했는지, 어떻게 얘기했는지는 그가 전혀 알 수 없었다.
전백찬이 사망한 심층적인 원인은 유소기가 일찌기 중공지하당의 총두목이었다는 것이다. 전백찬ㅇ느 1937년에 비밀리에 중공에 가입한다. 오랫동안 통전업무에 종사했다. 1961년 북경대학 부교장에 임명되었을 때, 외부에서는 비로소 전백찬이 중공당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중공은 정권을 잡은 후, 지하당원에 대하여는 이런 정책을 쓴다; "강급안배(降級按排), 공제사용(控制使用), 취지소화(就地消化), 축보도태(逐步淘汰)" 중공이 발동한 여러번의 정치운동에서, 거의 모든 지하당원은 숙청당한다. 많은 사람들은 죽게 된다.
전백찬이 사망한 가장 심층적인 원인은 그가 마르크스주의의 본질을 몰랐다는 것이다. 그는 당성과 인성의 가운데서 고민했다. 결국은 이 충돌이 너무 커져서 도저히 해결되지 않을 때, 당성을 선택하면 인성은 말살될 것이고, 인성을 선택하면 죽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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