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청군(淸軍)은 팔국연합군에게 왜 힘없이 패배했을까?

중은우시 2020. 4. 3. 13:04

글: 왕우군(王友群)


1900년, 중국역사상의 대사건이 하나 벌어진다.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일본, 오스트리아, 러시아의 8국연합군이 극히 단기간내에 청나라의 수도 북경으로 쳐들어온다. 청나라정부는 결국 팔국연합군을 이기지 못하고, 여기에 스페인, 벨기에, 네덜란드를 합쳐 총11개국과 <신축조약(辛丑條約)을 체결하게 되고, 4억5천만냥의 백은을 배상하게 된다.


이 사건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한가지 견해는 중국인의 무기가 그들만큼 선진적이지 못해서, 패배했다고 본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 당시 청군의 무기장비는 팔국연합군에 비하여 못지 않았다. 청군의 북방주력인 "무위오군(武衛五軍)" 즉 동복상(董福祥)의 감군(甘軍), 섭사성(聶士成)의 무의군(武毅軍), 원세개(袁世凱)의 신군(新軍), 송경(宋慶)의 예군(豫軍)과 무위군총사령관 영록(榮祿)이 직접 지휘하는 중군(中軍)은 모두 서양의 총과 대포를 갖추고 있었다.


섭사성이 지휘하는 무의군을 예로 들자면, 무의군의 전투인력은 모두 16,200명이다. 보병은 독일제 모제르11미리구경단발소총, 독일제 11밀리 연발모제르소총 합계 10,000정, 7미리, 9미리구경모제르소총 2,100정을 보유하고 있었다. 기병은 오스트리아제 8미리구경 만리히연발소총 1,400정을 보유하고 있었다. 장교는 6발짜리 권총을 보유하고, 포병은 75미리 크루프대포 16문, 60미리 대포 32문, 57미리 속사포 32문을 보유하고 있었다.


아래는 연합군이 천진에서 획득한 중국신식군용물자보고서에 나오는 리스트이다:


36문의 크루프대포, 구경 87미리, 대부분 상자에 들어 있었음.

60문의 크루프대포, 구경 79미리

42문의 노던필드식의 속사기관포, 구경57미리

42문의 노던필드식의 기관포, 구경 47미리

42문의 대표, 일부는 노던필드식, 일부는 상해기기국이 제조, 구경37미리

10문의 속사기관포, 구경 37미리

20문의 소구경 속사기관포

3만정의 최신포기가 있는 모제르총과 만리히식 라이플총

3만개의 칼, 군용품 및 기타.


영국공사가 영국정부에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이 보고서의 리스트는 한 이탈리아장교가 작성한 것이다(무기고에 보관되어 있는 대량이 군용물자를 포함하지 않았음). 이 보고서리스트의 놀라운 사실은, 이들 신형대포와 라이플총이다. 누군가 나에게 말해주기를 만리히식 카빈총의 유형이며, 중국에 투입된 오스트리아-헝가리부대의 그 카빈총보다 더욱 신식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크루프대포는 절대로 독일군이 보유한 대포보다 신식이었다."


8월 4일, 팔국연합군 1만6천여명은 천진에서 북경으로 출발한다. 10여만의 우수한 장비를 갖춘 청군과 의화단을 궤멸시키며, 14일 북경에 입성한다.


8월 15일, 서태후는 광서제를 데리고 황급히 자금성을 빠져나가, 북으로 도망치다, 다시 서쪽으로 도망친다. 2000여킬로미터를 도망쳐 결국 서안에 도착한다.


왜 청군의 무기장비는 상대보다 못하지 않은데, 형편없이 무너졌을까? 이 문제는 깊이 생각해봐야할 점이다.


첫째, 변법(變法)과 맹목적인 배외(排外)


팔국연합군이 북경으로 진입하기 2년전, 북경에서는 또 다른 대사건이 벌어졌다. 바로 무술변법(戊戌變法)이다. 1840년 아편전쟁이래, 늙은 중화제국은 서방문명의 강력한 도전을 받는다. 중국은 한번 또 한번 패전하고, 영토를 할양해주며, 배상금을 물어주었다. 그리하여 엘리트들은 대응방법을 계속하여 생각하게 된다.


최초의 고민결과는 바로 위원(魏源)의 <해국도지(海國圖誌)>에서 내놓은 "사이장기이제이(思夷長技以制夷)" 오랑캐의 장기로 오랑캐를 제압한다이다. 즉 서방의 선진적인 과학기술을 배워서, 서방열강의 침입에 저항한다는 것이다. 그 후에 발생한 양무운동(洋務運動)이 일어나고, 무기공장을 만들고, 외국에서 선진무기를 수입하는 등이 모두 이런 사상아래에서 진행된 것이다. 1894년의 청일전쟁에서의 패배후 어떤 살마은 "오랑캐의 장기'만으로는 부족하고, 서방의 선진적인 사상이론까지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엄복(嚴復)은 토마스 헉슬리의 <천연론(天演論, Evolution and Ethics)>를 번역하여, "물경천택(物競天擇), 적자생존(適者生存)"등 이념을 중국에 도입한다. 다시 그 후에 어던 사람은 반드시 변법도강(變法圖强)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1898년의 무술변법이 일어나게 된다.


다만, 개혁이 가장 핵심적인 문제인 '최고권력'에 부닥치자, 좌초하고 만다. 당시, 서태후가 수렴청정한지 여러 해가 지났다. 광서제는 변법을 통하여, 최고권력을 서태후의 수중에서 빼앗아 오려고 했다. 이는 금기를 범한 것이다. 서태후는 분노하여 광서제를 중남해 영대에 연금하고, 유신파인사인 담사동(譚嗣同)등을 죽여버린다. 103일간 지속된, 요란했던 무술변법은 실패로 끝나고, 개혁은 돌연 중단된다.


그후, 서태후는 계속 고민한다. 도대체 문제가 어디에 있는가?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마지막에 내린 결론은 이러하다: 모두 서양인들의 잘못이다. 서양총, 서양대포, 서양사상, 서양개혁, 하다보니 결국 자신을 겨누지 않는가? 반드시 서방과는 '관계단절'을 하고, 철저히 쇄국해야 한다.


1900년 6월 21일, 청나라조정은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일본, 오스트리아, 러시아, 스페인, 벨기에, 네덜란드의 11개국에 선전포고한다. 서양인들을 죽이도록 독려한다: "남자오랑캐 1명을 죽인 자는 상으로 은 50냥을 내린다; 여자오량캐 1명을 죽인 자는 상으로 은 40냥을 내린다; 어린아이른 1명 죽인 자는 상으로 은 20냥을 내린다."


당시 서방국가는 신속히 발전하고 있었고, 중국은 심각하게 낙후되어 있었다. 청나라조정은 변법으로 강대해질 수 있었고, 개방으로 여러 나라의 장점을 본받아 강해질 수있었다. 다만, 서태후를 위시한 극단보수파는 변법에 반대했고, 개방을 거절했다. 최고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최우선목적이었다. 그리하여 ㅇ려강에 가장 멍청하고 가장 극단적인 행동을 취한 것이다.


이런 행동은 천리와 인심에 위배된다. 그리하여 열강의 강렬한 반발에 부닥친다.


하늘을 거스르는 행동이기 때문에 청왕조가 서양총과 서양대포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둘째, 종교신앙자유와 멸양교(滅洋敎)


서방에서 종교신앙의 자유는 아주 중요하다. 예를 들어, 미국은 종교신앙의 자유가 입국의 근본이다. 교회, 성당, 성직자는 모두 특별히 보호받는다. 종교를 신앙하는 사람은 모두 신을 빋고, 신을 믿는 사람들은 모두 신이 사람을 만들었고, 신이 만물을 주재한다고 믿는다.


서태후의 배외에서 찾은 중요한 대상은 바로 양교(洋敎)이다: 배외의 가장 두드러진 표현은 바로 '멸양교'였다. 멸양교의 방식은 바로 교회를 부수고, 선교사를 죽이라는 것등이다. 전국각지에서 크고작은 교안(敎案)이 연이어 발생한다.


1899년 가을에서 1900년 여름까지 각국정부는 여러번 공문을 보내어, 청정부가 이미 체결된 국제조약중 선교보호조항을 준수해서, 기독교인사를 살해하는 것을 막고, 교회를 부수는 것을 막아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모든 외교노력은 실패로 끝난다.


1900년 7월 9일 '태원교안'은 가장 전형적인 사례이다. 그날, 산서순무 육현(毓賢)은 33명의 외국선교사 및 그 자녀들, 12명의 천주교 선교사 및 중국인 기독교도를 살해한다. 선교사들이 피살된 후, 그들의 의복, 반지, 시계는 약탈해 갔다. 수급은 성문에 걸어서 사람들에게 전시했다. 시신은 하룻동안 땅바닥에 놓여 있었다. 중국의 교인들이 '심장이 파내어지고 버려진 시신'이 된 외국선교사들을 비밀리에 매장해준다. 5일후, 200명의 교민들이 처형당한다.


한 침례교신도는 순무아문에서 살해하는 과정을 그대로 목격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먼저 끌려온 것은 영국 침례교 선교사인 Mr. Farthing이었다. 그의 처는 그를 꽉 붙잡고 있었다. Mr. Farthing은 가볍게 처를 밀어내고, 행형자들의 앞으로 걸어가서 꿇어 앉았으며,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망나니의 칼이 그의 목을 쳤다. 이어서 살해된 것은 Hoddle 선생, Beynon 선생, Lovitt 박사와 Vilson 박사이다. 그들의 수급은 모두 망나니의 한칼에 잘려나간다. 순무 육현은 이때 짜증을 냈다. 살인속도가 너무 느리다는 것이다. 그는 그의 호위부대에게 나머지 사람을 죽이는 것을 도우라고 명한다. 그의 호위군인은 모두 손잡이가 긴 검을 차고 있었다. 이어서 살해된 3명의 선교사는 Stokes 선생, Simpson 선생과 Whitehouse선생이다. Whitehouse 선생은 한칼에 참수되었지만, 앞의 두 사람은 여러번 칼을 맞고 나서야 수급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남성 선교사들을 모두 죽인 후, 부녀들이 끌려 올라왔다. Farthing 부인은 3명의 아이를 손으로 잡았고, 아이들은 엄마에게 꼭 붙어 있었다. 망나니가 모친의 머리를 치고나서 이이들의 머리도 하나하나 쳤다."


화북의 직예, 산서, 내몽고, 그리고 동북에서 보편적으로 외국인과 중국기독교도에 대한 도살사건이 발생한다.


교회측의 통계에 따르면, 1900년 여름, 2만여명의 중국교인이 피살되었고, 241명의 외국인이 피살되었다. 마테오 리치등 중국에 걸출한 공헌을 한 선교사 및 백명이상의 선교사들의 묘지가 북경에 있었는데, 모두 파헤쳐져서 뼈를 바수어서 뿌려버렸다.


청정부가 미친듯이 선교사 혹은 기독교도를 죽여버린 것은 팔국연합군이 북경으로 진격한 중요한 원인중 하나이다.


셋째, '불참래사(不斬來使, 사신은 죽이지 않는다)"와 외국공사관포위공격


중국전통문화에 "두 나라가 교전을 하더라도, 사신은 죽이지 않는다"는 것이 있다. 이는 춘추시기 송(宋)나라의 화원(華元)이 사신으로 혼자서 초군의 군영으로 가서 담판을 벌여, 초군에게 송국의 도성포위를 풀고 물러나, 양국이 전쟁을 멈출 것을 요구한다. 화원은 인질로 초국에 잡혀 있었다. 이 규칙은 점차 '양국교전, 불참래사'의 원칙을 형성하게 된다.


서태후의 배외에서 찾은 두번째 중요대상은 외국공사관의 인원이었다. 배외의 또 다른 두드러진 표현은 군대와 의화단으로 하여금 외국공사관을 공격하라고 한 것이다.


6월 11일, 일본공사관의 서기관 스기야마 아키라(衫山彬)가 북경의 길거리에서 청군에 살해당한다. "먼저 사지를 자르고, 다시 몸을 분해했다."


1900년 6월 20일, 독일공사 케텔러(Ketteler)가 동교민항을 떠나 청정부의 총리아문으로 가서 공사철수의 건을 교섭하는데, 도중에 청군에게 살해당하고, 수급은 동안문(東安門)에 걸어둔다.


6월 20일, 청군은 외국공사관을 포위공격하기 시작한다. 8월 14일 팔국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할 때까지, 55일간이나 지속되었다. 대부분의 외국공사관은 불태워지고 파괴된다; 각국 외교관, 가족과 대사관을 비호하던 중국인은 속속 건축이 견고하고, 천명까지 받아들일 수있는 영국공사관으로 피난한다. 청군과 의화단의 맹렬한 공격하에, 영국공사관내에서 71명이 사망하고, 수백명이 부상당한다.


영국공사관을 계속 공격해도 함락시키지 못하자, 청군과 의화단은 화공(火攻)을 준비한다. 6월 23일 저녁, 그들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 도서관인 한림원(翰林院)에 불을 질러, 일거에 한림원과 담장하나를 사이에둔 영국공사관을 불태워버리려 한다. 이번 큰 불은 한림원의 휘황한 건축물을 불태워없앳을 뿐아니라, 수만권의 고서적도 잿더미로 변하게 만든다.


사신을 참하고, 공사관을 공격하고, 외국교민을 죽였다. 이는 팔국연합군이 북경으로 진격한 두번째 중요한 원인이다.


넷째, 중앙정부의 '선전포고'와 지방정부의 '중림선언'


팔국연합군이 북경으로 진입하기 전에, 청나라의 통치계층은 주전파와 주화파로 나뉘어진다. 전자는 극단적인 수구세력이 위주이고, 후자는 비교적 양무를 이해하는 지방실력파가 위주였다.


무술변법의 실패후, 서태후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극단보수파들은 매일 서태후에게 서양인들에 대한 나쁜 말을 전했다. 서양인들이 광서제를 부추겨서 무술변법을 하게 하였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서태후는 서양인들에 이를 갈았다. 1900년 6월 16일 한밤중에 누군가가 위조한 서태후로 하여금 광서제에게 권력을 넘겨주라는 외교공문을 서태후에게 전한다. 그리하여 서태후는 화가 머리끝까지 난다.


1900년 6월 21일, 서태후는 광서제의 명의로, 11개국에 선전포고를 내린다.


당시, 양강총독 유곤일(劉坤一), 호광총독 장지동(張之洞), 양광총독 이홍장(李鴻章), 철로대신 성선회(盛宣懷), 산동순무 원세개(袁世凱), 민절총독 허응종(許應騤)등은 누군가 "교조(矯詔, 조서를 위조하여), 난명(亂命)"했다는 것을 이유로, 열강에 대한 선전포고명령의 집행을 거절한다. 그리고 저명한 '동남호보(東南互保)'를 발기한다. 공개적으로 전쟁에서 중립을 선언한다. 6월 26일, <동남호보조약>이 상해에서 체결되고, 강소, 강서, 안휘, 호남, 호북, 광동, 산동, 절강, 복건, 사천, 섬서, 하남등의 성이 전후로 '호보'에 참가한다.


이는 청나라말기 지방실력파가 처음으로 공공연히 조정에 반대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팔국연합군이 북경으로 진입한 후, 뒷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게 만들었다.


다섯째, 청나라의 최고통치자는 의화단을 이용하여 대재난을 일으켰다.


먼저 '부청멸양(扶淸滅洋)'의 기치를 들고 일어난 의화단의 수령 주홍등(朱紅燈)은 1899년의 1달동안 평균 매일 3개의 마을을 약탈했다. 그는 말그대로 강도짓을 하는 토비(土匪)였다.


1900년 5월 12일 의화단은 하북성 내수현 고락촌에서 살인행각을 벌인다. 이 마을의 34호는 천주교를 신봉했다. 의화단은 신도들이 오후에 성당에서 미사드리는 틈을 타서 쳐들어가 외국선교사 1명과 중국신도를 죽여버린다. 그후 교인의 집을 불태우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조리 죽여버린다. 이어서 재물을 수색하고, 집을 불태운다. 34호의 140여명의 사람들중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한다.


청정부의 의화단에 대한 정책이 처음에는 진압이었다. 그러나, 이해관계를 따져본 후에 서태후는 의화단을 이용하기로 결정한다. 그녀의 배외목적에 이용하려는 것이다.


6월 7일, 의화단은 대규모로 "진경근왕(進京勤王)" 즉, 북경으로 가서 황제를 보호한다.


위로는 서태후가 받쳐주고 있으므로, 의화단은 북경내에서 광란한다.


어림군인 '호신영(虎神營)'의 익장(翼長) 아극단(阿克丹, 2품관리)은 일찌기 기독교에 입교한 적이 있어, 의화단에 의해 참수되어 수급이 걸린다. 공부상서(工部尙書) 진학분(陳學棻)은 아문으로 출근하는데, 한무리의 의화단이 시끄럽게 떠들며 다가왔다. 진상서는 그들이 '무장(無狀)'하다고 질책했고, 의화단원들은 분노하여 그를 한칼에 베어버린다. 이어서 총을 쏘아 진상서와 다른 3명의 관리가 핏무더기 속에 쓰러져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는다. 부도통(付都統) 경항(慶恒)은 단왕(端王) 재의(載漪)의 심복이었는데, 사적인 원한 때문에 의화단에 의해 일가 13명이 모조리 죽임을 당한다.


당시 의화단에서 유행하는 순구류(順口溜)에 "흘면불각장(吃麵不擱醬), 포타교민항(包打交民巷), 흘면불각초(吃麵不擱醋), 포타서십고(砲打西什庫)" 국수를 먹는데 장이 놓여있지 않으면 동교민항에 포를 속, 국수를 먹는데 식초가 놓여있지 않으면, 서십고성당에 포를 쏜다는 말이다. 이는 그들이 동교민항과 서십교성당을 포격했다는 자술서나 마찬가지이다. 당시의 사람은 이렇게 기록했다: "교인을 만나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마음대로 길거리에서 죽여버렸고, 아무도 뭐라고 하지 못했다. 교민의 집은 어디에 있건 마음대로 불지르고 파괴했지만, 아무도 감히 나서서 구해주지 못했다."


숭문문(崇文門) 안에 시신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등시구, 구란후통, 대산란, 조보시등은 피해가 특히 심했다." "시내의 7개 외국선교기관의 34개 주택, 18개 성당, 12개의 남자학교, 11곳의 여자학교, 4곳의 직업훈련학교, 11개의 약방과 7개의 병원은 모조리 의화단에 의해 파괴된다. 영국외교관이 서산에 비싼 돈을 들여서 지은 별장과 교회에 속한 33개의 산업은 모조리 불태워진다."


6월 16일, 의화단은 전문외 대산란에서 '노덕신(老德訊)' 서양물품가게와 '굴신씨(屈臣氏)" 서양약방을 불태운다. 그 결과 북경의 가장 번화한 전문대가 일대가 불에 타서 폐허로 변한다. 1000여개의 점포, 7000여개의 주택이 잿더미로 변한다. 정양문(正陽門)의 성루(城樓)도 불에 타서 무너진다. 경성의 24개 주은창(鑄銀廠)도 모조리 불에탄다.


팔국연합군이 북경으로 진입한 후, 금방 의화단이 만든 소란은 평정된다.


결론, 청군의 패배는 내부요인이 가장 관건적이다.


맹자는 이런 말을 남겼다: "부인필자모(夫人必自侮), 연후인모지(然後人侮之); 가필자훼(家必自毁) 이후인훼지(而後人毁之); 국필자벌(國必自伐), 이후인벌지(而後人伐之)" 무릇, 사람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업신여긴 후에 남이 그를 업신여기게 되고, 집안은 스스로 망가진 후에 비로소 남이 그 집안을 망가뜨리게 되고, 나라는 스스로 무너진 후에 비로소 다른 나라가 그 나라를 무너뜨리는 법이다.


청나라의 최고통치자는 맹목적으로 외국을 미워하고, 외국을 배척하는 의사결정을 내렸다. 이것이 청군이 참패한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종교신앙자유는 치국안방의 근본이다. 동방이건 서방이건 모든 바른 종교, 바른 신앙은 신을 믿는다. 신을 믿고 신을 받드는 사람을 박해하고 살해하면 반드시 벌을 받게 되어 있다.


청나라조정은 의화단, 청군, 지방관리를 종용하여 선교사, 기독교도를 마구 죽였다. 부녀자와 아동을 포함해서. 이는 천리와 인심에 위배되는 일이니 패배하지 않을 리가 없다.


팔국연합군이 북경성으로 쳐들어온 것은 후세의 중국정치가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하늘을 거스르는 일을 하면, 작은 경우 자신의 목숨이 위험하고, 크면 나라가 망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