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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과거제 폐지의 과정

by 중은우시 2019. 5. 24.

글: 맹헌실(孟憲實)


팔고문(八股文)을 폐지하는 것은 과거제도의 고질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리고 경제특과(經濟特科)의 설립은 고시제도의 새 방향을 대표한다.


엄수(嚴修, 1860-1929), 천진사람이며 광서9년 진사이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생한 후, 귀주성학정(貴州省學政)에 임명된다. 현존하는 엄수의 일기를 보면, 학정으로 있던 몇년동안, 그는 과거시험문제를 고민한다. 그는 왕안석(王安石)과 소식(蘇軾)의 과거논쟁을 시험문제로 내기도 했다. 귀주의 마지막 기간동안 그가 가장 주요하게 한 업무는 바로 경제특과를 설립해달라는 상소문을 작성하는 것이었다. "과거 과목은 모두 옛것을 익히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그러나 당장 필요한 것은 현재를 아는 것이다. 혹은 천하의 나라들의 장단점을 두루 알거나, 혹은 외국과의 교섭을 잘 알거나, 혹은 산학(算學), 역학(譯學)등 전문분야를 잘하거나, 혹은 제조를 잘 익혀서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거나, 혹은 '감유력(堪遊歷)'을 고르거나, 혹은 '공측회(工測繪)'를 잘하거나, 모두 경제라는 이름으로 옛날의 과거제와 다르게 해야 합니다."(<엄수연보> 102페이지, 제로서사) 그는 이처럼 구체적인 지식을 보유하고 한 분야의 기술을 가진 사람을 모두 경제과로 칭하며 경국제세의 인재라고 히였다. 그리고 현재 필요한 인재라고 하였다. 이는 그가 이전의 인재관념과 다른 인재관념을 제기했을 뿐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새로운 학과와 과거를 연결시켜, 민간에서 여려해동안 제창해온 서학과 현행제도를 결합시키려 한 것이다.


풍계분(馮桂芬)은 비교적 일찌감치 서학을 제창한 학자이다. 그는 <교빈여항의. 채서학의>에서 이미 서학을 열거한다. "예를 들어 산학(算學), 중학(重學), 시학(視學), 광학(光學), 화학(化學)등은 모두 사물의 이치를 알아내는 것으로...많은 중국사람들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과거의 개혁에 대하여는 무슨 새로운 건의를 하지 못한다. 기본적으로 고염무식의 사상에 머물러있었다.


정관응(鄭關應)은 서학과 학교, 서학과 과거의 문제에서, 성숙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다. <성세위언>의 학교편에서 그는 광범위하게 서방과 일본의 학교와 학과를 소개한다. 예를 들어 기초학과의 국교(國敎), 격치(格致), 산학, 지리, 사사(史事), 회도(繪圖), 체조(體操)등. 고시편에선느 서학을 시험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격치, 화학, 전학(電學), 중학, 광학의 새 법을 시험치고, 둘은 천문정온, 오주지리, 수륙형세를 시험치며, 셋은 내외의과(醫科), 배약(配藥) 및 농가식물의 새법을 시험친다."


엄수의 특과건의는 분명히 정관응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의 일기에 따르면, 그가 상소문을 올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그로부터 <성세위언>을 빌려간다. 엄수의 건의를 조정에서 상세히 논의한 후, 최종적으로 6개 과목을 정한다. 즉, 내정(內政), 외교(外交), 이재(理財), 경무(經武), 격물(格物), 고공(考工).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 예전부터 있던 용어이지만, 실제로 내용은 모두 서학이다. 예를 들어, 이재에는 세칙(稅則), 광산(鑛産), 농공(農功), 상무(商務)가 있고, 격물에는 중서산학(中西算學), 성광(聲光), 화전(化電)이 있다.


특과는 신정시기에 단 1번 시행된다. 과거를 개혁하고, 과거제를 폐지시키는데 아주 중요했다. 양계초는 <무술정변기>에서 이렇게 썼다: "귀주학정 엄수가 적절하게 상소를 올려 특과를 열게 했고, 윤허를 받아 시행한다. 당시 팔고는 아직 폐지되지 않았는데, 이를 통해 새로운 사람들을 충분히 뽑을 수 있었다. 이는 실로 신정의 시작이었다." 엄수의 특과건의는 과거개혁을 실무적으로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한번 봇물이 터지자 막을 수가 없게 된다. 보수파들은 이 점을 본 것같아. 엄수의 스승인 서동(徐桐)은 그와의 관계를 단절한다고 선언한다. 그는 실제 이로 인하여 관직을 잃는다. 엄수 자신도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있었다. 그는 심지어 더욱 나쁜 결과까지도 예상하고 있었다.


무술변법의 내용중 하나는 신식학당을 건립하여 신식학과를 추진하는 것이다. 다만 신식학당과 과거의 관계가 명확하지 않았다. 특과만이 신식학과와 일종의 소통이 가능하게 해주었다. 정관응의 사상에서, 먼저 학교와 서학은 대응관계에 있다. 과거시험과 서학은 차선책을 구하는 방법이다. 다만 그가 구상한 보완방법이 먼저 승인되고 실시된다. 무술정변을 통하여, 신정시기가 열리고, 학교와 서학의 관계는 두드러지게 된다. 그렇게 인재를 배양하는 최우선적인 방법이 된다.


장지동(張之洞)등은 1903년 말에 올린 상소에서 과거를 점진적으로 퇴출시켜야한다는 이유로 과거가 학교를 방해한다는 것이다. 첫째 학당은 과거와 다르다. "과거는 모든 문장이 표절이다. 학당의 공부는 실무를 중시한다. 과거는 단지 하루에 잘하느냐 못하느냐를 보지만, 학당은 반드시 여러해동안의 연구를 축적시켜야 한다." 둘째 학당은 이미 과거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무릇 중국에 있던 경학, 사학, 문학, 이학은 모두 과거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학당의 겸통한 것은 과거에서 갖추지 못한 것이다." 현재 과거를 감퇴시키라는 것은 과거를 폐지하라는 것이 아니다. "실로 과거와 학당을 하나로 합치라는 것이다." 다만, 사회의 사람들은 아직 관망하고 있었고, 민간에서 돈을 내어 학당을 세우려 하지 않으므로, "학당을 흥성시키지 않으면, 인재를 길러낼 수가 없다."


1905년 8월, 원세개등 6대신이 상소를 올려 과거제를 중단할 것을 건의한다. 이들이 얘기한 원인은 여전히 과거가 학당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국가에는 인재가 시급히 필요한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20년을 기다린 이후에 필요한 인재가 나오게 된다. 그러나 강력한 이웃나라들이 둘러싸고 있어 시간이 없다. 즉시 과거를 중단하면, 새로운 인재는 10년만 기다리면 된다. 이번 상소는 새로운 생각을 담은 것이 아니라, 과거는 쓸모없다는 것 이외에 더욱 강조한 것은 국민교육의 의미이다. "학당을 설립하는 것은 인재를 기르는 것뿐아니라, 백성의 지식을 열게 하는 것이 위주여야 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널리 교육을 보급하여, 병농공상(兵農工商)이 모두 각각의 의무를 다하고 각각의 사업을 나누어 담당하며, 부인과 어린이들도 빠지지 않고 가정에서 교육을 받도록 하여, 학교가 없는 곳이 없고, 배우지 못하는 사람이 없게 만들어, 이를 통해 부유하고자 하면 부유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를 통해 강해지고자 하면 강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원세개주의> 하책 1187페이지, 천진고적출판사) 이는 근대중국의 교육구국론의 목소리와 같다. 이 상소가 올라간 다음 날, 황제의 비준이 내려오고 과거제는 정식 폐지된다.


바로 과거제 시대에 전국각지에는 학교가 없었다. 관료가 되는 유일한 길이므로, 학교는 실제로 과거의 예비학교였다. 서학이 중국에 전래되면서, 교육에서 먼저 양무운동 과저에서 성립된 전무학교에 비로소 상응한 과정이 있다. 그리고 보통의 교육과정이 되지는 못했다. 엄수의 특과개설은 서학을 배우는 사람에게 정치적인 출로를 마련해준 것이지만, 대응하는 학교교육이 없었다. 이런 특과의 기초는 한계가 있었다. 무술변법은 바로 전국에 신식학당을 설립하고, 과목내용은 이미 중국과 서양을 결합시킨 것이다. 당연히 이런 학당의 진정한 발전은 신정시기에 나타난다. 과거제가 폐지되기 전의 학당은 두 가지 유형이 병존했다. 신식학당과 과거예비학교. 1903년 과거제가 제한되면서 과거예비학교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1905년 과거제가 폐지되면서 학교의 이중구조는 끝이 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알아볼 수 있다. 만일 신식학당과 상응한 서학의 전래가 없었다면, 과거제의 폐단은 그렇게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과거제를 폐지하는 조건도 성숙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제도의 대체품이 없었기 때문이다. 과거제의 폐지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동시에, 중국의 인재관념은 근대에 크게 변화한다.고대의 귀족식의 통재사상은 도구주의로 바뀌고, 특별히 구체적인 실무능력을 중시하게 된다. 이는 중국역사에 심원한 영향을 당연히 미치게 된다.;