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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의화단(義和團)은 전투에서 어떤 모습을 보였을까?

by 중은우시 2019. 5. 25.

글: 후의걸(侯宜杰)


1900년 의화단운동이 산동과 직예(直隸)에서 발발한다. '부청멸양(扶淸滅洋)"을 구호로 내걸고 교회와 신도들에 대하여 살인, 방화, 약탈을 하고, 선교사와 기타 서양인들을 살해한다. 공사관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하여, 각국의 주북경공사는 호위부대를 북경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한다. 5월 31일, 청정부의 동의를 받아, 각국 공사관은 호위부대 300여명을 진주시킨다. 그 후, 의화단민들이 속속 북경으로 들어오고, 활동도 계속 강화된다. 6월 10일, 각국공사는 위험이 가까이 다가온 것을 느끼고 병력을 증강시킨다. 그날 영국해군함대사령관 시모어는 2,100여명의 팔국연합군을 이끌고 당고(塘沽)에 상륙한다. 그 후에 천진에서 기차를 타고 북경으로 진격한다. 도중에 의화단의 습격을 받는다. 이때부터 일부 의화단민은 팔국연합군과의 전투에 참가한다.


의화단민의 팔국연합군과의 전투시에 보여준 모습에 대하여, 주류의 견해는 그들이 '극히 용맹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맨몸으로 침략자들과 싸웠고, 용맹하게 항거하여 혁명영웅주의를 발휘했다고 한다. 선혈과 생명으로 비장한 송가를 썼다고 한다. 그 근거로 삼는 사료는 개략 이러하다: "권비(拳匪, 의화단민을 비하하여 부르는 명칭임)는 총탄에 다치지 않는다는 미신을 믿어, 전투를 할 때면 앞장서서 돌진했다. 연합군은 서양총으로 막았고, 죽는 자가 바람이 쓰러지는 풀과 같았다. 뒷줄에 몇 명이 남지 않더라도 여전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처음 한두먼 전투에 참가한 단민들에게서는 확실히 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6월 12일 의화단이 랑방(廊坊)에서 연합군을 막을 때, 단민은 "검, 쇠스랑, 곤봉을 휘둘렀다. 기관총의 사격을 맞으며 달려갈수록 가까워졌다....이들 젊은 남자들은 분명히 극도로 광분한 상태였다. 그들은 미친 것처럼 이들의 앞에 서서 달렸다....그들은 놀라운 용맹함을 보여주고, 1시간동안의 연속 속사로....그들을 격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미 침중한 타격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14일, 단민은 고함을 치면서 장갑열차를 탈튀하여 망가뜨리려고 시도한다. 연합군이 맹렬하게 사격한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놀랍게 용감했다. 앞으로 돌진하며, 완전히 연합군의 화력 아래에 노출된다. 자신의 생명을 전혀 돌보지 않고 도검을 휘두른다. 그들이 마지막 60야드 혹은 70야드까지 돌진해 왔을 때, 맥심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비록 맹신도들이 극히 용감했지만, 뒷줄의 사람들이 앞 줄의 시신과 쓰러진 부상자들을 밟고 나가야 했을 때, 그들의 용기는 상실된다. 쇠스랑, 대도, 화승총을 버리고 고귀한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도망쳤다." 북경의 단민이 처음 각국 공사관을 공격할 때, 역시 "각자 자신의 기술을 가지고, 매번 공격할 때마다 앞장섰다." 그러나 여러 명이 죽은 이후에는 마찬가지로, "점점 총포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서양병사를 만나면 서로 앞다투어 도망쳤다."


단민이 처음에 연합군과의 전투시 보여준 용맹함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도창불입(刀槍不入)은 불가능하다. 신령부체(神靈附體)는 사기이다. 그러나 조사자료를 보면, 법술을 행한 후 확실히 단민들은 용기를 발휘한다. 어떤 단민은 이렇게 말한다: "절을 하고 법술을 행하면, 크게 고함을 지르면서 앞으로 달려갔다. 보기에 서양인의 총이 머리를 날린 것도 잊는 것같았다." "싸울 때 신이 너의 신체를 보호할 것이다. 총알은 너의 몸 양쪽으로 지나간다. 신은 네가 피곤한 줄도 모르게 할 것이다. 기운이 펄펄나게 해줄 것이다." 문헌에는 이런 기록도 있다: "의화단 내에는 동자(童子)들이 아주 많았다. 어떤 경우는 나이가 겨우 8,9세에 불과했는데, 칼을 들고 전투에 나섰다. 스스로 말하기를 법술을 행하게 되면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다만 기운이 솟아 참을 수가 없게 되어 엎으로 달려가가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단민들이 법술을 행한 후 신이 몸에 붙어서 앞으로 돌진하고, 죽음을 겁내지 않는 비밀은 도대체 무엇일까? 한 단민이 스스로 그 비밀을 풀어놓았다.


법술의 관건은 주술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부적을 삼키는 것이다. "의화단은 사람마다 도부(道符)를 가지고 있는데, 주사(朱)로 맥황지(麥黃紙)에 쓴다." 왜 부적을 마시면 용기가 생길까? 대대로 의화문(義和門)에서 무술을 익혀온 색극공(索克恭)이 직접적으로 그 해답을 알려준다: "그 부적을 쓴 주사는 흥분제로 만들었다. 부적을 마시면 한시간내에 심신이 혼미하고 그저 싸우고 싶어진다. 1시진이 지나면 원래대로 돌아온다." 또 다른 단민은 이렇게 말한다: "듣기로 부적을 마시면 1시진 내에만 효과가 있다고 한다(부적종이에 아마도 흥분약으로 썼을 것이고, 심리적으로 안정을 주었을 뿐, 실제로 총포를 피할 수는 없었다."


비밀은 바로 '흥분제'라는 세 글자에 있다. 부적을 흥분제를 섞은 주사로 쓴 것이다. 부적을 마시는 것은 흥분제를 복용하는 것과 같다. 흥분제는 사람을 일시적으로 흥분시키고 본성을 잃게 만드는 성분이 있다. 그래서 단민들이 마신 후에 '심신이 혼미하여 그저 싸우고 싶어진다" 그리고 이 약은 그저 1시간내에만 효과를 낼 뿐이고 그 시간이 지나면, 사람은 원래대로 돌아온다. 단민의 '영웅기개'는 바로 흥분제에서 온 것이다.


비록 현재 필자는 그저 한 단민이 '영웅기개'의 비밀을 폭로한 것만을 보았기 때문에 증거가 하나뿐이지만, 이 해답이 정확하다는 것을 믿을만한 이유는 충분하다.


먼저, 그 단민은 대대로 무술을 익혔고, 외부에서 알지 못하는 절대기밀의 내부사정을 잘 알고 있다. 그는 당사자로서 신령부체, 화부염주(畵符念呪) 배후에 숨은 비밀을 들춰냈고, 단민의 '영웅기개'의 진실한 원인을 밝혀주었다. 흥분제를 마신 단민은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미치광이상태가 되어 자신이 어떤 위험한 지경에 처해있는지도 모르고, 그리고 총포에 목숨을 잃게 될 것이라는 것도 모르고 그저 싸우려고 뛰어나간 것이다. 그래서 그저 칼을 좌우로 미친 듯이 휘두르며, 총탄이 비오듯이 쏟아지는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한 의화단의 대사형(大師兄)은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들이 자신을 이런 혼미상태에 빠지게 한 것은 칼에 베이고 칼에 맞는 것에 댛나 감각을 느끼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진실한 사정을 알지 못하는 외부인이 보기에 단민의 모습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영웅기개'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합리적으로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비밀을 풀었다. 신령부체, 화부염주는 소두목, 단민과 외인이 보기에 단지 '그 형식'일 뿐이다. 기실 그 뿐만이 아니라, 실제적인 의의가 있다. 즉 이런 형식을 빌려서 단민들로하여금 흥분제를 마시게 한 것이다.


단민은 전투에서 부적을 마시고 주문을 외운 후 왜 정신이 혼미하고 광분했는지 아무런 두려움없이 앞으로 돌진하였는지, 그것은 흥분제를 복용하여 정신이 정상이 아니어서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뒷줄의 단민들은 앞줄의 동료가 죽어나가는 것을 보고서도 왜 겁내지 않았을까? 그리고 계속 돌진했을까? 왜냐하면 그들은 부적을 마셨고, 흥분제를 먹었기 때문에, 흥분제의 작용으로 앞쪽의 동료가 죽은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총포의 무서움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단민들이 한번 돌격하고나서는 왜 금방 패퇴했을까? 그것은 흥분제의 효과가 기껏해야 1시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단민은 이 시간내에는 용기가 충만하고, '생사를 도외시하지만, 그 효과존속기간이 지나고 나면 정신이 다시 맑아지고, 죽음이 두려워 도망치게 되는 것이다.


연습때 왜 대두목들은 단민으로 하여금 부적을 마시고 주술을 외우게 했을까? 그것은 연습하는 사람들이 '신권'의 초자연적인 신비한 역량을 드러내게 하기 위함이다. 사람들은 쉽게 믿게 되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따라오게 선동하고 기망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무독유우(無獨有偶). 의화단과 1세기가량 시간이 지난 당금세계에서도 흥분제를 복용한 '용사'가 나타난다. 영국의 데일리미러 보도에 따르면, "이라크의 반미무장분자들은 장비가 뛰어난 이란주둔미군을 상대하기 위하여, 매번 공격을 감행하기 전에 흥분제와 유사한 특수약물을 먹는다. 먹은 후에는 스스로 '수퍼맨'이 된 것처럼 대단하다고 느껴져서 미군을 전혀 겁내지 않게 된다." 이 사례는 의화단의 '영웅기개'가 흥분제에서 노왔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만드는 하나의 사례이다.


흥분제 복용으로 나타나는 용감함은 그저 일종의 허상이다. 그것을 가지고 단민의 '영웅기개'를 증명할 수는 없다. 아래에서는 다시 단민이 연합군과 싸운 주전장인 천진에서의 모습을 보기로 하자. 천진조계를 공격한 전투는 6월 13일에 시작된다. 이때 천진에 주돈하던 서양병사들은 많지 않았다. 개략 랑방 의화단의 도창불입의 신화가 이미 깨졌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천진의 단민들은 돌격시의 '짧은' 용맹함 마저도 보여주지 못한다.


15일, 의화단의 저명한 지도자인 조복전(曹福田)이 단민을 이끌고 마가구(馬家口) 전선으로 간다. 앞에서 붉은 깃발을 들고 위에는 크게 "조(曹)"자를 쓴다. 옆에는 "부청멸양(扶淸滅洋), 천병천장(天兵天將)"이라고 적었다. 그는 말을 타고, 선글라스를 끼고, 입에는 서양담배를 물었으며, 몸에는 푸른 장삼을 입고, 붉은 허리띠를 매었다. 발에는 검은비단신발을 신었고, 허리에는 작은 서양총을 차고 잇었다. 등에는 총을 매고 있었다. 말그대로 조폭 두목의 모습이다. "손에 수숫대를 들고 길가는 사람에게 말한다: '너희는 가서 보겠는가. 내가 손에 든 수숫대를 휘두르기만 하면 서양인들은 고개를 숙이고 투항해올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러 따라간다. 성의 서쪽문으로 들어가서 동쪽문으로 나왔다. 마가구에 가까워지자, 조복전은 "문득 말하기를 '더 들어가면 이미 지뢰가 매복되어 있다. 내가 이미 계산을 해보니, 서양인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는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그 뜻은 하동의 기차역으로 가겠다는 것으로 보였다. 거기에서도 서양인과 싸울 수 있다. 그래서 강을 건넜는데, 기차역이 있는 남쪽으로 가지 않고, 북쪽으로 거리를 지나며, 금의위교를 거쳐 하북에 이른다. 다시 강을 건너 남쪽으로 간다. 그리고 부대를 정돈한 후 돌아간다." 이렇게 한바퀴 돌면서 아예 서양병사들과 싸우지도 않고서 돌아온다. 그리고는 "크게 소리치켜 '크게 전승을 거두었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주민들에게 떡, 녹두탕등을 내놓게 하여 병사들이 배불리 먹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서양병사들과 싸운다. 27일, 그는 각국에 전서(戰書)를 보낸다. 다음 날, 장덕성(張德成)이 '천하제일단'이라고 불리는 4,5천명을 이끌고 천진에 도착한다. 그리고 조복전과 연명으로 공고문을 내건다. 29일에 서양인과 연합하여 싸우겠다고. 표면적으로 보면 전서에는 연합군에 대한 멸시가 가득하고, 겁내지 않는다는 혁명정신과 반제국주의투쟁을 끝까지 하겠다는 굳은 결심이 쓰여 있다. 그러나, 29일 그는 동남풍이 불리하다고 핑계를 대고 출전하지 않는다. 실제로 이는 그저 큰소리치며 사람을 속이는 짓일 뿐이다. 그후 직예총독 유록(裕祿)이 여러번 그들 두 명에게 단민을 이끌고 청군과 함께 출전하자도 독촉한다. 그들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는 핑계를 대거나 혹은 일진이 불리하다거나 하면서 계속 미루었다."


뒤로 가면 갈수록 단민은 더욱 겁쟁이가 된다. 청군이 연합군과 악전고투를 벌일 때, 대체로 이런 상황이다. "서양인을 공격할 때, 모두 관병이 앞장서고" ,단민은 "뒤에서 따르며 감히 앞장서지 못한다." "혹은 시장에서 활보하며 힘을 자랑하고," "혹은 "주민들 속에 숨어서 마음대로 약탈하고" 혹은 "매번 적을 맞이할 때면 성을 돌아서 적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고, 모두 건물귀퉁이나 담장아래에 숨어 있다가 부대를 정비해서 돌아간다. 그러면서 큰소리로 외친다 '대거 전승을 거두었다'" 7월 13일, 연합군이 천진성내를 향해 총공격을 개시한다. 밤에, "성내의 의화단은 모조리 철수한다. 외지에서 온 의화단은 원래 왔던 길로 철수하고, 본시의 의화단은 물러나면서 해산하여 각자 집으로 돌아간다."


몇몇 단민도 자신들이 직접 겪은 일을 진술한다.


당시 권수(拳首) 왕음영(王蔭榮)의 위대(衛隊) 대장을 맡았던 이구은(李九恩)은 이렇게 말한다: "처음에 적과 전투를 벌인 것은 노용두기차역에을 공격하는 것이었다.....이번 전투에서 우리는 이겼다. 다만 희생된 사람이 너무 많았다. 제2차도 노용두, 노염타 일대이다. 모두 오월이었다. 제3차는 해대도에서 싸웠다. 이번 전투에서 아무도 부상을 입지 않는다. 그러나 후방으로 돌아와서 점검해보니, 서단구에서 7명이 부족했다.....나는 다시 회대도로 가서 그 일곱명을 찾아서 찾아냈다. 원래 대장원(大醬園)에 숨어 있었다....이후, 우리는 다시 해광사 일본군영지를 공격했다...실패하고 고루로 철수했다. 다음 날...의화단은 금방 대오를 벌였다. 그러나 그날은 싸우지 않았다." 이 의화단은 2번 싸운 후에는 7명이 숨어 버리고, 전투에 나서지 않았으며, 제4차는 패배하고, 그 이후에는 다시 싸우지 않는다.


단민 곽세영(郭世榮)은 이렇게 말한다: "제1차....칼과 총을 들고 마가구에 도착했다. 거기에서 외국인이 매복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감히 공격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제2차는 무고(武庫)를 공격하는 것이다. 서양이니 총포를 계속 쏘는데, 총알을 피했으나 대포는 피하지 못했다. 그래서 의화단은 철수한다. 돌아온 후 어떤 사람은 동요했고, 물러났다....제3차는 동국자(東局子)를 공격했다.... 전투시작후 백여명의 외국인이 말을 타고 횡으로 줄을 섰고, 말에서 내리고 총을 들어 의화단을 향해 쏘았다. 의화단은 당시에 총이 없었고, 서양인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서 있으면 총을 맞으므로 모두 땅바닥에 엎드려 총과 포를 피했다." 이 의화단은 3번 싸웠는데, 처음에는 감히 공격하지 못하고 돌아왔고, 두번째도 마찬가지였으며 어떤 사람은 동요해서 도망쳤다. 세번째는 적에게 돌진하지도 못하고 그저 땅바닥에 엎드려서 총과 포를 피했다.


단민 왕문발(王文發)은 이렇게 말한다: "의화단이 남문을 나섰고, 자죽림에 주둔하던 육국군대와 만났다. 꼬박 하룻동안 죽어라 싸운다. ...다음 날 다시 한번 싸웠다. 밤에는 강소회관으로 돌아와서 밤을 보낸다. 서양놈들은 죽어라 화포를 쏘아댔다. 누가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포는 정말  싫다. 우리 그만 싸우고, 고향으로 돌아가자." 그렇게 하여 우리 12명은 밤에 성을 빠져나와, 고향인 정루로 돌아갔다." 이 12명의 단민도 단지 1번 싸우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사형(二師兄) 이장경(李長慶)은 이렇게 말한다: "한번은 아마도 프랑스인인 것같은데, 물수레를 급히 따라왔다. 이곳에 오자 우리에게 맞아죽었다. 그래서 총 한 자루를 빼앗았다. 또 한번은 양인의 기마대가 왔다. 앞의 두 필에는 여자가 있었다. 우리는 본 후에 철로 아래로 몰아서 철로아래에서 그들과 싸웠다. 모두 그들 7명을 때려죽였고, 2,3자루의 총과 1필의 말을 빼앗았다. 우리는 72명이 죽었다..... 기가장에서 싸웠다. 마장도 불이 붙었다. 그리하여 나는 이 십여명을 이끌고 급히 되돌아갔다. 막 기가장에 도착하니, 적은 2줄로 총을 쏘았다. 금방 기가장에서 사람이 도망쳐 나와 말했다. 서양인들이 다리를 건넜다. 내가 머리를 들어보니, 기가장에 불이 붙었다. 그래서 물러나서 집으로 갔다.....서양인이 해광사를 점령했다. 이때부터 우리는 흩어졌다. 나는 이곳에서 30리 떨어진 대박자로 도망친다. 나는 칼을 거기에 묻었다." 이 단민은 처음에 혼자 오는 서양인을 만나서 죽였다. 두번재 만난 것은 두 여자를 우두머리로 하는 아마도 정규전투부대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7명을 때려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단민은 10배이상의 희생을 당한다. 나중에 아직 적을 만나기도 전에, 그들이 다리를 건넜다는 말을 듣고는 바로 철수한다. 이어서 도주한다.


이 몇명의 단민은 모두 의화단이 높이 평가받던 시대에 조사원에게 말해준 것이다. 만일 의화단에게 겁내지 않는 '영웅기개'가 있었다면, 그들은 분명 아주 영광스럽게 영웅사적을 전혀 감추지 않고 자랑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자술을 보면, 의하단은 절대 겁내지 않는 기개를 지닌 영웅이 아니었다.


의화단의 대두목들인 장덕성, 조복전, 유십구(劉十九), 한이례(韓以禮)등은 스스로 신통광대(神通廣大)하며 법술이 뛰어나다고 자랑했다. 그러나, 연합군과 전투시, 그들이 '돌진하며 피를 뒤집어쓰고 분전하는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들 중 한명도 전쟁터에서 싸우다가 죽지 않았다. 모두 위기의 순간에 후안무치한 도망자가 되었다. 그들의 행위는 청일전쟁때의 등세창, 임영승등 애국장군이나 민족영웅들과는 천양지차가 있다. 당시의 관병의 영웅기개, 애국정신이 그들보다 백배는 나았다. 섭사성은 일단 전투가 발생하면 각 군영을 다니며 사병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7월 9일, 병력을 이끌고 자죽림을 공격하다가 적군의 기습을 당한다. 그래도 친히 포화를 뚫고 맹렬하게 전진한다. 팔리대에 도착한 후, "서양병사들이 사방에서 공격하고, 총포가 비오듯이 쏟아졌다" 그는 "두 다리에 모두 총상을 입고도 여전히 병사들을 독려하며 조금이라도 물러서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영관(營官) 송점표가 일단 물러나서 조금 휴식을 취하며 정돈하자고 권하자, 그 제독은 분기탱천해서 다시 칼을 들고 전투를 독려한다. 그러다가 다시 적의 총에 좌우 뺨과 목의 옆, 머리등을 맞고, 배꼽아래 조금 떨어진 곳은 포탄이 날아와서 내장이 몇 촌 빠져나와 사망한다." 송점표도 '전투가 있으면 반드시 앞장섰고' 그와 함께 장렬히 희생한다. 영관 서조덕(徐照德)은 병사를 이끌고 무기고를 공격한다. "근접전이 벌어져 칼로 적을 3명 찌르나, 돌연 총탄에 맞는다. 그래도 손을 휘두르며 적을 죽이다가 기운이 다하여 죽었다." 마옥곤(馬玉昆)의 부대의 우로통령 이대천(李大川)은 부대를 이끌고 공격한다. "용맹하게 앞에서 뛰쳐나가 철로를 빼앗아 점령한다" 나중에 "포에 맞아 사망한다." 초관(哨官)이하 용맹하게 전사한 사람이 부지기수이다. 어떤 사병은 아주 비장하게 전사한다. 반금산(潘金山) 부대는 동국자에서 철수할 때, 두 명의 사명을 남겨서 지뢰를 매설한다. 연합군이 돌진해 온 후에, 그들이 지뢰를 터트려 적과 함께 죽는다.


천진이 함락된 후, 의화단은 놀라서 혼비백산한다. 다시는 전선에 나서서 '멸양'하겠다고 나서지 못한다. 창장시랑(倉場侍郞) 유은부(劉恩溥)는 이렇게 보고한다: "천진성을 지켜내지 못한 후, 서양인은 의화단민을 죽이겠다고 소리친다. 그리하여 동안, 무청의 각 단은 이미 그 소식을 듣고는 해산했다." "유지를 받들어, 신이 단민과 회합하여 근접전을 벌여서 승리를 거두려 했는데, 단민은 이미 궤멸하고 흩어져서 신도 방법이 없습니다." 통주방초사 의장췌도 마찬가지로 보고한다: "이전에 보고하여 허가를 받아 두개 영을 모집하여 방어하려고, 고시문을 붙였으나, 의화단민은 한명도 응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북경의 단민은 더더욱 말할 필요가 없다. 단민 2,3천명이 서십고교당을 공격하면서 소리높여 고함친다: "불태워라. 죽여라. 이모자(二毛子)들이여. 너희의 생일이 왔다." 이어서 교당의 대문으로 달려간다. 지키고 있던 서양병들이 몇줄의 총을 쏘자 삼십여명이 죽는다. 뒤에서 오는 단민은 이를 보자 모조리 놀라서 도망쳤다. "부상자들은 엎드린 자는 엎드리고, 구르는 자는 구르고, 모두 죽으라 서쪽으로 도망쳤다." 이후 꼬박 2달동안 수만명을 투입했지만, 교당을 공격해서 점령하지 못한다. 8월 10일, 외지에서 온 의화단이 속속 도망친다. 북경이 함락되기 전에, 소위 의화단이라는 자들은 일찌감치 도망치고 흩어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