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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제정러시아가 사할린을 점령할 때 청나라는 왜 반격하지 않았을까?

by 중은우시 2020. 1. 6.

글: 과라료부(科羅廖夫)


사할린섬(중국한자명으로 庫頁島)는 현재 러시아에서 가장 면적이 넓은 섬이다. 북태평양에위치하고 있으며, 일본 홋카이도의 북쪽에 있다. 사할린은 자원이 풍부하고 6000여개의 하류와 1600여개의 호수가 있으며, 그 외에 섬에서는 석유, 천연가스, 석탄, 어업자원, 삼림자원이 모두 상당히 풍부하다.


다만 이 면적이 7.64만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 러시아용토는 원래 중국의 것이었다. 제정러시아가 대청왕조를 잠식하면서, 결국 사할린섬을 잃고, 동해로 나가는 출구를 잃게 되었다.지금 중국은 그저 길림성의 방천구안(防川口岸)에서 멀리 바다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중국은 어떻게 하여 이 '보고'같은 진귀한 섬을 잃어버리게 되었을까?


1789년 제정러시아는 흑룡강연안을 따라 탐험하며 바다에 닿는다. 그리고 바다를 건너 사할린섬에 이른다. 섬에 오른 후에는 대거 현지 토착민을 살상하고 그들을 대륙으로 쫓아보냈다. 그리고 사할린섬의 남부에 정부청사, 교회, 감옥, 학교등 시설을 지었으며 점차 사할린섬을 점령한다. 이때는 청나라 건륭54년이었다. 청나라는 1788년부터 1789년까지 안남(安南)전투를 벌였고, 1790년부터 1792년까지 두번에 걸처 구르카를 원정했다.이때의 청나라는 병력이 강했다. 다만 동시기에 제정러시아가 사할린섬을 차지하는데 왜 청나라정부는 아무런 반격도 가하지 않았을까?


사할린섬은 자고이래로 현지 유목민족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고대에는 고엽(苦葉), 흑룡서(黑龍嶼)등으로 불리웠다. 비록 청나라때 청나라정부는 이 섬에 대한 주권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효과적인 관할을 실시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수년에 한번 사할린섬에 대한 정례 순사(巡査)를 실시할 뿐이었다. 이 순사도 대충 형식에 그쳤을 뿐이다.


사할린섬은 청나라때 이론적으로는 길림장군의 관할에 속했다. 청나라는 길림장군이 매5년 관할구역에 대하여 1차례 대순시를 진행하도록 규정했다. 그러나 사할린섬은 정말 먼 곳이었다. 길림장군이 순시를 진행했는지 아닌지, 어느 지방을 순시했는지, 황제가 알 수 없었다. 황제는 그저 그들이 올린 상소문을 통하여 그들의 상황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많은 길림장군은 아예 사할린섬에 대한 순시를 시행하지 않았었다.


19세기 중엽 이전에, 사할린섬의 중북부의 주인은 주로 어업과 수렵을 위주로 하는 허저(赫哲)인등 토착인이었다. 동북지방 북부변방은 텅 비어 있었고, 그리하여 사할린섬은 건륭말기에 러시아, 일본에 의해 침범된다. 사할린섬이 할양되기 전까지의 이 시기에 사할린섬은 여전히 청나라조정에 초피(貂皮)등을 조공으로 바쳤고, "공초상오릉(貢貂賞烏綾)" 즉 담비가죽을 바치면 검은비단을 하사하는 제도는 계속 진행되었으나 청나라는 실제로 이미 사할린섬에 대한 통제를 잃어버렸다.


1858년, 제정러시아는 정식으로 아이훈조약과 북경조약을 통하여 중국에 사할린섬을 할양할 것을 압박한다. 이후 이 섬은 일본과 러시아의 사이에 몇번 주인이 바뀌었다가 최종적으로 1945년 일본이 패전하면서 소련에 귀속된다. 중국과는 더 이상의 인연이 없었다.



초기 사할린섬의 지도는 네덜란드 탐험가인 Maarten Gerritsz Vries가 1643년에 그린 것이다. 지도의 우상귀에 사할린섬과 홋카이도가 하나로 연결된 것으로 잘못 그려져 있다. 당시 사람들은 사할린이 섬이라는 것을 잘 몰랐기 때문이다.


중국국가측회국이 2003년에 발표한 <공개지도내용표시약간규정> 제17조에 따르면, 중국의 모든 지도에서 반드시 '사할린섬'이라고 쓴 후 중국명칭 '庫頁島'를 부가하도록 하고 있다. 이를 통해 중국인들이 굴욕의 역사를 잊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일본이 사할린섬이 쟁탈전에 뛰어든 것은 1485년부터이다. 당시 사할린섬은 대명왕조의 관할이었는데, 사할린섬의 아이누추장이 일본에 동작대를 진헌한 후, 1593년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마쓰마에 요시히로(松前慶廣)에게 사할린섬의 아이누족을 보호하도록 명령한다. 그리고 사할린섬에 대한 세금징수권리를 확립한다. 다만 이때의 일본은 사할린섬에 실질적인 군대를 파견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사할린섬은 여전히 빙천설지(氷天雪地)의 세계였기 때문에 당시에는 전략적 가치가 없었다. 누구든지 개발하고 누구든지 이용할 수 있는 상태였다.


1689년 제정러시아는 대청국과 네르친스크조약을 체결하여 처음으로 북부의 국경선을 확정짓는다. 조약규정에 따르면 외흥안령이남은 중국영토이다. 다만 사할린섬은 언급되지 않았다. 여기에는 아무런 오인의 소지가 없다. 왜냐하면 당초 러시아인은 사할린섬의 존재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1709년, 강희제는 전국판도의 측량을 명령하고, 다음 해 측량대는 성공적으로 바다를 건너 사할린섬에 도착한다. 이 섬은 정식으로 만주어로 명명된다.


다만 1738년에 이르러, 원동지구를 탐색하던 제정러시아의 중위 스판베르크가 일본인에게서 사할린섬의 존재를 전해 듣고, 그후 수십년간 서리아의 탐험가들은 사할린섬의 동해안을 거의 전부 탐험한다. 제정러시아는 이때부터 사할린섬이 극동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된다.


처음으로 사할린섬에 대하여 상세하게 탐사한 일본인은 마미야 린죠(間宮林藏, 1775-1844)이다. 1808년과 1809년, 마미야 린조는 두번에 걸쳐 소야(宗谷)해협을 건너 사할린섬을 고찰한다. 마미야 린죠는 <동달지방기행>과 <북이분계여화>라는 두 권의 견문서를 정리한다.


비록 사할린섬이 중국영토였지만, 대청은 이 섬을 신경쓰지 않았고, 오히려 일본과 러시아가 서로 다투게 된다. 1808년 에도막부는 '아선구축령(俄船驅逐令)"을 내린다. 일본연해에 가까이 오는 러시아선박은 축출하거나 심지어 선원을 체포하여 처형하라는 것이다. 1850년, 제정러시아는 먼저 확장의 이빨을 드러낸다. 네비르스코이에서 사할린섬북부의 쿠아이거다갑에 도착하여 제정러시아의 국기를 게양하며 선포한다: "현재 아무르강(즉 흑룡강)의 하구, 사할린과 달단해협연안지대는 이미 러시아판도에 편입되었다. 그들은 제정러시아의 무력에 의하여 보호받고 침범받지 아니한다."


19세기 중엽, 일본은 사할린의 남부로 확장한 후, 동시에 섬의 북부에서 내려오던 러시아인과 맞부닥친다. 양국은 잠시 북위48도선을 경계로 약정한다. 일본인과 러시아인은 각각 섬의 남부 북부를 점령했고, 호적, 세수, 지도측량등 실질적인 행정관리를 시행한다. 하나의 영토는 말로만 하거나 조공을 받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영토라 할 수가 없다. 유효한 관할을 시행해야만 된다.


1854년, 크리미아전쟁으로 정신이 없는 러시아는 극동까지 신경쓸 수가 없어서, 잠시 사할린에서 철군한다. 그러나 대청은 외흥안령과 사할린섬을 회복할 수 있는 이 기회를 잡지 못한다. 이어서 크리미아전쟁이 끝나고, 제정러시아가 권토중래한다. 이번에는 사할린섬만이 아니라, 흑룡강이북에서 우수리강이동까지도 제정러시아가 침탈한다. 총면적은 160만평방킬로미터를 넘는다.


1858년-1860년, 청나라조정은 이미 쇠약하여 영토상실을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이 기회에 제정러시아는 제2차아편정쟁의 틈을 타서, 주국에 아이훈조약과 북경조약을 체결하도록 압박하여, 철저히 이미 점령한 중국영토를 합법화한다. 이때부터 사할린섬은 중국과 육상이나 해상으로 직접 교류하지 않게 된다. 점점 제정러시아화된 사할린섬은 더 이상 중국의 품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 1875년, 일본과 러시아는 생페테르스부르크에서 <사할린.쿠릴열도교환조약>을 체결하고, 일본은 사할린섬에 대한 이익을 포기한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패전한 러시아는 <포츠머스조약>에 근거하여 사할린섬남부를 일본에 할양한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카라후토도(樺太島)라고 개칭하며 카라후토청(樺太廳)을 설치한다. 1945년 2차대전말기 소련은 얄타조약에 근거하여 동북에 출병하고, 동시에 사할린 남부를 점령한다. 그리고 남쿠릴열도(일본에서 말하는 북방4도)도 점령하여 지금까지 통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